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리길 안내자료
평택이 깨지나 아산이 무너지나
길을 떠난다. 싫건 좋건 떠나야 한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삶이 짊어진 짐이다. 아이가 자라 두발로 일어서면서 시작되는 길 걷기는 고스란히 삶이 된다. 마당을 걸어 나오면 길로 연결된다. 조금씩 멀리 걸어 보며 나와 주변을 지역을 돌아보며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그것이 곧 삶이고 인생이다. 고대 벽화에도 두발을 당당히 내 뻗어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인간이라는 자부심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내가 걸었던 첫길의 기억은 백양나무가 하늘높이 솟은 신작로였다. 어딘지 기억나진 않지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먼지 나는 신작로를 걸었다. 그렇게 걸었던 길을 학교를 들어가고선 일요일 빼고 매일 걸었다. 중학교 들어가서는 시오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그렇게 길을 걸으며 ‘애송이’를 벗어나 내 뼈는 합쳐지고 영글어 갔다. 천천히 느리게, 참으로 긴 시간으로 생각된다.
망건다리도 그렇게 기억되는 다리다. 왕복 두 차선으로 좁은 도로는 미루나무를 양쪽으로 부여잡고 남으로 흘러가다 안성천에서 망건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넜다. 망건다리는 성환의 청맹이들과 평택의 유천리들을 연결하며 지금도 승용차나 농기계들이 다니는 다리다. 그 아래로 전에 세웠던 다리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가 세웠던 다리로 보인다. 오래된 기억으로는 그 다릿발위로 검게 타르를 뒤집어쓴 통나무로 된 교각의 잔해가 있었다.
망건다리도 그렇고 청맹이들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이곳은 청일전쟁의 격전지였다. 그보다는 먼저 조일전쟁시기 소사평 전투가 있었다. 小砂坪혹은 素沙坪전투는 1597년 직산현 북방 소사평에서 왜장 구로다와 명나라 섭지충이 6회전 전투로 명나라가 승리했다고 기록 하고 있다. 소사평 전투는 평양성, 행주대첩과 함께 육전삼대첩으로 기록된 규모가 큰 전투라 한다. 다만 명나라군대에 의해 치러진 전투란 것이 다른 두 곳의 전투와 다른 점이다. 30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두 나라는 다시 이곳에서 전쟁을 치렀다. 300년쯤 전에는 명나라가 이기고 그 후에는 일본이 이겼다. 이 전쟁으로 청나라는 급격히 쇠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청맹(靑亡)이 뜰이란 이름이 생겨났단다. 망건다리는 청군이 진을 치고 망루를 세웠다고 해서 망건(望見)이 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고 이후 이지점에 다리가 놓이면서 망건다리란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80년대까지만 해도 평택이나 성환지역 사람들이 즐겨쓰던 말이 “평택이 깨지나 아산이 무너지나”란 말이었다. 그 말은 ‘길고 잛은 것은 대봐야 안다’는 속담과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그 말의 출처는 청일전쟁에서 기원했다. 아산을 통해 성환벌에 주둔한 청나라군대를 아산으로, 서울에서 내려와 소사벌에 진을 친 일군을 평택으로 상징하고 두 나라의 전쟁이 우리민중과는 아무 상관없는 전쟁이라는 좀 자조석인 속담이 됐다는 것이다. 즉 일본이 이기나 청나라가 이기나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국제정세는 그리 간단하진 않았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갑오농민군들은 공주 우금치를 넘어 평택과 안성을 거쳐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청이 개입하고 일이 개입하면서 운명은 결정 났다. 농민군은 이 다리, 아니 안성천을 건너지 못했다. 죽산에서 기다리던 농민군들은 이후 작살이 났다고 한다.
어찌보면 이 전쟁으로 조선의 운명이 결정 나고 조선민중의 운명이 결정 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당시 민중들은 두 나라와의 전쟁이기에 우리는 두고 볼 뿐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렇지만 청나라군대의 주둔과 전쟁을 도와야 했던 민중들의 고통은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죽 하면 일본군대의 근대식군사행동에 찬사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을까. 어쨌든 청나라 군대는 성환전투에서 청망이 되도록 패전하고 말았다. 청맹이들에는 어린나이로 전장에 끌려와 낮선땅에서 일본군대의 기관총에 피를 흘리며 죽어간 청나라군의 원혼이 서려 있을지 모를 일이다. 강물은 무심히 그날과 같이 흐르고 있다. 금빛 머리를 팔랑이는 억새꽃에 부는 바람도 무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벌써 백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흘렀다. 철길이 놓이고 다리가 놓이고, 홍수피해를 막기위해 직강으로 바뀐, 더 이상 바닷물이 올라오지 않는 안성천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송화리 솔숲은 뉘해 땅이던고?
송화리 솔숲을 들어가 본다. 이곳에 평택에선 보기 드물게 아름드리 조선소나무(육송)숲이 보전되어있다. 아직도 이 땅은 미국으로부터 반환 받지 못한 상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은 이곳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기지를 접수했다. 일제는 1942년부터 2만 여 명의 강제징용과 근로보국대의 징발로 일본해군시설대(302부대) 보급부대의 비행장을 건설했다. 해방이 되자 비행장은 미군에게 넘어갔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 K-6부대의 주둔으로 이어졌다. 이곳을 접수한 미군은 아직도 야영훈련장과 사격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을 방문했던 날도 야영을 하느라 각종장비와 군인들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송화리 솔숲, 정확히 말하자면 옛날 45번 국도가 양쪽으로 갈라놓은 남산리 일부 솔숲과 도로건너 서쪽의 팽성중고로 넘어 강당골부터 남으로 송당까지의 송화리 일부 숲을 말한다. 1914년 송당과 개화리가 합쳐 송화리가 되었다고 한다. 소나무가 많아서 송화리라고 했다고 해서 그른 것은 아닐 것이다. 일본제국군대가 비행장을 만들면서 소나무를 베었으면 베었지 심었을 리도 없다. 일본제국주의는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고 엄청난 양의 소나무를 베어 버렸다고 하지 않던가. 한반도의 소나무가 처음 학살당한 것이 식민시대다. 이후 전쟁으로 망가지기도 했지만, 송당이란 이름도 소나무로 둘러싸인 집쯤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하여간 소나무가 많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김해규선생에 의하면 이곳 일인농장의 생산물에 리기다소나무가 포함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땅에 조선솔을 베어내고 그 자리엔 리기다소나무 조림을 했다. 그런데 송화리 솔숲엔 리기다 소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80년 이곳을 지나는 45번 도로는 포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포장도로 못지않게 관리가 잘된 도로였다. 미군들이 사용하는 도로라서 그랬을 것이다. 이곳에는 수시로 미군의 야간사격훈련이 있었다. 폭음 소리가 주변마을을 흔들고 아침에 철수하고 나면 아이들은 탄피를 주우러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야간에 훈련을 하기에 탄피를 흘리고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탄피는 푼돈을 만들 수 있는 매력있는 물건이었다.
미군들의 눈을 피해서 들어가 본 솔숲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깨끗하고 널직한 비포장도로가 숲속여기저기로 펼쳐지고 아름드리 소나무는 붉고 의연한 자태로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가끔 드러나는 지하벙커의 콘크리트 노출부위를 보며 미군들의 군사시설인줄 만 알았다. 그런데 이번 답사를 통해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지하벙커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놀랍기도하고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치욕스러움에 몸서릴 쳐야했다.
이곳의 지하시설을 두고 설들이 많이 있다. 일본의 마츠시로 대본영처럼 한반도내에 일인 몇 만명이 들어가서 최후항전을 수행하기위해 원폭에도 견뎌내는 정도의 강도로 지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중국 산동반도까지 해저로 연결하려고 시도했다는 설까지 전해지고 있다. 팽성 평택지역에 이곳에서 징용이나 보국대로 동원돼 노역을 했던 어른들이 계실텐데 그분들의 증언을 구할 수 없어서 아쉬울 뿐이다.
남산리 쪽 솔숲 언저리엔 용화사라는 절이 있다. 이절은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으나 고려후기에 폐사 되었다고 한다. 60년대에 기록을 확인하며 절터를 확인하고 다시 법당을 세웠다고 한다. 법당은 관음보살상을 모신 대웅보전이다. 그런데 이 절터에 미륵을 세워 뒀는데 법당을 세우면서 미륵이 발견돼 그대로 법당안에 모시게 됐다고 한다. 미륵은 하반신이 땅에 묻힌 채 법당 한켠에 개금을 하고 우람하게 신도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돌미륵이 주불인 관세음보살보다 더 보살핌을 받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륵불 좌측 아래에 놓여있는 밀돌의 확실한(?)효험 때문 아닐까? 8배나 108배를 하고 마음을 가라 안치고 무릎을 꿇고 밀돌을 밀면서 소원을 빌면 어느 순간 밀돌이 바닥돌에 들러붙는다고 한다. 그러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는데 나 같은 작자는 아무리 밀어보아도 들러붙을 기미가 없다. 마음 정한 사람들만이 소원을 빌어야지 개도라치 같은 작자는 해당사항 없음이 분명하다.
미륵은 미래불이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가고나서 자그마치 56억7천만 년 후에 평등의 나라, 유토피아가 나타나는데 그 시대를 다스리는 부처가 미륵불이다. 이는 공교롭게도 기독교의 메시야 ‘Messiah’와 산스크리트어로 미륵'Maitreya'이 음이 비슷하다. 곧 기독교의 메시아가 불교의 미륵으로 읽혀진다. 그런데 미륵이 나타난다는 세상이 천문학적으로도 표하기 어려울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호모사피엔스(현생인류)의 역사가 이제20만 여년에 지나지 않는데 56억7천만년이란 시간은 언제 다가올 시간인가 말이다. 부처께서 그런 날이 온다는 희망을 가지라는 뜻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미륵이 현재 도솔천에 머물며 수행을 한다는 사실이 혁명을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민중들은 힘들고 괴로울수록 미륵에 빠져들고 미륵이 제시하는 희망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현실의 가렴주구나 혹세무민을 견뎌 내기는 그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은근슬쩍 미륵사상에 기댄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민간신앙을 잘 이용했다는 것이고 사회의 만연된 지역과 계급의 차별에 저항수단으로 차용된 탓이다. 서북출신 지식인들이 천주교에 쉽게 동화되고 천민계급이 쉽게 동화된 이유가 된다. 어쨌든 미륵은 어려울 때 일수록 더 많이 숭배되고 곳곳에 미륵불을 세웠던 것이다. 평택에는 안성처럼 미륵이 많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않은 미륵이 모셔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는 소사동 미륵과 여기 용화사 미륵, 그리고 방축리 서천사에 미륵이 남아있다고 한다.
송화리 솔숲을 거닐다보면 솔숲사이 농지에 콘크리트 구조물을 보게 된다. 언제 만들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도로를 내기위한 시도로 보인다. 안정리에서 45번 국도까지 일직선으로 도로를 내기위해서 계획을 하고 이미 콘크리트로 도로를 연결하다가 솔숲에서 끊어지고 다시 안쪽의 논에 콘크리트벽을 쳐 놓았다. 이는 솔숲을 반환받지 못했기에 공사가 중단된 것으로 보이는데 솔숲을 반환 받으면 곧 공사가 재개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개발업자들이 이 솔숲을 반환받으면 개발 하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도 떠돌고 있다.
송화리 솔숲은 보존되어야 한다. 일본제국주의의 탐욕을 들여다보는 중요 역사 자료다. 또한 아직도 반환받지 못한 평택의 미군기지에 대한 우리들의 성찰을 위해서라도 보전 되어야 하는 곳이다. 이곳은 평택 사람들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항상 들여다보며 우리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 물러섯고 또 싸웠고 타협했는지를 우리가 성찰해야 하고 후대가 평가하도록 보전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보전하지 못한 솔숲을 미군에 의해 지켜졌다는 사실이 슬프다. 하지만 평택에 이만한 넓이의 조선솔이 보전된 장소도 드물다. 시민들에게 돌려주어야할 공간이다.
k-6 험프리스
흔히 주소가 캘리포니아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이는 주한미군 관계자들이 "Little California in South Korea"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을 진짜 캘리포니아 주에 속하는 것처럼 와전된 것이다. 실제로는 US Armed Forces / Asia-Pacific 이라는 미국의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분류된다.
1950년부터 미합중국 육군이 사용하게 되었고, 1962년 헬리콥터 사고로 순직한 CWO 벤저민 K. 험프리스의 이름을 따 '캠프 험프리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병력 이전과 관련해 대규모 확장 계획이 추진되었고, 현재 주한미군 사령부와 동두천 등 전방 미군 병력이 이전하여 주둔중이다. 기지 면적은 여의도의 5배 크기이며, 미군 단일 기지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농성은 무엇으로 쓰인 것인지 정확치는 않다고 한다. 추측컨대 말을 키우던 말목장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평택이 말목장이 많이 있고 중국에서 뱃길이 가장 빠른 곳이니 중국에서 수입한 말들을 임시로 먹이던 곳이라는 추측일 뿐이다. 임명직 도지사 마지막이 임사빈씨 였던걸로 기억 하는데 이양반이 평택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라고 해서 이 농성을 평택임씨의 세출지로 확인하고 대대적으로 복구 복원 사업을 했던 기억이 있다.
농성에서 아기자기한 마을 고샅길을 걸어 대로를 잠깐 걷다가 동창리로 들어서면 시골마을의 한적함이 기다리고 있다. 동창리에서 옛 대추리 들어가는 고갯길로 올라서면 눈앞에 푸른 강이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가슴을 시원하게 만든다. 고갯길은 눈물의 길이다. 어머님이 보따리를 넘겨주며 잘 다녀오라고 신신 당부하던 길이 아니던가. 사랑하는 님을 기다리며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고개 아니던가. 고개는 만나고 헤어지며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곳이다. 여러 곳의 고개가 섶길의 중간중간에 배치되어 인문학적 섶길로 안내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행운이다. 이내 눈을 들면 광활한 오성창내 들이 손짓하며 부른다. 동서로 뻗은 38번 도로와 40번 고속도로 그리고 새로 건설중인 미군기지로 들어가는 철길이 수평선으로 나란하고 들판에 점점히 찍힌 마을 들이 그야말로 그림처럼 다가온다. 바로 강가의 자전거 도로를 올라서면 평택호의 남쪽 부분을 끼고 노양리 까지 연결된다.
서탄 귀여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