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이 성경 야고보서는 좀 특별한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은 오직 믿음을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해 강조를 해왔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약화 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우리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운 기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데 믿음이 있는 자는 행위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된 믿음은 반드시 삶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행동을 강조하는 이 야고보서는 좀 특별하면서 우리들에 귀한 은혜를 줍니다.
이 야고보서는 저자가 예수님의 형제라고 대체로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야고보가 둘이 있었는데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야고보 혹은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 야고보 중에서 한 사람이 이 글을 썼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의 사건 전까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시대에 아주 역동적으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오늘 이 야고보서 1장을 통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신앙에 대해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첫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야고보서 1:22에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이 말씀을 듣는 당시 12지파 유대 기독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성도들은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오늘날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그리고 기독교 방송을 통해 얼마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이 우리 문자로 번역이 되어 언제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통로로 많은 말씀을 듣습니다.
물론 그 말씀을 많이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19절 말씀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기는 속히 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잘 듣고 빨리 듣고 말씀을 믿고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안 듣는 것이 문제이지 말씀을 잘 듣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듣고 알아야 신앙생활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구원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다 듣고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없으면 그 말씀을 듣고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중요한데 행하는 것이 없으면 열매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22절에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하였습니다. 말씀을 다 듣고 알기는 아는데 행하지 않으니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말씀을 모른다면 모르고 행하지 않았다고 하면 죄가 작지만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23절에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기는 하는데 행하지 않은 사람을 거울 보는 사람과 비유로 했습니다. 자기 얼굴을 거울을 통해 왜 보겠습니까? 무엇이 묻지는 않았는지 머리는 바르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머리를 바르게 단장을 하고 때로는 여자분 같으면 화장을 고치기도 하고 모습을 단정하게 합니다.
그런데 거울을 보았는데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닦지를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것 같으면 거울을 왜 보겠습니까! 24절에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모습을 보고 옷에 무언가 묻었는데 잊어버리고 다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렇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기는 듣는데 행하지를 않으면 거울을 보고 검정을 보기는 보았는데 잊어버리고 닦지를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래서 행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았을 때 그 말씀을 내 마음에 담아두고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 아닌지 살펴보고 이전에는 내 마음대로 살았다 하더라고 말씀을 듣고 나서는 나의 모습을 변화시켜 그 말씀을 따르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은 살아서 역사를 다음 때문입니다. 나무가 이렇게 작은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살아 있는 나무는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도 자라고 그 사람의 삶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아멘
25절에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아멘 만일 설교를 통해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라고 설교를 들었다고 합시다. 그 설교를 듣고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많은 응답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고 은혜의 간증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도 기고하지 않으면 기도응답도 없을 것이고 기적을 체험하지도 못할 것이고 삶은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됩시다.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게 되지만 참 믿음이 있는 자는 작은 일에도 실천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자는 참 믿음의 성도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둘째, 말씀을 듣고 말하는 것을 조심하라!
26절 말씀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며 실천하는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언어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시며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서 말을 사용합니다. 언어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의사소통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말이 없으면 얼마나 소통이 안 되겠습니까! 그래서 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말을 하는데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배우고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말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으로 노래하고 고백합니다. 또한 말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또 예배를 드립니다. 아멘
그런데 그렇게 귀중한 말씀의 도구를 조심하지 않아 자기 혀에 재갈물리지 않으면 크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이 말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신앙의 말이 나오면 좋겠는데 우리 인간의 속에 있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남을 미워하며 시기하는 죄악이 말로 나오면 서로 상처를 주고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 말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이 신앙을 실천하는 것 중에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항상 신앙의 말을 하며 항상 주 안에서 복된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혀로 형제를 비판하거나 이간질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혀를 재갈물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재갈물리다’는 말은‘칼리나고게오’라는 말인데 ‘말의 굴레를 씌우다. 고삐를 매다’라는 뜻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서 고삐를 달아 말 탄 자가 오른쪽 왼쪽으로 조정을 합니다.
어릴 때 소를 키우는 것을 보면 소코에 코뚜레를 답니다. 그리하여 어린 주인이라고 소고삐를 잡고 당기면 소가 서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소고삐가 없으면 그 큰 소가 힘이 센데 자기 마음대로 가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밭을 갈고 일을 하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작은 혀가 온 몸을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혀는 작은 것이지만 우리 온 몸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말이 그 사람의 인생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배를 운행하면 타가 있는데 조타실에서 운전을 하면 배 뒤편에 있는 타가 움직여 그 큰 배가 좌우로 움직입니다. 타는 작은 것이지만 그 큰 배의 방향을 움집입니다.
산에 불이 날 때 작은 불씨가 시작되어 온 산을 태우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작은 것이 큰 산을 지배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언어가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말을 조심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언어를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지 몇 주 만에 갈 수 있는 가나안 땅에 40년이 걸렸습니다. 또한 그들의 말대로 광야에서 다 죽고 싶다고 해서 다 죽었습니다. 대신에 그 자녀들이 성장하여 가나안 땅에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말을 하여 가나안 정복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도교인은 말씀을 듣고 신앙이 무장되어 우리 언어생활이 바뀌어야 합니다.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우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마음에 담았다가 말씀의 언어를 사용하고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아멘
셋째, 참된 경건은 약한 자를 돕는 것입니다.
27절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그 원어는 ‘드레스케이아’라는 말인데 영어로는 ‘relision’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즉 ‘종교,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참된 종교선, 신앙심은 무엇인가? 참된 신앙의 경건성을 가진 사람은 약한 자를 돌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라고 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신약이나 구약이나 늘 약한 자를 상징합니다. 항상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약한 자들을 돌보고 있습니까? 복음송 가사처럼 혹시, 듣기는 하고 말은 하는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닙니까? 우리는 작은 것이라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
고아는 부모가 없기 때문에 도울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만일 고아를 괴롭힌다면 그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과 같습니다. 고아를 돌본다면 그 아버지에게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과부는 남편이 없기 때문에 보호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약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여자 중에서 강한 자가 사회에서 이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편 없는 여인이 가정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나그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자신의 집이 없기 때문에 보호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 성도는 약한 자들 돌보아야 합니다. 특히 그런 약한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였을 때 돕는 일을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환난 당한 사람들을 돌보는 자는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아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실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듣기는 하는데 다 알고 있는데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면 말씀을 들었다면 실천하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자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타락하고 부패합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사람은 세상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예화) 연어의 귀환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우리는 세상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연어는 냇가에서 자라서 큰 바다로 가서 산다고 합니다. 큰 바다에서 마음껏 살다가 산란을 할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냇가의 흐름을 거슬러서 위쪽으로 올라갑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물을 거슬러 헤엄쳐 올라갑니다. 산란을 하여 후세를 위해서 희생을 하고 죽습니다. 살아 있는 연어는 끝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나 죽은 연어는 물에 떠서 내려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따라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죽은 연어처럼 물에 떠내려가는 자가 아니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살아 있는 자들이며 깨어 있는 자들입니다. 아멘
결론)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다 가르치신 후에 마태복음 7:24~25에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서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살면 반석위에 기초를 하여 집을 지은 자 같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리고 창수가 나서 그 집에 부딪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기초가 반석 위에 놓여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세상의 풍파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말씀대로 살아가면 절대로 그 신앙과 인생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다 듣고 배우기도 하였는데 그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습니다. 창수가 부딪치면 그 집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