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 깡깡이 예술마을
경기문화재단에서 실시한 지역문화 콘텐츠 사례학습 및 시민활동가 교류 활성화를 위해
2022. 11. 3 - 11. 4일 까지 1박2일로 부산 영도를 방문 하였다
부산은 많이 가봤지만 대개 기차나 자동차로 갔었지 항공기로 가보기는
이번이 처음인것 같다, 공항가는것이 더 번거로운것 같다
영도는 신라시대에서 조선 말기 까지 말을 키우던 목마장으로 유명했고
우리나라 최초로 고구마 시배지(1764)로 알려져 있다
섬 한가운데 우뚝솟은 봉래산이 태평양으로 부터 불어오는 강풍을 막아준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하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자 영도 연안부에 제염. 정미.
양조, 군수공장과 조선소를 집중 건설했다
대풍포를 매립하고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조선소인 다나카 조선소가 조성된다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부산을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1934년 섬과 육지를 잇는 연륙교인 영도대교를 건설했다
214m의 짧은 다리였지만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도개교로써 당시로는
파격적인 형태와 기능을 가진 교량 이었다
당시 부산 인구가 15만명인데 영도 다리 준공식에 5만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영도 문화해설사로 부터 전반적인 설명을 듣고 현장을 둘러본다
부산대교
영도대교
영도대교가 조선의 아픈 근현대사를 상징하듯 이 일대는 근대 조선역사를
상징하는 곳으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상업시설, 산업시설, 제염, 조선소가 들어섰다
영도 100년 옛길에는 26개의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일본인이 가져온 석불인데 우리의 장승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곳이 유곽거리 였다는데 아무 흔적도 없다
이곳은 에비스지 극장이 있던 자리이고
이곳은 시라이시 제염소가 있던 자리인데 지금은 선박 수리소 이다
중요 지점에는 도로 바닥에 동판으로 새겨 놓았다
깡깡이 예술마을
20세기초 바람이 아닌 발동기(엔진)를 사용해 동력을 얻는 방식으로 배를 만든 다나카
조선소와 나카무라 조선소가 세워졌던 근대 조선산업의 발상지이다
선박이 들어오면 배 외판에 붙어있는 해조류나 녹, 페인트 따위를 사람이 직접
망치를 두둘겨 벗겨냈는데 그때 깡깡 소리가 난다 하여 이러한 작업을 깡깡이질 이라
하였고 수리조선업을 주로 하였던 대평동을 깡깡이 마을로 불렸다
깡깡이 안내센터
이곳에서 유람선을 타고 한바퀴 돌아본다
대풍포를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풍을 평(平)으로 바꾸어
대평동이라 하였고 1970 - 1980년대 원양어업 붐을타고 선박 조선업과 수리 조선업으로
명성을 떨치면서 대평동에서는 못고치는 배가 없다고 하였고
이곳에서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후 조선업의 불황으로 인구가 감소되고 대평동은 남항동으로 편입된다
신기한 선박 체험관
깡깡이 마을의 물양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인선을 활용해 다양한
예술가들의 상상이 더해진 입체적인 선박체험 공간
깡깡이 유람선을 타고 100년의 역사를 지닌 영도 도선의 추억을 회상하며
영도대교
자갈치 시장
배에 매달려 작업하면서 냈던 깡깡깡 소리
옛날 다방 그대로
쌈지공원은 녹지가 거의 없는 깡깡이 마을에 푸른 쉼터를 조성하기 위해
마을 정원사 동아리와 가치예술협동조합이 1년간 정성들여 조성 하였다고 한다
깡깡이 생활문화센터
1층은 마을 주민이 직접 운영하는 카페로 기념품도 팔고 있고
2층에는 100여년에 거친 대평동 수리조선업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2층에 있는 역사 전시관
독일 화가가 2017년에 10시간에 걸처 아파트 벽면에
그렸다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이 벽화의 주인공은 과거 녹슨 배의 표면을 걷어내기 위해 고된 망치질을
했던 깡깡이 아지매 이다. 마을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잘 표현해낸 작품이다
망치소리로 시끄러웠던 깡깡이 마을이 최근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새로운
관광명소로 거듭나면서 깡깡이 예술마을로 조성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