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군과 성군
어스름한 역사의 지평 위로 두 개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만물을 태워버릴 듯 광기 어린 열기를 내뿜고,
다른 하나는 대지의 숨결을 어루만지며 잠든 생명을 깨웁니다.
전자를 혼군(昏君)이라 부르고 후자를 성군(聖君)이라 부릅니다.
혼군의 시대는 고립된 성벽과 같습니다.
군주의 눈은 아첨이라는 안개에 가려져 세상의 허기를 보지 못하고,
그의 귀는 간신들의 감언이설에 갇혀 백성의 신음을 듣지 못합니다.
그에게 권력이란 백성을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잔입니다.
잔이 넘칠수록 백성의 눈물은 흐르고,
궁궐이 화려할수록 민초의 한숨이 늘어납니다.
혼군이 다스리는 나라는 겉으론 화려하지만, 서서히 침몰하는 난파선과 같아서,
밤은 깊으나 새벽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성군의 시대는 막힘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성군은 자신의 보좌를 가장 낮은 곳에 둡니다.
높은 곳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그의 통치는 백성의 아픔이 고인 곳으로 자연스레 스며듭니다.
그는 백성의 근심을 자신의 불면으로 바꾸고,
백성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성군의 언어는 서슬 퍼런 명령이 아니라,
시대를 읽는 혜안과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공감에서 나옵니다.
그가 지나는 길마다 법도(法道)는 향기가 되어 퍼지고,
억눌렸던 재능은 봄날의 새싹처럼 피어납니다.
성군이 다스리는 나라는 비록 화려하지 않아도 온기가 끊이지 않고
백성의 웃음소리가 장엄한 음악처럼 들려옵니다.
혼군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권세를 확인하지만,
성군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경계합니다.
혼군은 역사를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무대로 여기나,
성군은 스스로 역사가 잠시 빌려준 도구로 여깁니다.
역사의 강물은 끊임없이 흐릅니다.
혼군의 이름은 낡은 종이 위에서 부끄러운 얼룩이 되어 사라지지만,
성군이 남긴 덕치(德治)의 향기는 세월을 건너 우리 곁에 머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화려한 영웅이 아닙니다.
차가운 권력의 문법이 아닌, 따스한 인문의 온기로 세상을 보듬는 성군의 마음입니다.
어둠을 탓하기보다 스스로 등불이 되어 길을 비추었던 그 고결한 뒷모습이 그리운 계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