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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 & 폐사지 】

화엄사(華嚴寺)

작성자칠성|작성시간19.10.15|조회수50 목록 댓글 0

#화엄사 각황전
#화엄사 대웅전
#효대
#구층암

■개설
통일신라시대(676~935)이래로 대표적인 화엄종 사찰이었던 화엄사(華嚴寺)는 조선 세종대에 선·교 양종으로 불교 교단을 정리할 당시 선종 사찰로 공인되었다. 임진왜란 이전 화엄사에 대한 기록은 소략한 편이나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 이후 화엄사는 대규모 중창 불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각황전(覺皇殿)은 연잉군(延礽君) 즉 영조의 원당으로 중수되어 조선후기 왕실원찰로 후원받았으며, 부휴계(浮休系)의 주요 근거지이기도 했다.

■연원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년 ~ 576년 8월, 재위: 540년 ~ 576년) 때 연기(緣起) 조사(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나, 연기 조사는 8세기 인물이므로 시기가 맞지 않다. 현전하는 화엄사 관련 기록이나 유물로 미루어 화엄사는 8세기경 지리산 일대의 대표적인 화엄종 사찰로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엄사 각황전 뒤쪽의 효대(孝臺)에 조성된 4사자3층석탑은 8세기 화엄사와 관련된 유물이며, 신라하대(780~)에는 『화엄경(華嚴經)』 석경(石經)을 조성하여 전각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각황전 자리에 있던 전각 석벽에 『화엄경』을 새겼는데,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소실된 뒤 수만점의 석경 파편만 전한다(현재는 성보박물관 수장고에 보관중이랍니다) 또한 각황전 앞에 있는 사자탑과 석등,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동서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유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최치원(崔致遠)의 글에서 의상(義湘)의 전교십찰(傳敎十刹) 중 하나로 화엄사를 꼽고 있어 신라하대 부석사(浮石寺)와 함께 화엄사도 신라 화엄사찰로서 명성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말여초(935~) 화엄사에서는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고, 화엄사에는 승려가 계를 받는 계단(戒壇)도 설치되었다. 후삼국시기 화엄종이 남악과 북악으로 분열되었을 때 화엄사의 관혜(觀惠) 대사는 견훤을 지지하는 남악파로 활동하였다. 고려시대에도 화엄사는 부석사와 함께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로서의 명성을 이어갔고, 대각(大覺) 국사(國師)의천(義天,1055~1101)은 화엄사에 들러 연기 조사를 추모하고, 연기의 저술을 다섯 가지나 찾아내어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수록하였고, 『원종문류(圓宗文類)』 간행에 참여하여 교정을 맡았던 의천의 문도 중에는 화엄사 주지도 있었다. 충렬왕대에는 원소암이 창건되었고, 공민왕대는 적기암이 창건되는 등 고려말에도 화엄사는 건재하였다.

■변천과 특징
조선건국 후 세종대 선·교 양종으로 교단을 통합하기 전까지 화엄사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특별한 기록이 전하고 있지 않다. 1406년(태종 6) 명나라 사신 정승(鄭昇)이 돌아갈 때 황모란(黃牧丹)을 화엄사에서 구해서 3개의 화분에 심어서 바쳤다는 것이 세종 이전의 유일한 기록이다(『태종실록』 6년 5월 8일). 1424년(세종 6) 세종이 기존의 7개 불교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선종과 교종 각각 18개씩 36개의 사찰만을 공인할 때 화엄사는 선종 18사 중 하나로 공인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신라시대 이래 화엄사는 대표적인 화엄종 사찰로 알려져 있었으나 세종대에 선종 사찰로 지정됨으로써 조선전기 화엄사의 사찰 성격에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대 선종 18사로 공인될 당시 화엄사에 원래부터 속해 있던 전지는 100결이었는데 50결을 더 주었다고 하며, 절에 거주할 수 있는 승려는 70명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화엄사에 대한 공인은 곧 취소되는데, 같은 해 10월 순천송광사(松廣寺)와 개성흥교사(興敎寺)를 선종 공인 사찰로 새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기존 18사로 공인되었던 화엄사와정곡사(亭谷寺)를 혁파하였던 것이다(『세종실록』 6년 10월 25일).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화엄사에 대한 주목할 만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화엄사는 공인 18사에서는 혁파되었으나 이후에도 지리산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자 고찰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특히 조선후기 중관해안(中觀海眼)이 화엄사 사적을 편찬하면서 17세기까지의 화엄사의 정황이 전하고 있으며, 1924년 화엄사 주지 정만우(鄭曼宇)가 중관의 화엄사 사적을 바탕으로 화엄사 사적기를 다시 찬술하면서 조선후기까지의 화엄사의 역사가 전해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화엄사에 대한 기록은 충분치 않지만, 성종대에는 삼교(三敎)에 통달했던 화엄사 법주(法主) 설응(雪凝) 법사가 화엄사에서 선교를 강론했고, 1520년(중종 15)에는 서산(西山) 대사(大師)의 양육사(養育師)이기도 한 숭인(崇仁) 장로가 청련암에서 선회(禪會)를 여는 등 조선전기 불교사에서 화엄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화엄사에서는 승군을 조직하여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절은 큰 피해를 입게 되는데, 전쟁 후 벽암각성(碧巖覺性)이 화엄사를 대대적으로 중수하여 조선후기 화엄사의 발전에 토대를 닦았다. 특히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성은 화엄사에서 근왕(勤王)을 위한 의승 3,000명을 소집하여 공을 세워 인조로부터 시호와 의발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또한 효종도 잠저 시절 각성을 만났던 인연으로, 1650년(효종 1) 각성이 만년에 주석한 화엄사를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지정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으로 화엄사의 전각 거의 대부분이 소실된 뒤 1630년(인조 8) 대규모 중창 불사가 시작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중창 공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1699년(숙종 25)~1702년(숙종 28)까지 4년에 걸쳐 2층 70칸의 장육전(丈六殿) 즉 각황전(覺皇殿)이 조성되었는데, 이 불사에는 숙종이 내탕금을 하사하였고, 숙빈최씨(淑嬪崔氏)도 동참하여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의 원당으로 삼았다. 1701년(숙종 27)에 화엄사는 선종대가람에서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영조대에도 각황전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또한 화엄사는 임진왜란 이후 부휴-각성을 잇는 문도들에 의해 부휴계의 주요 근거지로 자리 잡았는데, 화엄교학의 전통이 강조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寺刹令)에 의해 30본산제가 시행되면서, 화엄사는 본산으로 지정되지 못하고 승주 선암사(仙巖寺)의 말사로 지정되었다. 이에 대한 반대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1924년 31번째 본산으로 승격되었고, 지리산천은사와 연곡사가 이때 화엄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 해방 이후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로 지정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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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연대는 1979년에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新羅華嚴經寫經)에 의해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였던 연기에 의해 창건된 절임이 밝혀졌다. 그 이전에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 승려 연기가 세웠다고 전해졌었다

화엄사 홈페이지


문화재로는 화엄사의 현존 건물은 벽암각성이 중건한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지리산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에 금강역사(金剛力士) 및 문수(文殊)·보현(普賢)의 동자상(童子像)을 안치한 금강문(金剛門)이 있다. 그 바로 뒤에는 제3문인 천왕문(天王門)이 있는데, 전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각 사천왕상(木刻四天王像)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에서 약 50m 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普濟樓)가 종루(鐘樓)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있다. 동서 쌍탑(雙塔)의 정면에는 대웅전, 그 서쪽에는 각황전이 있으며, 이 밖에도 영산전(靈山殿)·나한전(羅漢殿)·원통전(圓通殿)·명부전(冥府殿)과 노전(爐殿)으로 사용되는 삼전(三殿) 및 요사(寮舍)인 원융료(元戎寮)·청풍당(淸風堂)·만월전(滿月殿) 등이 있다.

이 중 보물 제299호인 구례 화엄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조선 중기에 조성된 삼신(三身)의 삼존불(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1757년에 제작된 보물 제1363호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華嚴寺 大雄殿 三身佛幀)이 있다. 또한, 국보 제67호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수법이 뛰어나다. 각황전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제루(普濟樓)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에는 각황전 앞 석등(石燈)과 사사자 삼층석탑(四獅子 三層石塔)·노주(露柱)·동서오층석탑(東西五層石塔)·석경 등의 중요한 유물이 전해 오고 있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의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고, 높이 6.36m이고 8각의 하대석(下臺石)이 병(甁) 모양의 간석(竿石)을 받치고 있다. 중간에 띠를 둘러 꽃무늬를 연이어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각황전 서남쪽의 높은 대상(臺上)에는 국보 제35호인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이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머리로 탑을 받이고 서 있는 승상(僧像)이 있다.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전하며, 석탑 바로 앞 석등의 아래쪽에도 꿇어앉은 한 승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불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그 능숙한 기법과 균형있는 조형미로도 주목되지만, 그 특이한 형태는 더욱 눈길을 끈다. 이 사사자석탑은 창건주 연기의 효성을 나타낸 것이기에 효대(孝臺)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원통전 앞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이마로 방형(方形)의 석단(石壇)을 받치고 있는데, 이를 흔히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이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용도를 밝혀내진 못했다고 한다

대웅전 앞의 계단 아래에는 양식을 달리하는 동서 양탑이 있다. 보물 제132호인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보물 제133호인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에 비하여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고, 단층기단(單層基壇)으로 되어 있다. 서탑은 1995년에 해체하여 보수되었는데, 이때 진신사리와 더불어 4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필사본 다라니경과 불상을 찍어내는 청동불상주조틀 등이 있었다.

대웅전에 모셔진 국보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求禮 華嚴寺 木造毘盧遮那三身佛坐像)’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교조각 중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로 이루어진 ‘삼신불(三身佛)’로 구성된 유일한 작품으로 조선 시대 불교사상과 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아 왔다.
2021년 6월 국보로 승격되었다
* 삼신불: 법신(法身)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보신(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화신(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말하며 화엄사상에 근원을 둔 도상으로서, 변상도(變相圖)나 사경(寫經) 등에는 종종 보이지만, 조각품으로는 화엄사 사례가 유일함
화엄사 대웅전에 봉안(奉安)된 3구(軀)의 좌상은 1635년(인조 13년) 당대 유명한 조각승인 청헌(淸軒 또는 淸憲)과 응원(應元), 인균(印均)을 비롯해 이들의 제자들이 만든 17세기의 대표적인 불교조각이다. 모두 3미터가 넘는 초대형 불상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앞도적인 느낌을 준다.

장륙전의 사방 벽은 화엄석경(華嚴石經)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물 제1040호인 이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은 의상이 조성한 것이라는 전승이 있지만, 화엄사가 세워진 경덕왕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석경은 불행히도 임진왜란의 병화로 장륙전이 불탈 때 파괴되어 많은 파편만이 남아 있다. 석경의 크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전(方塼: 네모난 벽돌) 정도이고, 사방 벽에 고정할 수 있는 홈이 아래위에 있다. 글자체는 쌍계사 진감국사비(雙磎寺 眞鑑國師碑)를 닮았다.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은1653년(효종 4)에 조성된 것으로서, 1997년 국보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인 구층암석등과 교지[敎旨: 선조(宣祖)가 벽암선사(碧巖禪師)에게 하사] 1매, 예조사격(禮曹寺格) 1매, 예조홍각대사첩(禮曹弘覺大師帖) 1매, 겸팔도총섭첩(兼八道摠攝帖), 예조대선사각성첩(禮曹大禪師覺性帖) 1매가 있다.

그리고 인조 하사 어석(御席) 1건, 인조 하사 가사(袈裟) 1령, 인조 하사 어작(御爵) 1대, 선조 어필각본(御筆刻本) 1권, 선조 하사 서산대사발우〔西山大師鉢盂〕 1좌, 선조 하사 서산대사 향합(香盒) 1건, 각황전중건상량문(覺皇殿重建上樑文) 1매, 각황전삼여래사보살복장기(覺皇殿三如來四菩薩腹藏記) 1축, 고종(古鐘), 인조 14년간 『화엄사사적(華嚴寺事蹟)』 1책 등이 있다.
참고: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버들피리님 作

보현보살,아미타불,문수보살,석 가모니불,관음보살,다보불,지적보살
각황전 뒷쪽 입석 불상
보수용 사다리?
추사의 필체라고 한다
각황전,버들피리님 作
대웅전,버들피리님 作
일주문,버들피리님 作
사사자 석등,버들피리님 作
원통전 사자탑,버들피리님 作
원통전 사자탑 옛모습인데 탑인지 건물의 일부인지 아직 용도를 밝혀내지 못했단다
각황전 흑매,버들피리님 作
불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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