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항, 평택연안의 역사환경과 평택섶길 조성활동
한도숙(전국농민회총연맹 고문, 평택섶길 위원)
1. 평택연안 과거와 현재
(1) 지리적 조건
평택의 자연지리적 조건은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여 중국과 가장 인접한 황해연안지역, 해양도시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연안지역 해양도시 중에서도 바닷물길이 내륙 경계 끝까지 이어져 해운이 가능하였던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다. 중부지방에서는 해안가에서부터 내륙 깊숙이까지 크고 작은 포구가 가장 많이 있었던 지역이다. 물길로 둘러싸여 물로 평택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지리적 위치로 중국의 선진문물을 직접 접촉할 수 없던 이유로, 삼국 중 문명발달이 늦었던 고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기 전인 6세기 중국과의 직접 통로를 확보하기위한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당시 한강하류 평택항(大津)을 차지하기 위해 삼국의 치열한 전쟁 속에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다가 결국 신라가 차지하면서 564년 처음으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 교류를 하게 된다.
이후 대진(平澤港)은 조공무역, 사신왕래, 불교유학생 등 대당나라와 교역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로써 신라는 선진문물 교류와 김춘추의 나당연합군의 결성 등으로 삼국통일의 주도권을 갖게 된다.
그림1 <평택호 수계(평택연안 내륙 물줄기)>
(2) 대진(大津)
그림2 <조선 후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水原府’ 하단의 기록>
<대진(大津)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혜군(槥郡:당진 면천의 옛 이름)의 가리저(可里渚) 동쪽에 수군창을 두었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후, 관(館: 여행하는 자들이 머무는 숙소)을 설치하고 곡식을 쌓아두었으며 호를 수관(稤館)이라고 하였다. 당의 사개(使价: 사신)이나 상고(商賈: 상인)들이 모두 그 관에서 묵었다. 조공하러 가는 신라 사람도 역시 이곳을 경유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대진이라고 하였다. -고려대 이진한교수 역>
김정호의 해설에는 대진에 백제가 군사용 창고를 두었고 신라가 점령한 이후에도 신라인들이 당나라와 많은 교역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에는 대진이 직산현에 속해 있으면서 아산만 건너편 포승에 위치하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조선후기에 직산현 외야곶면에 대진이 있었다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영토상으로는 수원부 지역(포승)에 위치하면서 행정적으로는 직산현에 속해 있는 월경지(越境地)였다. 월경지는 소속된 고을과 경계를 접하지 않고 다른 지역에 동떨어져 있지만 조세는 소속 고을에서 거두었고, 이는 과거 행정구역이었던 연고지에서 생선·소금과 같은 주요 물자의 조달, 조운(漕運)·조창(漕倉)의 필요성에 의해 형성된다.
직산현은 4곳의 월경지가 있었는데 고려 후기에 정해져서 조선 후기까지 존속했다. 그 4곳은 경양현(팽성 신대리, 본정리, 노양리 일대), 안중면(현덕면 황산리 일대), 언리면(오성면 대반리, 당거리 일대), 외야곶면(포승면 신영리 일대)이다. 직산현에 속해있던 현 평택시의 남서부 지역 대부분이 조선후기에도 수원부로 행정개편이 된 이후에도 직산현의 월경지로 남아있던 것이다. 월경지로 두어야 할 만큼 평택시 남서부지역은 대진을 포함하여 생산이나 교역의 다른 특수한 중추 역할을 수행하였던 땅이다.
원효와 의상대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위해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서 고구려 군사에게 잡혀 첩자(세작)로 몰려 한 달여간 갇혀 있다가 경주로 되돌아간다. 10년 후 신라가 평택항 일대를 장악하자 두 사람은 다시 당나라로 가기위해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하기 위해 평택항(포승 원정리 수도사)까지 와서 원효는 해골의 물을 마시고 득도하여 되돌아가고 의상만 뱃길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약 70여 년 후 한국 최초의 세계인으로서 실크로드의 개척자인 혜초가 등장한다. 혜초 스님은 서역에서 보고들은 것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여행기를 엮었다.
육로를 통한 대당 유학이 좌절되었던 원효와 의상이 대진(당항성)에서 출발하는 해로를 이용했다면 반세기 후에 경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혜초는 과연 어떤 경로를 거쳐 당나라에 건너갔을까 하는 것이다.
1,500년 후로 되돌아와서 살펴 볼 사건이 있다. 2015년 2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평택지역의 두 국회의원이 주최하여 국회의원회관에서 ‘황해-실크로드 익스프레스 대토론회’를 개최하였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기간 추진되었던 남북한 철도를 이어 중국의 대륙횡단철도를 연결하여 유라시아를 잇는 신실크로드를 만들려는 시도는 이명박, 박근혜정권이 들어서고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대륙횡단철도 실크로드 추진이 중단되었다.
이제 북한(고구려 땅)과 적대적 관계로 교류가 막히자 다시 해로를 이용하여 평택항에서부터 열차 페리로 한국과 중국을 직접 연결하는 실크로드 익스프레스라는 차선책을 찾자는 제안을 하게 된 것이다. 역사의 반복을 현재 현실에서 보고 있다.
2. 평택항의 역사환경
《소근산성은 한남정맥 용인(龍仁) 부아산(負兒山)에서 발원한 진위천과 오산천, 광교산에서 발원한 황구지천, 3개 하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와 서해 남양만(南陽灣) 상류의 바다로 향하는 수구(水口)를 지키고 있는 지형으로 항곶(項串, 황구지천교 부근)은 충북 진천 도당산성, 대모산성(할미성)~안성 내혜홀 비봉산성~양성~평택 청북면, 화성 양감면으로 이어지는 삼국쟁패의 요충지 당항성로(黨項城路) 길목을 지키는 산성이다.
당항성(黨項城)을 화량진(花梁津, 현 대부도와 화성 송산면 사이) 인근에 있는 당성(唐城)으로 추정하는데, 우선 주변의 지명을 살펴보면 항곶은 황구지천의 어원(語源)이며, 고잔(高棧)은 곶(串)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항곶~고잔, 항곶~청북면 삼계리 옹포(甕浦, 독개나루)는 지형상 남북으로 폭은 좁으면서 능선은 길게 이어지며 나지막한 구릉을 동서로 사이에 두고 아산만 진위천, 남양만이 나뉘는 천혜의 지형이다.
화량진은 넓은 바닷물로 인해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수심이 깊지 않다. 그리고 태풍에 취약하여 대륙을 오가던 대중소형의 선박들이 피항하고 적군으로부터 배를 해안 깊숙히 감추기가 쉽지않다. 반면 남양만 옹포(청북 삼계리, 독개나루)와 고잔 등의 항포구는 수심이 깊어 큰 배의 운항이 비교적 자유롭다. 그리고 강력한 태풍과 적군의 눈을 피해 선박을 깊히 감추고 공격과 수비가 훨씬 수월한 지리적 이점을 지닌 항포구인 것이다. 한반도의 계절적 특징인 여름철 동남풍과 겨울철 북서풍 그리고 해류(海流)의 흐름을 타고 순풍(順風)에 돛 달고 대양(大洋)을 항해(航海)하는데 최적지 또한 이곳이다. 현대의 초대형 선박들도 입출항이 자유로운 지금 평택항(平澤港)은 예나 이제나 대진(大津, 한진나루)으로서의 기능을 충족시키는 천혜의 항구인 것이다. 화성시 소근산성에서 평택시 자미산성(용성)까지의 당항성(黨項城)은 백제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로 삼국쟁패의 각축장인 동시에 대중국 교역로이며 당나라 사신들과 장사꾼 유학생 고승(高僧)들이 오가던 국제무역항이며 전세계로 향하는 해양 코리아실크로드(Korea Silkroad)이었다.
화량진(현 대부도와 화성 송산면 사이)은 수심이 얕고 좁아 뱃길로 이용하기에 위험하다는 여러 기록이 있다. 그리고 경기만 일대에서는 아산만이 그중 수심이 깊어 통일신라 이후 선박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진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었다. 이는 청일전쟁 당시 곤지진(팽성 대추리)을 통해 청군이 입항하거나 현대에 들어 이곳 대진에 평택항을 건설한 것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3. “섶길은 살아있는 박물관이며 미술관이다”
(1) 평택섶길 조성
평택시는 가볼만한 명소나 역사문화공간이 없다는 것이 지역 내 만연된 인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거나 찾으려는 노력이 없었던 결과일 뿐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역문화에 관심이 있는 몇 사람이 가볼만한 곳을 발굴하자는 의지를 모았다. 2012년부터 발굴한 명소들을 한나절이나 하루코스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개발의 손길 덜 미치는 평택시 외곽, 경계에 위치하다는 것을 확인하여 평택시를 한 바퀴를 도는 둘레길로 조성하자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섶길의 ‘섶’이란 저고리나 두루마기의 앞여밈을 하는 데 있어 앞 중심에 겹쳐지는 부분을 의미한다.
초기 1~2년간에는 자동차와 자전거로 대략적인 둘레길의 윤곽을 잡고 이후부터는 직접 걸으며 섶길의 세부노선을 다듬어 왔다. 현재 총연장 180Km, 16코스로 각 코스의 명칭은 평택시의 산업, 역사, 마을, 자연을 담는 대추리길, 비단길, 원효길, 소금뱃길, 정도전길, 과수원길, 산성길 등 평택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
5년 여간 활동가들의 순수 자비로 활동하다가 현재 섶길추진위원회는 평택문화원을 통해 3년째 일부 민간보조를 받아 활동하고 있으며, 배꽃길걷기 등 정기걷기여행과 상시걷기여행
을 실시하며, 섶길안내지도와 활동책자를 발간하고 있다. 상시걷기는 가출청소년, 위탁교육생 걷기체험과 일반 중등학생들에 대한 교과연계 마을공동체 체험학습을 진행하고 있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동시에 관내 신입, 전입 초중등교사들의 내 지역알기연수 걷기프로그램도 진행 중이다. 서울 등지에서 오는 단체들에 대해서도 섶길 걷기여행 안내 해설을 하고 있다.
섶길은 시민들의 건강증진위한 걷기활성화와 내 지역의 알기위한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다.
(2) 평택섶길의 역사성은 해양문화
1. 군문포 軍門浦 - 1코스 대추리길
2. 곤지진 坤池津 - 2코스 노을길
3. 경양포 慶陽浦 - 3코스 비단길
4. 당포진(신흥포) 唐浦津 - 3코스 비단길
5. 구진나루 鳩津나루 - 3코스 비단길
6. 혜초기념비 - 3코스 비단길
7. 계두진 鷄頭津 - 5코스 원효길
8. 신영포구 新營浦口 - 5코스 원효길
9. 대진 大津 - 5코스 원효길
10. 수도사 修道寺 - 5코스 원효길
11. 옹포 瓮浦, 신포 新浦 - 6코스 소금뱃길
12. 용성리성, 강길성, 자미산성, 비파산성, 무성산성 - 6-1코스 산성길
13. 항곳포 項串浦 - 9코스 황구지길
그림5 <평택섶길 노선도와 포구와 해양유적>
(3) 에코뮤지엄의 새로운 실험 “평택섶길”
길이란 예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의 역사, 오래전부터 살아온 선조들의 인생… 등 삶의 모든 것들을 담아내고 있다.
섶길추진위는 평택을 도는 둘레길의 윤곽을 대부분 완성한 후, 길 자체만이 아닌 길 주변의 역사·문화·환경 생활자원 등을 파악하기 위한 섶길자원조사단을 구성하여 답사를 통해 종합적 조사를 진행하였다. 길 주변 마을에서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과 관련된 것들을 섶길에 담으려 하였다. 이밖에도 지역의 문인들과 미술인들이 섶길이 지나는 마을의 예술적 가치를 파악하고, 마을의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길의 발견은 살아있는 교육을 위해서 더욱 중요하다. 길을 통해 특산물, 마을, 역사, 문화, 경제를 포함하는 과거 그리고 현재의 생활자원, 우리 주변에 있는 가치들을 재발견하고, 그 가치를 발현시켜 생활에 실질적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참조>
이정우, 「천안 지역 월경지 연구」(『제15회 전국 향토 문화 연구 발표회 수상 논문집』, 전국 문화원 연합회, 2000)
강봉룡, 『바다에 새겨진 한국사』 한얼미디어, 2005
윤명철, 『한국해양사』 학연문화사, 2003
단국대선사문화연구소, 「평택 원효대사 오도성지 학술조사보고서」,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