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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이야기

평택지역 신임교사 대추리길 체험연수 해설 자료

작성자광우|작성시간19.11.08|조회수186 목록 댓글 0



1코스 대추리길 소개

 

코스개요

- 평택섶길은 16개 코스, 총연장 180Km

-평택섶길 기점인 평택시청 앞에서 출발해 K-6(Camp Humphreys) 미군기지 정문 앞까지 15Km 5시간 난이도 보통

-동북아 근현대사의 아픔을 응축적으로 간진한 대추리를 기억하며, 화해와 평화를 염원하는 길

-시내길, 물길, 마을길, 산길, 논길, 과수원길


포인트

-청일전쟁 기간(1894~95) 가장 치열했던 격전장이었던 소사벌과 망건다리

-일제, 미군 등 외국군 주둔으로 터전을 이리저리 옮겨야만 했던 대추리마을과 주민들

-CPX 미군 사격훈련장(반환 공여지)K-6 캠프 험프리스 미군기지

-대추리평화마을의 역사관, 체험관

 

망건다리

망건다리는 성환의 청맹이들과 평택의 유천리들을 연결하며 지금도 승용차나 농기계들이 다니는 다리다. 다리 아래에는 이 다리 이전에 세웠던 다리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가 세웠던 다리로 보인다. 오래된 기억으로는 그 다릿발위로 검게 타르를 뒤집어쓴 통나무로 된 교각의 잔해가 있었다.

망건다리를 건너며 보이는 들판이 청맹이들로 이름이 암시하듯 이곳은 청일전쟁의 격전지였다. 그보다 먼저 조일전쟁시기 소사평 전투가 있었다. 小砂坪혹은 素沙坪전투는 1597년 직산현 북방 소사평에서 왜장 구로다와 명나라 섭지충이 6회전 전투로 명나라가 승리했다고 기록 하고 있다. 소사평 전투는 평양성, 행주대첩과 함께 육전삼대첩으로 기록된 규모가 큰 전투라 한다. 다만 명나라군대에 의해 치러진 전투란 것이 다른 두 곳의 전투와 다른 점이다. 30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두 나라는 다시 이곳에서 전쟁을 치렀다. 300년쯤 전에는 명나라가 이기고 그 후에는 일본이 이겼다. 이 전쟁으로 청나라는 급격히 쇠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청맹(靑亡)이 뜰이란 이름이 생겨났다한다. 망건다리는 청군이 진을 치고 망루를 세웠다고 해서 망건(望見)이 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고 이후 다리가 놓이면서 망건다리란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보인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평택이나 성환지역 사람들이 즐겨 쓰던 말이 평택이 깨지나 아산이 무너지나란 말이었다. 그 말은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는 속담과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 이 말의 출처는 청일전쟁에서 기원했다. 아산을 통해 성환벌에 주둔한 청나라군대를 아산으로, 서울에서 내려와 소사벌에 진을 친 일군을 평택으로 상징하고 두 나라의 전쟁이 우리민중과는 아무 상관없는 전쟁이라는 좀 자조석인 속담이 됐다는 것이다. 즉 일본이 이기나 청나라가 이기나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청나라 군대는 성환전투에서 청망이 되도록 패전하고 말았다.

 

소사벌

소사동 남쪽으로 펼쳐진 들판이다. 안성천 배후습지에 발달한 들판으로 근대 전후에는 안성천과 소사천으로 바닷물이 드나들과 안성천과 소사천 좌우에 흰 모래밭과 웅덩이가 펼쳐져 소사(素沙)’라고 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개간지가 많았고 대부분 논보다는 긴 이랑의 밭이었다. 그래서 옛말에 남편이 앞서 쟁기질을 하고 가면 뒤 따라 가던 마누라가 도망가도 몰랐다고 말할 정도였다. 1970년대 초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고 경지정리사업이 전개되면서 논농사지대로 변해 가을이면 황금들녘을 이룬다.

 

충청수영로(8대로)

조선후기 제8대로이다. 한양에서 삼남지방으로 연결된 삼남대로(6대로)가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평택시 칠원1동 갈원과 천안시 성환읍 가룡리에서 갈라져 충청도 보령시 오천면의 충청수영까지 연결된 길이다. 통상 일반인들은 갈원에서 동삭동을 거쳐 군문포에서 배를 타고 아산방면으로 나아갔지만, 가마를 탄 왕이나 양반사족들은 소사교와 안성천 아교를 건너 성환읍 신가리-와룡리-팽성읍 노와리-남산리-석근리를 거쳐 아산방면으로 나아갔다. 피부병이 많았던 조선의 왕들이 온양행궁으로 행차할 때 많이 이용했다.

 

통한들

팽성읍 평궁리, 추팔리, 노와리 일대에 펼쳐진 들판이다. 19세기에 궁방전(宮房田)이나 역둔토(驛屯土)로 간척되었다. 19세기 말의 추수기(秋收記)에는 명례궁(덕수궁)이나 순화군의 토지가 많았다고 기록되었다. 평궁리, 신궁리, 상궁과 같은 지명도 궁방전에서 비롯되었다. 국가 소유의 궁방전, 역둔토는 1910~18년 사이에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총독부에 수탈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게 불하되었다. 일본인 토지는 해방 후 적산으로 분류되어 미군정이 설립한 신한공사가 관리하다가 적산불하정책에 따라 일반인에게 분배되었다.

 

유네스코지정 인류무형문화유산 평택농악

평택지역의 국가지정문화재는 보물567호 만기사철조여래좌상을 비롯해서 유형문화재 3, 무형문화재 1개가 있다. 평택농악은 중요무형문화제 제11-2호이며 유네스코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이다. 평택농악은 서울, 경기, 충청지역의 대표농악인 웃다리농악과 평택지역 두레농악을 대표한다. 평택농악을 만든 사람은 팽성읍 평궁리에 거주하던 걸립패 출신의 상쇠 최은창이 이다. 최은창은 1958년 이승만대통령탄신 전국농악경연대회가 열렸을 때 경기, 충청지역(웃다리) 명인들을 모아 평택농악단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했다. 1980년에는 평택군청의 요청으로 웃다리 명인들과 팽성읍 평궁리 두레농악단을 결합하여 평택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하여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85년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11-나호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 전국 6대농악과 함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다. 평궁리에는 평택농악전수관이 있으며, 현덕면 권관리 평택호변에 평택농악공연장이 마련되었다.

 

노와리

조선시대 충청도 평택현 동면에 속한 마을이다. 본래 노련동(동면)과 와촌(瓦村)이라는 마을인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 두 마을을 통합하여 노와리라고 했다. 1946년 병술년 수해를 겪으며 큰 피해를 입은 평궁리 상평마을 주민들이 이주하여 와룡리 경계에 양천마을을 형성했으며, 1960년대 서울지역 도시빈민들에 대한 귀농정착사업 때 노와4리 귀농촌이 조성되었다. 2010년경에는 용산미군기지 이전에 따라 쫓겨난 대추리 주민들 일부가 평화마을 대추리를 조성하여 현재는 5개 자연마을이 있다. 1894년 청일전쟁 때는 성환방면으로 진격하던 일본군 별동대와 청군이 격돌하여 일본군이 승리했던 역사적 장소이며, 삼남대로의 역로(驛路)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하여 조선시대 추팔1리에는 화천역이라는 역촌이 있었다. 근래에는 노와2리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마을의 전통민속놀이인 와야골거북놀이를 복원하여 공연하고 있다.

 

평화마을 대추리와 행복마을

조선시대 대추리는 충청도 평택현 북면에 속한 마을이었다. 삼태기처럼 형성된 구릉 안에 마을이 있어 주변에서도 부러워하는 포실한 마을이었다. 그러다가 1942년 일본군이 안정리 일대에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마을 일부가 잘려나갔고, 1952K-6미군기지가 건설되면서 마을 전체가 근처 곤지나루로 강제 이주 당했다. 그러다가 2003년 경 용산미군기지 평택이전으로 또다시 강제이주당할 처지에 놓이자 마을주민들이 미군기지확장 팽성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반대촛불시위를 전개했다. 미군기지이전반대투쟁은 평택시민단체를 비롯해서 전국의 문화예술인들의 지지와 동참을 가져왔고 2007년까지 뜨겁게 투쟁했다. 투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주민들 2/3는 마을을 떠났고 끝까지 남아 있던 주민들이 20071월 정부의 집단이주단지 조성, 생계유지대책 등 24개항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노와리에 29,000평의 이주단지 평화마을 대추리가 조성되었으며 20099월부터 10월까지 44세대가 입주를 완료했다. 평화마을 대추리에는 대추리기념관과 대추리 평화박물관, 천주교 대추리공소가 있다. 기념관에는 마을 공공시설과 함께 평택평화센터가 입주했으며, 근래에는 대추리평화마을협동조합도 창립하여 농촌교육과 평화교육, 농촌체험활동, 목공과 로켈푸드체험을 하고 있다. 평화박물관에는 대추리마을의 역사와 투쟁과정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었으며, 대추리공소는 150년 내력의 천주교신앙촌인 대추리 주민들의 신앙의 거처다.

남산5리 행복마을은 투쟁과정에서 먼저 마을을 떠난 대추리, 도두2리 주민들의 집단이주단지다. 이들은 마을을 떠난 뒤 송화리 주공아파트와 우미린아파트 등에 거주하다가 남산5리에 집단이주단지를 조성했다. 초기 조성과정에서는 30호가 신청을 했지만 조성 및 입주과정에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20여 호()는 부지를 매각한 뒤 입주를 포기했고 나머지 10()만 입주했다.



⑧송화리 솔숲(CPX훈련장, 지하벙커)
송화리라는 마을은 1914년 송당과 개화리가 합쳐진 이름이다. 소나무가 많아서 송화리라고 했다고도 한다.
평택에선 보기 드물게 아름드리 조선소나무(육송)숲이 보전되어있다. 아직 미국으로부터 반환 진행 중인 상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은 이곳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기지를 접수했다. 일제는 1942년부터 2만 여 명의 강제징용과 근로보국대의 징발로 일본해군시설대(302부대) 보급부대의 비행장을 건설했다. 해방이 되자 비행장은 미군에게 넘어갔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 K-6부대의 주둔으로 이어졌다. 이곳을 접수한 미군은 아직도 야영훈련장과 사격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는 수시로 미군의 야간사격훈련이 있었다. 폭음 소리가 주변마을을 흔들고 아침에 철수하고 나면 아이들은 탄피를 주우러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야간에 훈련을 하기에 탄피를 흘리고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탄피는 푼돈을 만들 수 있는 매력있는 물건이었다.
이곳 CPX훈련장 지하시설을 두고 설들이 많이 있다. 일본의 마츠시로 대본영처럼 한반도내에 일인 몇 만명이 들어가서 최후항전을 수행하기위해 원폭에도 견뎌내는 정도의 강도로 지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중국 산동반도까지 해저로 연결하려고 시도했다는 설까지 전해지고 있다. 팽성 평택지역에 이곳에서 징용이나 보국대로 동원돼 노역을 했던 어른들이 아직 살아계시다고 한다.



⑨용화사
남산리 쪽 솔숲 언저리엔 있는 절이다. 이절은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으나 고려후기에 폐사 되었다고 한다. 60년대에 기록을 확인하며 절터를 확인하고 다시 법당을 세웠다고 한다. 법당은 관음보살상을 모신 대웅보전이다. 그런데 이 절터에 미륵을 세워 뒀는데 법당을 세우면서 미륵이 발견돼 그대로 법당안에 모시게 됐다고 한다. 미륵은 하반신이 땅에 묻힌 채 법당 한켠에 개금을 하고 우람하게 신도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돌미륵이 주불인 관세음보살보다 더 보살핌을 받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륵불 좌측 아래에 놓여있는 밀돌의 확실한(?)효험 때문 아닐까? 8배나 108배를 하고 마음을 가라 안치고 무릎을 꿇고 밀돌을 밀면서 소원을 빌면 어느 순간 밀돌이 바닥돌에 들러붙는다고 한다. 그러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한다.




K-6캠프험프리즈수비대

K-6캠프험프리즈와 CPX훈련장은 1942년 일본해군시설대가 안정리, 함정리 일대에 비행장과 격납고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의 비행장 건설로 안정1리 서정자마을과 함정1리 서원말은 폐동되었고 조선인 징용자 2만여 명과 평택주민들이 징용과 근로보국대로 끌려와 고생했다. 해방 후 미군에게 접수되었다가 정부수립 후 한국해병대가 일시적으로 주둔했던 안정리비행장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미군이 주둔하면서 본격적으로 미군기지로 탈바꿈했다. 미군기지확장으로 대추리마을은 근처 곤지나루로 강제이주 당했으며 주변 경작지는 수용되었다. 한국전쟁동안 평택비행장으로 불렀던 K-6캠프험프리즈 미군기지는 1962년 헬기사고로 사망한 제4수송중대 벤자민 험프리를 기리기 위해 K-6캠프험프리즈로 개명했다. 1974년에는 제19후속보충여단의 출범으로 K-6캠프험프리즈수비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3년에는 용산미8군의 평택이전계획이 발표되었고 지역주민들과의 갈등 끝에 2007년부터 확장공사가 시작되었고 2018년에는 용산 미8군사령부가 이전하여 주둔 중이다.

기지 면적은 여의도의 5배 크기이며, 미군 단일 기지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농성

농성은 무엇으로 쓰인 것인지 정확치는 않다고 한다. 추측컨대 말을 키우던 말목장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평택이 말목장이 많이 있고 중국에서 뱃길이 가장 빠른 곳이니 중국에서 수입한 말들을 임시로 먹이던 곳이라는 추측일 뿐이다. 임명직 도지사 마지막이 임사빈씨로 평택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라고 해서 이 농성을 평택임씨의 세출지로 확인하고 대대적으로 복구 복원 사업을 하였다.

인접한 도원사 주지스님 말씀에 따르면 이 농성 입구에 원효대사가 묶었던 곳이라는 푯말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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