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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의학

작성자travel|작성시간18.12.28|조회수431 목록 댓글 2

중세 유럽 의료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중세의 의학


의학정전, 15세기

11-12세기 유럽에서는 정치적·경제적 변화와 인구 증가에 따른 장기적인 사회 변화, 그리고 도시화에 따르는 교육 기회의 확대 등으로 인해서 의학 전통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적인 변화에 따라 이 시기에 의학 교육은 성당에서 도시의 학교로 옮겨가고, 의료 활동 자체도 전문화와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10세기 남부 이탈리아의 살레르노 지역의 도시 의료 활동을 들 수 있다. 12세기 유럽 전역에서는 아비케나의 『의학정전』을 비롯한 이슬람 의학 서적의 번역본이 유입되면서 의학 지식이 확대되었다. 또한 중세 대학이 생기면서 대학에서 의학 교육이 조직적으로 실시되었다. 이런 중세 대학에서의 의학의 제도화는 그것이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졌다는 면에서 의학 이론과 실제 의료 행위의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의학이 중세 대학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의학과 다른 철학적 지식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중세 대학에서 의학은 체계적인 발전을 했는데, 특히 오줌의 색과 맥박에 의한 진단 및 치료, 약에 의한 치료, 해부학과 외과학 분야에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인체 해부는 13세기 말 볼로냐를 비롯한 몇몇 이탈리아 대학에서 실시되기 시작했는데, 해부 수업에 범죄자의 시체를 이용하기도 했다. 중세 의학 분야 가운데 의료 제도적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인 것은 병원의 발전이었다. 의료 기관으로서 병원 제도는 6세기를 전후 비잔틴 제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 인문학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현상만 뚝 떼서 성급한 비교를 하는 것이다. 한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심층을 함께 봐야 한다. 겉으로 두드러지는 몇몇 요소만 보고 급한 판단을 내리면 오류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로마와 중세를 비교할때 가장 심하게 저지르는 오류가 하나는 늘 로마의 최전성기와 중세의 몇몇 혼란기(그리 길다고 할수도 없는)를 떼서 비교하는것, 또 하나는 지중해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 제국과 일부만 통합한 왕국들의 체계가 같을 수 없다는 점을 망각하고 단순비교를 하는 행위이다.

 단순한 일반화는 중세 뿐 아니라, 근대와 로마를 비교할때도 종종 보인다. 가령 로마군의 의료체계를 극찬하는 어떤 글을 보면, 19세기 말의 부상자 회복률과 로마군을 비교하면서 로마군의 선진성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그러나 이는 근대 초 이후의 군의들은 로마군의 군의가 알지 못했던 총과 대포에 의한 부상을 치료해야 했다는 점을 망각한 비교다. 더욱이 화약 무기가 발달하면서 의사들은 고중세의 의사들보다 압도적으로 절단수술을 많이 해야했는데, 이것이 당시 환경에서 얼마나 위험한 수술이었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고 중세 군대의 의료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중세의 군대들은 흔한 편견처럼 의료와 위생이 엉망이었는가?


중세의 군대와 의학

중세의 의학에 대해 온갖 카더라와 뜬소문만 남발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개별 치료에 대한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탓이다. 중세는 사료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은 시대이긴 하지만, 그 대부분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국정문서와 재판기록 등이나 교회 행정 문서에 해당하는 것이다. 의사의 처방전이나 치료 경과서 같은 것들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병을 앓았던 이들의 자전적 기록도 상당히 간략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치료가 행해졌는지 파악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러나 한 가지만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리가 고대 로마군의 의료 체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중세인들이 베게티우스를 비롯한 로마군 의료 관련 기록의 사본을 많이 생산해놓은 덕분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때, 이들이 이 사본들을 왜 많이 만들었겠는가? 그냥 재미로 베꼈을리는 없지 않겠는가?

Krug선생이 지적하듯, 중세의 왕과 지휘관들은 부상자에 대한 고대 로마적 태도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크레시 전투가 끝난 뒤 에드워드 3세는 "전쟁터에서 부상자들을 수습해서 치료하고, 연금을 지급하여 본토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이는 중세 군대에 부상자를 치료할 능력이 있는 집단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중세의 왕들과 정부가 점점 부유해질수록, 종군하는 전문 의료인 집단의 수도 늘어난다. 현전하는 중세 정부 문서들에는 실력 있는 군의들을 왕에게 추천하는 문서들이 꽤 많이 남아있다.

그러면 의료 수준은 어떠했을까? 중세의 의학은 근본적으로 갈레노스를 비롯한 고대 의학과 그리스도교의 몸 이론의 결합이었다. 당연히 현대와 같은 감염이론을 몰랐으나 그래도 어떻게 해야 위생을 유지하고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사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일부 전해지고 있는 당시 군의들의 지시와 주의사항은 이를 잘 보여준다.


"습한 지역을 피하고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머물 것"

"물, 음식, 날씨의 변화는 위험하다. 특히 노병보다 신병들이 더 취약함."

"보리로 만든 약탕은 열병을 예방한다."

"배설물은 반드시 진영 밖에서 처리할 것"

"한 장소에 너무 오래 머물지 말 것"


물론 전근대 군대라는 한계상 완벽한 예방은 불가능했다. 전염병과 열병의 경우 약으로 다스려야 했는데, 이는 중세 초부터 병원 시스템을 운영해온 수도원 기반의 약초학 지식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약초의 사용이 수도원과 이후 대학의 이론수업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면, 전투로 인한 부상의 치료는 좀더 실용적인 지식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중세의 외과의학은 도제식 교육을 통해 이루어졌다. 각 지역에는 외과의 길드가 형성되어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대학에서 이론적 교육을 받고 나온 이들을 받아들여서 실용적 치료기술을 가르쳤다.

당시 의료 텍스트들을 보면 출혈을 멈추는 법, 봉합수술 하는 법 등이 상당히 상세하게 나와있다. 봉합수술도 깨끗한 부상과 더러운 부상을 다루는 방법이 다르며, 환자의 상태에 따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도 상세히 구분하고 있다. 사료들은 많은 면에서 당시의 의학 기술이 결코 초보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병원 시스템은 어떠했을까? 사실 중세 의학의 가장 큰 혁신 중 하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의 '병원'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물론 완전히 근대식 병원은 아니다. 중세의 병원은 그리스도교 신학 이론에 따라, 몸의 치료와 영혼의 치료를 병행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중세의 hospital은 환자의 치료뿐 아니라 몸이 쇠약한 노인, 여행자를 위한 요양소를 겸하는 곳이었다. 지금도 상당부분 온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답사를 가보면 그 건물의 배치와 구조 자체가 사람의 몸과 마음의 건강 양쪽을 위해 정교하게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병원은 중세 초부터 수도원이 쌓아온 지식을 기반으로 운영되었으며 나중에 도시의 부가 축적되면서 각 도시들도 병원들을 운영하였다. 이것이 근대 병원의 가장 직접적인 기원이다. 당연히 야전병원도 우리가 생각하는것보다 훨씬 더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렇다면 의료기술은 얼마나 효과적이었을까? 사료의 제한 때문에 치료율의 정확한 통계를 내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로 볼때, 특별히 뒤떨어졌다고 볼 이유도 없다. 정말 의료체계가 엉망진창이었다면 중세 군대가 일정한 수를 유지하면서 작전을 하는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십자군 원정같은 장기원정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기록에 가장 잘 남아있는 것은 고위급의 예라 얼마나 일반적인 경우인지 단정할수는 없지만, 부상에서 성공적으로 회복된 사례는 상당히 많다. 리처드 1세는 십자군 원정 중에 열병에 걸렸지만 무사히 회복했다. 잔 다르크는 전투중에 어깨와 다리에 화살을 맞고, 머리에 돌을 맞았지만 회복에 성공했다. 헨리 5세는 슈르즈베리 전투에서 얼굴에 화살을 맞는 중상을 입었지만 역시 회복에 성공했다.

고고학적 증거로 봤을 때, 일반 병사들도 의료체계의 도움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일반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매장된 경우를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 중 대표적인 사례인 토우튼 전투 매장지를 볼 경우 몇몇 유골들은 그 전투 이전에 십수번이나 넘는 부상을 머리에 입었지만, 감염 없이 회복된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유골은 턱에 타격을 입어서 턱뼈가 세조각으로 부러졌다가 치료된 흔적을 보인다. 이 역시 감염의 흔적 없이 깔끔하게 나았다.


Elizabeth Prescott, The English Medieval Hospital c. 1050-1640 (Seaby, 1992).

Piers D. Mitchell. Medicine in the Crusades: Warfare, Wounds and the Medieval Surgeon (Cambridge, 2004).

Larissa Tracey and Kelly deVries (eds.), Wound and Wound Repair in Medieval Culture (Leiden,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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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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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캐스트어웨이(여수) | 작성시간 18.12.29 감사합니다
  • 작성자암흑물질 | 작성시간 18.12.29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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