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길 안내 2

작성자歸廬齋|작성시간20.10.27|조회수99 목록 댓글 0

1) 평택시내의 산줄기 물줄기

속리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한남정맥을 따라 용인 문구봉에서 갈라져 안성미리내 쌍령산으로 넘어오면서 쌍령지맥이 된다. 평택의 주산은 천덕산이다. 이 지맥의 끝은 덕암산을 거쳐 부락산을 거쳐 해창으로 가서 진위천에 머리를 숙인다.

그중 한줄기가 지문리를 거쳐 백운산에 이르러 월구리를 거쳐 죽백동과 배다리를 돌아 덕동산에 솟아 주변의 산들을 형성한다. 끝머리는 통미로 소사벌에 안긴다. 이 지맥의 남쪽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안성천으로 흘러들고 북쪽 사면은 진위천과 통복천으로 유입된다.

 

2) 재랭이 고개

자란로는 넌센스다. 재넘어가 재랭이가 되었다.

 

3) 통복천

발원은 고성산이다. 바닷물이 원곡 외가천리까지 유입 됐다고 한다. 새말에는 국창 이동백이 10여년 살며 후진 양성을 했으며 그가 돌아갈 때는 여자들이 상여를 멧다고 한다. 하구는 화촌을 거쳐 고잔에서 안성천과 만난다. 통복포라는 포구가 있어 배를 댓다.

 

4) 통복시장

통복시장은 1950년대에 개설됐다. 한국전쟁 당시 평택의 중심지였던 원평동 시가지가 80% 이상 파괴되어 평택역, 평택군청, 평택경찰서 등 공기관이 이전하고, 철도역과 관공서가 이전하면서 구도시의 중심을 형성하던 시장도 1953년 현재의 위치인 통복동으로 옮기게 됐다.

이곳에는 싸전과 우시장이 유명하다. 싸전에 살을 배달하던 엄복동이가 최고의 싸이클 선수가 된 배경이기도 하다.

 

당시 구전되던 가요(타령)

떳다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

간다 못간다 얼마나 울었던가/ 정거장 마당이 한강수 되노라

싫커던 두어라 너하나뿐이냐/ 산너머 산이있고 (좋다) 강건너 강이 있다.(좋다)

 

평택시장 장타령. (실제 산하리 분이 부른타령으로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있다)

일이송송에 내송송/ 청춘말을 들었더니

점심 참이 늦어간다/ 일자나 한자나 들고보니

지리구품바나 들어 갔네 / 삼십먹은 노총각

장개들기를 원한다./ 치리구품바나 잘한다

안성장에를 갔더니/ 안서져서 못보고

오미장에를 갔더니/ 오무라져서 못보고,

평탁장에를 갔더니/ 편안해서나 못봤네

일자나 한자 들고나보니/ 일이송송에 내송송

점심 참이 늦어간다

 

 

 

 

5) 원평동

원평동은 식민지가 낳은 수탈도시이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준비할 때 쯤 한반도의 남북을 연결하는 경부선, 경의선 철도가 가설되었다. 일본인들은 토착주민들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철도역 주변에 정착하였다. 철도역을 중심으로 도로가 가설되고, 물화가 철도를 중심으로 유통되면서 조선인 시장도 개장(開場)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 금융기관, 여관, 식당, 각종 사회단체도 철도역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도시 주변의 광활한 토지는 총독부가 몰수하여 헐값에 일본인이나 친일파들에게 불하되었다. 도시의 주요 이권도 친일파나 일본인들이 차지하였다.

일제는 동척농장이나 일본인 농장, 친일파 농장에서 생산된 곡물과 과일, 안성천 하류와 아산만에서 잡아 올린 어물과 소금을 평택역에 집산한 뒤 철도로 인천항으로 날랐다. 평택역이 교통과 상업, 금융의 중심도시로 발전하면서 원평동 일대에는 근대도시가 발달하였다. 근대도시의 초기 지명은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였다. 평택리는·1920년대 중반 인구가 급증하면서 평택면으로 성장하였고, 1938년에는 평택읍으로 승격되었다.

본정통은 일제강점기 근대도시 평택의 중심 거리다. 가장 번화했던 거리 입구에는 한성공동창고(상업은행 전신) 건물과 일본인 잡화점, 여관, 식당 그리고 조선인 상점과 시장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평화병원 *공주여관

일인들의 수탈야욕을 보여주는 진위군청이전과 군청명개정에 대해 집요하게 청원한 자료가 있다.

 

[군청 이전의 건에 대한 청원] (1912(명치45)년 7월 )

 

당 평택 정거장 소재지는 진위군의 남쪽 끝에 있고, 일본인 호수가 65호, 조선인 호수가 500호에 지나지 않지만, 철도로 인해 남북이 서로 통할 수 있고, 평탄한 길로 인해 동서로 왕래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안성하(安城河)의 수로(水路)로 인해 선박운행[舟楫]의 편리가 있기 때문에, 경기도 서남부, 충청도 서북부의 물산(物産)은 대개 본 지역에서 집산(集散)하고, 그 수용품(需用品) 또한 본 지역에서 집산됩니다. 때문에 그 수출입 화물의 많음은 경부노선(京釜路線) 중에서 수원(水源), 조치원(鳥致院), 대전(大田)보다 우월하고, 다만 경성(京城), 대구(大邱), 부산(釜山)에 미치지 못할 뿐, 최초에 한한 들판 가운데에 있던 정거장이 금일(今日)과 같이 발전하기에 이르렀음은 지리적 이점이 그렇도록 만들었던 바이기에, 장래 더 한층 발전하고 인가(人家)의 증가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시험 삼아 작년도 중에 화물집산 상황을 조사하니 실로 다음과 같은 수량이 되었습니다.

一 미곡집산고(米穀集散高) 10만석

중 철도에 의해 수출된 것 7만석

수로에 의해 수출된 것 3만석

一 식염집산고(食鹽集散高) 5만석

중 철도에 의해 수출된 것 3만5천석

수로에 의해 수출된 것 1만5천석

一 잡화집산고(雜貨集散高) 1천톤

이 같은 상황인데, 당 지역은 실로 경기도 남부의 교통 중심지로서, 진위군에서 가장 요지라고 칭할 만합니다. 그런데 현재의 진위군청은 군의 북쪽에 치우쳐서 당 지역과의 거리가 3리(里) 이상에 이르러, 본 지방 주민의 불편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군청을 당 지역으로 옮기는 것은 단지 본 지방 주민이 편리함을 누리고 그 발전상에 많은 이익을 향유할 뿐만 아니라, 서정리(西井里) 정거장으로부터 철도의 편리함이 있기 때문에, 군민(郡民)의 과반수가 또한 이것을 편리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아무쪼록 본 청원서를 채용해주시는 영광을 누린다면, 군청 부지(敷地)는 당 지방에서 부담하여 제공할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각하가 전술한 사정을 통찰하셔서 군청 이전에 대한 결정이 있기를 관계 인민 일동이 연서(連署)하여 삼가 받들어 청원합니다.

 

1912(명치45)년 7월

경기도 진위군 병파면(丙坡面) 평택리(平澤里)

일본인(日本人) 구사가와 가메타로(草川龜太郞)

니히라히사(仁平久庸)

시이타니 게이타로(椎谷慶太郞)

다카사키 후사키치(高崎房吉)

히로이케 사쿠한(廣池作半)

외 33명

 

조선인(朝鮮人) 김○○ 조○○ 서○○ 외 25명

진위군 병파면(丙坡面) 비전리(碑前里) 권○○ 외 9명

 

진위군 성남면(城南面) 각 이장(里長) 최○○ 외 7명

진위군 오타면(五朶面) 각 이장 박○○ 외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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