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오늘 본문은 아삽의 시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는 다윗 시대의 찬양인도자이며 시인이네요.
다윗과 조금 결이 다른 것은,
다윗은 직접 겪은 일이 워낙 많다 보니
개인의 삶과 연관된 고백과 찬양을 드렸다면,
아삽은 그를 둘러싼 사회의 부조리와
악한 이들의 악행에 대한 고뇌와 성찰로 채워진 듯합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의 마음도 요동을 칩니다.
악행이 아무런 저지 없이 저질러질 때는
그 부조리함 때문에 거의 하나님께 원망하듯 소리칩니다.
‘큰소리 탕탕 치며
거친 말로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자들.
사람들이 저들의 말을 귀담아듣는다니, 기막힌 일 아닌가?’ (73:9~10)
지금 시대, 우리나라 광화문을 채운 사람들이 연상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시간에
‘행동’하십니다.
‘주께서 저들을 미끄러운 길에 두셨고
저들은 끝내 미혹의 수렁에 처박히고 말 것임을.
눈 깜빡할 사이에 닥치는 파멸!
어둠 속의 급한 굽잇길, 그리고 악몽!’ (73편 17절 이하)
‘잘못을 저지른 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고
그분을 함부로 대할 자 아무도 없도다.’ (76:12)
하나님은 어떤 악행도 끝내 유야무야로 넘기지 않으십니다.
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께 가져와 돌이키지 않고
그것을 소신처럼 행하는 이들은 파멸에 이릅니다.
교묘히 이생에서 큰 대가 없이 통과하여
쾌재를 부른다 해도,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오늘 마음에 깊이 꽂히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뚝 서서 모든 일을 바로잡으시니
이 세상의 가련한 이들이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본문의 대목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나의 존귀함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했다면,
그처럼 존귀한 타자를 품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약자에 중점을 두는 것은
강자보다 존재가 더 귀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짓밟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사랑이
더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걸어오면서
존경하는 하나님의 목자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삼중축복 — 영적 구원, 육체의 건강, 물질적·생활적 축복’은
어려운 시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거기에 타자와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본질과 부산물을 분별하고
삶에 적용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하나님을 향한 저의 본질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표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저에게 가장 소중한 것,
제 주변의 타자와 이웃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부산물로 채워질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 묵상은 아래의 말씀으로 마치려 합니다.
‘내 피부는 처지고 내 뼈는 약해져도,
하나님은 바위처럼 든든하고 성실하십니다.’ (73:26)
내 피부가 처지고 뼈가 약해지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위처럼 든든하고 성실하시다는 사실에 대한
신뢰가 더욱 견고해져서
저의 연약함을 극복하게 하소서.
오늘 본문은 온통 그런 이야기로 채워져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