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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통독

26.6.22. (시편 118~122장)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작성자Hyun|작성시간26.06.22|조회수21 목록 댓글 0

하나님,

아침에 솔직히 묵상을 하기 싫었습니다.

무기력하고 부정적인 마음이

온몸과 마음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제 탓입니다.

저는 그 원인을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부끄럽습니다.

마음과는 정반대였지만

무조건적으로 성경책을 펴고,

집중이 잘되는지와 관계없이

정해진 분량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묵상이 저를 이끌어 간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하나님께서 길러 주신 작은 습관이

저를 이끌어 준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저를 양육해 주신 결과이며,

또한 지금까지의 제 믿음의 분량인 것 같습니다.

 

그럴 믿음이 있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면서도

송구스러움이 밀려옵니다.

이 믿음의 여정을

최소한 멈추지만 않게 도와주소서.

 

제 감정과 감각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단 0.1mm라도

더 나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늘 말씀을 읽으며

유독 눈에 띄는 문장은

118편 초반에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끝이 없다!"

 

세어보니

무려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믿음의 경주를

저의 약하고 볼품없는 모습에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원천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약속과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118편 5~16절을 보면

기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원수들을 물리쳤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어제 1편을 시청한

'참교육'이라는 드라마가 떠올랐습니다.

 

대중적이고 자극적일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오히려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전쟁과 폭력, 정의라는 문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눈물도 흘렸습니다.

 

폭력과 물리력을

신앙인이 해석하는 일은

참으로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군대윤리를 강의하면서도

전쟁에 대한 해석과 당위성을 찾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물리력과 폭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며,

어디까지 금지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성경에서 말하는 전쟁과 폭력의 문제와도

이어집니다.

 

분명한 전제 하나는,

하나님의 이상은 평화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보다 백 배,

천 배 더 선하고 완전한 방법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전쟁에 대한 고민은

죄로 무너진 인간 세계의 고민입니다.

인간은 죄성으로 인해

전쟁과 폭력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장 거룩한 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리력과 폭력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사용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내가 폭력을 당하고 있을 때입니다.

폭력을 당하지만 다른 평화적 수단을

시급성이나, 피해의 정도, 권력의 문제 등으로 인해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정당방위로서의 물리력은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옳다고

인정하신다기보다,

죄악된 현실 속에서

불가피하게 허용하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둘째는

지금 당장 폭력을 당하고 있지는 않지만,

명백한 악행을

다른 방법으로 막을 수 없어,

깊은 고민 끝에 공동체가 책임 있게 내린 결정으로

물리적 저지를 선택하는 경우입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이상은 아니지만,

죄악된 인간 사회 안에서는

불가피하게 허용되는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어제 드라마에서도

피해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잔인하고 치밀한 학교폭력을 당합니다.

학교도, 선생님도, 가해자 가족의 권력 앞에 굴복하여

그 악행을 막지 못합니다.

그 안에서 사람은 죽어갑니다.

 

그때

새롭게 설립된 교권위원회의 일원이

합법적인 물리력을 사용하여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다른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을 해결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카타르시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물리력 자체를 무조건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불가피성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허용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교권보호국을 설립한 교육부 장관과

그 일을 수행하는 주인공 역시

학교폭력의 피해자였음이 암시됩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피해의 경험, 깊은 고민,

그리고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동기가 있습니다.

 

이제 전쟁을 생각해 봅니다.

폭력을 통해 죄 없는 국가를 강압한다면,

정당방위 차원에서

물리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책임 있는 결정으로

물리력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을 넘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무고한 국가와 민족을 향해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전쟁을 정치적 수단으로 여기며,

많은 부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는 더 많은 고민과 해석이 필요합니다.

(제가 현역이었다면

이런 전쟁을 추구하는 국가라면

지금의 저는 전역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악의 경우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정당방위도 아니고,

정치적 목적도 아니며,

상대를 인간 존재로 여기지 않는

물리력의 행사입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식민지 국가가 원주민을,

특정 종교집단이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인간 이하의 존재처럼 여길 때,

 

그 전쟁은 정치적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많이 죽일수록, 씨를 말릴수록,

더 거룩한 일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드라마 속 가해자들의 행동도

바로 이런 의식에서 시작됩니다.

열등한 학생을 골라 끝없이 괴롭히고, 고문합니다.

존재를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오늘 제가 묵상한 내용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안타깝고, 슬프며, 괴로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토록 현실적인 세상 속에서

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한적으로

물리력을 허용하실 수밖에 없는지,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고민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에는

얼마나 깊은 고민이 스며 있는지,

조금이나마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얼룩지고, 오해 많고, 왜곡되며,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완전한 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리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하게 시작했지만,

묵상을 마치며 다시 다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최선을 다해 그분을 찾는 복 있는 사람." (119:1~8)

그 사람이 바로 제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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