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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화성군청 이장덕 계장 : 용기 있는 공무원 죽이는 사회

작성자피티윤쌤|작성시간15.08.21|조회수2,128 목록 댓글 0

세월호와 용기 있는 공무원 죽이는 사회

 [슬로우뉴스 2014-8-28]

http://slownews.kr/24175


1990년대 후반, 경기도 화성군청 사회복지과에서 부녀복지계장으로 일하던 공무원이 있었다.


지역 경제 망친다고 협박당한 한 공무원


“깨끗한 복장과 정시퇴근하는 게 부러워서 공무원을 선택”했다는 그는 그저 원칙을 지키고 싶었다. 그는 화재에 취약하다며 관내 청소년 수련시설의 진입로 허가 처리를 반려했다(이 때문에 업체 측으로선 수련원의 원활한 운영이 불가능했다).

“진입로를 보완하기 전에는 사용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요즘 말로 치면 ‘암 덩어리 규제를 무기로 경제 활성화 가로막는 무사안일 공무원’이라는 각종 민원에 시달렸다.


허가 내주지 않은 지옥의 2개월


1998년 12월부터 두 달 동안은 지옥이었다. 군청 간부들은 허가를 내주라고 난리를 쳤다. 아예 깡패들까지 찾아와 협박했다. 깡패들을 피해 인근 시청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도망치기도 하고, 협박에 못 이겨 살던 집을 비우고, 아이들과 함께 큰집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끝내 허가를 내주진 않았다.


좌천되다 허가하다 불타다


군청에선 결국 그 계장을 좌천시키고 곧바로 청소년 수련시설에 허가를 내줬다. 그리고 1년도 안 돼 화재가 났다. 유치원생 19명을 포함해 23명 목숨을 화마가 앗아갔다.


국민들은 콘크리트 1층 건물 위에 컨테이너 수십 개를 얹어 화재에 취약한 가건물 형태였다는 걸 알고 충격에 빠졌다. 화성군청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그 계장은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따가운 시선에 무척이나 힘들어했다고 한다.
결국 다음 해 명예퇴직했다.


잊혀진 이름 ‘이장덕 계장’


우리는 ‘씨랜드 화재 사건’을 계기로 획기적인 제도정비가 이뤄졌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서해훼리호,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대구지하철, 씨랜드, 기름유출, 남대문, 세월호 악몽에 시달린다. 그때마다 우리는 ‘시스템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자기 파괴적인 신념을 학습한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 계장을 ‘참 공무원’이라며 칭송했던 우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장덕’이란 이름 석 자를 잊어버렸던, 잊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사회의 조직적 망각 시스템도 한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현장을 잘 아는 공무원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주는 개혁을 했다면, 국민안전을 위한 더 엄격하고 촘촘한 규제를 만들고 정비했다면, 공공성을 내팽개친 공직자를 고발할 수 있는 ‘호루라기’를 쥐여줬다면 어땠을까. 하다못해 일부러라도 이장덕 계장을 이장덕 과장으로, 이장덕 국장으로 승진시켰다면 어땠을까.

원칙을 지키는 소신과 용기를 지닌 공무원이 출세한다는 학습효과라도 줬다면, 세월호 참사로 뼈저리게 깨닫게 된 ‘시스템 붕괴’에 온 국민이 절망하는 사태를 어쩌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지도자 ‘교시’ 받아쓰기, 남북이 따로 없다


그럼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 왜 우리는 이장덕 같은 공무원이 ’영웅‘ 대접을 받는 시스템을 만들지 못하는가.

제도에 따라, 상급자 눈치나 지시만 기다리지 않고 공익에 근거한 일 처리는 왜 안 되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현장을 책임지는 공무원에게 실질적인 권한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의견 청취도 하지 않는 시스템(제도)과 관행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지도자는 원고지 수십 장 분량으로 ‘깨알 교시’를 내리고, ‘부하들’은 한자라도 놓칠세라 수첩에 받아 적는다. 여기엔 남과 북이 따로 없다.




“박근혜 정부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풍경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하는 주요 회의에서 참석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 채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 달뉴스, 후진적 교육 현장 청와초교…매일 아침 받아쓰기 시험 (사진: 좌측 달뉴스, 우측 서울신문)



“오바마가 이야기하고 있고 장관들은 그를 주시하며 조심스럽게 경청하고 있다. (…중략…) 받아 적는 장면이 특히 나오지 않는 사진을 고른 게 아니다. 찾아보면 대부분 이렇다.”– 들풀, ‘사관이 된 장관들’ 중에서 (사진: zimbio.com)


‘해바라기’에게 책임과 용기?


대통령이 ‘규제는 암 덩어리’라고 규정해 버리고 나면 일선 공무원이 인허가를 안 내줄 수 없다. 안전은 그다음 문제다. 모든 공무원을 ‘해바라기’로 만드는 제도와 공무원 조직 내부의 관행에서 공무원에게 책임감과 용기를 요구한다면 그게 오히려 넌센스다. 꿈 깨시라. 언감생심이다.


미국, 현장 책임자에게 전권 주는 사고지휘체계(ICS)


미국은 1978년 설립된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중심으로 일원화 체계 속에서 통합적으로 위기를 관리한다. 관리청은 국가적 재난 발생 시 해당 주의 주지사가 요청할 경우 대통령 승인을 받아 해당 재난을 관리한다. 반면 우리는 상설기구 없이(겸직) 부서별로 업무를 수행하는 분산적 위기관리방식이다.

물론 미 연방재난관리청도 카트리나 허리케인(2005) 당시 미숙한 대응으로 수장 마이클 브라운이 사임하거나, 캘리포니아 산불(2007)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연방재난관리청 직원을 기자인 척 심어 가짜 질문을 해 여론의 질타를 받은 적 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현장 책임자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미국의 사고지휘체계(ICS)다. 그런 시스템이 있기에 9.11테러 당시 뉴욕시 소방본부장이 현장 지휘를 총괄할 수 있었다. 적어도 안전관리에 대한 전문성이라곤 전혀 없는 안전행정부가 콘트롤타워 자리에 앉아 구조자 숫자 세기도 버거워하는 안쓰러운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무원도 고달프다


공무원을 조롱하고 비난하기는 쉬운 일이다. 대한민국 대표 공무원인 대통령이 앞장서서 공무원을 심판하겠다고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을 이익은 무엇인가.

사실 ‘일 안 하는 공무원’이란 관념은 사실 공무원을 비난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하다. 작년(2013년) 사회복지직 공무원의 연이은 자살 사례에서 보듯 대다수 공무원들은 일에 치여 산다.

그럼에도 공무원은 국민들에게 비난받는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원칙과 소신? 어기면 살고 지키면 죽는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 공동체를 이끌어야 할 ‘리더’라는 자들은 제일 먼저 탈출했다. 어른의 말을 믿고, 규칙을 따랐던 학생들은 비극을 당했다. 참사를 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는 고위 공무원들은 심각한 무능력과 무책임, 거기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곤 찾아보기 힘든 무신경까지 드러냈다.

그 중심에는 뒷짐만 지고, 현장을 장악하지 못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와 공무원 조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이유로 모든 공무원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종자 가족들이 “누구 하나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정부를 성토한다는 것은 사고 발생 초기는 물론이고 지금도 여전히 총괄조정과 지휘를 할 수 있는 ‘지도부’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건 개별 공무원이 손톱 밑 가시를 뽑겠다고 혹은 암덩어리 척결에 나선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현장엔 실권 없고 ‘높은 분’은 현장 모른다

결국 고민을 제도(혹은 시스템)와 정치로 확장해야 한다.

우리에겐 황제라면이나 비리, 무능력 공무원만 있는 게 아니라 이장덕 같은 존경받았어야 할 공무원도 있었다. 현장을 잘 아는 공무원에겐 실권이 없고, 고위직들은 현장을 모른다.


‘이장덕’에게 권한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이장덕 같은 공무원에게 권한과 자율권을 주고, 그런 공무원들과 토론할 준비가 돼 있는가.

혹시 우리는 지금도 ‘공무원은 죄다 생선가게 고양이’라는 편견에 빠져 어디선가 백마 타고 나타나 생선가게 고양이를 심판할 왕자님(혹은 공주님)을 기다리는 건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는 선거를 주기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열망과 냉소를 목욕탕에서 ‘칠냉팔온’ 하듯 되풀이하는 건 아닐까.

이장덕 같은 용기 있는 공무원이 명예퇴직해야 하고, 빠르게 잊히길 강요하는 나라에서 ‘공무원’을 생각한다. 여전히 묵묵히 일하고 있을 이 땅의 수많은 ‘이장덕’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원칙과 소신으로 현장을 누비는 날을 상상한다.

* 이 글에 나오는 일부 문장은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 ‘서울신문’에 썼던 여러 기사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밝힙니다. (필자)



공무원과 국민의 생명: 켈시를 영웅 만든 사회, 이장덕을 죄인 만든 사회
필자: 키젤대위 작성일: 2014-04-22

http://slownews.kr/23730


프랜시스 켈시라는 미국의 여성공무원이 있었다. 소속은 FDA 즉 미국식품의약국이었고, 하는 일은 신약에 대한 심사 후 판매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고용되자마자 첫 과제로 주어진 일은 임산부의 입덧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어떤 신약이었다. 켈시는 독일에서 개발한 이 신약을 미국에서 판매해도 되는지를 심사했다.


만능 ‘임신증후군’ 신약, 유럽서 선풍적 인기


약의 이름은 탈리도마이드. 입덧뿐만 아니라 두통, 불면증, 식욕저하 등 거의 모든 임신증후군에 잘 듣는다는 소문에 유럽 각국에서는 선풍적인 반응을 보였고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진입을 코앞에 둔 상태였다.

제약회사는 이미 유럽 각국에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으므로 미국에서도 의례적인 심사과정을 거쳐 즉시 판매 허가가 나올 것을 기대했지만, 담당자인 켈시 박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 약이 사람에게는 수면제 효과가 있는 반면에 동물에게는 효과가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영화 [식코]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켈시는 제약회사 측의 집요한 요구에도 차일피일 시간을 끌며 승인 허가를 미루었다. 영화 [식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미국 제약회사들의 로비와 압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가며 승인 허가를 질질 끌었다


켈리의 신중함, 미국의 수많은 임산부와 아이 구하다


그러던 차에 유럽 각국에서 팔다리가 없거나 짧은 해표지증(혹은 해표상지증; Phocomelia Syndrome)을 가진 기형아들의 출산이 급증했다. 역학조사 결과 거의 모든 경우가 산모가 임신 중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당연하게 미 당국은 탈리도마이드  판매를 허가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8천 명이 넘는 기형아들이 태어났지만, 미국에서는 켈시 박사의 소신 덕택에 단 17명밖에 태어나지 않았다. 켈시 박사는 “서류를 깔아뭉갠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다”고 겸손해했지만, 미국 정부는 대통령상으로 그의 강직한 업무처리에 보답했다.


1962년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켈시에게 대통령상을 수여하는 장면. 위키백과 공용


한국판 켈시 ‘공무원 이장덕’


‘이장덕’이라는 한국의 여성 공무원이 있었다. 소속은 화성군청 사회복지과였고, 하는 일은 유아ㆍ청소년용 시설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담당 계장으로 근무하던 1997년 9월, 관내에 있는 씨랜드라는 업체는 청소년 수련시설 설치 및 운영 허가를 이장덕에게 신청했다.

다중이용 시설 중에서도 청소년 대상이므로 철저히 안전대책이 마련되어야 함에도 실사 결과 콘크리트 1층 건물 위에 52개의 컨테이너를 얹어 2, 3층 객실을 만든 가건물 형태로 화재에 매우 취약한 형태였다.


이장덕의 소신, 묻히고 짓밟히다


당연히 신청서는 반려되었지만, 그때부터 온갖 종류의 압력과 협박이 가해졌다. 직계 상사로부터는 빨리 허가를 내주라는 지시가 계속 내려왔다. 민원인으로부터도 여러 차례 회유 시도가 있었고 나중에는 폭력배들까지 찾아와 그와 가족들을 몰살시키겠다는 협박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끝내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1998년 화성군은 그를 민원계로 전보 발령하였고, 씨랜드의 민원은 후임자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씨랜드 측과 관련 공무원들이 앓던 이 빠졌다고 좋아한 지 1년도 채 못되어 씨랜드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였고 결국 19명의 유치원생을 비롯한 23명이 숨지는 참극으로 끝났다.


상식과 소신을 지켜주지 못한 사회의 비극


똑같이 소신에 찬 공무원이었지만 한 사람은 비극을 막고 다른 한 사람은 비극을 막지 못했다.

한 사람은 영웅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지만, 한 사람은 경찰에 제출한 비망록으로 동료들을 무더기로 구속시켰다는 조직 내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한 사람은 90세까지 근무한 후 은퇴하자 조직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하였지만 한 사람은 현재 무얼 하며 지내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그의 소신을 지켜주지 못한 죄를, 그가 일깨워준 교훈을 잊은 죄를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아이들이 대신 감당하고 있다. 우리가 뭐라도 해야 한다면 출발은 여기부터다.

* 미국 공무원 켈시 사례와 한국 공무원 이장덕 사례는 양 국가의 공무원 조직 전체를 대변하는 사례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공무원의 신중함과 상식 그리고 소신을 켈시 사례에선 국가와 사회가 지켜줬습니다. 하지만 이장덕 사례에선 그렇지 못했죠. 그 결과는 이 글에서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편집자)



'청백리 바람'의 주인공

이사람/이장덕 화성군청 민원계장

한겨레21 1999년 07월 22일 제267호


“이장덕 정신을 사수하자.”

유치원생 등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기도 화성군 청소년수련원 ‘씨랜드’ 화재참사 이후 얼굴을 들지 못하는 중·하위직 공무원들 사이에 불고 있는 새로운 ‘청백리 바람’이다.

이장덕(40·여·화성군청 지적과 민원계장)씨는 97년 7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화성군청 사회복지과 부녀복지계장으로 일하면서 ‘씨랜드’ 인·허가를 담당했던 지방 6급 공무원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규정 미비로 씨랜드 허가를 내주지 않고 버티다 상사의 압력과 폭력배들의 협박에 시달렸고, 끝내 보직을 내놓아야 했다.

최근 경찰에 의해 공개된 그의 비망록은 공직사회의 뿌리깊은 비리 관행과, ‘참공무원’이 되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낱낱이 보여줘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는 씨랜드쪽으로부터 가족몰살 위협을 받을 때마다 남편(43·공무원 6급)과 1남1녀를 친척집으로 피신시키면서도 비망록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비망록이 공개된 과정은 극적이다. 참사 뒤 그는 주무 계장으로서 경찰의 첫번째 수사대상이었다. 경찰은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그의 집을 뒤졌고, 이씨는 급히 비망록을 찢어 휴지통에 넣으려다 경찰에 빼앗겼다. 그의 비리 혐의를 담고 있을 것으로 여겨졌던 비망록은 오히려 그의 결백함을 증명하는 상징이 됐다. 하지만 이씨는 경찰 수사 뒤 “지금도 (비망록 때문에 자신의 상사가 구속된 데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화성군청엔 “괜히 비망록을 써서 다른 사람에까지 피해를 입히냐”는 분위기도 일부 있다. 우리 공무원 사회가 얼마나 ‘의리를 가장한 공범 의식’에 물들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이씨는 경찰 수사 이후 출근하지 않고 있다. 휴가중이다. 공직생활 20년째를 맞은 이씨는 최근까지 명예퇴직을 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공직을 물러난다면 또하나의 부끄러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요즘 고민에 빠져 있다.



용기 있는 공무원' 이장덕 계장 육성고백

여성동아. 2000년 4월호

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_donga/200004/wd2000040330.html


“내가 명예퇴직하는 이유 & 씨랜드 참사 당시 상황과 그 후 내게 일어난 일들”

□ 글·이혜련 기자


3 월31일자로 20년8개월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공직생활을 끝내는 것에 대해 미련은 없지만 유가족들에게 죄송할 뿐이다. 지난해 씨랜드 사건 이후 지금까지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3남매를 기르고 있는 애엄마로서 그때 일을 생각하면 정신이 멍해지고 심장이 막히는 것 같은데, 아이들을 잃은 유가족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이 글을 통해 피어보지도 못하고 희생된 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 한분 한분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지난 2월초 명예퇴직하겠다고 하자 동료들은 “왜 그만두려고 하느냐”며 만류했다. 하지만 남편과 아이들은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젠 쉬라”며 위로해주었다.

사 실 씨랜드 사건 때문에 명예퇴직을 하게 된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직장생활을 해야 했다. 공무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대학 공부에 대한 꿈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직장생활로 20년 연금이 해당되는 1999년 9월에 명예퇴직을 하고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99년 봄에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했다.

그 런데 99년 6월30일 씨랜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날 아침 라디오 뉴스에서 화재로 어린이들이 숨졌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숨이 막히고 가슴이 저려오면서 잠시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가처리 과정에서 차라리 내가 죽더라도 불허가 처리를 했어야 하는 건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하고 미칠 것만 같았다.


‘네 집이 어딘지 알고 있다’는 협박에 아이들을 피신시켜


그 때 나는 화성군 부녀복지계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씨랜드 수련원과 관련된 내 업무는 건물 자체가 아니라 수련원 진입로와 관련된 것이었다. 청소년수련원 설립과 운영을 감독하는 부서는 한 곳이 아니라 건축, 체육, 부녀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담당한다. 따라서 나는 인·허가 과정 전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당시 씨랜드 수련원은 건물이 완공되어 등록신고까지 끝낸 상태였다. 그런데 수련원 설치·운영 허가신청이 들어와 현장에 가보니 진입로가 너무 좁았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수련원이기 때문에 단체방문객을 실은 대형버스가 드나들 것은 뻔한데,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피할 수도 없을 만큼 도로가 좁았다. 만에 하나 차가 길 아래 논으로 떨어진다면 대형사고가 일어날 것 같았다.

그래서 진입로를 보완하기 전에는 사용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수련원 진입로가 몇 미터 이상 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씨랜드 수련원 사장과 위에서는 “법적 근거도 없는 일을 네가 뭔데 그러느냐”고 야단이었다. 하지만 나는 법적인 근거가 없더라도 공무원이 안전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며 허가를 안내주고 버텼다. 그 과정에서 수련원 사장이 돈봉투를 건네려고 하고, 깡패를 동원해 협박을 하고, 위에서는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공개되었던 비망록은 당시 너무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이 들어서 그때그때 일을 업무수첩에 기록해놓은 것이었다. 98년 12월부터 두달 동안 정말 엄청나게 시달렸다.

박 재천 씨랜드 수련원 사장과 깡패들이 사무실로 찾아왔을 때 너무 무서워서 남편이 일하는 오산시청으로 피신했다. 오산시청이 화성군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기도 하지만 위급한 상황이 되니 남편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들이 쫓아와서 붙잡을 것 같아서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뛰는데, 다리가 후들거려서 빨리 뛸 수도 없었다.

또 하루는 박재천 일행이 폭언을 퍼부으며 “네 집이 어딘지 다 알고 있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까 두려워 아이들을 큰집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혹시 그들이 우리집 근처에서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 동네 사람들에게 집 근처를 살펴봐달라고 한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깨끗한 복장과 정시퇴근하는 게 부러워 공무원 선택


그런 일을 겪으며 이렇게까지 하면서 공무원 생활을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가 들었고,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결 국 나는 도로 중간에 버스가 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서를 받고 씨랜드 수련원 설치 허가를 내주었고, 곧 부녀복지계를 떠나 민원계로 자리를 옮겼다. 씨랜드 참사는 도로가 아니라 부실한 건물 때문에 발생했지만 어쨌든 허가를 내주었다는 점에서 나는 죄를 지은 것이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다른 일은 모두 최선을 다해 처리했지만 이 일로 인하여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셈이다.

어 른들의 잘못으로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목숨을 잃다니… 요즘 각종 행정 절차와 규제가 완화되고 있지만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사안은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담당했던 수련원 진입로만 해도 그렇다. 수련원 수용인원이 몇 명이라는 것이 나오면 차량이 몇대가 오가고, 도로가 어느 정도 넓이가 되어야 하는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런 규정이 세밀하게 정해져 있어야 하는데 관련법이 너무 미비했다.

나는 1979년부터 비봉면사무소에서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다. 수원에서 자취하며 수원여고를 다녔는데, 자취집이 경기도청 바로 아래에 있었다. 깨끗한 복장과 정시에 출퇴근하는 공무원들의 모습이 참 좋아보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어차피 대학진학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라 공무원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두 살 위인 언니와 함께 시험을 보았는데, 2차시험에서 언니는 떨어지고 나만 합격해서 언니에게 굉장히 미안해 했던 기억이 난다.

공무원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책임감을 가지고, 국민을 내 부모, 형제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대하려고 노력했다. 공무원 하면 월급은 적어도 오전 아홉시까지 출근해서 오후 여섯시면 퇴근하는 ‘편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공무원이 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공무원 생활을 해보니 그것은 일부 공무원의 모습이었다. 밤늦게까지 일할 때도 많고, 업무처리하는 데 어려운 일도 적지 않았다.

과천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정부종합청사에서 근무하는 아저씨의 주민등록번호가 잘못되어 주민등록증을 재발급해야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까지 사용하던 번호인데 왜 갑자기 틀린다고 하느냐며 주민등록번호를 정정하게 되면 운전면허증, 재산관계 서류 등을 모두 바꿔야 하지 않느냐며 고치지 않겠다고 야단을 했다. 지금은 불편하지만 어차피 정정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번호 부여지인 마산시청에 전화를 하고 서류를 보냈다. 그런데 마산시청에서는 번호 부여사실이 없다는 회신이 왔다.

그 때 아이가 한돌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지만 내 임무는 직접 가서라도 확인하고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하루 휴가를 내게 해 함께 밤열차를 타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새벽에 마산에 닿아 해장국을 먹고 아홉시에 마산시청에 들어가 대장을 모두 확인해서 서류를 찾을 수 있었다.

드디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같은 공무원끼리 자세히 확인해보지 않고 회신을 해서 경기도에서 마산까지 일부러 간 생각을 하니 화가 났다. 결국 감사실장이 사과를 했지만 온몸의 기운이 쭉 빠졌다. 과천으로 돌아와서 민원인에게 직접 갔다 왔다는 사정을 말해주고 주민등록번호를 정정해야 한다고 설득하니 그제서야 고생했다며 선선히 응해주었다.

나는 면사무소에 오래 근무했는데, 여성 공무원들이 겪는 문제 중 하나가 출산휴가였다. 법적으로는 60일의 휴가가 보장되었으나 실제로 현장에서는 30~40일의 휴가만 허가되었다. 하지만 나는 두 아이를 낳을 때마다 법에 명시된 60일의 휴가를 신청했고, 상사인 부면장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상사는 일단 40일만 하고 상태를 봐서 더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나는 “죄송합니다. 60일로 해주시면 몸상태가 좋아지는 대로 앞당겨서 출근하겠습니다”하고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는 것만큼 주어진 권리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법학공부 하며 봉사활동할 계획


남 편은 첫 근무지인 비봉면사무소에서 일할 때 만났다. 그리고 만난 지 4년 뒤인 스물여섯살 때 결혼을 했다. 많은 직장여성들이 육아와 가사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만 다행히 나는 시어머니와 손윗동서의 도움으로 편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작은아이가 열살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주셨다. 또 손윗동서는 밑반찬은 물론 김장까지 해서 보내주셨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요리를 잘 못하는 편이다.

씨랜드 사건이 나고 언론에 비망록이 소개된 후 전국에서 수십 통의 편지, 전보, 전화를 받았다. 책을 보낸 분도 있었고, 사무실로 찾아오신 분들도 많았다. 또 전직 국회의원인 최락도님, 충북 옥천도서관장 안후영님, 전 감사원 감사관 이문옥님 등은 우리 부부를 초대해 위로하고 격려해주셨다.

그때 받은 편지 내용을 몇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무원은 정부의 창이요, 대통령의 대리자라는 신념없이는 스스로 물러나서 다른 사업으로 나가야 한다’

‘사람의 행동이 의(義)에 부합할 때는 어떤 불인(不仁)을 받아도 이를 뿌리칠 수 있다’

‘떳떳한 길을 지켜 변하지 말라’

‘몹시 괴로움을 받으면서 이 시점에서 퇴직한다는 것은 정의를 유기하는 일이다. 정의로운 사람이 많아야 우리 사회가 지탱된다’….

뜻하지 않게 상패도 받았다. 한국범죄방지재단으로부터 격려패와 격려금을 받았고, 지난해 연말에는 인천일보사의 ‘99 올해의 인물’로 선정돼 올해의 인물패와 순금메달을 받았다.

많은 분들의 따뜻한 관심을 받으면서 힘이 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일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명 예퇴직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앞으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해 시작한 방송통신대학 공부 외에는 아직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방송통신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중인데, 중학교 때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라 무척 재미있다. 대학 진학에 대한 꿈은 20년 동안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들 기르고 직장생활하느라 선뜻 엄두를 내지 못했다.

퇴직을 하고 나니 출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지 않아서 좋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나서 집안일 좀 하고 방송 테이프를 듣다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큰 딸은 20년이 넘게 일하던 엄마가 집에만 있으면 오히려 힘들지 않겠느냐며 걱정을 해준다. 둘째, 셋째도 씨랜드 사건으로 힘들 때 엄마를 쉬게 하려고 집안에서 말소리도 줄이던 속 깊은 아이들이다. 그동안 직장생활하느라 엄마노릇도 제대로 못했는데 애들에게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큰딸이 고2, 둘째아들이 고1 그리고 막내딸이 중2다. 이제 엄마에게 매달릴 나이는 지났지만 뒷바라지는 더 힘들 것 같다. 사실 그동안 직장생활을 계속했던 데는 경제적인 이유도 컸다. 공무원 월급으로 혼자 벌어서는 빚지지 않고 살기 힘들다. 20년을 기다려 명예퇴직을 한 것도 근속기간이 20년이 넘어야 연금이 월 80만원 정도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직장에 매어서 앞만 보고 살아왔으나 앞으로는 어려운 이웃과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봉사활동도 할 생각이다.


“조카들 뒷바라지까지 하며 공무원생활 25년 만에 24평 임대 아파트 마련”


명예퇴직 신청을 하고 한달간 특별휴가중에 있는 이장덕씨를 집으로 찾아갔다. 지난해 씨랜드 사건 직후 남편 이호락 오산시청 회계과 계장을 인터뷰한 후 이계장 부부와는 친밀감이 있었다.

이 호락 계장은 25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고, 이장덕씨는 20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최근에서야 24평 임대아파트를 장만했다. 이호락씨는 둘째 아들이지만 요절한 형 대신 부모를 모셨고, 조카들까지 돌보았다. 이장덕씨에게 혹시 속으로는 속상하고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시어머니와 손윗동서 덕분에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며 공을 돌렸다. 부부는 닮는다는데, 두사람은 온화한 인상에 조용한 말씨가 아주 닮았다.

딸 둘이 같이 쓰는 방을 들여다보니 벽에 ‘성실하고 정직하며 바르게 살자’는 가훈이 걸려 있었다. 이호락씨가 직접 붓글씨로 쓴 것이라고 했다. 이호락씨는 할아버지가 서당 훈장이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부터 동몽선습, 통감, 명심보감까지 공부했다고 한다. 덕분에 방송통신대에 다닐 때 한자가 가득한 교재를 읽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방송대를 마치고 98년에는 아주대 공공정책대학원을 졸업한 학구파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계장 부부를 만나면서 정말로 가훈을 실천하며 사는 가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장덕씨가 비망록을 통해 보여주었던 불의에 저항했던 모습도 그런 생활 속에서 나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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