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전남 진도에서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호랑이 사진. 영국 런던에서 1915년 출판된 <아시아와 북미에서의 수렵>에 실렸다.   한국범보전기금 제공
1903년 전남 진도에서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호랑이 사진. 영국 런던에서 1915년 출판된 <아시아와 북미에서의 수렵>에 실렸다. 한국범보전기금 제공

[토요판] 생명 진도 호랑이굴
조선시대 농지확장 정책으로
서식지 잃고 깊은 산이나
인구 적은 섬으로 숨어들어

진도에도 100년 전 최대 10마리
상만리·향동리 범굴 발견
진돗개들 호환 피해
부엌문에 개구멍 만든 기록도

“전라도 섬 지방에도 호랑이가 많이 살았어요. 그런데 ‘백두산 호랑이’가 머리에 박혀서인지 대학교수들조차 믿지 않는 거예요.”

지난달 20일 전남 진도의 호랑이굴을 답사하러 가는 길. 김동진 서울대 연구교수(수의과학연구인력양성사업단)가 과거 ‘억울한 시절’에 대해 웃으며 말했다. 김 교수는 조선시대 호환 기록을 분석하고 있다. ‘반전’은 올해 초 영국 런던에서 1915년 출판된 <아시아와 북미에서의 수렵>이라는 책을 입수하면서 찾아왔다. 영국의 사냥꾼 포드 바클레이가 1903년께 진도에 들어와 호랑이를 잡은 일화와 사진(<한겨레> 2월20일치 11면)이 실려 있었다.
 

김 교수는 진도로 향했다. 맨 처음 진도 사람들의 반응은 “호랑이가 백두산이나 지리산에 있지, 무슨 진도에 사느냐”였다. 2박3일의 1차 조사를 마친 뒤 김정호 전 진도화원장의 전화가 왔다. “<한국지명총람>을 보니까 범굴이나 범골이라고 불린 6~7곳이 있어요. 수소문해보니, 실제 호랑이굴이 있었다고 하네요.”

김 교수는 향토 기록과 목격담을 수집해 호랑이굴 찾기에 나섰다. 이번이 세번째 방문이고, 우리는 진도 남동쪽 어귀산 기슭에 이르렀다. 박종부(80·임회면 상만리)씨가 말했다.

“저그가 다 민산이었재. 올라가믄 항시 만날 정도로 노루, 고라니가 많았재. 호랑이가 다 그거 잡아먹고 살았잖아.” “호랑이를 보셨나요?”

“아니, 내가 본 건 아니지만 호랑이가 산 건 확실혀. 귀성부락의 할머니가 호랑이에 물려갔다고 들었으니께.”

호랑이굴은 어귀산 중턱의 바위 아래에 있었다. 길이 2~2.5m, 높이 1~1.5m. 어미가 새끼 두어 마리를 데리고 넉넉히 누울 정도였다. 사람이 들어가니 꽉 찼다. 호랑이가 보이지 않게 된 이후로는 장작을 구하러 올라간 동네 사람들이 바닥에 돌을 깔아 쉼터로 활용했다고 한다.

진도 호랑이는 조선시대 국영목장이 진도에 있었을 적에는 말을,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노루와 고라니를 잡아먹고 살았다. 백두산과 지리산에만 호랑이가 살던 게 아니었다. 김 교수는 “오히려 국영목장이 있고 사람이 많이 없던 섬에 호랑이의 밀도가 더 높았던 거 같다”며 “인천 강화도나 전라도 섬 등에서 호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의 어귀산 중턱에 있는 호랑이굴에 대해 김동진 서울대 교수가 설명하고 있다.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의 어귀산 중턱에 있는 호랑이굴에 대해 김동진 서울대 교수가 설명하고 있다.
호랑이는 곶감을 주며 달래고 피해야 하는 존재로 전해지지만, 역사적으로 인간과의 관계에서 약자였다. 14세기 무렵 한반도에선 대규모 생태적 변화가 일어난다. 고려시대 동물과 사람이 윤회로 순환한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배격하고 성리학적 민본주의로 무장한 조선의 신진사대부들이 나타나면서부터다. 이들은 농본주의 정책을 펴면서 농지개간에 나섰다. 1389년 80만결에 지나지 않던 농경지는 1406년 무렵 126만결, 16세기 후반에는 150만~170만결로 늘어났다. 인간에게 서식지를 침범당한 호랑이는 호환을 일으켰다. 농지개간과 동시에 조정은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착호군’과 ‘착호갑사’를 신설하는 등 대대적인 호랑이 잡기에 나선다.

“농지개간과 대규모 호환은 밀접히 관련돼 있어요.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중반까지 호환이 극심한데, 열악한 서식환경으로 밀려난 호랑이의 행동 특성을 보여주죠. 18세기 중반을 넘어서면 호랑이 서식지로 간주되던 곳들이 늑대가 출현하는 지역으로 바뀌기 시작해요. 호랑이가 줄어들면서 최상위 포식자가 늑대로 바뀐 거죠.”

어떻게 보면 요즈음 서식지 축소로 인해 도시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멧돼지와 비슷하다. 진도에서 호랑이는 1920년대께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 임순재(당시 75살)씨는 1986년 1월 <예향진도>에 ‘진도 마지막 호랑이’에 대해 증언한다. 그가 10살 적인 1921년 진도읍 성내리 성동부락에서였다.

“아침이 됐는데도 호랑이가 대밭 속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사람을 해치므로 조용히 도망치게 하자고 하여 사람들이 징, 꽹과리를 두들겨댔다. 그래도 호랑이는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결국 죽이는 방법이 결정됐는데, 대나무 끝을 날카롭게 깎아 창을 만들고 거기에 닭을 한마리 끼워 넣었다. 그것으로 호랑이 입을 건드리고 입속에 찔러 넣는 방법이었다. 결국 호랑이는 크게 고함을 쳤는데, 그 순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호랑이를 찔렀다. 그 뒤 읍안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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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호랑이는 진돗개와 묘한 경쟁관계를 이뤘다. 지난달 20일 만난 김창남(68)씨는 “어릴 적 진돗개를 산에 풀어주면 입가에 피를 묻혀 돌아오곤 했다”며 “그뒤 진돗개를 따라가면 노루가 죽어 있었고 마을 사람들과 노루피와 고기를 나눠 먹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돗개도 호랑이 앞에선 젬병이었다. 호랑이가 민가에 내려와 마당에 들어서면 진돗개는 ‘개구멍’을 통해 부엌 안으로 도망가 신음처럼 짖는다. 이 소리를 듣고 집주인은 긴 대나무를 창문 구멍에 끼워놓고 흔들며 호랑이를 쫓는다. 개구멍은 진돗개가 피할 수 있도록 부엌 문턱에 달아놓은 진도 특유의 시골 가옥 구조다.

진도 호랑이는 호랑이의 생태적 특성에 대한 전통적인 선입견을 뒤엎는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말처럼 호랑이가 숲이 무성한 산을 좋아한 게 아니었을 거라고 김 교수는 추측한다. 오히려 노루, 고라니 등 사냥감이 많고 시야가 트인 곳을 좋아했으리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농지가 확장되면서 오히려 호랑이는 깊은 산으로 쫓겨났을 테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국영목장이 있고 인구가 적은 섬으로 몰려갔을 것이다.

이날 추가로 답사한 향동리 등 호랑이굴은 모두 점찰산, 어귀산, 가인봉 등 200m 안팎의 산을 끼고 있다. 호랑이는 굴에 은신했다가 사냥 때 내려와 돌아다녔을 것이다. 20세기 초반 바클레이의 목격담으로만 4마리가 살았는데, 호랑이굴 수와 두어 곳의 큰 산을 고려하면 최소 4마리, 최대 10마리 안팎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식 밀도는 높은 편이다. 한국 호랑이의 마지막 서식지로 알려진 러시아 아무르 지방의 한마리당 서식 면적이 400㎢인데, 비슷한 크기의 진도(363㎢)에서 수마리가 살았으니 말이다. 진도/글·사진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