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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섶길 9-1코스 원균길

작성자달리마|작성시간22.07.29|조회수83 목록 댓글 0

평택섶길 원균길

 

 

모선제 - 원균장군묘 - 내리마을회관 - 원균생가터 - 양세충효정문 - 덕암캠핑장 - 모선제

약 5km, 2시간

 

 

원균 장군을 모신 사당 모선제

 

 

 

본관은 원주 자는 평중이다

평택 도일동에서 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난뒤 자질이 뛰어나 27세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처 만호로 있을때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다

 

 

 

 

왜적의 침입이 예상되자 육군의 장수에서 경상도 우수영의 수군 절도사로

임명된다, 이순신과 함께 옥포, 당포등지에서 연전연승 했다

그는 특별한 방법으로 매번 적을 이겼는데 우리 함선으로 적선 측면으로

돌진해 적의 배를 부숴 버렸다, 당시 왜적의 배는 삼나무로 아군의 배는 소나무로

우리 배가 더 견고하고 튼튼한 점을 이용한 것이다

 

 

 

원균장군 묘 (경기도 기념물 제57호)

그러나 포상 과정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이 심해 불화가 생겼고

이순신이 삼도수군 통제사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크게 반발했다

1594년 충청병사로 전출됐고 얼마후 전라 병사로 전속 되었다

 

 

 

이무렵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서울로 압송되자

1597년 경상우수사겸 경상도 통제사에 임명되어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을 통제하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터지자 권율 장군과 합동으로 바다와 육지를 지키고 있었으나

권율 장군은 수군이 먼저 나가 싸우라 하고 그는 육지의 주둔지를 먼저

공격해야 섬멸할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조정에서는 간첩 요시라의 간계로

권율의 주장대로 수군이 먼저 수상전을 하도록 명령하는 바람에 

 경상도 전역의 함선 160여척을 이끌고 부산의 적 본진을 급습 하려고

했으나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적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 하였으며

칠천도로 이동해 무방비 휴식상태에서 적의 수륙양면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160척의 배가 12척만 남았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크게 놀라 백의종군 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에 임명한다

  

*자료참고 : 평택시사

 

평택시사에서는 그래도 원균장군의 입장을 많이 고려해준것 같다

 

애마총

원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천리를 달려와 장군의 신발과 담뱃대를 놓고

그 자리에서 죽은 애마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만든 말무덤

그가 타던 애마는 선조 임금이 하사한 말이다

 

 

 

기념관은 코로나 때문인지 문이 닫혀있다

 

 

 

원연과 원사립 부자의 충절과 효성을 기리기 위해 내린 정문이다

원연은 도일동에서 태어나 사마시에 합격 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누산(덕암산)에 성벽을 쌓고 적의 길목을 지키는 한편

유격대를 편성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다,

임란후 공로를 인정받아 연기현감으로 다시 적성(연천)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조선 숙종때 1차 충절정문이 내려졌고, 순조때 이조참의로 추증되고 정문을 다시 건립했다.

 

원사립은 원연의 차남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 하였고 선조 24년 21세 나이로 무과에 급제

하였으며 훈련원주부 등의 관직을 역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관찰사 김성일의

휘하에서 종군 하였으며 그 공로로 김해부사, 평안도병마절제사를 지냈다

퇴직후 고향에 내려와서는 전란때 전사한 양 아버지 원전 묘소에 시묘살이를

3년간 하면서 효성을 다했다

1829년 효자정려가 내려졌고, 그의 생부인 원연과 함께 양세충효정문이 세워졌습니다.

 

 

 

 

덕암호 캠핑장

 

 

 

원주원씨 15공신 정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적과 맞서 싸운 선무공신,

임금을 호위하여 국난을 극복한 호성공신,

이몽학의 난을 평정 하는데 기여한 청난공신으로 원주원씨에게 책록된

56인의 공신중 당시 진위 지역에 거주한 15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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