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길 안내

작성자歸廬齋|작성시간20.10.02|조회수40 목록 댓글 0

시내길 안내

1) 평택시내의 산줄기 물줄기

속리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한남정맥을 따라 용인 문구봉에서 갈라져 안성미리내 쌍령산으로 넘어오면서 쌍령지맥이 된다. 평택의 주산은 천덕산이다. 이 지맥의 끝은 덕암산을 거쳐 부락산을 거쳐 해창으로 가서 진위천에 머리를 숙인다.

그중 한줄기가 지문리를 거쳐 백운산에 이르러 월구리를 거쳐 죽백동과 배다리를 돌아 덕동산에 솟아 주변의 산들을 형성한다. 끝머리는 통미로 소사벌에 안긴다. 이지맥의 남쪽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안성천으로 흘러들고 북쪽 사면은 진위천과 통복천으로 유입된다.

 

2) 재랭이 고개

자란로는 넌센스다. 재넘어가 재랭이가 되었다.

 

3) 통복천

발원은 고성산이다. 바닷물이 원곡 외가천리까지 유입 됐다고 한다. 새말에는 국창 이동백이 10여년 살며 후진 양성을 했으며 그가 돌아갈 때는 여자들이 상여를 멧다고 한다. 하구는 화촌을 거쳐 고잔에서 안성천과 만난다. 통복포라는 포구가 있어 배를 댓다.

 

4) 통복시장

통복시장은 1950년대에 개설됐다. 한국전쟁 당시 평택의 중심지였던 원평동 시가지가 80% 이상 파괴되어 평택역, 평택군청, 평택경찰서 등 공기관이 이전하고, 철도역과 관공서가 이전하면서 구도시의 중심을 형성하던 시장도 1953년 현재의 위치인 통복동으로 옮기게 됐다.

이곳에는 싸전과 우시장이 유명하다. 싸전에 살을 배달하던 엄복동이가 최고의 싸이클 선수가 된 배경이기도 하다.

 

5) 원평동

원평동은 식민지가 낳은 근대도시이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준비할 때 쯤 한반도의 남북을 연결하는 경부선, 경의선 철도가 가설되었다. 일본인들은 토착주민들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철도역 주변에 정착하였다. 철도역을 중심으로 도로가 가설되고, 물화가 철도를 중심으로 유통되면서 조선인 시장도 개장(開場)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 금융기관, 여관, 식당, 각종 사회단체도 철도역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도시 주변의 광활한 토지는 총독부가 몰수하여 헐값에 일본인이나 친일파들에게 불하되었다. 도시의 주요 이권도 친일파나 일본인들이 차지하였다.

일제는 동척농장이나 일본인 농장, 친일파 농장에서 생산된 곡물과 과일, 안성천 하류와 아산만에서 잡아 올린 어물과 소금을 평택역에 집산한 뒤 철도로 인천항으로 날랐다. 평택역이 교통과 상업, 금융의 중심도시로 발전하면서 원평동 일대에는 근대도시가 발달하였다. 근대도시의 초기 지명은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였다. 평택리는·1920년대 중반 인구가 급증하면서 평택면으로 성장하였고, 1938년에는 평택읍으로 승격되었다.

본정통은 일제강점기 근대도시 평택의 중심 거리다. 가장 번화했던 거리 입구에는 한성공동창고(상업은행 전신) 건물과 일본인 잡화점, 여관, 식당 그리고 조선인 상점과 시장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평화병원 *공주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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