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리길 중 강당산- 캠프험프리 안내 매뉴얼
*. 강당산이란?
강당산은 팽성읍 송화리와 남산리 경계에 걸쳐서 팽성복지센터와 험프리 미군기지 사이에 있는 나즈막한 세 개의 구능숲으로 이루어져 8만여 평이다. 숲은 평택에서 유일하게 남은 대규모 육송 군락지로 수령은 80년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객사리에서 둔포로 가는 45번 구도로가 가로질러 나누어져 있고 세 개의 구능숲은 논과 밭으로 이어져 있다. 평택 시내 방향에서 구도로의 왼편으로는 일제시대의 지하벙커가 보존되어 있다. 세 개 숲은 험프리 CPX훈련장으로 미군 공여지이다.
안정리 방향에서 구도로 쪽으로 적송 군락을 훼손하는 평택시의 도시계획도로 공사가 현재 중지된 상태이다. 공사는 SOFA협정에 의한 공여지 반환이 확정되기 전인 2009년도에 시작되어 그 협정에 발목이 잡혀 중지되어 있다.
시내 생활권에 위치한 사격훈련장으로 주민들은 재산상, 생활상의 피해를 감수하여 왔으며, 몇 년 전부터 강당산이 개방되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인근 주민들은 시내의 허파역할을 하는 강당산 숲을 훼손하는 도로공사 반대활동을 해오고 있지만 평택시 도로공사 답당부서는 미군과 공여지 협상이 마무리되면 공사를 다시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용화사
한쪽 구석엔 용화사라는 작은 암자가 있는데 개금을 한 미륵 부처가 법당안에 있으며 밀돌이 있다.
이절은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으나 고려후기에 폐사 되었다고 한다. 60년대에 기록을 확인하며 절터를 확인하고 다시 법당을 세웠다고 한다. 법당은 관음보살상을 모신 대웅보전이다. 그런데 이 절터에 미륵을 세워 뒀는데 법당을 세우면서 미륵이 발견돼 그대로 법당안에 모시게 됐다고 한다. 미륵은 하반신이 땅에 묻힌 채 법당 한켠에 개금을 하고 우람하게 신도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돌미륵이 주불인 관세음보살보다 더 보살핌을 받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륵불 좌측 아래에 놓여있는 밀돌의 확실한(?)효험 때문 아닐까? 8배나 108배를 하고 마음을 가라 안치고 무릎을 꿇고 밀돌을 밀면서 소원을 빌면 어느 순간 밀돌이 바닥돌에 들러붙는다고 한다. 그러면 소원이성취된다고 하는데 나 같은 작자는 아무리 밀어보아도 들러붙을 기미가 없다. 마음 정한 사람들만이 소원을 빌어야지 개도라치 같은 작자는 해당사항 없음이 분명하다.
미륵은 미래불이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가고나서 자그마치 56억7천만 년 후에 평등의 나라, 유토피아가 나타나는데 그 시대를 다스리는 부처가 미륵불이다. 이는 공교롭게도 기독교의 메시야 ‘Messiah’와 산스크리트어로 미륵'Maitreya'이 음이 비슷하다. 곧 기독교의 메시아가 불교의 미륵으로 읽혀진다. 그런데 미륵이 나타난다는 세상이 천문학적으로도 표하기 어려울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호모사피엔스(현생인류)의 역사가 이제20만 여년에 지나지 않는데 56억7천만년이란 시간은 언제 다가올 시간인가 말이다. 부처께서 그런 날이 온다는 희망을 가지라는 뜻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미륵이 현재 도솔천에 머물며 수행을 한다는 사실이 혁명을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민중들은 힘들고 괴로울수록 미륵에 빠져들고 미륵이 제시하는 희망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현실의 가렴주구나 혹세무민을 견뎌 내기는 그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은근슬쩍 미륵사상에 기댄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민간신앙을 잘 이용했다는 것이고 사회의 만연된 지역과 계급의 차별에 저항수단으로 차용된 탓이다. 서북출신 지식인들이 천주교에 쉽게 동화되고 천민계급이 쉽게 동화된 이유가 된다. 어쨌든 미륵은 어려울 때 일수록 더 많이 숭배되고 곳곳에 미륵불을 세웠던 것이다. 평택에는 안성처럼 미륵이 많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않은 미륵이 모셔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는 소사동 미륵과 여기 용화사 미륵, 그리고 방축리 서천사에 미륵이 남아있다고 한다.
* 역사
이 땅은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지 못한 상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은 이곳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기지를 접수했다. 일제는 1942년부터 2만여 명의 강제징용과 근로보국대의 징발로 일본해군시설대(302부대) 보급부대의 비행장과 대피벙커를 건설했다. 해방이 되자 비행장은 미군에게 넘어갔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 K-6부대의 주둔으로 이어졌다. 이곳을 접수한 미군은 아직도 야영훈련장과 사격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의 지하시설을 두고 설들이 많이 있다. 일본의 마츠시로 대본영처럼 한반도내에 일인 몇 만명이 들어가서 최후항전을 수행하기 위해 원폭에도 견뎌내는 정도의 강도로 지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중국 산동반도까지 해저로 연결하려고 시도했다는 설까지 전해지고 있다. 팽성 평택지역에 이곳에서 징용이나 보국대로 동원돼서 노역을 했던 어른들이 계실텐데 그분들의 증언을 구할 수 없어서 아쉬울 뿐이다.
* 생태
송화리 솔숲, 정확히 말하자면 옛날 45번 국도가 양쪽으로 갈라놓은 남산리 일부 솔숲과 도로건너 서쪽의 팽성중고로 넘어 강당골부터 남으로 송당까지의 송화리 일부 숲을 말한다. 1914년 송당과 개화리가 합쳐 송화리가 되었다고 한다. 소나무가 많아서 송화리라고 했다고 해서 그른 것은 아닐 것이다. 일본제국군대가 비행장을 만들면서 소나무를 베었으면 베었지 심었을 리도 없다. 일본제국주의는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고 엄청난 양의 소나무를 베어 버렸다고 하지 않던가. 한반도의 소나무가 처음 학살당한 것이 식민시대다. 이후 전쟁으로 망가지기도 했지만, 송당이란 이름도 소나무로 둘러싸인 집쯤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하여간 소나무가 많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김해규선생에 의하면 이곳 일인농장의 생산물에 리기다소나무가 포함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땅에 조선솔을 베어내고 그 자리엔 리기다소나무 조림을 했다. 그런데 송화리 솔숲엔 리기다 소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이 숲도 보전을 하지 않으면 천이를 할 수 밖에 없다. 지금도 아까시나무나 참나무류들이 솔숲을 넘보는 것으로 보인다.
*소나무: 애국가에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하고 노래하는 것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강인한 의지를 말하는 것으로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나무로서 온 국민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솔나무· 송목· 적송· 육송 등으로 부르는데 적송(japanies red pine)은 일본인들이 사용했다. 높고 굵게 크는 나무로서 우리나라의 나무 가운데 은행나무 다음으로 큰 몸집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를 물어본 결과 절반에 가까운 46퍼센트가 ‘소나무’라고했듯이 소나무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무다.
우리나라에 자라는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 종류로는 육송, 반송, 해송, 리기다소나무 등이 있으며 고급수종으로 금강송이 있다.
해송은 흔히 곰솔이라고도 부르며, 육송은 주로 내륙지방에서 자라며 상단부가 붉은 색을 띤다. 소나무의 제왕 금강송은 이 같은 육송에 속한다.
소나무 구분 방법
잎으로 구분 방법
두갈래잎 : 적송, 해송, 반송 등
세갈래잎 : 백송, 리키다소나무 등
다섯갈래잎 : 오엽송, 잦나무
껍질로 구분 방법
육송 : 붉은 표피을 가진다.
해송 : 표피가 검다. (곰솔 )
백송 : 줄기가 흰색이다. (중국에 많고 예산에 가면 있다)
반송 : 키가 작고 지경부에 가지가 갈라짐 조경수.
금송 : 잎이 두틈하고 더운지방에 산다.
소나무는 100여종이 있는데 주로 중국 동북지방, 우리나라, 일본, 산둥반도에서 자란다.
리기다소나무 : 소나무 잎은 2개인데 반해 잎이 3개다. 북아메리카 원산으로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 1907년부터 해방 후까지 우리나라 민둥산 조림용으로 많이 심은 수종이며 수피는 붉은 빛을 띤 갈색이다.
금강송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귀족 소나무, 명품 국민소나무, 소나무 중에 제왕일 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지녔다. 금강송은 이름이 다양하다. 백두산 주변은 미인송이라 한다.
흔히 줄기가 곧고 붉어서 적송이라 하고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금강산에서 강원도, 경북 울진과 영덕, 청송일대에서 자라 금강산소나무를 줄여 금강송이라고도 하며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목질이 금강석처럼 단단하다해 금강송(金剛松)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도 있다.
소나무는 해송과 자연잡종을 잘 만든다. 그 잡종송을 간흑송(間黑松)이라 하는데 대체로 줄기가 곧고 빠르게 자라며 형질이 우량하다. 소나무와 해송의 분포경계, 즉 해안 가까운 곳에 이러한 잡종송이 흔히 발견된다.
해안을 따라 분포해 있는 해송의 유전자는 이러한 잡종과정을 통해서 소나무가 자라는 내륙 쪽으로 전파되어 가는 유전자확산(遺傳子擴散) 현상을 나타낸다.
소나무는 좋지 못한 환경에서는 낙엽활엽수종과의 생존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으나, 지력이 좋고 토양습도가 알맞은 곳에서는 그 자리를 낙엽활엽수종에게 양보하고 만다.
소나무숲의 천이과정을 보면 지금부터 약1만년 전에는 참나무류가 성하였고, 그 뒤 소나무속이 나타나서 참나무속· 서나무속· 느릅나무속· 호도나무속 등과 함께 오래 살아왔고, 약 1400년 전부터 소나무가 갑자기 불어났다고 생각된다.
현재 소나무 생육지는 생태계의 조화가 크게 깨지면서 솔나방의 유충, 솔잎혹파리·소나무좀 및 대기의 오염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
간솔가지 및 소나무뿌리를 원료로 건류를 거쳐 송근유(松根油)·목초액·송근타르 등을 얻는데, 일제강점기 말엽 일제는 군수자원을 얻고자 우리나라 사람들을 혹사하면서 송근 채취와 건류에 혈안이 된 적이 있다. 그 흔적이 소나무숲 여기저기에 나타난다.
소나무 숲에는 각종 버섯들이 발생하는데 그중 송이가 으뜸이다. 봉령이란 땅속 버섯도있다.
강당산 솔숲을 위협하는 나무로는 아카시나무와 참나무류가 있다.
강당산을 위협하는 초종으로는 환삼덩굴(깔깔이풀)이 있다. 한해살이풀이며 귀화식물로 추정되는 종으로, 보리가 영입될 적에 들어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유입된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귀화식물이 아닌 토착식물로 보기도 한다. 번식력이 매우 왕성해서 수가 빠르게 불어나며, 칡마냥 덩굴을 주변 식물에게 뻗어가며 그 식물 위에 '지붕'을 만들어 그 식물들을 간접적으로 죽게 한다. 생태계교란 식물로 지정되어있다. 홉과에 속하므로 맥주원료로 사용가능한지 연구중이며 어린잎은 여러 가지 식재료에 이용된다.
환삼덩굴에 집을 짓는곤충은 네발나비유츙이다. 장마이후에 많이 나타나는 보통 호랑나비라고하는 나비의 유충이다.
*시민활동
송화리 솔숲을 거닐다보면 솔숲사이 농지에 콘크리트 구조물을 보게 된다. 언제 만들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도로를 내기위한 시도로 보인다. 안정리에서 45번 국도까지 일직선으로 도로를 내기위해서 계획을 하고 이미 콘크리트로 도로를 연결하다가 솔숲에서 끊어지고 다시 안쪽의 논에 콘크리트벽을 쳐 놓았다. 이는 솔숲을 반환받지 못했기에 공사가 중단된 것으로 보이는데 솔숲을 반환 받으면 곧 공사가 재개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개발업자들이 이 솔숲을 반환받으면 개발 하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도 떠돌고 있다.
송화리 솔숲은 보존되어야 한다. 일본제국주의의 탐욕을 들여다보는 중요 역사 자료다. 또한 아직도 반환받지 못한 평택의 미군기지에 대한 우리들의 성찰을 위해서라도 보전 되어야 하는 곳이다. 이곳은 평택 사람들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항상 들여다보며 우리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 물러섯고 또 싸웠고 타협했는지를 우리가 성찰해야 하고 후대가 평가하도록 보전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보전하지 못한 솔숲을 미군에 의해 지켜졌다는 사실이 슬프다. 하지만 평택에 이만한 넓이의 조선솔이 보전된 장소도 드물다. 시민들에게 돌려주어야할 공간이다.
*질마재
충청수영로(보령)길의 일부이다. 안정리 질마재 입구에서부터 객사리를 거쳐 평택 칠원으로 향했을 것이다. 안정리는 12개의 마을로 나눠져 있다. 12개 마을에서 토박이 마을은 안정 1리 안현(鞍峴) 뿐이다. 안현 말고도 부대 안에 서정자라는 마을과 일곱집메가 있었지만 일제 말과 해방 후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강제 이주당하였다. 안현(鞍峴)의 우리말 땅이름은 길마재다. 길마재는 서정주의 시집에서처럼 질마재로 불린다. 길마란 짐을 싣기 위해 소나 말 등에 얻는 도구를 말한다. 그러므로 길마재란 길마처럼 생긴 고개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안현(鞍峴)은 길마재의 한자표기이다. 안정리라는 지명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안현의 안(鞍)자와 서정자의 정(亭)자를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다.
안정리는 주민들 대부분이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다. 주변 농가에서 복숭아나 고구마들을 여기에 와서 팔아 생계를 이었다.
질마재 마을은 약40호 정도 된다. 아직도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아서 골목에는 군데군데 흙 뭍은 농기구들이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있다. 노인들에 의하면 예전에는 마을이 보유한 경작지도 넓은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 전후만 해도 농민들이 땅의 주인이 아니어서 살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었다.
이 마을은 옛부터 서정자라는 누정으로 유명했던 마을이다. 예컨대 팽성지(18세기 초)에 따르면 “본래 이 마을에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쉬어갔던 서정자라는 누정(樓亭)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라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 이전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는 청북면 삼계리 옹포 (당항성)인데 경주에서 이곳까지 가는 최단거리는 하늘재를 넘어 수안보. 안성. 직산에서 서정자 마을을 지나 대추리 곤지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같은 기록대로라면 서정자 마을의 역사는 1천년을 훨씬 상회한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도 일본군이나 미군과 같은 외국군의 주둔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일곱집매의 강제이주는 6.25 전쟁 후에 이뤄졌다. 전쟁 중에 미군이 진주하는 과정에서 부대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서정자 사람들은 10여 년 만에 또 다시 대책 없는 보따리를 싸야만 했다.
*캠프험프리스 기지
1919년 일본 육군이 활주로를 만들고 해방때 까지 사용했다.
1951년 2월에 미군은 한국 정부로부터 이곳을 공여받아 미국 해병 항공대와 제614전술통제단이 주둔하였고, 'K-6'로 불렸다. 1961년에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순직한 제6수송중대의 벤저민 K. 험프리스 준위의 이름을 따서 1962년부터 '캠프 험프리스'라고 하였다.
안정리는 외국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생각할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한국 전쟁을 계기로 한반도 안보의 절대적 존재가 된 미군은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그랬던 것처럼 전시작전권 뿐 아니라 우리 영토 어디든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승만 정권은 그것만이 은혜에 대한 보답이며 우리의 살길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미군 주둔을 위해 자기나라의 국민들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밖으로 내몰았다. 미군기지는 토착민들에게는 재앙이었지만 전쟁 피난민이나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희망의 땅이었다. 이들은 미군기지를 배경으로 지식 있는 사람들은 통역관이나 사무관으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노무자나 용역회사의 잡역부로 일자리를 얻었다.
부대주변에는 미군을 상대로 장사하고 술을 파는 사람들과, 몸을 파는 양색시들이 몰려들었다. 양색시 또는 양공주로 불렸던 여자들 1970년대 카터대통령의 미군철수로 파주, 동두천, 연천 등에 있던 미군부대가 감축되면서 그 지역 양색시들까지 몰려들어 한 때 안정리에는 1700명이 넘는 양색시들이 명줄을 대고 있었다.
급격한 인구증가는 심한 주택난을 가져왔다. 방세가 쌀 한 말에 180원 할 때 무려 800원에 달했는데도 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나 토착민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집을 지어 방을 놓았다. 하지만 급하게 지은 주택들은 모양만 집이고 방이었지 미로 사이로 다닥다닥 지은 벌집이었다. 양색시들은 떠나고 이제는 많이 정비가 되었다.
주한미군 이전
2004년에 용산기지이전협정(YRP)과 연합토지관리계획개정협정(LPP)가 대한민국과 미국 사이에 체결되었고, 2006년에 주한미군기지이전사업단이 창설되었다.
한·미 양국은 서울의 용산 기지를 비롯해 대한민국 전역에 분포하는 미군 부대의 대부분을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캠프 험프리스는 기존 부지에서 서북쪽으로 10 km²를 확장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팽성읍 대추리 전역과 도두리의 4분의 3(대부분 농지)이 기지에 편입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주민 거주지가 편입된 대추리에서는 2006년에 주민들과 기지확장 반대 단체를 중심으로 한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
캠프 험프리스의 확장 건설에는 107억 달러(약 12조 원)가 들었으며, 이 중 대한민국 정부가 91.6%(미국 정부의 11배)인 98억 달러(약 11조 원)를 부담했다. 2017년 7월에 미국 제8군사령부가 이전하였으며, 2018년 6월 29일에 용산에 위치한 주한미군사령부가 73년 만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전 대상 미군 부대의 90% 이상이 2018년 말까지 이전했으며, 기지 이전 사업은 2021년 여름에 완료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