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걷기여행 - 고지도를 들고 개천을 걷다! (9월7일)

작성자광우|작성시간24.09.03|조회수187 목록 댓글 0

고지도(1760 京都五部圖와 1892 首善全圖 )를 들고 개천(청계천)을 걷다.

 

◎ 일시 : 2024년 9월 7일 토요일 오전 10시~오후4시

◎ 집결 : 숭례문(남대문)광장 오전10시,

◎ 해산 : 신설동역 오후 4시

◎ 코스 : 7.5km,   숭례문 - 남대문시장 - 한국은행 - 원구단 –시청- 소라탑 1.8km - 조계사-우정총국-인사동길  1.8km - 탑골공원 –전태일 기념관- 이벽집터- 청계천- 배오개다리 – 버들다리- 전태일동상 1.9km -버들다리 –광통교- 도깨비시장- 청계천 8가 – 서울풍물시장- 신설동역 2.0km   

 

◆ 청계천 걷기여행 해설자료

 

고지도(1760 京都五部圖와 1892 首善全圖 )를 들고 개천(청계천)을 걷다.

 

숭례문 10시 집결-남대문 시장 ,한국은행 ,원구단,소라탑까지 1.5km 소라탑부터 아래 그림과 같이 진행,

전태일 기념관 이벽집터 수표교 관수교, 세운상가, 배오개다리, 새벽다리, 마전교, 전태일 다리, 오간수문..맑은내 다리. 황학동 도깨비시장, 동묘 도깨비시장 다산교, 영도. 황학. 비우당교. 청계천 박물관.

수선전도 개천부분 수선총도(首善總圖)

장통교(長通橋)수표교(水漂橋) 하랑교(河浪橋) 효경교(孝經橋) 마전교(馬廛橋) 오간수문(五間水門)

1892년경의 지도로 아래 해동전도 보다 140년 정도 뒤에 그려졌다. 따라서 개천의 다리 이름이 상이하게 나타난다.

 

해동지도(1760년)

청계천 다리는 종각에서부터 대광통교(大廣通橋)장추교(長楸橋)수표교(水標橋)하즉위교(河卽尉僑) 맹교(盲橋)마전교(馬廛橋)훈련교(訓鍊橋)오간수문(五間水門)

 

1,대광통교

'광통교(廣通橋)'는 '광통방(廣通坊)의 다리(橋)'란 뜻이다.

이외에 줄임말인 '광교(廣橋)'를 비롯하여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광충교(廣沖橋)'란 이름도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주로 '광교'로 많이 불렀다.

이중 대광통교와 북광통교의 경우, 청계천의 지류인 창동천에 놓인 같은 이름의 다리와 비교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청계천은 창동천보다 북쪽에 있었고, 다리 역시 창동천의 광통교보다 규모가 컸기에 소광통교, 대광통교라 불린 것이다.

조선 태조 때 창건했으며 원래는 흙으로 만든 다리였다. 이후 1410년(태종 10년)에 홍수로 무너지자 돌다리로 고쳐지었다. 이 때 다리 건설에 사용한 돌들은 태종의 계모 신덕왕후가 묻혔던 정릉에서 가져왔다.# 이는 신덕왕후에게 원한을 가졌던 태종의 복수의 일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정릉에 쓰인 돌들은 무사하여 현대까지 여말선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한성의 큰 길인 육조거리(세종로)와 운종가(종로), 그리고 숭례문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광통교 일대는 사람이 많이 붐비는 한성의 최대 번화가가 되었다. 다리 주변에 여러 수공업 작업장들이 들어섰고 큰 재래시장들도 생겨났다. 심지어는 거지들도 이 근처에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후대 임금들도 광통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단 왕이 숭례문으로 나갈 때 반드시 이용하던 다리였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다리인 만큼 임금 자신이 백성들을 생각한다는 행동을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격쟁도 많이 열렸고,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나눠주는 곳이 되기도 했다.

1760년(영조 36년) 청계천을 준설할 때 영조가 직접 나와 이곳에서 공사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1762년(영조 38년)에 다리의 기초 부분을 고쳐짓고 난간을 수리했다.

이후 큰 변화없이 있다가 1899년(광무 3년) 종로와 숭례문을 연결하는 전차노선이 생기면서 다리 동편에 전차선로가 깔렸다. 1910년 8월에 이 노선이 복선화되면서, 다리는 1m 정도의 콘크리트 선로 밑에 묻혔다.

2.장추교

‘장교(長橋)’를 비롯하여 ‘장창교(長倉橋)’, ‘장찻골다리’, ‘장추교(長楸橋)’, ‘장추골다리’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장창교와 장찻골다리는 장통교 주변에 재래시장의 창고들이 길게 늘어서 붙은 이름이다. 장추교는 《경도오부북한산성부도》에, 장추골다리는 《수선전도》에 나오는 명칭으로 유래는 알 수 없다. 일반 백성들은 주로 장교라고 많이 불렀다.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長橋洞)의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3.수표교(水標橋)

수표교는 만들어질 당시는 그 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 불리었다. 세종 23년(1441년) 다리 앞에 개천(開川, 청계천)에 흐르는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 보물 제838호)를 세웠다.

다리 아래에 ‘在長通橋東橋西中央立石標刻尺寸之數 凡雨水以知深淺(장통교 동쪽에 있고, 다리 서쪽 중앙에 석표를 세우고, 척촌을 새겨서 무릇 빗물의 깊고 얕은 것을 알았다)’고 기록하였다. 그 후 영조 36년(1760년)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庚(경)·辰(진)·地(지)·平(평)’이라는 글씨를 새겨 물높이를 4단계로 측정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라 부르게 되었다.

장충단공원의 수표교

4.맹교(盲橋)

효경교(孝經橋)는 종로대로의 이현(梨峴)에서 남쪽 낙선방(樂善坊)으로 가는 길이 지나는 청계천 위에 설치되었던 다리이다. 종묘의 정남 방향에 자리했으며, 종로에서 남산으로 가는 도로상에 있었다. 청계천의 하량교(河良橋)와 마전교(馬廛橋) 사이에 위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영풍교(永豊橋)라고도 하였다. 다리 인근에 장님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소경다리, 맹교(盲橋), 새경다리, 효경다리라고도 불렀다.

1796년(정조 20) 8월에 포도청의 좌포장(左捕將)신응주(申應周)는 동생 신홍주(申鴻周)가 효경교를 지나다가 낙상하였다는 이유로 심야에 사람들을 모아 그 석교를 헐어 버렸다. 이에 비변사가 신응주를 무겁게 처벌하도록 요청하여, 신응주를 정배시켰으며 야간의 통행금지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훈련대장 이한풍(李漢豊)도 파직시켰다(『정조실록』 20년 8월 7일).

 

5.마전교(馬廛橋)

‘마전교(馬廛橋)’ 뜻은 ‘마전(馬廛) 근처에 있는 다리(橋)’뜻이다. 마전은 ‘말(馬)을 파는 가게(廛)’를 의미하는데, 말 뿐 아니라 소 및 마소를 부리는 기구 등을 거래했다. ‘馬前橋’로 쓰는 경우도 있는데,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마전 앞(前)의 다리’란 뜻으로 사용했단 설이고, 다른 하나는 ‘전(廛)’과 발음이 같은 ‘전(前)’과 혼용했다는 설이다.

 

조선 태종 때의 이름은 창선방(彰善坊)에 있다하여 ‘창선방교(彰善坊橋)’였으며 성종 시기에는 ‘태평교(太平橋)’로 불렸다. 그러다가 영조 시기에 이 근처에 마전이 생기면서 ‘마전교(馬廛橋)’란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순조 때에도 태평교와 마전교를 혼용한 것을 보아, 태평교 이름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은 듯 하다.# 조선시대 한성을 그린 그림 〈수선전도〉에는 ‘마전다리’, 〈도성도〉에는 ‘馬井橋(마정교)’, 대한제국 시기에 그린 〈경성부근지도〉와 〈한양경성도〉에는 ‘馬軍生橋(마군생교)’로 적혀있다. 그리고 마소 매매를 주로 낮(午)에 했다하여 ‘오교(午橋)’, ‘오굣다리’로도 불렸다.

마전교는 원래 수표교 옛 이름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 마전은 수표교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1441년(세종 23년)에 청계천의 수위 측정을 위한 기둥인 수표(水標)를 다리 서쪽에 세운 이후부터 구 마전교는 ‘수표교(水標橋)’로 불렸다.

6.훈련교(訓鍊院橋) 쌍이문동천에 놓였던 다리이다. 이곳에 조선시대 무과시험과 병사의 무술훈련을 관장하던 훈련원(訓練院)이 있었던 데서 다리의 명칭이 유래하였다.

7.오간수문(五間水門)

한양도성 성곽의 일부로, 청계천이 도성을 빠져나가게 만든 수문(水門)이었다. 5개의 무지개 모양으로 된 홍예문이었으며 이름도 본래는 ‘오간수문(五間水門)’이었다. 사대문안의 모든[2] 물줄기는 청계천을 통해 이 문으로 빠져나갔다.

1396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을 지을 때 창건한 듯 하나 정확한 건 모른다. 처음에는 수문이 3개였으나 1421년(세종 3년)에 장마로 개천이 범람하자 1년 뒤에 추가로 2개를 더 만들어 5개가 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에 수리했다.#[3] 1760년(영조 36년)에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다시 보수했다.

1907년(융희 원년) 일제가 청계천 물줄기가 원활하게 흘러간다는 명분 하에 오간수문을 헐었고 1년 뒤에는 근처의 성벽마저 철거했다. 이후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새 다리를 짓고 이름을 ‘오간수교(五間水橋)’라 했다.

1921년 6월에 흥인지문(동대문)에서 광희문간 전차 노선이 새로 생기면서 오간수교 위에 전차 선로가 놓였다. 1926년 6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 행렬이 오간수교를 지나면서 약 4.5m던 다리의 폭을 약 8.2m로 확장했다. 그러나 그 다리마저도 1961년 12월에 청계천 복개공사로 사라졌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자신의 임기 안에 청계천 복원 사업을 무리하게 끝마치기 위하여 유적 복원을 날림으로 진행했다는 평가도 있는데, 실제로 석축·효령교·하랑교·오간수문은 복원되지 않고 중랑구 하수종말처리장에 보관되고 있다.[21] 또한 1773년에 쌓은 현 무교동 사거리에서 시작되며 청계천을 따라 17.1m의 폭을 두고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청계천 석축은 발굴 후 복원되지 못했다. 복원 당시 발견된 석축은 동아일보사 앞의 좌안석축이 교차로를 기준으로 서쪽 57m, 동쪽 36m 정도, 반대편 우안석축은 9m 정도로 모두 100여m나 된다. 수표교는 예산상의 문제라는 표면적 이유로 장충단공원에 남아 있고, 광통교는 원래와 다르게 복원되었다. 청계천 입구에 위치하는 소라탑 또한 일각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스웨덴 출신의 미국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가 설계한 작품으로, KT가 34억의 비용을 들여 서울시에 기증한 작품이다. 높이 20m, 폭 6m, 무게 9t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적인 미가 결여되어 있고, 주변에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비판과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좋지 못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을 떠받치는 관악산 봉우리는 뾰족한 삼각형으로 불의 기운이 강하다. 이 때문에 서울에 화재가 많다 하여 조선시대엔 광화문 좌우에 해태상을 설치하고 중심축 주변에 조형물을 함부로 세우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 후 그 중앙에 불의 형상을 세웠으니 나라가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이는 일제가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해 북한산에 쇠말뚝을 박은 것보다 더욱 치명적이다.”

그는 스프링에 대해 “붉고 뾰족한 끝이 불(火)의 형상이라 서울의 명당수 역할을 해야 할 청계천 물(水)의 기운을 억누르고 있다”며 “빨리 뜯어내거나 다른 조형물을 세워야 청계천이 숨을 쉰다”고 했다.

 

김 교수는 최근의 남대문 화재나 촛불시위, 대형 살인사건 등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는 것엔 스프링의 영향도 있다고 덧붙였다. 2009년9/23 동아일보

 

실록에 나타나는 개천 기사

세종실록 106권, 세종 26년 11월 19일 갑오 3번째기사 1444년 명 정통(正統) 9년

개천을 깨끗이 하는 일과 풍수설에 대해 의논하게 하다

時集賢殿修撰李善老請於宮城西, 鑿貯水池, 引入永濟橋。 又於開川之水, 禁投臭穢之物, 令水淸潔, 下其事議之。 領議政黃喜、右議政申槪、左贊成河演、右贊成皇甫仁、禮曹判書金宗瑞、右參贊李叔畤、藝文大提學鄭麟趾、判漢城府事李孟畛、禮曹參判尹炯等議: "鑿池, 宜待來秋更議。 開川之水, 令各部及漢城府郞廳修城禁火都監郞廳分掌城內各戶, 臭穢之物, 令勿投棄, 務要淨潔。 漢城府堂上禁火都監提調常加考察, 亦令司憲府無時糾擧。" 左參贊權踶上書以爲: "風水之說, 論者非一, 不免有抵牾舛錯者, 似難以一書所言爲定。 況其書有論墓雩者, 有論建都設邑者, 又有以一事而或言吉或言凶, 未定其說者, 豈可以《洞林一書》, 遽爲難行之禁乎? 臣恐民受其弊, 而國無實應也。" 下風水學議之。

 

영조실록 120권, 영조 49년 5월 29일 정해 1번째기사 1773년 청 건륭(乾隆) 38년

좌의정 김상철이 청계천 준설의 물력을 마련할 방안에 대하여 아뢰다

丁亥/上御集慶堂, 引見大臣備堂。 左議政金尙喆曰: "今此濬川石築物力, 不可不及時區劃。 關西貿置小米一萬石備局行會者, 分劃於三軍門, 濬川石築後, 濬川司所管小米三千石糶糴者, 逐年倂耗, 次次移充於今劃萬石之數好矣。" 上許之。

 

 

1, 남대문시장

1414년 '정부임대전' 을 개시한 것을 시작으로 시장의 시초가 되었으며 일제 때인 1911년 친일파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 를 설립한 것을 계기로 지금의 시장이 개장되었고 이 때부터 상거래 등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육의전이 금난전권을 가지고 있어 한양 도심에 새로운 시장을 열 수 없어 남대문 바깥쪽에 시장이 서기도 했다.

1922년에는 한때 소유주가 일본인으로 바뀌어서 일본인 소유의 시장이 되기도 했으며, 1936년에는 조선총독부의 훈령에 따라 남대문시장이라는 명칭 대신 '중앙물산시장'이라는 명칭으로 강제 변경되기도 하였다.

2. 한국은행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제도는 1909년 구한국은행(舊韓國銀行)이 설립되면서 처음 도입되었다. 구한국은행은 한일합방 후 1911년조선은행(朝鮮銀行)으로 개편되어 발권, 국고업무 등 중앙은행의 기능과 함께 일반은행업무도 일부 겸영하였다.

대한민국의 통화인 대한민국 원의 발권은행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12일에 발족하였으며,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9에 위치하고 있다.

3.환구단(圜丘壇)

환구단은 1897년에 고종(高宗)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大韓)’으로 바꾸고 왕의 지위를 ‘황제(皇帝)’로 올리면서, 이를 국내외에 알리고 천지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이는 유교적 황제 관념에 입각한 것이면서도, 대한제국이 청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국임을 명확히 하고 황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독자연호 광무.

“광무 원년 10월 12일은 조선 사기에 몇 만 년을 지나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 천 년을 왕국으로 지내어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 대접을 받고 청국의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이 있더니 하나님이 도우시어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시어 이달 12일에 대군주 폐하께서 조선 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나라가 이렇게 영광이 된 것을 어찌 조선 인민이 되어 하나님을 대하여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오.” 독립신문

 

4. 소라탑

5. 광통교

 

6 .전태일 기념관

7. 이벽집터 (한국 천주교 발상지)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이다. 이벽의 누이가 정약용의 이복 형 정약현(丁若鉉, 1751~1821, 호:鬴淵)과 혼인했기 때문에 이벽은 정약용의 인척이었으며 학문적⋅인격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벽은 정약용과 그의 둘째형 정약전(丁若全, 1758~1816, 호:巽菴)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소개하였는데,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서 정약용은 “1784년 4월 보름날 맏형수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고 우리 형제와 이벽은 같은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갔는데 배 안에서 천지가 조화하는 시초나 육신과 정신이 죽고 사는 이치를 듣고서 황홀하고 놀라워 마치 은하수가 끝없이 펼쳐진 느낌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정약용은 이벽의 재주와 인격을 소식(蘇軾, 1037~1101, 호:東坡)이나 이응(李膺, 110~169, 후한 말 명신)에 비교하기도 하였다. 또한 1814년 유배지 강진에서 ≪중용(中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저술한 ≪중용강의보≫를 탈고하면서 “광암이 지금까지 살았다면 그 진덕박학을 어찌 내게 비유하겠는가.”라며 이벽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여러 곳에서 그의 의견을 인용하거나 그의 해석을 따랐다. 1818년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벽과 함께 학문을 닦던 시절을 자주 회상하였다.

 

8. 수표교

 

9. 세운상가

세운상가라는 이름은 당시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이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위치는 최북단이 종로3가역, 최남단이 충무로역에 인접하는 약 1km 길이[1]의 초대형 주상복합상가군으로 1967년부터 72년까지 세운, 현대, 청계, 대림, 삼풍 풍전 신성, 진양상가가 차례로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고급아파트와 상가가 함께 존재한 건물이였으나, 60년대부터 이 부근은 미군부대에서 빼내온 각종 고물들을 사기쳐서 고쳐서 판매하는 사업장이 자리잡은 동네였었고 이곳의 상가들은 이런 주변의 사업장과 결합해 가전을 비롯 각종 전자 제품의 메카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강남개발이 빠르게 이뤄지면서 주거지로서 메리트가 사라지게 되었고, 결국 상부의 아파트들도 기술자들의 작업장으로 전용되면서 사실상 상가로 바뀌게 된다.

 

10. 광장시장과 방산시장

 

11, 염초청터

 

12. 전태일 다리

청계천 공사를 하면서 서울시는 애초 다리 이름을 버들다리라고 정했지만, 노동단체들이 전태일 열사가 불꽃처럼 산화한 곳이란 역사성을 들어 전태일다리로 명명하자고 요구했다. 2010년 서울시는 이런 건의를 받아들여 버들다리와 전태일다리를 함께 부르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 냈다.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 등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정도로, 그는 상징적 존재다. 전태일 분신 사건 이후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국민들의 인식이 높아졌고, 지식인과 대학생들 사이에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각성하게 되었고, 사회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노동은 위르겐 하버마스가 강조하듯 소통과 더불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노동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은 그 대가인 임금으로 사회생활을 영위해 간다. 1960∼70년대 산업화 시대에 한편으로는 고도성장이 구가됐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성장의 실제적 주역인 노동자계급의 임금 및 생활조건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민주주의 아래 평등한 존재로서의 당연하고 당당한 전태일의 외침은 당대의 노동현실을 증거했다. 그래서 작업복을 입고 있는 형상인 이 반신상 앞에 서면 언제나 마음이 시려오고 처연해지곤 한다.

 

13. 오간수문

 

14. 빨래터와 황학시장 삼교와 영도교 사이

 

15. 청계천 8가 {천지인의 노래}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틈 없는 인파로 가득찬

땀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솟은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부부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칠흙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화려한 불빛도 없이 그저 각자의 삶의 길로

수없이 지나치는 사람들 그 사이로

내 의지 보다는 타의로 생겨나고 사라지고

현실의 벽앞에 난 눈물을 떨구고

가난이란 글자에 포기란 단어로 끼어맞춰 보기도

했지만 순간에 뱉어 버리고 그래도

자식들의 꿈있는 미래를 위해

내 한 몸 이 거리 속에 묻혀, 이 두 다리로 버텨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칠흙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16. 서울풍물 시장 소머리국밥 한 그릇

 

17. 청교천 교각

18. 판자집

19. 청계천 박물관

끝.

 

                                                                                         대표 한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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