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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상길 안내 매뉴얼

작성자歸廬齋|작성시간20.02.09|조회수102 목록 댓글 1

2. 명상길 안내 매뉴얼

 

*명상이란

冥想(meditation) 눈을 감고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함 이라고 국어사전에서 풀이 한다.

명상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이다. 정신을 가라앉히고 현상의 내가 아닌 우주존재인 나를 찾아가는 정신집중이다. 이는 현대의학에서 치료에 이용하고 있어 정신이 질병 억제에 작용함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현대의 자본주의적 질서가 가져오는 각종 갈등과 긴장을 다스리는 심리적 행위로 각광을 받고 있기도 하다. 명상은 요가와 함께 종교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 중시하는 끊임없는 질문인 이 뭣고라는 화두가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인 것을 보면 명상은 분명 종교적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상의 나를 갈등과 긴장으로부터 내려놓게 하는 것은 치료행위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이 누리는 문명의 이점은 누구도 거부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절대적인 것은 갇힌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거기로부터 해방 되고자 하는 또 다른 욕구에 부딪히는 것이다. 이를 치유라는 이름으로 명상을 권하는 의료인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명상길로 된 사연

명상길은 신왕2리 원신앙 마을을 중심으로 약 5Km를 걷는 길이다. 이곳은 멀리 서봉지맥의 마지막 자락인 광덕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들이 말물자()형상으로 늘어져 평택호로 제각각 빠져 들어간다. 골짜기마다 마을들이 들어서있는 이곳은 한때 신왕나루의 번창으로 잘나가는 동네였다고 한다.

이곳을 명상길로 한 이유는 걸어보면 안다. 걸으면서 참좋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심복사라는 절에 주지스님이 이 마을에 오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하신 말씀부터 이 마을 이장님의 아직 평택에 이만한 환경을 보전하고 있는 마을은 없다고 자부하는 말씀 까지가 이유라면 이유가 되겟다. 반딧불이 있고 물고기를 잡아 어죽을 끓이는 마을이란다. 아쉽게도 몇몇 전원주택지가 산허리를 붉게 만들고 평택항에서 미군기지앞 본정리로 나가는 고속도로가 광덕산 줄기를 무참히 깎고 지나간다. 바야흐로 개발과 보전의 모순이 뒤엉키고 있는 뜨거운 곳이 된 것이다.

 

옛 이름이 광덕현이었던 이곳은 지금도 광덕이란 이름을 즐겨 부른다. 마을회관에 걸린 광덕청년회가 보여주듯 이 지역 사람들은 오랫동안 광덕현으로 행정구역의 독립성을 보장 받아왔다. 1914년 현덕면으로 개칭되면서도 자기들만의 정체성으로 강하게 결집되어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일테다. 평택호반 옛 신왕나루터 근처에서 바라보는 원신앙이나 마두마을이 저녁연기에 감싸이는 모습은 한폭의 수채화같은 모습을 연출한다. 느릿하고 풍만한 산줄기에 옹기종기 들러붙은 농가들이 아직도 평택의 오래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반갑기 그지없다.

 

*신왕리의 역사

원신왕 마을 회관 앞에 버스를 내려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이 느티나무와 우물터이다. 느티나무는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맞고 아직도 봄이면 푸른 싹을 돋우어 낸다. 300년쯤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됐는지도 모른다. 마을 중심에 있는 우물은 보통 대동우물이다. 목숨을 부지 하는 물을 함께 나누어 마시니 함께 동고동락이라는 가치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물은 동네입구에 지나는 길손에게 목을 축이도록 했다. 어여쁜 김첨지네 딸이 버들잎을 훑어 물그릇에 넣어 길손에게 건네고 볼을 붉힌다. 특히 우물은 마을의 이정표요 소식을 접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누구네를 찻아 온 길손이 여기서 길을 물으면 그 사람이 누군지 왜 왔는지 묻지 않아도 아낙들의 수다스런 추론으로 결론이 나는 곳이다.

신왕이라는 이름은 심복사 쪽으로 평택호를 따라 돌아 나가는 광덕산 사면에 있는 왕터라는 지명과 관계가 있다. 처음에 이곳에 터를 잡은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안성천변에서 경작을 했으나 홍수에 경작지가 쓸려나가는 바람에 지금의 원신앙으로 옮겼다고 한다. 원신앙의 들은 조수의 영향을 덜 받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마을 사람 이야기로 왕터는 정감록에 왕이 나올 터라고 돼있다고 한다. 그 터를 새로이 옮겼기에 신왕이라고 했다고 한다. 정감록에 그런 기록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오히려 평택호 물줄기로 이어지는 곳에 또 다른 신왕리인 화성 신왕리가 있고 아산 신왕리가 있다. 이 두 마을의 유래를 들여다보면 샘터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곳 신왕도 샘이 있어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옛날에야 샘같이 중요한 것이 없다. 마을이 서려면 기본적으로 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온 이름이 새암 > 샘이 >새미> 생이다. 이는 새암이 되어 1914년에 행정구역 통폐합 때 새는 한문으로 이 되고 암은 으로 고친 듯하다.

 

*신왕포구

마두마을에는 신왕포구가 번성할 때 객주와 색주가가 함께 번창했다고 한다. 신왕포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唐浦津(당포진)으로 기록 되어있어 당나라로 가는 포구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후일 수원읍지에 唐津浦로 기록되어있어 당진으로 건너가는 포구로 표기하고 있어 혼란스럽다. 어쨌든 신왕포구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1974년까지로 볼 수 있다.

마두마을은 광덕산에서 느리게 흘러내린 산줄기로 물이 닿는 가장 깊은 곳까지 머리를 내밀고 있어 포구로서 역할을 하지 않았겠는가. 이 지역 한량들이 마두봉에 올라 시를 짓고 놀았다니 가히 풍광이 으뜸인 것은 미루어보지 않아도 알겠다. 한량들의 그런 행사는 70년대까지 남아있어 평택문화원이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포구 터와 샘터 그리고 능선주변으로 이어졌을 객주와 색주가들의 흔적이 보고 싶은 사람들의 눈에만 살짝 모습을 내비치고 있다. 뱃사공들의 고단함은 육지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고 한다. 풍랑이며 물살을 헤치고 목적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늘 순풍에 돛 달고처럼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억센 바람에 돛대가 부러지고 살여울에 배가 걸쳐 빠져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에 목숨을 내 맡기고 뱃사공을 하는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쉽게 색주가에 빠져들어 술과 나긋한 몸에 나른한 몸을 뉘였으리라. 이런 배따라기들을 홀리는 아가씨들 또한 고단한 삶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이 지역 주변에는 술집 여자들은 소금 한 배를 먹어도 짜다는 법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주머니를 털었던 것이다. 이 좁은 지역에 배가 10여척 항상 머물고 파시 때에는 임시 천막으로 색주가가 또한 20여 곳 성업했다고 한다. 청어· 조기· 미역· 미곡· 대맥· · 소금· 목화·창호지· 우피· 담배 등의 세금을 거두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단순한 포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벌어먹기 어려운 시절 객주를 따라 색주가도 함께 들어왔을 것이다. 멀리 덕적도나 서해안 쌀이 나지 않는 섬에서 생선을 싣고와 쌀로 바꾸어가는 황포돗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물류뿐 아니라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아산사람들은 경양포로 가서 평택역으로 아니면 바로 발안 수원으로 연결 되었던 것으로 추측 한다.

 

이 나루에는 전설처럼 뱃사공 황씨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나룻배를 저어 객을 실어 날랐다고 해서 마을사람들이 공덕비를 세워주기도 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없어진 것은 공덕비만이 아니다. 1974년 아산만이 막혀 평택호가 되니 뱃길도 뱃사공도 사라지고 그 많던 강다리, 숭어들도 보이지 않고 객주나 색주가도 물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뿐이랴 이 바닥을 일궈 농지로 이용했던 거친 농부들과 아산 해평윤씨 집안의 땅덩어리들도 물속에 가라앉았다.

 

*평택호 이야기(갯골 상상)

이곳에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된 것은 1974년도 부터이다. 아산만 방조제가 바다를 막고서부터 빗물이 고여 호수를 만들었다. 계양바다라 불렀던 해수가 배제되고 담수가 늘 그정도의 수위를 유지하고 있으니 옛일을 짐작하기 어렵다. 저 물속에 뱃길이 있었고 포구가 있었고 그리고 농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만으로 그려 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소래포구를 가보시면 안다. 포구에 물이 차오르면 배가 올라온다. 갯골에 물이 빠지면 배가 다니지 못한다. 농사도 바닷물이 밀려들지 못하도록 둑을 막아야만 농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 둑을 막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2m남짓 둑을 쌓고 농사를 지었다. 큰물이 올라 오거나 홍수가 지면 떠내려가는 땅이다. 그야말로 지난한 자연과의 싸움 속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나마 그렇게 지은 쌀을 지주에게 바쳐야했다. 차이가 있지만 일제가 쌀을 가져가자 지주들은 소작료를 높였다. 73의 소작료를 강요하기도 했다. 둔포 신항리 해평윤씨네의 부가 만들어지는 배경이기도 하다. 윤보선은 그 힘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쉽게 말해 아산만 줄기의 소작농들의 생산력이 그의 권력을 만들어낸 재력이 됐다는 말이다.

 

 

*서당

원신왕마을엔 개인이 하는 서당이 남아있다. 안선생님이 훈장으로 계셨다. 지금은 폐하고 서당 현판만이 남아있다. 서당은 면이나 동리를 단위로 설립된다. 교육내용은 과거나 유학적 학문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향교나 서원과는 전혀 다른 교육체계다. 17세기부터 서당이 널리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는 농민과 하층양반들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또 상층농민 등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평민층의 교육요구가 높아지면서 확장된 것이다.

 

그 후 18~19세기에 동족부락이 형성되고 이것이 서당설립의 주도세력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서당이 그들 가문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이전과는 달리 서당도 향사기능을 수행하는 등 보수화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일제병탄 당시 전국의 서당은 16,540개였는데, 일부에서는 초등교육기관의 기능에 더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일제는 <서당규칙>을 제정하여 서당이 일제의 동화교육을 담당하도록 했으며, 민족교육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해방 후 서당은 그 기능을 보통학교에 물려주고 점차 소멸했다.

이마을에 서당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은 안선생 개인적으로 지켜낸 일이기도 하지만 이 마을의 정체성과 관련이 잇을 것이다. 한 마을에 유학자가 나오면 서원이 설 수 있다. 하자만 이 마을에 그런 존재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유교적 충효전통을 내세울 형식이 필요햇을 것이다. 그 하나가 효열각이고 그 다음이 서당이라고 본다.

 

*효공원과 방수고리처 이야기

발길을 옮기면 효공원이 있다. 심청의 이야기가 아니다. 효를 행하자고 계몽차원에서 만든 것도 아니다. 이 마을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던 효열비 때문이다. 경주이씨 효부에 대한 전설이 마을에 남아있고 효열비가 마을 입구에 서있었다. 이 마을에 살던 방수고리의 처 경주이씨가 있었다. 방수고리가 딸과 시어머니를 두고 일찍 죽자 부인 경주이씨는 9년 가뭄으로 굶주림을 피해 경상도로 갔는데 그곳에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한다. 며느리는 시어머니 장사를 고향에서 치르기 위해 시어머니를 여름날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을 채워 700리길을 이고 왔다고 한다. 경주이씨는 3년 시묘살이 중에 숨을 거뒀다고 한다. 이를 가상히 여겨 임금이 효열비를 내렸다고 한다. 효는 유교의 이념이다. 충과 효는 조선시대 이데올로기로써 목숨을 걸고 지켜온 가치였다. 마을에 효자비가 서는 것은 마을의 자랑이었다. 충과 효에 이어 부녀들에게 ()을 강조했다. 남편을 위해 가문을 위해 죽어야 했다. 지금의 가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것이 인생의 궁극적 목표라고 쉽게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경주이씨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으로 이해되고 국가는 이를 기려 충과 효와 을 더욱 강화했는지 모를 일이다. 효열비는 경주이씨의 외손인 서씨 집안에서 관리했는데 도로공사로 그만 없어지고 효열비만 장소를 옮겨 설치하고 비각은 짓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포장이 채 되지 않은 공사중인 도로 옆에 방수고리 처의 비는 오늘의 현실을 비추듯 그 가치가 퇴락 한 채 새로운 비석돌로 오두마니 서있다. 방수고리도 경주이씨도 효열비도 한갓 거추장스럽기만 한 존재로 남루하고 쓸쓸하게 길거리를 지킬 뿐이다.

마을 뒤에 서낭당이 있다. 두 나무에 오색 헝겊이 감겨있는 것으로 봐 올해도 산제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 나무는 음()나무이다. 귀신을 불러 해원을 하거나 축원을 해야하는데 귀신을 쫒는다는 음나무가 신목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음나무로 된 서낭당은 도처에 보이니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해마다 풍어제와 당산제를 지냈는데 한동안 중단되다가 이곳에 여선재를 둥지삼아 행위 예술을 하는 김석환 선생이 풍어제를 올린 담부터 마을에서 맡아하고 있다 한다. 서낭나무가 오색천을 휘감고 우뚝 서있으니 든든하다. 나그네도 두 손 합장하고 마을의 안녕과 이장님의 숙원인 농촌테마마을 조성과 성공을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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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광우 | 작성시간 20.02.09 훙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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