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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포구나루방

성환천 발원지를 찻아서

작성자歸廬齋|작성시간20.10.01|조회수820 목록 댓글 0



성환천이 안성천에 합수하는 지점. 주소는 평궁리와 성환읍이 복잡하게 교차되는 지점이다. 옛날 물길이 경계였던것 때문이다. 여기서 부터 성환천 분수령이 되는 노태산까지 20km이다. 바로 남쪽 벌판이 청망뜰이다. 청나라가 망한 지점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행정명으론 성환읍 복모리인데 보머리에서 이름이 왔다고 한다. 洑자의 한자음이 복으로도 나기때문이다. 이곳에는 작은 규모의 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가시박이 무성해지는 가을 개버들의 역상이 볼만하다.

성환읍 어룡리모습이다. 여기서 북쪽이 와룡리다. 이지역의 지명이 룡이 많은데 이는 성환천을 따라 북으로 흘러 내리는 산줄기가 왕지산으로 부터 용맥처럼 느리게 늘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성환천에는 사금이 많이 났다고 한다. 갯방죽에는 버럭더미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는 일제가 사금과 다른 광물을 제련한 찌꺼기를 모아둔 더미에서 유래한다.

청나라 섭지충이 여기에 진을 쳤다가 아침밥을 먹다가 아산으로 도망친 월봉산이다. 실제 월봉산은 깍여나가고 그 앞산을 월봉산이라고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성환읍내와 성산의 모습이다. 성산은 사산성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마정천과 합치는 두물머리.... 마정천은 천안 옥녀봉 물줄기인 양전 저수지물과 마정저수지에서 나오는 율금천이 합수해 이곳에 이른다.

백로

쇠백로

직산역 여기가 시름새 앞쪽이다.



업성리 업성은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지명이다.


사근다리가 이동네 본래이름이다. 읍성이 업성이 됐나... 성이있었나? 궁금증 유발



업성저수지 운행기

공사중이라 물을 많이 빼버룠다.



도랑을 찻아서

오르니 노태산이다.

노태산은 단대쪽 국사봉에서 노태산을 거쳐 연암산으로 간는 분수령이다, 남쪽은 곡교천으로 북쪽은 성환천으로 흘러 아산만에서 다시 만난다. 이곳에서 20km의 성환천을 더듬었고 이제 성환천 주변을 돌아보며 북으로 오른다.

이쪽 골에서 물이 업성저수지로 흘러들겠지.

직산 읍치에 있는 구억마을 어디나 구억이라는 이름은 궁벽한곳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직산현 비석거리

직산현청

본래 백제(또는 고구려)의 사산현인데,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백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에 직산으로 개칭되었으며, 1018년(현종 9) 천안의 속현으로 병합되었으나 후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조선초인 1393년(태조 2) 직산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401년(태종 1) 다시 감무로 강등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직산현이 되어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에 속했다.

직산은 여러 실학자들에 의해 백제의 시조 온조가 내려와 정착한 위례성으로 비정되어 최근까지도 일부에서 주장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지방으로 내려가는 성환역이 있어 교통요지였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직산군이 되어 1895년에 공주부 소속, 1896년에 충청남도 소속 직산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비입지였던 경양면이 평택군으로, 언리면·외야곶면·안중면이 수원군으로 이관, 면적이 크게 줄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직산군이 폐지되고, 동변면·서변면·일서면이 성산면으로, 이서면·삼서면·이북면이 성환면으로, 삼동면·이동면(일부)이 입장면으로, 이남면·이동면(일부)이 성거면으로 통합되어 천안군에 병합되었다. 1920년 성산면이 옛 직산현의 이름을 따 직산면으로 개칭되고, 1973년 성환면이, 1985년 성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온조사당

온조가 이곳 직산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는사실은 조선시대에까지 모든 역사서를 통털어 기정사실이었다. 해서 역대임금들이 온조사당을 만들고 제향했다. 처음 사산성 산줄기 끝머리 용안치에 사당을 두었다가 훼손되자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그바람에 온조사당은 남한산성과 이곳에 두곳에 존재한다. 현재의 온조사당은 직산사람들의 열망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져 다시 건립됐다. 매해 지역유지들이 제향을 올린다.

직산향교 다른곳이나 진배없다. 가는날이 추계석전대제였으나 끝나버린 뒤였다. 아쉬웠다. 발걸음을 뒤로 하는데 관리자가 직산향교지를 선뜻 내어준다.

호서지역의 중요길목에 있는 지역이라는 뜻의 호서계수아문의 현청정문 코로나로 막혀있다.


도영지 위의 설명처럼 남쪽에 휴류암이 불길해서 이곳에 거꾸로 비치도록 했다는 것이다.

정면으로 성거산이 훤하다. 왕건이 이곳에서 시름을 놓았다고 해서 시름새라는 땅이름이 생겼다. 물론 한문으로 수헐원(愁歇院)이다. 성거산을 이름붙인것도 왕건이라구 한다. 성거산은 남쪽으로 금강에 합수하고 북쪽으로는 곡교천따라 아산만으로 합수한다.



부소산과  부수문이 고개가 보인다. 저고개너머가 천안 북면이다.

부소산[扶蘇山] : 충청남도 천안시의 동남구 입장면 양대리와 북면 대평리 등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고도459m). 조선지형도에 북면 운용리와 입장면 양대리 경계에 부소령이 있다. 산 북쪽에 있는 엽돈재가 충청북도 진천군과 충청남도의 경계가 된다. 천안을 비롯하여 부여와 개성의 부소산, 태백산의 부쇠봉 등 여러 곳에 같은 계열의 지명이 분포하고 있다. 이 산이 백제 시조 온조의 직산 위례성설에 의한 위례산 바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역사적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부여족 민족의 대이동과 관련되어 설명되기도 하다. 부소산은 단군의 아들 부소의 이름을 붙인 산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 산 남쪽에 부소문이(부수문이)고개가 있다. 부소는 솔()을 뜻한다. -출처 :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2010.2, 국토지리정보원-



홍경원터의 홍경사 갈기비이다. 원래 홍경사 비갈 이라고 했는데 정식명칭이 갈기비라고 한다. 국보7호이다. 김정호가 금석문 해독을 해서 이곳이 봉선홍경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다.


先弘慶寺 碣記 (봉선홍경사 갈기)

譯文 翰林學士 柳奭佑(前曉星大敎授) 宣議郞 內史舍人知 制誥兼史舘修撰官賜祡金魚袋臣崔沖奉 敎撰 奉議郞國子丞臣白玄禮奉敎書,

한림학자 선의랑 내사사인 지제고 겸 사관수찬관 사 자금어대 신 최충은 명령을 받아자 지었음, 와자 봉이랑 국자승 신 백현례는 명령을 받자와 썼음,

 

臣謹按內云, 招提者招引提十方英俊, 洪蘭 佛法居止之所焉, 又莊子說薳盧而視仁義, 晉書論逆旅以濟公私, 今之於稷山縣成歡驛北路一牛鳴地, 新置寺舍者,卽其類也,

 

신은 삼가 고찰하옵건대 내전에 이르기를 초제란 것은 십방의 영춘한 이를 부르고 이끌어 불법을 널리 밝히면서 거주하는 곳이라 그리고 또 장자가 거려를 말하면서 인과 의에 겨누고 진서에 역려로 써 공과 사를 돕는다고 논하였으니 이제 직산현 성환역의 북쪽길 한 소 울음 들릴 자리에 새로 절집을 두게 한 것은 곧 그런 종류라,

 

可終丕,屬於 盛時, 惟 我聖上, 守位以仁, 兼文之德, 于戈戚楊皆偃之矣, 禮樂刑政畢修之矣, 若乃喜捨之綠, 遹追之業, 求諸注代, 無得而踰

 

처음 이 곳에는 장단의 정자가 없어 사람의 연기가 동떨어져 끊겻고 환포의 못이 있어 검탈하는 도적은 많아 비록 갈림길의 요지이로되 실로 왕래하기 어려운터라 끝내비색하지는 않을지라 문명한 시대를 만났도다, 오직 우리 성상께옵서 인으로서 지키시고문교의 덕을 잡으시와 방패와 창과 도끼들을 다 쓰지 않게 되었고 예와 악과형법과 정치는 다 수정되어서 희사하는 인연과 휼추하는 사업은 지나간 시대에 더듬어도 얻어 넘어서지 못하였을지라,

 

嘗 詔左右兩街都僧通眞光敎圓濟弘道大師臣逈兢, 而曰昔者 皇考安宗憲 景孝懿英文大王, 初九潜身, 大千 歸命, 每覽法華之妙設, 深嘉中道之化城, 方欲 效行 ,未能 勳集, 朕卽善繼其 志, 永觀厥宇, 副我書貞之 命, 主其慮事之權,

 

일찌기 좌우양가도승통 통진광교원제흥도대사 신 형궁에게 명령해 이르시되 옛적 황고 안종 헌경호의영문 대왕께옵서 초구에 몸을 간직 하시매 대천세계에서 명령에 따르려 하였는데 매양 변화의 묘한 말씀을 살피시고 깊이 중도의 화성을 아름다이 여기시어 바야흐로 본받아 행하려하다가 아직 능히 큰 공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짐은 곧 그뜻을 잘 이어 길이 그 성공을보려 하노니 한가지로는 행려를 구제하여 험로에 걱정없게 하고 한가지로는 중의무리를 부르고 이끌어 법륜에 나아가게 하려니 법사는 마땅히힘써 찬양의 일을 보살펴 몸소 친히 자리를보아 나의 물어 정하게 하는 명령에 맞추어 그 일을 계획하는 권을 주장하라 하시었다,

 

兢纔受 綸言, 便圖經始, 縱九廻而無倦, 須百足以不僵, 所貴同心, 用將龥俊, 爰有廣利證玄大師賜紫沙門臣得聽, 靜慮修眞悟理大德賜紫沙門臣蘠琳等, 兢扶願穀, 枚卜要途, 蒸然來斯, 實興我役, 上續差推誠致理翊載功臣金紫興大夫兵部尙書知樞院事兼太子太傅上柱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臣姜民瞻, 中樞副使中大夫秘書監兼 太子寶客柱國宜春懸開國男食邑三百戶賜紫金魚袋臣金猛等,爲別監使

형궁이 겨우 명령을 받자 곧 경영을 도모하여 비록 하루 아홉 번 돌아도 권태함이 없이 모름지기 백족의 벌레처럼 엎어지지 않게하려고 소중한 것은 마음이 맞는 이로서 장차 준수한 이를 불러 들였다 이에 광리중현대사 사자한 사문 신 득총과 정려수진 오리대덕 사자한 사문 신 장림등이 있어 기원하는 수레바퀴 중심을 다루어 붙들고 긴요한 길목에 자리를 잠으메 수두룩이 역군이 밀려와 실로 우리 역사를 일으켰다, 임금께서 잇달아 추성치리익대공신금자흥록대부 병부상서지중추원사 겸 태자태부 상주국 천수현 국개국남 식읍삼백호 신 강민첨과 중추부사 중대부 비서감 겸 태자빈객 주국 의춘현 개국남 식읍삼백호 사자금어대 신 김맹동을 보내어 별감사로하였다,

 

於是事諧共理, 謗絶宣驕, 疕徒勿奪於農時, 程物免煩於 公帑, 陶人施瓦, 木客供材, 雪鋸風斤蜂聚蕩心之匠, 雲鍬電鍤駿遊手 之 群起自丙辰春, 迄千辛酉歲, 凡造得堂殷門廊等共二百餘間, 所置塑晝諸功德像及鍾磐幡差, 具如見在其數寔繁, 乃勅賜額爲奉先弘慶寺, 莫不功由鳩, 値若飛來, 像殿經樓麗異而宛 疑兜率, 鳧種鴈塔莊嚴而遙認爛阿, 旣 常三寶勃興, 實可千燈相續, 又於寺西, 對立客館一區計八十間, 號曰廣綠通化院, 斯亦溫盧冬密, 凉屋夏寬, 積以银糧, 貯之芻秣, 施賙窮急, 設雍伯之義漿防備盜奷, 列陳留之樓鼓, 夫如是則不獨方袍之衆虛往實歸,亦令之足之徒宵盤野晝憩, 終見證眞之境, 蔑聞焚次之虞, 向若非酌古今讼, 寒先皇之弘願, 隨機設敎, 崇 彼佛之妙門, 則兼濟之, 仁幾乎而息,

이에 일은 함께 다스림에 화합해지고 교만을 부린다는 헐뜯음이 끊어저 쇠찬한 백성에게 농사철을 빼앗기지않고 물건들은 국고에 귀찮게 하지않아 도공이 개와를 베풀고 목수가 재목을 바치어 눈빛 같은 톱, 바람일으킨 도끼로 마음 흔들린 장인이벌떼 처럼모이고 구름같은 가래들과 번개같은 삽들을 유식하는 무리들이 빨리 달려 병진년(현종7- 단기3349-서기1,016) 봄에일으켜신유년(현종 12- 단기3,353- 서기1,021)에 마치었다, 무릇지어진 마루, 궁전, 문행랑들 모두 이백여간이오 둔 바의조각한 소상과 그려 낸 모든 공덕상 및 쇠북, 경석, 깃발, 일산은 모두 현재와 같아 그 수효 실로 많은지라,이에 칙명으로 액을 내려주시어 봉선홍경사로 하였음니다 공은사람들을 모으고 어울린 데 말미암았고 형세는 날아오는 듯하여 불상을 둔궁전 불경을 둔 누각은 아름답고 이상하여 완연히 두솔인가 의심되고 부씨의 만든 종, 기러기의 탑은 장엄하기 멀리 난타인가 인정되어 이미 항상 삼보가 울컥 일어나정말 가히천등이 서로 잇겠다, 또 절의 서편에 객관 한갈피 모두 팔십간을 마주세워 이름해 부르기를 광언 통화연이라 이 또한 따스한 집은 겨울에 아늑하고 서늘한 지붕은 여름에 너그러워 양식을 쌓고 말꼴도 두어 군급한 이에게 베풀어 옹백의 의상을 설시하고 도적의 간흉을 방비하여 진류의 누고를 벌렸다, 대저 이같이 한 즉 홀로 중의 무리가 비어서 갔다가 채워서(지식을 많이 얻어) 돌아갈뿐 아니라 또한 피로한 나그네 무리로 하여금 밤에 즐기고 낮에 쉬게 한다, 마침내 증진의 지경을 보냈고 숙소를 불태운 근심을 듣지 못하겠다, 접때 만약 옛일을 참작하고 지금 시세에 따라 돌아가신 임금님의 큰소원에 바치고 기틀에 따라 교화를 베풀어 저 불교의 묘문을 높이지 않았다면 고루 구제하려는 어진 일로 거의 식었을 뻔 하였다,

 

於戱, 權興有旨, 祖述無虧, 肯構之功旣存矣, 奉行之道亦廣矣, 盡善盡美,念玆在玆, 今則申命儒生, 俾書盛事, 臣恩遲燥吻,淺嚼筋, 雖長卿形似之文, 無能爲也, 而小子斐然之作竊敢効焉, 略述端倪, 聊裨實錄, 時 聖上御國之十八歲, 太平記曆之弟六年, 夏四月 日, 謹 記

아아-시작 하는데 뜻이 있었고 선대의 일을 닦는데 빠짐이 없다, 긍구하는 공이 이이 있었고 봉행하는 도리도 또한 넓도다, 선을다하였고 미를 다하였으며 이를 생각 하이에 마음 두어 이제는 거듭 유생에게 명령하시어 장한 일을 쓰게 하시니 신은 생각이 드디어 입술을 태우고학식이 열어 갈빗대 힘줄 씹 듯 비록 장경의 본뜻 글일지라도능히 못 할 지나 소자의 알롱한 작품으로 슬그머니 감히 바치노니 대략 전말을 딱아 애오라지 실록에 도움되게 함, 때는 성상의 나라를 다스린지 십팔년이오 태평으로 역서를 기록한 제육년 여름사월 일에 삼가 기 함,

 

奉 宣權知寺主圓慧智廣普辯通濟得理三重大師賜紫沙文臣彦 崇都監, 解行無垢大師賜紫沙門臣朗崇副都監, 副寺主抄門臣成普, 抄門臣蕙廷 儈殷抄, 暹遠, 義玄, 奉謙等奉 敎立

 

선명을 받자와 권주사주인 원혜지광보광선변통제득리삼중대사 사자한 사문 신언승이 도감으로,해행무구대사 사문 신낭숭이 부도감으로, 부사주인 사문신 성보, 사문 신혜연,중은묘,성원,의현,봉겸 등 은 명령을 받자와 세웟음, 譯文 翰林學士 柳奭佑(前曉星大敎授) 宣議郞 內史舍人知 制誥兼史舘修撰官賜祡金魚袋臣崔沖奉 敎撰 奉議郞國子丞臣 白玄禮奉敎書,


             글쓴이 ;晋州市  大谷面 雪梅里 臨溪亭   姜 元 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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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홍경사갈.... 임창순선생이 썻다.

  임창순은 한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 재야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 금석문, 서예, 그림, 서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연구 활동과 통일사회운동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성균관대학교 교수 재임 시에 4.19혁명이 일어나자 4.25교수 데모를 주동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대학에서 쫓겨나 재야에서 '우리 문화의 뿌리 찾기'를 기치로 내걸고 1963년 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해 한학 강좌를 시작했다. 이후 보다 깊이 있는 한학 연구를 위해 도시 외곽에 지곡서당을 설립했다. 지곡서당은 옛 서당 방식의 한학 수업을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국학 연구의 최고 아카데미가 되었다. 또한 금석학의 대가로 전국 각지의 비문 등 금석문을 해석·판독하는 일에도 탁월함을 보였으며, 특히 단양적성비 판독은 학계에 큰 공헌을 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1979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나무는 홍수에 떠내려와 이곳에 뿌리박았다는 1200년묵은 성환 양영리 향나무다. 이 지역의 역사를 훤히 꿰고있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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