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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간,삶

47인의 낭인

작성자남해어부|작성시간18.08.02|조회수519 목록 댓글 2

1702년 12월 14일, 47인의 낭인들이 주군의 복수를 감행하다가 전원 할복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근세 일본 사회를 뒤흔든 대사건은 일본 문학의 주요 소재로 자리 잡아 1748년 처음 상연된 이래 근세 서민극인 인형 조루와 가부키는 물론 근대에 들어서는 백 편이 넘는 영화와 TV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주군의 명예를 위해 죽음도 불사했던 47인의 사무라이들이 펼치는 복수극은 죽음, 집단성, 의리와 인정 등의 일본적인 정서가 한데 어우러진 일본 국민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 개요

일본 에도 시대에 벌어진 사건으로 가부키나 조루리 극으로 만들어져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에도 시대 사상가들 역시 여러 차례 사건의 본질을 논했을 정도의 유명한 사건. 현대 일본 에서도   여러 차례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만들어졌다.


◆ 아코 사건(赤穂事件)

1. 발단

忠臣藏(주신구라)의 배경이 된 실제 사건은 1701년 3월에 일어난 일이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고베(神戶) 지역인 아코 번(赤穗藩)의 영주인 아사노 나가노리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성에서 덴노의 조정이 보내오는 사절을 맞이하는 임무 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막부에서 의전을 담당하는 집안인 고케(高家)의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는 아사노에게 사신을 대하는 격식에 대해서 나무랐고, 이에 격분한 아사노는 사신이 근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칼을 빼들고 휘둘러서 기라 요시히사를 다치게 했다. 쇼군이 집무하는 에도성에서 형식적이지만 쇼군의 상관인 덴노의 칙사 앞에서 칼을 뽑아 휘둘러 상관을 다치게 까지 했으니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에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3가지 이유를 들어서 아사노에게 자결을 명했는데,


1. 덴노가를 우대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 쇼군의 의지인데 덴노의 칙사가 보는 앞에서 고케인 키라를 해한 죄.
2. 에도(江戶)성내에서 살아있는 생명에게 해를 가하지 말라는 생류연령(生類憐みの令)를 어긴 죄.
3. 명분론을 강조하고 유학을 펴는 문치주의하에서 용납할 수 없는 하극상을 저지른 죄.


2. 아사노의 할복

이 세가지 죄목을 이유로 아사노는 타무라 가 저택의 마당에서 할복하였고, 아코 번은 개역되었으며, 그 휘하의 무사들은 로닌(낭인)으로 떨어져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개역된 아코 번은 임시로 인접 번주인 타츠노 번의 와키자카 야스테루와 빗추 아시모리 번의 키노시타 킨사다가 임시로 관리하다, 다음 해 시모츠케 카라스야마 번주였던 나가이 나오히로가 전봉해서 번주를 맡게 되었다.


막부의 명령을 받은 와키자카 야스테루는 아사노가의 가신들이 거세게 반항할 줄 알고 중무장을 하고 접수하러 왔으나, 가로인 오오이시 요시오는 막부에 저항하는 것은 주군의 원수를 갚기는 커녕 무의미하게 죽을 뿐이라고 생각을 하고, 순순히 와키자카에게 성을 명도했다.





3. 와신상담

 낭인으로 전락한 무사들은 막부의 조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부가 이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키라와 같은 다이묘는 자택 호위병력도 상당한지라.. 그래서 가신들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오오이시 요시오는 아예 기생집에서 주색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감시의 눈을 피했고, 다른 가신들은 에도에 올라와서 쌀집이나 혹은 다른 잡일들을 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 그들은 키라의 자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주군 아사노의 미망인으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각종 무기를 사들이면서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4. 복수

1년 뒤인 1702년 12월 14일 밤, 오오이시 요시오(쿠라노스케)를 중심으로 아코 번 출신의 낭인 46명 혹은 47명이 키라 요시히사의 저택을 습격. 주군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저택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베어버렸다. 키라도 저항 끝에 이들에게 사로잡혔고, 할복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할복을 거부했다. 그러자 이들은 키라를 죽인 뒤 목을 아사노의 묘지에 가져갔다.


연행된 사무라이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는데, 쇼군이 용서해준다면 자기 휘하로 받아들이겠다는 다이묘들이 자기 돈으로 먹이고 재웠다.


그리고 전원 시나가와(品川)의 센카쿠지(泉岳寺)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막부는 사건 처리를 놓고 여러모로 고민을 했으나 결국 할복을 명령했고, 46명 모두 여러 다이묘의 저택에서 할복. 정확히는 할복 형식의 참수형을 당하여 센카쿠지에 묻히게 된다. 모리 가에서 10명이 할복할 당시 기록이 남았는데 한 명은 카이샤쿠에게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하며 차분하게 죽음을 맞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또 한 명은 진짜로 할복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머지 8명은 막부측에서 배를 가르라고 칼도 줬지만 못한 걸 보면 그냥 참수형을 한 뒤 할복으로 보고했을 것이다.


이들은 뭇 백성들의 동정을 샀고, 이에 막부는 아사노의 동생에게 500석의 하타모토 작위를 부여하여 아사노씨는 격은 축소되었지만 그래도 가문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낭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무사 지위를 박탈했다거나 가족이 굶어죽었다는 등의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당사자가 할복하는 대신 가족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 창작물로 승화

1748년에 조루리(꼭두각시 인형극)으로 가나데혼추신구라(假名手本忠臣藏)가 만들어졌고, 같은 이름의 가부키가 공연되었다. 이때는 막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건 인물들의 본명을 숨기고 중세후기인 남북조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등장인물도 남북조시대의 인물로 가탁하였다. ex) 키라 코즈케노스케는 고노 모로나오, 야나기와라 스케카도가 아시카가 타다요시등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여서 서양에도 잘 알려졌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도 길게 인용되어 있고, 일본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미국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이 이야기를 애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미의 대문호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서도 이 사건이 들어가고 있다.


. 역사적인 해석과 의의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사건을 파고들면 그렇게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실제로 에도 시대 내내 이 사건을 둘러싼 철학적 논의가 벌어졌을 정도. 간단히 말해 이 사건이 에도 막부의 정체성과 그 시대의 사무라이들이 갖고 있는 본질성, 양자에 내재된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명예를 위해 사무라이는 모욕을 당하면 칼부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vs '질서를 위해 함부로 폭력을 행하면 안된다.' 라는 핵심적인 양대 문제의 충돌이 발생한 사건.

따라서, 이 사건을 막부가 어떤 방식으로 처리했어도 커다란 논란이 일어났을 것이 분명하였다. 실제로 복수를 한 46명의 낭인들조차 복수 여부를 둘러싸고 2년 간에 걸쳐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을 정도이다.


우선 이 사건의 발단이된 아사노의 칼부림 사건부터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 세간에 알려지기로는 아사노가 키라에게 칼부림을 하게 된것이 아사노가 키라에게 격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키라에게 모욕을 들어서라고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은 이전부터 원한 관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아사노 가문은 원래 아코 번의 영주가 아니었지만 아코로 영지를 옮겼다. 미카와의 소영주였던 키라 가문은 미카와 키라쵸의 척박한 환경 때문에 농사 대신 소금 제조로 먹고 살던 상황이었다. 키라 가문은 아사노 가문의 아코 정착을 돕기위해 소금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아사노 가문이 독자적으로 개량한 아코 소금을 팔면서부터 키라 가문과 갈등이 생겨났다. 아사노 가문은 아코 소금을 팔기위해 가장 큰 시장인 에도를 개척하려 했고 선전을 위해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에게 소금을 상납했다. 이게 소문이 퍼지면서 에도에서 아코 소금의 판매가 늘어났다. 문제는 그간 에도는 키라 가문의 소금이 독점하던 상황이었던 터라 두 가문이 소금 판매를 두고 서로 앙금이 깊어졌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키라가 아사노에게 미동을 양보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아사노가 그걸 거절한뒤 다른 사람의 부탁에 미동을 얼른 보내버리자 키라가 원한을 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사건 발생에 원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역시 저 위의 사건 전개 과정에 설명된 내용, 즉 칙사 접대 과정 중에 일어난 다툼이라는 것. 그런데 웃긴건, 칙사 접대역을 교육하는 코케들에게 적당한 사례금을 주는 것이 관습법적으로 인정되고 있었고, 덤으로 에도 주재 수석가로의 의견도 사례금을 두둑히 주어서 가뜩이나 사이가 안 좋은 판에 예식 교육역이라는 직책까지 받은 키라의 심기를 달래자는 것이었는데, 정작 주군이라는 사람은 사례금을 주자는 의견을 깔아뭉개고 간단한 과자만 선물로 보낸 것.


하지만 이런 의혹들은 당시 상황과 정서를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본 것이다. 사실 최초의 가장 간단한 이야기, 그냥 사소한 다툼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애초에 당시 사람들은 아사노가 칼부림한 이유는 그렇게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한데, 에도 막부 초기까지만 해도 사무라이들은 그것보다 더 시시한 이유로 칼부림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 예를 들어, 1630년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다.


< 마에다 토시이에의 손자인 마에다 히고가 친구들과 다리를 건너던 도중이었다. 이때 반대쪽에서 걸어오던 무라세와 사카베라는 두 사무라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히고와 사카베의 칼집이 서로 부딪쳤고, 마에다 히고는 즉시 부채로 사카베의 어깨를 쳤는데, 그러자 사카베는 즉시 칼을 뽑았다.> 무라베와 사카베는 현장에서 살해당했으며, 사건을 전해 들은 무라세의 부친 무라세 규우에몬이 현장으로 돌진하여 히고의 가신 두 명을 살해한 뒤 자신도 살해 당하였다. 사카베의 부친 사카베 지로베이도 현장에 난입하였으나, '구경꾼이 너무 많아'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였고, 나중에 이를 부끄러워 한 지로베이는 머리를 깎고 출가해버렸다.>


 영주였던 마에다 가문 측은 보고를 받은 뒤 양쪽 모두 처벌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그냥 시비 붙어서 싸운 거라 처형하자면 자기 가문 사람도 할복을 시켜야 하는 판이니... 한편 마에다 히고는 죽는 날까지 복수를 두려워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사례 를 보면 소금이니 사례금이니 하는 이유는 쓸데없이 복잡한 것(..). 당시 사무라이의 사고방식이란, '자신이 느끼기에 모욕이면 각오하고 칼을 뽑아야 한다.'는 것으로, 그 세세한 이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 따라서 당시 사람들 역시 아사노가 칼을 뽑은 이유에 대해 그렇게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여 해결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성 안이라는 점을 감수하고 칼까지 뽑았는데, 키라를 죽이지 못한 아사노가 무능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즉, 이런 논리이다. 아사노가 칼을 뽑은 것은 이유가 어찌 됐든 사무라이로서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공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어쨌든 할복은 당연한 일.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칼을 뽑았으면 상대를 죽여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민망하다는 것. 따라서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아사노의 할복 자체는 그렇게 동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할복 자체가 아니라, 할복을 둘러싼 여러가지 사전, 사후 처리가 잘못되었기 때문. 즉, 당시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사건 처리 방식이 영 잘못되면서 사건의 규모가 확대되었다는 것.


이에 대해서는, 이것은 츠나요시보다도 소바요닌이던 야나기사와가 더 책임이 크다는 의견이 주류이다. 즉 전국시대의 사무라이 풍격을 가졌다는 아사노 나가노리가 좀 살림이 폈다면서 설치는 꼴을 못마땅해 한 문치주의 일변도인 츠나요시의 기분을 살핀 야나기사와가 접대역의 교육을 맡은 키라 요시히사를 충동질하여 아사노를 필요 이상으로 갈군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때의 야나기사와의 행동으로 가부키나 기타 창작물에서 야나기사와가 추신구라의 흑막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하게 생각해서 츠나요시가 너무 열이 받아 앞뒤 생각없이 행동했다(..)는 견해도 있다.


일단 다이묘가 연루된 대형 사건인데 처리가 너무 빨랐다는 점. 아사노는 사건 이후 겨우 7 시간 만에 할복하였는데, 이로 인해 사건의 처리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실제로도 아래에서 논할 각종 병크들을 낳게 되었다. 또한 아코 번에서는 주군에 대한 구명 활동이나 후속 사항에 대한 대첵을 세울 틈도 없이 날벼락을 맞은 셈이 되었다. 이로 인해 막부 안에조차 너무 성급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다음으로 가장 큰 문제점은, 키라는 왜 벌을 받지 않았냐?는 것.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키라가 원인제공자일 가능성이 있는데, 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인 같은 거 이 사람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의 방식에 따르면,  "아사노가 할복을 했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상대방인 키라도 할복을 해야 한다" 는 것.


 왜냐면, 전국시대 무렵 형성된 사무라이의 관습법에 따르면, 싸움을 한 사무라이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당사자 모두에게 동일한 처분을 내린다였기 때문.(쌍방폭행....?)


 이것을 겐카료세이바이(喧譁兩成敗 훤화양성패)라고 하는데, 전국시대에 군령을 통일하고 같은 세력 내의 다툼을 억제하기 위해 각국 다이묘들이 도입한 뒤 '천하의 법도'라고 불릴 정도로 확고히 정착된 원칙이었다. 그러니 이 원칙 덕분에 당대 사무라이들에게 '이유는 중요치 않다. 참을 수 있는 정도인가 없는 정도인가의 문제', '명예를 위해선 자신의 죽음도 각오하고 벤다.'는 사고방식이 굳어지게 된 것. 따라서 이유를 불문하고 싸움의 양쪽 당사자인 아사노와 키라의 처분이 다르다는 것은 당대 모든 사무라이 계급의 반발을 불러왔다.


 사실 키라는 칼침 맞은 피해자인데, 이 당시 논리에 따르면 범인인 아사노와 똑같이 할복해야 한다는 것(..). 그런 관점에서 보면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인 셈


다음으로 문제가 된 것은 영지 몰수.

사실 에도 시대에 이 문제는 그렇게 까지 논의가 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내재된 명예, 공법, 도리 등의 추상적이고 철학적이며 거시적인 문제와는 달리, 영지 문제는 여러 사람의 밥줄 문제로서 지나치게 형이하학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건에 상당히 크게 작용하였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의 밥줄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


심지어 영지 몰수와 가문 단절이라는 엄벌이 없었다면 추신구라 사건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람도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실제로 남겨진 당시 편지 기록에 따르면, 추신구라 이야기의 주인공인 쿠라노스케, 즉 가로(家老)였던 오오이시 요시오는 영지를 돌려받고 죽은 아사노의 동생이 가문을 잇게 해준다면 가문의 명예를 지킬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만사가 해결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막부로서도 한번 내린 결정을 되돌린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 이렇게 되는 경우 자신들의 실수를 자인하는 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엔자이는 병크가 아니라 일본의 전통입니다. 이로 인해 막부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사실 가신들에게 직접적인 문제는 영지를 잃어 낭인이 되었다는 것. 이때문인지 당시 기록에 따르면 아코 번의 가신들은 둘로 견해가 나뉘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가로인 오오이시 측은 아사노의 동생이 가문을 잇게 해준다면, 어떻게든 가문의 밥줄명예를 되찾을 수 있다는 입장이었고, 이에 반하는 측은 "그런 건 필요없고 무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편, 오오이시 요시오 등의 온건파는 교토에 머물렀고, 반대 측인 과격파는 도쿄에 머무르는 식으로 양자가 분열되어 있었는데 오오이시 등 온건파의 경우 다른 다이묘들에게 청원을 넣는 등의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과격파들이 최초로 주장한 것은 키라 암살이 아니었다. 이들이 처음에 주장한 것은 막부의 몰수에 대항하여 아코에서 농성하자는 것. 결국 이 모든게 밥줄의 문제였다는 얘기. 그러나 농성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나자 도쿄로 올라가 키라 암살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국 2년씩이나 지났음에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오오이시 방식의 해결이 불가능함을 의미하였으며, 이로 인해 오오이시는 결국 과격파들의 견해를 꺾을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오오이시 요시오는 키라 습격이 기정 사실로 정해지자 습격에서 빠지기는커녕, 가로(家老)로서 선두에 나서 지휘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미 이 당시에도, 집단의 방침이 정해지면 자기 뜻과는 달리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일본인의 사고방식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아사노의 가신들만의 특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무라이 계급들이라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이었다. 실제로 에도의 과격파들이 보낸 서신에 따르면, 다이묘부터 하급 사무라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에도 사무라들이 '아사노 가(家)는 명예를 알기 때문에 주인의 적을 살려두지 않을 가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거나

 '막부가 차후 백만 석(고쿠)를 아사노 가문에 내린다 해도 체면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평판이 있다.' 고 주장하였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키라는 아사노와 달리 아무 처분도 받지 않았다: 키라에게 뭔가 비슷한 결과가 있어야 죽은 아사노 및 아사노 가문의 체면이 선다는 견해가 다수 존재하게 되었다.

>2.막부가 결국 아사노의 동생에게 대를 잇게 해주면 그나마 체면이 설 가능성이 있다: 막부로서는 자신들의 결정을 뒤집으면 오히려 체면이 서지 않으므로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 결론: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 가신들이 직접 키라를 죽여 주군과 가문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당시 사무라이 계급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심지어 막부조차 아사노 가문의 가신들이 키라에 대한 복수극을 펼칠 것을 눈치챘지만 이를 어쩔 수 없다 여겨 체념하고 수수방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사무라이 세계관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이 복수가, 막부 통치라는 제도와는 모순이 된다는 점. 그러니까, 사무라이 가치관에 따르면 가신들의 복수는 당연하고 옳은 것. 그러나 어찌됐든 막부에 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무라이 계급의 통치자로서 막부는 어떻게 가신들의 처우를 결정해야 현명한 것일까?라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추신구라가 에도 시대 내내 논란이 되었고, 민간의 전설이 되기까지 한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사건 이후 막부는 아사노 가신들의 사후 처리에 대해서도 골치를 썩일 수 밖에 없었다. 최초의 아사노 사건과 달리 가신들에게 할복을 명한 것은 사건 이후 무려 50여일이 지난 뒤. 그나마도 그냥 복수를 한 게 아니라 저택의 무고한 남녀노소를 닥치고 살해한 죄까지 고려한 결과였다. 막부가 최초에 아사노의 칼부림 사건을 반나절도 안돼서 처리했던 패기와 비교해 보면, 쇼군 츠나요시의 병크가 이 사건을 얼마나 큰 규모로 키웠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사건 당시부터 숱한 사상가들에게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최종적으로 막부가 받아들인 결론은,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의 측근이자 막부의 정치고문이었던 오규 소라이의 견해. 오규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 만약 사론私論으로써 공론을 해치면 차후 천하의 법은 설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사건을 사무라이 계급의 사적 원리와 막부의 공법적 원리의 충돌로 보고, 공적 권위의 우월성을 주장한 것이다.

 즉 사적 보복을 금지하고 초월적인 공적 권위의 존재를 인정한 오규의 관점은 당시 입장에선 상당히 선진적인 것으로, 현대 정치학자들은 오규의 견해가 마키아벨리즘과 상통하는 수준의 정치사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어쨌든 오규의 주장대로 47명이 할복하였으며, 이러한 오규의 사상은 에도 막부의 논리가 되어 이후의 시대를 관철하였다.


하지만 오규의 결론 이후에도 이러한 논리와 해석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사상적 논쟁이 종종 발생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에도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동시대 가장 극단적인 무사도 원리주의자였던 하가쿠레의 저자인 야마모토 츠네토모는,


>아사노 공의 사무라이들이 행한 야습은 물론 잘못이다. (왜냐하면, 사건 발생 즉시) 즉각적으로 (키라를) 공격한 후에 센가쿠지(泉岳寺)에서 바로 할복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주군의 사후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다. 키라 공이 그러다 만일 병들어 죽었다면 어쩔 것이었는가? 교토 인간들은 칭찬받을 일을 궁리하는 데는 똑똑하고 재빠르다.


..라는 견해를 밝혔다. 한마디로 이런 경우 앞뒤 가리지 않고 칼질하고 할복하는 것이 사무라이의 도리라는 것.


한편 막부 말기~ 메이지 초기의 계몽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다음과 같이 논했다.


>아코의 의사(義士)라 하여 세상에서 칭송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막부의 판결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면 >어째서 상소를 올리지 않았던 것인가? 물론 상소를 올린자가 되려 처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다시 상소를 올리는 식으로, 마지막 한명까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법에 호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된다면 막부 또한 사건을 다시 조사했을테고 무례를 범한 키라에게도 처벌을 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당한 도리와 이치를 따져서 세상을 바로잡게 해야 참된 의사(義士)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소를 내서 이치와 도리를 따지지 않고 제멋대로 칼부림을 벌여서 수십명이나 죽은 참극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법에 따라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권한인데 일개 낭인 무리들이 그걸 침해한 사건에 대해 칭송하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한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손에 죽은 게 키라 한명이 아니라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오규 소라이가 이 사건을 "공적 권위와 사적 권위의 문제"라고 해석한 반면, 후쿠자와 유키치는 법치라는 관점으로 이 사건을 본 것. 그놈이 그놈 같아 보이지만, 양자에 미묘하면서도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오규의 견해는 '권위 = 공법 = 막부'로 각각을 동일시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후쿠자와는 권위가 아닌 법률 그 자체를 논하는 동시에, 막부 역시 법률에 근거하여 판결을 내린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근대 사상가로 숭앙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 여담

1. 그 당시의 일들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 사건의 피해자라고 볼수 있는 키라 가문도 결국 가문이 끝장나고 만 것이다. 키라의 양자(실제로는 손자지만 키라의 차남이 죽자 양자로 들어갔다)가 키라를 구하지 않고 도망쳤다는 이유로 막부가 유배를 보내버린 것. 물론 무사의 본분을 다하지 않았다는 명분이 있다고 해도 피해자인 키라 가문을 단절시킨걸 볼때 츠나요시가 여론을 의식했다는 지적이 있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추신구라 사건의 흑막을 츠나요시의 정실부인(미다이도코로)인 노부코로 보기도 한다. 노부코는 108대 덴노 고미즈오의 손녀로 정3품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츠나요시의 생모인 케이쇼인은 교토의 하급무사가문 출신으로 품계로만 따지면 노부코가 훨씬 위였다. 그러나 시어머니인 탓에 노부코는 게쇼인 앞에서 숙여야만 했고 둘 사이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츠나요시가 자신의 생모인 케이쇼인을 위해서 위에 언급된대로 무리한 궁정공작을 통해서 케이쇼인에게 정1품의 지위를 내리는 조서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자 노부코는 덴노의 손녀인 자신보다 낮은 가문의 케이쇼인이 자신보다도 더 높은 정1품의 지위를 받는것에 분개해했고 이를 파토내기 위해서 뒤에서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평소에 기라와 사이가 좋지 않던 아사노를 조종해서 칼부림 사태를 일으켰고 결국 이 사태로 인해서 케이쇼인에게 정1품의 지위를 내리는 것은 연기되었다.


노부코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과 친밀한 사이였던 고노에 히로코를 통해 아사노의 가신인 오오이시를 움직여 키라 가문에 복수하도록 부추겼다고 한다. 히로코는 오오이시와 인척지간이었기 때문에 접촉하는데 무리가 없었고 히로코가 오오이시에게 주군의 원수를 왜 갚지 않느냐고 하자 오오이시는 에도에서 무사들이 대규모로 움직이는게 힘들다고 말했고 이에 히로코는 높은분이 도와주면 가능하겠느냐라고 했다는것. 결국 노부코가 배후에서 힘을 쓴 덕에 오오이시는 로닌들을 이끌고 기라가문으로 쳐들어가 사단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노부코가 추신구라를 배후조종한 이유는 이런 사건을 통해 츠나요시의 권위를 실추시켜서 츠나요시를 쇼군에서 끌어내려 게쇼인을 뒷방늙은이로 만드는것이 목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재미있게도 츠나요시 사후에 쇼군을 승계한 이에노부의 정실부인이 바로 고노에 히로코였다. 게다가 이에노부는 아사노 가문을 사면하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결국 노부코가 흑막이지 않겠느냐는것.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추측성이 강한 주장이다.


이 사건으로 엉뚱하게 우에스기 가도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츠나노리는 키라 요시히사의 아들로, 우에스기 가에 양자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습격을 받았는데도 움직이지 않은 우에스기 츠나노리는 주군의 복수를 하기 위해 목숨을 건 아코 번사들과 대비되어 서민 사이에서 우에스기 가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사건 당시 츠나노리도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나서려 했지만 막부측의 제지와   가신들의 만류로 실패했던 것을 생각하면 억울한 셈.


출처 - https://namu.wiki/w/%EC%B6%94%EC%8B%A0%EA%B5%AC%EB%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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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카로트(부산) | 작성시간 18.08.02 얽히고 섥힌 묘한 이야기입니다...
  • 작성자즈나(부산) | 작성시간 18.08.03 47로닌.... 영화로 봐던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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