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여유로운 주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육체의 쉼과
평화로운 마음을 허락하소서.
오늘 93편에서
하나님의 견고하심과 강하심을
바다의 폭풍과 비교합니다.
저는 120일간의 항해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바다와 파도, 폭풍의 힘 앞에
저는 너무나 나약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바다와 폭풍이 잠잠해지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수천 톤에 달하는 선박도
바람 앞에서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허수아비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93편 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나운 폭풍보다 강하시고,
폭풍이 일으킨 파도보다 강력하신 하나님,
엄위로우신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그러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온 우주에 임재하고 계신데도
악인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아니, 느끼려 하지 않습니다.
94편 1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복수’는
그저 복수가 아닙니다.
악인이 뒤틀리게 한 불공정함과 부조리함,
비정상을 바로잡아
공정함과 정상으로 회복시키시는 조처입니다.
악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보지 않아.
야곱의 하나님은 점심 드시러 가셨어.” (94:7)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을 넘어
조롱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엄격하게 다스리시되,
그 영혼만큼은 긍휼히 여겨
다시 하나님의 사랑의 품과
진리로 정리된 세상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하나님만이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찬양’이라는 좋은 단어가
이 세상에서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전체주의적 독재자나 사이비 교주들이 그것을 요구하여
아무런 혼도 없고 온전한 정신도 없이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군중의 모습으로,
또는 가슴 아프게도 교회 안에서조차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것에만 마음이 머무르는 모습이
찬양의 본질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찬양이
그런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강요나
가스라이팅에 의해 만들어지는 외침도 아니고,
내 욕망을 투사하는
어색한 통로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목소리입니다.
그 목소리 안에는
나뿐 아니라 나와 같은 타자를 향한
사랑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새 노래로 찬양하라!’
새 노래는 단순히 새롭고 좋은 노래를 만들어
부르라는 뜻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목도하며
찬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그런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비록 우여곡절은 있지만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기를 바라며
분투하는 저의 새로워진 마음의 찬양을 뜻합니다.
하나님, 찬양합니다.
새 노래로 찬양합니다.
그 찬양이 온 세상에 가득하고,
오늘도 결코 녹록지 않은 상황 속에서
삶의 투쟁을 이어 가고 있는
영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용히 스며들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