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붙어 단종이 윤리관점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비운의 왕입니다.
한편 냉정한 개혁신념으로볼땐 사육신의 준비부족의 무모한 작전이 원망스럽기도합니다.
단종복위 세력은 집현전 출신의 선비들 주축으로,
성리학에 충실, 유교적 정통성과 명분론자였으나,
실제로 군사를 움직여 도성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는 거친 권력 투쟁에는 서툴렀습니다.
반면 세조는 이미 계유정난을 거치며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
당대의 지략가들을 확보하고, 중앙 군사력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출처 : 핫피플나우
거사의 실책: 현장 변수에 무너진 '지나친 신중함'과 보안의 허점(밀고)
당시 단종복위 세력은 명나라 사신을 위한 창덕궁 연회장을 거사 장소로 택했습니다.
1456년 6월초, 성삼문은 세조의 정권찬탈을 폭로하는 격문을 품고 창덕궁으로 향했습니다 .
그러나 세조의 책사 한명회가 연회장이 좁다는 이유로,
호위무사인 별운검(사육신 중 무장이었던 성승과 유응부가 맡기로함)의 출입을 전격 금지합니다.
이때 무장 유응부는 "계획이 바뀌었어도 지금 당장 실행하자, 여기서 멈추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문관 출신인 성삼문과 박팽년은 "오늘은 별운검이 들어가지 못하니 실패할 확률이 높다.
다음번 세조가 상왕(단종)을 모시고 행차할 때를 기약하자"며 거사를 뒤로 미루고 맙니다.
갑자기 거사가 지연되자 겁이 좀 있었던 성균관 사예였던 김질은,
그날 밤 장인인 정창손을 찾아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합니다.
기회주의자 정창손은 밀고만이 살길이다며, 김질과 함께 궁으로 세조를 찾아가 밀고하고 맙니다.
이렇듯 무슨 정권탈환을 하려면 실제로 군사를 움직여 도성을 장악하는 여력을 갖춰야하는데,
군권 확보 여력이 너무 약했으며, 보안이 생명인 거사에서 너무 많은 인원이 계획을 공유하는등,
보안 통제를 못했다는 점은 사육신이 가진 조직력의 한계였습니다.
사육신이 정말 국가와 민심을 위한다면 단종복위운동이 아니라
정도전 정신이 담긴 민본운동을해 훈구파를 끈임없이 갈굼질을 했어야합니다.
당시 중원의 성리학이나 유교적 정통성은 신분제라는 중세 봉건적인 폐단이 만연했습니다.
이전에 건장한 문종이(단종의 부친) 1046년 5대왕에 오르나, 모친 3년상후 바로 부왕(세종) 사후 3년상
도합 6년상을 치루느라 기력이 쇠하여 집권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승하합니다.
이는 유교가 사람을 살리는게 아니라 삶을 올가메는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도전을 따르는 신진개혁파가 과거제 응시를 양민(평민)까지 대폭 확대 주창했는데,
주창을 한들 과거가 배우기 힘든 한문에다 사서오경이라는 고리타분한 문과여서 양민에겐 급제가 쉽지가 않았으며,
급제한들 한직 요직에 낮은 직책 고착화가 심했습니다.
그렇다면 신분제중 천민과 노비를 없애거나 혁신해 노비를 머슴화(지주에 고용된 삯꾼) 필요
천민도 양민화하고 중인도(기술직,장사꾼) 다변화 및 직급화해 양반으로 승격 가능케하며,
한편 공신전 남발보다 양반도 양민의 직업을 가질수 있게해 직업의 귀천 해소를 요구하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시대상으론 앞선 주장이나 정도전 후학이라면 이길만이 조선이 잘 살길이라 판단도 가능하건만..
과거시험을 성균관에서 대과로 일괄적으로 하기보다 다양화해
기존 무과와 진사 이하의 등용시험은 한자와 훈민정음을 섞여서(공인중계사 시험처럼)하는등,
사서오경과 같은 성리학적 시험만 말고 요직을 확대해 응시과에 따라
인문계(언어, 문학, 역사, 철학 수학, 물리 등) 필수,선택을 병행해 응시의 요구가 필요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글 보급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군주는 두시언해를 가능케한 성종입니다.
그러나 성리학에 기초한 경직된 신분체제로 한낮 립서비스로 그쳐 르네쌍스 근처도 못갔습니다.
정5품의 행사직까지 지낸 고령의 장영실을 찾아내, 혹은 여러 장인을 찾아내
집현전학자는 한글을 좀더 개발하고, 장인들은 효율적인 인쇄기술을 개발하는등
(기존 비효율적인 팔만대장경 금속활자를 좀더 개발하고 인쇄기술도 연구하는등)
지식의 보편성을 이뤄야하건만 사육신제자도 훈구파도 하는둥마는둥이었습니다.
장영실 - 나무위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8697
만일 다양한 기술발전을 기했다면 물래,수래의 발전과 상하수도 문제도 가능,
또한 당시 15세기 유럽에서 화승총을 개발한것을
업데이트하였다면 조선이 최초 현대식 총을(뇌관식 권총 등) 개발할수도 있었습니다.
이미 세종 14년에 고려 우왕때 최무선이 제작한 휴대형화포를(승자총통) 개량한
세총통을 개발했으니 말입니다.
출처 : 나무위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16세기 후반에는 훈구파의 힘이 약해지고, <훈구파 = 부국강병 중시, 엿장수식 실용주의, 불교 수용.>
사림파가 정계를 장악하면서부터 더욱 망조의 길로 가게 됩니다..
즉 세계 정세에 어두운 우물안 개구리로 오랑케 타령하면서 여진 무시하다 털리고, 일본 무시하다가 털리고,
서방 세계 무시하다가 뒤떨어진거, 거의다 성리학적 마인드에 갇혀있는 사림파들이 한짓이곤했습니다. (17세기 송시열 등)
아무튼 누가 거사를 해 정권을 쥐든 어떻든 양민의 시선에선 또하나의 그들만의 리그였습니다.
빌프레도 파레토가 "역사는 엘리트의 무덤"이라 말한 것처럼, 인류 역사는 엘리트에 의한 다수 대중의 지배의 역사이며,
역사 변화도 기존 지배계층에서 다른 지배계층으로 바뀌는 것에 불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