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비단길 중 마안산과 구진개 마을 안내 매뉴얼
*비단길이란?
Silk Road는 중국 시안에서 터키 이스탄불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기원전 30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한반도에 이르는 길은 베이징을 거쳐 육상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신라는 서쪽의 백제, 북쪽의 고구려에 막혀 섬과 같은 지경이었다. 이것을 극복하고자 한강유역을 차지하기위한 노력을 했다. 이것의 시초가 계립령로(충주하늘재)의 개척이다.
계립령은 신라에 의해 156년에 개척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신라는 이 길을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도로의 사용목적으로 개통했다. 이것은 교통로에 대한 국가적 인식이 반영된 최초의 기록이다. 이를 통해 신라는 서기 2세기경부터 계립령로를 이용해 중국과 교류를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계립령로는 북쪽으로 가는 길과 당성, 당항성으로 가는길로 나뉘어진다. 당성(화성)과 당항성(평택)은 100여리 거리가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같은 곳으로 인식했을 수 있다. 계립령로는 경주~영천에서 서쪽에 위치한 대구방향으로 서진한 후 대구에서 선산~상주~문경~계립령~충주~수안보~안성~직산~둔포~곤지나루~당항성의 경로로 추정한다.
*혜초
月夜瞻鄕路(월야첨향로) 달 밝은 밤에 고향 길 바라보노라면
浮雲颯颯歸(부운삽삽귀) 너울너울 뜬 구름만 고향 길 가네.
緘書參去編(함서참거편) 그 구름편에 편지 봉해 부치려하니
風急不聽廻(풍급불청회) 빠른 바람에 구름을 잡을 길 없네.
我國天岸北(아국천안북)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이구요
他邦地角西(타향지각서) 내가 있는 남의 땅은 서남쪽이라오.
日南無有雁(일남무유안) 햇볕 따뜻한 이곳엔 기러기도 오지 않으니
誰爲向林飛(수위향림비) 그 누가 내 소식을 계림(신라)으로 전해주리.
혜초대사의 망향가 旅愁이다. 왕오천축국전에 실려있다.
혜초는 7세기 무렵 신라에서 태어나 나이 스무 살을 전후하여 당 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는 다시 배편을 얻어 남해를 지나 인도에 당도하였다. 그 당시 당 나라의 불교는 대단히 융성하여 덕망과 지식이 높은 승려가 많아 신라의 유학승은 대부분 당 나라에 머물렀다.
그는 험한 길을 더듬어 전후 약 다섯 해에 걸쳐 인도 전역을 답파(踏破)하였다.
혜초야말로 新羅(신라)는 물론, 여러 나라 구법승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혜초의 여행기는 북인도의 쿠쉬나가라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불교의 교조인 샤아캬무니가 열반한 땅이다.
혜초는 다시 이곳에서 남하하여 간지스 강변에 자리잡은 베나레스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외도(外道)가 성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므리가다아바(鹿野苑)를 찾았다. 샤아캬무니가 처음으로 다섯 사람의 제자를 만나 설법한 곳이며, 초전법륜(初轉法輪)의 땅으로 이름 놓은 곳이다. 마침내 샤아캬무니가 성도한 땅인 붓다가 야아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보리사(菩提寺)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곳을 떠나 혜초는 남인도의 길에 올랐다. 그는 도중에서 인도에 많은 석굴의 하나를 찾아 3층을 이루는 큰 규모에 놀라기도 하고, 혹은 그가 통과한 여러 나라의 특이한 풍습과 언어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 후 혜초는 다시 북상하여 북인도를 거쳐 귀국하였다. 혜초는 마침내 727년 당나라의 서쪽 끝에 있는 안서 도호부(安西都護府)에 당도하였다.
그의 여행기는 이곳 동쪽인 언기국에서 끝나고 있다.
이 기행기를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1910년 중국 서쪽 ,돈황(敦煌)의 석실 속에서 불란서의 동양 학자 포올·펠리오가 찾아내고 중국인이 책으로 폈다. 1907년 일본인에의해 신라 혜초가 쓴 글임을 밝혀냈다..
이 발견으로 말미암아 혜초의 생애가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리하여 짧은 기록이나마 8세기 인도의 역사와 풍습 등을 오늘에 전하여 준 여행기로서 귀중할 뿐 아니라, 신라의 도축승(渡竺僧)으로서 그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다.
그는 인도에서 돌아와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되어 불경 번역에 종사하였다. 그가 중국불교, 특히 밀교(密敎)에서 차지한 자리는 그의 인도 여행과 더불어 신라 승려의 명예를 빛나게 하였다. 혜초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다시 신라에 돌아오지는 못하였던 듯하다.
그는 여든 살이 넘는 고령에 이르러 중국 오대산에 들어가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혜초의 참된 면목은 그의 인도 여행뿐 아니라, 긴 생애에 걸친 불도에의 정진과 구법의 노력과 불교 전도를 위한 공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가 중국으로 건너갔을 때 걸어간 길을 추적해 평택호변에 혜초대사 기념비를 평택시가 새겻다.
*마안산[馬鞍山]
이 산은 광덕산(고등산)과 무네미고개로 연결되는 산이다. 무네미고개는 신왕리와 대안리를 연결하는 고갯길이며 이 산의 등산시점이다. 마안산은 대동여지도에 나오지 않는다. 산경표에 따른 지맥중 서봉지맥을 따라 용성리 삼정대산을 거쳐 직산마을과 고등산으로 연결되는 갈래이다. 마안산이라 함은 산의 모양이 말 안장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하나 확실치 않다. 오히려 지역 유지들이 마안산이라 했을 것이다. 사대주의를 몸에 품고 살았던 사람들이 당나라 시선인 이백이 숨을 거둔 곳이 마안산이기에 이곳을 그리 명하지 않았나십다. 전국에 마안산이 여럿 있다. 오히려 우리말로 멀뫼 였을 수 있다. 광덕현이 수원도호부의 속현이다. 읍치에서 당포진(신왕포구)이 90리 떨어진 곳이니 멀리 있기는 하다. 멀리 있는 산 이란 뜻의 멀뫼는- 멀미산-말미산을 한자로 바꾸니 마안산이 된다.
등산로에 올라 정상(112m)을 거쳐 구진개(대안4리)로 내려간다.
*생태
마안산의 주 수종은 참나무류와 리기다 소나무류이다. 참나무는 6종이 있는데 그중 3~4종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잡목 숲인데 물가에는 아까시 나무도 많이 보인다.
참나무속 참나무 무리에는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두 종, 졸참나무로 대표되는 넓은 타원형의 비교적 큰 잎을 가진 졸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및 떡갈나무 네 종을 합쳐 모두 여섯 종을 ‘참나무’라고 말합니다.
- 상수리나무는 잎이 좁고 긴 타원형이며, 가장자리의 톱니 끝에 갈색의 짧은 침이 있고 잎 뒷면이 녹색입니다.
- 굴참나무는 상수리나무와 잎 모양은 거의 같으나 잎 뒷면이 희끗희끗한 회백색이고 코르크가 두껍게 발달해 있습니다.
- 졸참나무는 잎이 참나무 종류 중 가장 작으며, 가장자리에 안으로 휘는 갈고리 모양의 톱니가 있습니다.
- 갈참나무는 잎이 크며 잎자루가 있고, 가장자리가 물결모양이거나 약간 뾰족합니다.
- 신갈나무와 떡갈나무는 잎이 크고 잎자루가 거의 없으며, 잎의 밑 모양이 사람의 귓밥처럼 생겼습니다.
- 떡갈나무는 잎이 특히 크고 두꺼우며 잎 뒷면에 갈색 털이 있고, 신갈나무는 잎에 갈색 털이 없고 두께가 얇습니다.
우리지역에 탄현면이 있었습니다. 송탄의 숯고개입니다. 탄현면은 나중에 일탄과 이탄으로 나누어지는데 일탄은 송탄시에 이탄은 서탄면에 속합니다. 서탄면의 탄이 여기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평택시가 숯고개의 전통을 살린다는 취지로 흰티고개에 가마를 세우고 주변에 참나무를 심었습니다. 참나무가 고급숯재료이니까요. 그런데 탄현면의 숯은 참나무가 아니라 소나무숯이었답니다. 조선시대에는 능의 전례제사에 쓰기 위해서 향탄산(香炭山)을 지정하고 그곳 주민으로 하여금 숯을 굽게 해서 상납시켰다.(사도세자릉) 양가에도 일반적으로 흑탄(송)을 사용하였다고 경국대전에 기록 되어있습니다.
옛 말에 "도토리나무는 들판을 내다보고 열매를 맺는다"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가뭄 때문에 흉년이 들었을 때 참나무에서 열린 많은 도토리를 곡식 대신 먹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한국에는 흉년을 대비한 구황식물로 첫번째는 도토리를, 그 다음으로 소나무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속담에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정도가 고만고만한 사람끼리 서로 낫다고 다투고 있는 것을 말한다. 또 '개밥에 도토리'는 어떤 무리에도 끼지 못하고 혼자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개는 도토리를 먹지 못하므로 밥 속에 들어가도 끝까지 남기기 때문에 생긴 속담이다.
도토리묵은 도토리를 이용한 고유 음식물 가운데 하나로 널리 애용되고 있으며 이 밖에도 도토리로 도토리 수제비나 도토리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그러나 도토리에는 탄닌 성분도 많아 날것은 써서 먹을 수가 없는데, 이 성분을 없애기 위해서는 물에 며칠 담가 두어야 한다. 최근에는 도토리에서 빼낸 아콘산(acornic acid)으로 환경오염의 주범인 중금속을 제거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어 수질오염 해결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이는데, 도토리 1㎏이 약 3.4t의 폐수를 처리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안4리 역사
해방 전후만 해도 아산만 어장의 대표적인 어항일 뿐 아니라 농업과 더불어 어업이 발달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갈매기 나루’라는 뜻의 ‘구진개’이다.
마을의 대성(大姓)은 청주 한씨다. 호(戶) 수에서도 47호나 되고,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도 ‘청주 한씨 세거비’다.
구진개 청주 한씨는 3백 년의 역사를 가졋다. 성남 율동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사정이 생겨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형님은 포승면 내기리에 정착하였고, 동생은 아산 쪽으로 가려다가 안성천에 막혀 구진개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어업인구가 줄어든 것은 간척사업이 진행된 일제강점기부터다. 기산리 노인들도 4월 어장철이 되면 구진개 나루에는 하얀 돛배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증언하였다.
어부들이 잡는 고기는 숭어, 강다리, 병어, 깡치(거물치) 같은 것들이었다. 특히 숭어가 많이 잡히는 이른 봄이면 강화도, 옹진군 일대의 어선들이 새카맣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하루만 조업해도 만선을 이룰 만큼 고기를 많이 잡았다. 하지만 교통이 불편한데다 수요가 적어서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이 없었다. 그래서 타지에서 온 배들은 고기를 손질하여 말리거나 염장을 하였고, 동네 사람들은 큰말로 담아서 팔았다가 나중에 겉보리로 받았다.
하지만 겉보리도 안 주면 그만이어서 어민들의 삶은 항상 팍팍하였다. 팍팍한 삶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장마철이었다. 장마철에는 잡은 고기를 제 때 팔수도 없었고, 말리려고 해도 잘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공회 구진교회
성당은 대한 성공회의 전통에 따라 전통 한옥으로 지었고 교회건물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아서 여느 집들과 구별되지 않았다.
성공회는 영국 국교회의 한국식 이름이다. 평택지방에 성공회가 전파된 것은 1906년 성공회 팽성성당이 설립되면서다. 팽성성당은 설립 후 복음전파 뿐 아니라 교육사업에 많은 공헌을 하며 복음전파의 초석을 놓았다. 1908년에는 안중읍 덕우리에 성공회 덕우리교회가 설립되었다.
구진개에 성공회 교회가 설립된 것은 1930년대 초였다. 이곳에 교회를 설립한 것은 아무래도 구진나루의 어업발달과 관련이 있을 것이나 그보다는 병인박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서양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구진개로 들어와 조선에 발을 딛고 수로와 논길을 따라서 갔다는 선교사들의 편지내용이 있고, 오매트르 라는 신부가 안전하게 머물다 나중에 잡혀 해미읍성에서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용인 수지 손골 성지에 성 오메트르 신부 순교지가 있다. 손골은 1863년 6월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가 그해 7월부터 15개월간 사목했던 곳이다. 오메트르 신부의 마지막 은신처 ‘샘골’이 구진개 마을이라고한다.(카돌릭 평화신문) 교회의 설립은 마을 사람들에게도 경이롭고 기대되는 일이어서 주민들의 우호적인 반응을 얻었다. 주민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1936년 성당을 건축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성당 건축은 일반 주택과는 달리 마을 공동체의 힘을 빌리기가 어려운데, 구진성당은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건축했다.
*당제사와 뱃고사가 공존하는 마을
대안리는 민중들의 문화유산이 풍부한 마을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농업지대와 어업지대가 상충하기 때문일 것이다.
구진개는 마을의 특성 때문에 당제사와 뱃고사를 함께 지낸다. 당제사는 마을의 공동제의로 음력 10월 3일에 지냈다. 제주는 정결한 사람으로 뽑았으며 제물은 다른 마을처럼 돈을 걷어 사용했고, 농업지대의 특성을 살려 소머리로 제(祭)를 올렸다. 뱃고사는 섣달그믐에 어민들만 따로 지냈다. 엄밀히 말하면 용신제와 뱃고사를 함께 지낸 것인데, 용신제는 마안산 꼭대기에 있던 팽나무 아래에서 올렸고 뱃고사는 배 위에서 지냈다.
보름사리 때마다 물막이를 해서 농사를 지었다는 보름틀과 도요새가 날아들었다는 도요틀을 지나면 구진나루 옛터다. 양어장이 그 터라고 한다.
*정자와 팔경
*연자방아
연자방아는 말과 소의 힘으로 끌어 돌리게 하여 곡식을 찧는 큰 매를 말하는데, ‘연자매’ 혹은 ‘연자마’라고도 일컫는다. 연자매를 설치해 두고 곡식을 찧는 방앗간은 ‘연자간’, ‘연잣간’, ‘연자맷간’ 등으로 부른다. 방아기계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자연력[물], 축력[마소], 인력 등으로 곡식을 찧었다. 동네 곳곳에는 물레방아나 연자방아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정에서도 사람의 힘으로 방아를 찧던 디딜방아가 있었다. 소량의 것은 절구통을 이용하여 절굿공이로 찧었다.
이마당을 세불내어 어유해야 어유해야
연자방아 꿍꿍찍어 어유해야 어유해야
제주맷돌 들들갈아 어유해야 어유해야 어유해야 해야
둥글둥글 개떡비벼 어유해야 어유해야
수영진으로 활쏘러가세 어유해야 어유해야
뒷집 맛동이 글방에서 어유해야 어유해야 어유해야 해야
공자맹자 공부하여 어유해야 어유해야
왈성급제 장원하여 어유해야 어유해야
옥당으로 들어가서 어유해야 어유해야 어유해야 해야
나라님께 충성이요 어유해야 어유해야
일낙서산에 해떨어지니 어유해야 어유해야 어유해야 해야
어서어서 이마당내어 어유해야 어유해야
서말 품삯 받아다가 어유해야 어유해야
샛거리 말갓 가아주니 어유해야 어유해야 어유해야 해야
말 것밖에 남지 않았네 어유해야 어유해야
(하의도 연자메 소리)
배고픔이 묻어나는 연자방아소리는 대개 보리껍질을 벗기는데 많이 사용한 연자방아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릿고개라는 농촌에서 힘든 시기를 넘긴 후 사용을 하기 때문 애환이 묻어있다. 이 마을의 연자방아는 실전했던 것을 찻아내 2005년 마을사람들이 힘을 모아 다시 세웠다고 한다.
*집성촌에 대하여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혼인, 재산의 자녀 균분 상속, 제사의 자녀 윤회봉사(輪廻奉祀)를 특징으로 하는 조선 전기의 가족 및 상속 제도는 서로 인과 관계를 가지면서 성관(姓貫) 의식과 족보 편찬에 영향을 미쳤다. 남귀여가혼은 결과적으로 딸(사위)과 그 소생(외손)을 아들 또는 친손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부처·부모·자녀·내외손을 각기 대등한 위치로 간주하여 쌍계적 친족관계를 낳게 했으며, 그러한 혼속과 가족제도는 재산의 자녀 균분제를 낳았다. 자녀 균분제는 부모의 제사를 자녀들이 윤봉하는 관행을 낳았고, 이러한 관행은 자녀와 내외손들을 한 마을에 공거하게 하는 이성잡거(異姓雜居)의 거주상을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전기의 관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점차 바뀌었다. 즉 남귀여가의 혼인은 여성의 출가로, 재산의 자녀 균분 상속은 자녀 차등 상속으로, 제사의 자녀 윤회는 중자윤회(衆子輪廻) 내지 장자전행(長子專行)으로 바뀌면서 점차 부계 친족이 중심이 되는 동성의 집성촌 마을이 생겨나고 그러한 관행은 조선 말기까지 성행하였다. 일제시기에 실시된 관습 조사에 따르면 집성촌은 일제강점기까지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립, 19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시대의 신분 질서가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되었고, 또한 1960년대 경제개발 추진 과정에서 농촌 인구의 도시로의 유출이 꾸준히 진행되면서 집성촌은 점차 와해되어 갔다.
평택에는 이곳 구진개 청주한씨 집성촌과 포승면 내기리 은곡의 함평 이씨 집성촌, 산하리 은골의 봉화정씨 집성촌. 덕우2리 수촌의 고령신씨 집성촌, 마산리 오룡동 단양우씨 집성촌, 수월암리 도도리 곡산강씨 집성촌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