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물길 포구나루 조사팀
안성천
안성천은 안성시 보개면 쌍령산에서 발원해서 고삼저수지를 거쳐 한내를 이루는 한줄기와 칠현산에서 발원하여 금광저수지를 거처 안성 시내를 가로지르는 두 줄기가 안성 후평리에서 합류하여 평택을 지나 아산만으로 흘러내린다. 대동여지도에는 大川대천으로 기록되어있다. 바닷물이 밀려오면 안성시 공도면 진사리 까지 물이 차올랐으며 중복리 까지는 바닷물이 올라왔다고 한다. 남쪽 성거산 위례산에서 발원하는 청룡천과 입장천 그리고 성환천이 모두 안성천으로 흘러들어 거대한 퇴적 평야를 이루며 구불구불하게 흘러간다. 그 흔적으로 평택 소사평과 유천동 일부가 천안 땅이다. 길이 76㎞, 유역면적 1,722㎢. 옛날에는 안성남천(安城南川)이라 하였다. 하구 근처는 우리나라에서 조차가 가장 큰 곳 중의 하나로 대조시 평균조차 8.5m에 달한다.
안성천 하구에 방조제가 들어설 때까지는 하구로부터 16.5㎞ 떨어진 평택시 팽성읍 신호리까지 조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 방조제를 아산방조제라 하는데, 방조제가 완공된 뒤 많은 간석지가 간척되어 농경지가 확대되었다.
素沙津
일명 거먹다리(안궁5리) 이 다리를 건너야 비로서 안성천을 다건넌 것이다. 소사진의 남쪽 끝이다.
본래 미양천의 하류이나 지금은 합류지점이 안궁1리 근처이다.
소사동 주막터로 남쪽 거먹다리를 잇는 두점을 연결하는 길에 나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
대동법시행 기념비와 안성천 취수장 (안성천본류는 이지점으로 건넜을 것임)
소사동 김육 대동법시행기념비에서 성환읍 홍경리 국보7호 홍경사비갈로 이어지는 길로 안성천을 건너는 나루로 추측 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망건다리가 생겨 그 뒤로는 망건다리로 평택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망건다리가 놓여지기 전에는 이 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위치는 현 안성천 취수장 근처로 보인다. 안성천 취수장을 건너면 안궁5리 문화촌인데 문화촌 앞에 옛 신작로에 작은 다리가 거먹다리로 나무로 만든 다리이다. 이 다리로 성환 땅을 디뎠을 것이다. 왜몰보는 근처 안궁2리 마을 뒤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왜몰보에 대한 내력을 적은 간판이 마을 회관에 서있으나 아는 이들이 없다. 다만 동네분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리 걷고 내를 건너기도 했다는 말 뿐이었다.
<안궁2리 최용수 77세>
승두천
승두천은 안성천이 내려오며 갈라진 갯골의 흔적으로 보인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인해 어디서 갈라진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리저리 휘돌며 38호 국도 안성천교 밑에서 합류한다.
南倉
전혀 흔적을 알 수 없다. 다만 『양성군지』, 광무3년(1899) 양성현에는 사창 6고(庫)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구룡동면 창리(현 용이동 구룡동 마을)에 남창(南倉) 3개가 있었다. 이곳의 남창은 육면세와 대동미를 수세(收稅)하여 보관하였는데, 1872년에 대청 6칸, 창고 12칸, 신당 1칸, 대문 1칸, 헛간 2칸을 새로 지었다 라는 기록과 마을 이름이 보일 뿐이다.
배미(夜味)
배턱(배미)위 조개터 아래
배미를 야미라 한 것은 우리말인 배미를 문자화 하면서 발생한 이름이다. 배미-바미- 밤미, 밤夜 맛味라고 말이다. 다행히 지역사람들이 배미라고 불러주어 지금은 배미라고 한글로 적는다. 이곳을 지역분들은 배턱이라고 부른다. 일각에서는 배를 댈곳이 아니며 오히려 논배미같은 말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이곳 사람들이 배턱 ,배미라고 주장하는데는 서쪽 가까운 곳에 합정동 조개터가 있기에 오래전에 바다ㅅ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통미라는 지명도 바닥가로 통하는 길목 정도로 이해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배를 대었던 곳으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동네 분은 sk-LPG 충전소 뒤편이라고 주장한다. 어려서 배댄 것을 보았다고 한다
합정동 이용주 (83)
망건다리
<자료사진> 위는 아산만(평택호) 아래는 1895년 일군이 북상하며 망건다리를 개설하고 건너가는 것으로 보임
이 다리는 청일전쟁후 소사벌전투에서 이긴 일군이 북으로 진격하면서 나무로 만든 다리가 최초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제의 1호선 국도를 개설 하면서 콘크리트 다리로 8~5칸짜리를 부설 했다고 한다. 그 다리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 후 전쟁 때 파괴된 것을 52년에 새로 개설했다고 한다. 성환 안궁리 최용수(79)는 개통식 때 노인들이 모두 걸어서 건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유천리 분들도 동의하며 현재의 다리 밑쪽으로 17가구의 주민들이 살았다고 한다. 일부는 망건다리가 철교라고 하는데 이는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
유천동 김형완(78)
원평나루
원평나루는 팽성을 거쳐 충청수영까지가는 대로상에있는 나루였다. 현재 원평동사무소 앞 대로가 안성천 구제방인데 이 제방 너머를 뚝방너머라고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직선으로 팽성 신궁2리 두리마을로 건너갔다고 한다. 늘 나룻배가 있었다고 한다.
비전동 조정목(79)와 비전동 전명원(78)
군문포
군문포옛터와 원평나루
군문포(軍門浦)는 평택시 군문동에 있었던 포구다. 정확한 위치는 안성천 변을 가로지르는 군문교 아래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이다. 이 포구는 평택현 영역이면서 조선시대 전국10대로 가운데 하나인 충청수영로가 지나는 길목이었으며 안성천을 건너 경기도 진위현에서 충청도 평택현으로 넘어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1905년 1월 경부선 평택역이 군문포와 인접한 통복리(동)에 세워진 것도 포구를 통하여 서해의 물산이 유입되고 평택평야에서 생산되는 양곡의 집적이 쉬웠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군문포는 ‘청일전쟁(1894) 때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주둔했던 곳’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청일전쟁 이전에도 안성천의 가장 중요한 수로교통로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이 같은 지명이 계속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군문포의 본래 이름은 ‘군물포(軍勿浦)’다. 군물포라는 지명은『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나타나지 않고 18세기에 편찬된 『팽성지』에 처음 나타난다. 그 후 1895년에 편찬된 『평택현 읍지』에도 쓰였는데 1899년에 편찬된 『진위군 읍지』에는 ‘군문포(軍門浦)’라고 기록하여 4년 사이에 지명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4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주목되는 것은 1894년의 청일전쟁이다. 앞서 청일전쟁은 아산만과 소사벌 일대에서 시작되었고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의 풍도를 거쳐 아산의 백석포와 군물포로 상륙하여 주둔하였음을 밝혔는데 이 과정에서 바뀌었을 것이다.
주민들의 기억에 의하면 원평나루 근처에 배를 대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군문교 다리가 낮아서 더 이상 배는 올라가지 않았다. 여기는 주로 덕적도에서 배가 들어왔다고 하며 새우젓이나 소금, 어물이 거래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삼성아파트 자리에 우시장과 도축장이 있었다. 현재 한약방 자리에 냉동창고가 있었는데 어물을 보관했다고도하며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냉동창고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생산품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미군에게 공급했다고 하는데 이는 근거가 없는 말아다. 미군의 생활물자는 우리나라에서 공급하는 것이 전무하다. 미국의 수입규정에 한국은 옐로우존으로 먹거리는 절대적으로 수출 할 수 없는 규정이 있다. 미국의 먹거리 수입규정은 지금도 포지티브방식이다.
통복포
통복포터(위)와 갯벌의 흔적(아래)
통복동은 조선시대 진위현 병파면에 속한 갯가로 이로 인해 유래된 지명이 “통복개”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통복리가 되었다.
통복포는 통복천 하류에 있었던 나루이다. 『대동지지』에 ‘진위현 남쪽 30리 지점에있으며, 양성 가천역 하류로 평택으로가는 길과 통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1770년경 편찬된 『팽성지』에는 ‘평택현 관아에서 북쪽으로 8리 지점에 있는데, 진위현과 수원부로 갈라지는 경계다’라고 했다. 통복포의 위치는 통복동 화촌으로 보인다. 화촌은 1974년 이전까지만 해도 경기만의 소금과 새우젓, 굴젓이 거래되던 포구였다.
통복포를 화촌포로 규정하는 데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해동전도(18세기 중반)에 화촌포가 나오는데 그 후에 나온 대동여지도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갈원에서 평택현으로 가는 길이 통복천(勿川)을 건너고 다시 안성천을 건너가는 노정으로 대동여지도에 나온다. 따라서 화촌포가 통복천 끝머리와 안성천이 만나는 지점이라면 통복포는 통복보인 경부선 철길 아래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통복천에 바닷물이 유입된 곳은 현재 수촌마을 까지라고 한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헤엄을 쳤고 게를 잡았다고한다. 수촌마을 과수원에 부녀자들이 밤에 냇갈에 나와 목욕하는 것을 본 일도 있다고 한다.
통복보는 통복천 주변 농지에 물을 대기위한 시설이었다. 바닷물은 때때로 보를 넘어 수촌까지 달려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