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백계 러시아인 사회
-저자 : 황동하-
묘비 속에 새긴 사진이 유리 속에 잠들고 있는 8세 되는 어린이의 무덤이 보인다. ‘고요히 잠들라. 내 귀여운 애야! 미래엔 저기서 만나게 해다오’하는 러시아어로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그는 백계 러시아인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혁명 으로 쫓긴 백계 러시아인이 조선 땅에까지 와서 어린이를 묻는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이 어린이는 러시아 부영사였던 알렉산드르 트로이츠키(Александр С. Троицкий)의 아들 비탈리 트로이츠키(Виталь Троицкий)이다.
그는 1916년 조선에서 태어나 1924년에 죽었다.
그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 화진 외국인 묘역에 묻혀 있다(묘지 번호 K-20).
또 그곳에는 세르게이 치르킨(С. В. Чиркин),
안드레이 튤킨(А. Д. Тюлкин),
예프게니 스 미르노프(Е. Смирнов) 등 백계 러시아인들이 묻혀 있다
이곳에 묻힌 러시아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이곳에 묻혔을까.
1920년대 초 한반도는 러시아 연해주지역에서 볼셰비키에 쫓겨 피난 온 백계 러시아인들의 피난처였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상하이, 홍콩, 하얼빈,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샌프란시스코, 일본 등지로 다시 떠났지 만, 일부는 한반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식민지시기 조선의 경 성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에 “작지만 흥미 있는 러시아공동체”를 만들 었다.
이 그림은 皇城新聞 1900년 7월 4일에 실린 자전거 광고이다.
아마 도 국내에서 나온 최초의 자전거 광고로 추정된다.
“정동 초입에 있는 怡泰号上邊 新築洋屋主人 캐리스키”는 새로 수입한 자전거를 팔려고 신문에 광고를 냈다.
캐리스키는 러시아사람인 것 같다. 식민지시기 이전에 러시아사람들은 정동 러시아공사관 근처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 다.
1884년 「조로수호통상조 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 사람들은 경성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 계대전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러시아인 사회’가 한반도에 들어서기 시작 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인 사회의 성격은 러시아 국내 상황의 변화로 크게 달라 진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자, 조선에 있는 러시아인 사회는 20세기 초 국제 정치 상황에 휘 둘리는 “쫓겨난 사람들” 다시 말해 ‘망명촌’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 뒤, 러시아는 4년 동안 벌어진 내전(1918~1922년) 에 휩싸였다. 제국주의 열강이 혁명러시아에 대한 간섭전쟁을 일으키자, 러시아 안에 있는 반혁명세력(백군)이 소비에트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1918년 7월 4일 극동소비에트정부가 지휘하는 붉은 군대와 콜차크(А. В. Колчак) 제독 을 중심으로 한 백군 부대 사이에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랜 전투 끝에, 1922년 10월 붉은 군대가 러시아 극 동군의 행정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босток)를 점령했다. 이로 써 극동에서 벌어진 ‘내전’은 막을 내렸다. 그 탓에 극동의 반혁명세력을 이루었던 백계 러시아인들은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1922년 10월 21일부터 백계 러시아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10월 24일 글레보프(Ф. Л. Глебов) 중장이 이끄는 극동군 병 사들이 가족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와 한반도 북부 사이에 위치한 포 시에트(Посьет) 항구에 도착했다.
레베데프(Д. А. Лебедев) 장군이 이 끄는 우랄-경기병 여단(Урало-Егерский отряд)의 병사와 가족들도 포시 에트 항구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10월 25일에 스타르크(Ю. К. Старк) 제독은 해군 병사들과 가족들을 태운 시베리아함대를 이끌고 포시에트 항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극동군 사령관 미하일 디테리흐스(М. Дитерихс) 중장은 행선 지를 정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스타르크 제독은 독자적으로 원산 행을 결정했다. 그는 포시에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원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철군으로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물자를 제대 로 갖출 수 없었고, 무엇보다 극동 지역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국가들 이 패잔병인 ‘백군’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신해혁명 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군벌들이 지역별로 득세해 러시아난민들 을 보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극동지역에 항구를 가지고 있는 영국 등 일부 서방세력은 모두 백계러시아인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 다. 미국은 볼셰비키 정권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항구는 마 닐라로 2천마일(3,700km) 이상이나 떨어져 있었다. 반면 일본은 백계러시아 지도 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군 지도자들은 자연스 럽게 일본의 식민지로서 포시에트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원산을 선택했 던 것이다.
1922년 10월 28일 러시아인들은 포시에트를 출발해 10월 31일에 원산 에 도착했다.
그 뒤 몇 번에 걸쳐 난민을 태운 선박이 잇달아 원산에 도 착했다. 로국피난민구호지露國避難民救護誌에 따르면, 10월 23일부터 피난민은 잇달 아 원산에 도착하여 11월 6일까지 그 수는 9,000명 이상에 이르렀다고 한다.
9,000명 가운데에는 붉은 군대와 전투할 때 중경상을 입어 부상 당한 군인과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배 안에는 정원보다 많은 사람이 비 좁은 배 안에 무리지어 있었고 먹을 것도 모자랐으며, 수면부족과 극도의 피로와 기아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홍열, 장티푸스 환자가 생길 수 있을 만큼,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1922년 11월 1일 현재 원산항에 도착한 러시아난민의 숫자는 총 7,504 명이었다. 부상병 541명, 해군과 승무원 1,221명과 이들의 가족 342명(남 5명, 여 208명, 어린이 129명) 그리고 군인 2,830명, 유년학교 생도가 307명, 일반 피난민이 2,263명(남 668명, 여 793명, 어린이 802명)이었 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 피난민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했다. 일본은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지역의 내전에서 백계 러시아군을 도와 적극적으로 참전했고 그 과정에서 백계러시아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사실 일본은 이 내전에 가장 먼저 참전했다. 일본은 1918년 1월 12일 군함 이와미를 블 라디보스토크에 파병했다. 뒤이어 순양함 아사히가 증파되었다. 블라디 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 기쿠지 기로(菊池義郞)는 입항 목적이 ‘일본거 류민들을 보호’ 하는데 있으며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렸 다.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의 불안정한 정국으로 조선과 남만주 및 동 부 내몽고 지역에서 일본의 주도권이 불확실해질 수 있다는 명분 때문에 참전했다. 그래서 일본은 군대를 동청철도 부근과 연해주 일대에 전진 배치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러시아의 내전과 혁명을 틈 다 동시베 리아 지역을 관리하려는 팽창의욕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소련과의 관 계를 생각해서 러시아 피난민 을 적극적으로 도울 처지에 있 지 않았다. 일본정부로서는 러 시아 피난민이 ‘계륵’이었다. 일 본은 피난민의 상륙을 허용하 지 않고 곧바로 다른 지역으로 떠나도록 촉구했다. 러시아 선 박에는 항해하는 데 필요한 물 자가 거의 바닥이 나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려면, 필요한 물 자를 공급받아야 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출항을 전제로 스타르크 제독에 게 물과 석탄을 공급하겠다고 제안했다. 난민들을 이끌고 있는 스타르크 제독은 일본정부의 이러한 소극적 태도에 대응할 수 있는 어떠한 수단도 없었다. 더구나 곧 겨울이 다가와 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불가피하 게 11월 21일 약 1,970명(해군 약 1,500명, 유년학교 생도 335명 및 그 가족 129명)이 14척의 함선에 나누어 타고 원산을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23일 부산에 도착한 스타르크 일행은 선박을 보수하고 난 뒤 러시아난민 을 실은 다른 함선과 합류해 12월 2일에 한반도를 떠났다. 스타르크 제독 일행이 원산을 떠난 뒤 원산에 남은 피난민의 수는 5,572명에 이르렀다.
원산에 수용된 러시아피난민……의 대부분은 관군이며 붉은 군대에게 참패한 패전 자로서 가족을 합하여 7천 5-6백 명이 함선 23척에 나누어 타고 멀리 이국의 원 산 항만에 도착하여 운명을 결정지으려고 한다. 그네의 행선지는 처음에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중국 하얼빈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외국여행권이 없 고, 1,500원 하는 배삭도 없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지어 숙박할 돈도 없어서 당 국은 상륙을 금지하였다.
----되돌아가려 해도 석탄이 부족하고……부상자의 곤경과 내일부터 먹을 것도 모자라 진퇴양난에 빠진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으리요. 차라리 우리를 원산 바다 한가운데에 산 채로 매장시켜달라는 말까지 나왔다. -----
그 뒤 일본 적십자사와 당국의 도움으로 부상자 6백 명은 예전에 수산품평회장인 동세관 창고 에 수용해서 치료하기로 했다. 그에 따라 소수의 인원도 상륙할 수 있어서 옛 세관 관내에서 천막생활을 하고 지냈다.
……그들이 수용된 창고를 돌아보았다.
……창고 안에는 중경상자로 가득했으며
……공기는 더러웠다. 창고 안 바닥 위에 나무판자 를 깔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팔다리가 또 어떤 사람은 얼굴 부상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전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나와 같이 건 강한 사람도 이런 곳에서는 견딜 수 없는데 앓아누운 사람들은 어떠하리오.
……곰 팡이가 난 빵 조각을 먹고 있는 그들의 여윈 얼굴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보는 사람마다 돈을 달라하며……마치 영화 같은 비극을 보 는 듯……
원산수용소를 방문한 조선 사람이 쓴 글이다. 그가 표현했듯이, 수용소 생활은 마치 ‘활동사진’에 나오는 가상의 세계인 것처럼 믿기 힘들었다. 그는 너무 끔찍해 서 “동정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지 못 하였다”고 한다. 9개월 동안 수용소 생 활에서 221명이 죽었다. 그 가운데에는 병으로 죽은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세상 을 비관하여 자살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피난민의 처지는 더욱 나빠졌다. 난민을 도우려 고 ‘노국피난민 경성위문회’가 조직되었고, 이화 학생들은 옷을 만들어 보냈다. 경성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러시아피난민 구제위원회를 조 선호텔에서 열었다. 미국인 선교사 아서 노블(William Arthur Noble) 은 러시아난민원조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조선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단에서는 조선에 있는 외국인에게 아라사피난민을 위해 자금을 모집하여 양식을 사주고 기타 구제에 힘을 쓰는데, 그 사무소를 태평통 ‘테 일러’의 집에 두고 선교사 노엘저만스 이외 많은 의원을 임명하고 사무를 집행하며 또 예전에 미국군대가 시베리아에 출전하였을 때 종군하였던 기독교 청년 회원에 게 보내려고 모집한 기부금 가운데 남은 돈 이천원도 미국영사관에서 금번 그 피난민에게 보내기로 되었다고 한다-----.
피난민을 대표한 레베데프 중장은 경성을 방문하여, ‘이름도 모르는 동 포의 기증’에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난민 생활은 고달파 ‘먹을 것이 없어 처녀들은 바이올린이나 만돌린을 가지고 집집마다 다니며 한 푼 두푼을 얻어’ ‘빵떡’을 사 먹고, 급기야 ‘매서운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타고나온 군함 두 척을’ 경매에 붙여 팔기도 했다.
-----지난 십오일 오후 여섯시 경에 러시아군복을 입은 러시아사람 십삼 명이 양주경찰 서에 와서 밥을 달라고 해서 이 경찰서에서는 저녁밥을 먹인 뒤 곧바로 철원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 러시아사람들은 원산에 체류하던 러시아 피난민이다.-----
미국선교사인 노블(W. A. Noble)은 그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원산 항구에……사람들은 버려진 세관창고를 숙소로 이용했다. 그들은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건물의 난방은 중앙에 놓여 있는 작은 난로밖에 없 었다.……여러 주 동안에 그들은 임시막사에서 살고 있었고 일상의 안락함과 위생 을 위한 수단 없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따라서 쓰레기와 해충에 희생당했다. 기근이 바로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임시직이긴 하지만 일을 해야 살 수 있었다. 겨 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서, 러시아인들은 일자리를 신청했다. 그 수는 610 명이었고 그 가운데 43명이 일자리를 얻었다(표2 참조). 또 그들은 단체 로 철도공사나 도로공사, 철원 중앙수리조합에서 일을 했다.
또 러시아피난민의 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문을 열었다.
-----아라사 피난민 제2수용소인 송전만에는 일찍이 아동교육을 위하여 학교를 설립할 계획이 있었다. 이번에 학교를 설립하고 지난 12월 28일부터 수업을 시작했는데, 150명의 생도를 셋으로 나누어 가르치고 있으며, 제1수용소, 즉 옛 세관에 있는 피 난민의 자녀에게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교육을 할 생각이라고 하더라.-----
제2수용소뿐만 아니라, 제1수용소에서도 임시학교가 문을 열어 1923년 1월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임시학교의 교실이 좁았기 때문에, 조선불교연 합회 원산지부가 중심이 되어 공사비 2,200원을 지원해 42평 규모의 예 배당을 새로 지어 학교로 사용하기로 했다. 1923년 2월 18일에 공사가 끝나 2월 27일에 개교식을 했고 그날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다. 개교할 때 에는 학생 수가 약 200명이었지만, 제2수용소에 있는 학교가 이전해서 합친 다음에는 전체 학생 수가 336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923년 7월말에 원산수용소가 폐쇄되면서 학교도 1923년 7월 25일에 문을 닫았다. 몇 차례에 걸쳐 러시아피난민들은 원산을 떠나 상하이 등지로 떠났다. 대부분의 백계 러시아인들은 9개월가량 수용소생활을 끝내고 백계 러 시아인들의 집단거주지가 있는 외국으로 떠났지만, 1920년대 말까지 대 략 100명에서 200명 정도는 경성 등지에 남아 정착했다. 경무국의 조 사에 따르면, “현재 조선 내에 거주하고 있는 러시아인의 수가 경기도에 52명 평안북도에 12명 함경북도에 66명 충청남도에 1명 강원도에 1명으 로 합계 136명”이라고 한다. 이들이 식민지 조선에 백계 러시아인 사 회를 만들었다.
1917년 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무너지자, 조선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 들의 상황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경성에는 무국적자가 된 제정 시기의 러시아 외교관들과 정교회 신부들, 그리고 백계 피난민들로 이루어진 러 시아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현재 경성에 있는 러시아인은 약 65명(이 가운데 여자 6명)이다. 이 가운데 대략 40명은 작년 11월 말 이후 연해주 방면에서 피난민으로 입경(入京)한 사람이다. 또 士耳其(터키)계 러시아 상인으로 하얼빈 방면에서 경성에 들어온 약 19명이다.-----
‘경성의 백계 러시아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세르게이 치르킨(Сергей Чиркин)과 그의 부인 나탈리야 치르킨(Наталья Чирк ин)이었다. 치르킨은 1911~1914년에 러시아 총영사의 비서로 경성에 근 무한 적이 있었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치르킨은 타슈켄트(Ташкент) 주재 러시아영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르제국이 무너지자, 그들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붉은 군대가 타슈 켄트로 몰려왔을 때, 그들은 영국의 도움 을 받아 인도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곳에 서 그들은 향후 목적지를 물색하고 있었 다. 치르킨은 예전에 경성에서 사귀었던 독일 상인에게 경성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의 도움으로 치르킨 부부는 1918년에 경성에 도착해 정동에 있는 정교회 주거 단지 아파트에 살 수 있었다. 치르킨은 조선은행에서 일했고, 관광성, 경 성 제국대학 등지에서 외국어를 통역하거나 가르쳤다. 그의 부인 나탈 리야는 미용실을 열었고 경성에서 최신 유행을 선보이는 살롱 가운데 하 나로 성장했다. 1924년에 쌍둥이인 블라디미르와 키릴이 태어나자, 나탈 리야는 미용실을 그만두고 집에서 옷을 만들었고 음악을 가르쳤다. 그들 은 경성에서 상대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했다.
경성의 백계 러시아인의 삶
백계 러시아인들은 교육 수준이나 예전 직업과 상관없이, 블라디보스 토크를 떠날 때 거의 빈손이었다. 그들은 “식당종업원, 운전사, 손톱소제 사,” 창기, 하녀, 야경부 등 그 어떤 일이라도 해야 했다. 예전에 러 시아제국 군대의 군의총감이었던 세제네프스키(Сезеневский) 부부도 경성 태평통 ‘텔러’ 상회의 점원으로 일했다. 양복감과 아라사 빵을 팔면 서 생활하고 있는 “부내 정동 25번지에 사는 이반 니콜라이비치 체노파 노프(Иван Николайвичь Ченопанов)”처럼, 그들은 대부분 양복감과 ‘아라사’ 빵을 팔아 생활하고 있었다. 몇몇은 하얼빈에서 국경 밖으로 금 시계와 보석 등을 반출하는 밀수업을 하기도 했다
백계 러시아인들은 남대문 시장 근처에 살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 다. “그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양복점 을 낸 사람도 있었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가내 수공업’으로 “가족들은 바느질을 하고 남성은 재단 일을 하는” 정도였 다. 상점을 열 수 없는 사람들은 대체로 오늘날 ‘3D 업종’으로 묘사되 곤 하는 일을 했다.
-----서울에 와 있는 백계 러시아인이 있지만, 그들은 처지가 처지이니 만큼 어려운 살 림을 하고 있다. 이른바 러시아 빵이나 기성 양복 또는 양복감을 어깨에 둘러메고 돌아다니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그들을 볼 때는 같은 외국 사람이지만 그 인간만이 퍽 딱해 보이기도 한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서일까. 그때 신문에 나오는 기사를 보면, 그들 은 이따금 주점에서 행패를 부려 유치장에 감금되기도 했다고 한다.
----시내 홍파동 78번지에서 운전을 하며 사는 <에이, 에이, 츔킨>과 평동 13번지 <야 코레프> 두 명은 다 같이 백계 러시아 사람이다. 그들은 보통 때에도 태도가 좋지 않았는데, 19일 밤 11시 30분에 시내 명치정 이정목 68번지 <토로이카>에 가서 술 을 먹다가 이웃 좌석의 손님들에게 주정을 하고 그것을 말리자, 그릇 등을 내던지 며 한바탕 야료를 부렸다는 보고를 듣고 관할 명치정 파출소 순사가 현장에 가서 그 두 명을 붙잡자, 그들은 순사에게도 가진 욕설을 다하고 파출소의 유리창까지 깨트렸다. 20일 아침 본정서에서는 두 사람에게 구류 이 주일에 처하였다.-----
남대문 구역에는 러시아 매춘도 생겨났다. 가난과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러시아 난민 여성들은 ‘매춘’에 노출되었다.
-----금발부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이용하려고 경상북도 대구에서는 樂天 一力亭 芳千 閣에 각각 한명의 젊은 금발부인을 데려다가 오는 손님의 소매를 끌고자 함은 시 국으로 말미암아 생긴 희비극이더라.-----
그마저 식민당국의 감독으로 그들은 실업자 처지가 되었다. “시내 본 정 경찰서에서 관내에 있는 각 카페에서 외국인 여급을 고용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재차 영업주에게 주의를 시킨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서사헌 정에 있는 <살론 아리랑>에서는 독일 여자 릴테애(29, 일명 대경성자)를, 시내 본정 이정목에 있는 본미인좌에서는 로서아 여자 마리아 니나(28) 를 여급으로 고용한 사실로 6일 본정 경찰서에서는 두 주인을 호출하여 각각 과태료 십 원을 부과하고 동시에 앞으로는 고용을 절대로 금지시켰 다 한다.” 일을 해도 돈을 받지 못하는 여성도 있었다. 이제 겨우 17 살인 이리에 스타로니젠코는 박도병이라는 사람이 조직한 가무단에 소속되었지만,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박도병을 경성지방법원에 고소” 하기도 했다.
예외가 있긴 했지만,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가난했다.
-----수표정 한 모퉁이에 셋집을 얻어 사는 <에이 에이 크랜트>씨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명문대가의 자손으로 일찍이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장이 되어 백만 군 대를 거느리고 한창 때에는 잘 나가던 사람이라고 한다. ……이제는 다시 돌아오 지 못할 옛날의 꿈이 되었고 한 주걱 보리밥과 말라버린 빵 덩어리로 겨우 생명을 보전하며……기자가 그 집을 방문하였을 때는 마침 점심시간이라 깨진 유리문 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드는데, 그들은 보리밥과 감자 국을 떠놓고 ……모진 풍파에 여지없이 쪼들린 그들의 얼굴에는 이마에 가로 잡힌 잔주름이 비애의 일단을 말없 이 드러내는 듯하다. 남편의 나이 금년에 31, 부인의 나이 반 오십을 겨우 넘은 그 들로써 그렇게 엄청나게도 늙어 보였다. 그들이 들어 있는 세집―위층은 세를 주 고 아래층 한 편 방은 손님을 들게 하고 그들은 다 떨어진 장판방에 조그만 침상을 놓고 또 한 방은 식당 응접실로 겸하여 쓰고 그들의 밥벌이 인 영어 개인교수도 역 시 그 방에서 하는 것이다. 테이블 한 개에 의자 다섯 밥 짓고 국 끓이는 냄비 두 개 풍로 한 개 화덕 한 개 접시 몇 개 숟가락 젓가락이 그들의 살림살이의 전부라 한다.-----
그들에게 가난보다 더 힘든 것은 정세 변화였다. 그들의 삶은 국내외 정세에 따라 달라졌다. 1925년 소일조약이 체결되자, 백계 러시아인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들은 소련대사의 소련국적 취득 요구에도 반응하지 않고 ‘무국적’자로 남아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미국으로 건너 가려고” 하거나, 중국으로 귀화하려고 신청하기도 했다. 이들 백계 러시아인들은 소련인들과 정동 대사관 구역에 같이 살면서도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것은 샤브쉬나(Ф.И.Шабшина)의 회고에도 잘 나타 나 있다. 또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는 적계 아이들과 백계 아이 들은 자주 서로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적 계 러시아인과 백계 러시아인 사이에서는 ‘내전’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백계 러시아인들은 전시체제의 동원시스템에 포섭되기도 했다. 1936년 독일·일본 방공협정이 체결되고 난 뒤, 식민당국은 백계 러시아인들을 ‘반소행위’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백계 러시아인들은 “제국주의열강의 위세를 빌려 이른바 복벽운동을”, 즉 “자기들의 제국재건을 꾀 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군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거나 방송국에서 ‘통역’자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때(1936~1939년) 每日 申報에는 ‘동아평화를 위하는 외국인들’의 국방헌금 사례를 보도했 다.
-----백계 러시아인은 일정한 국적이 없이 세계 각지로 안주의 땅을 찾아……나그네 세 월을 보내고 있지만, 경성에 있는 30명의 백계 러시아인은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 다. 이것은 일본국가의 덕택이라고 감격하여 금번 부내 정동정 22 백계 러시아인이 모이는 정교회에서는 이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겠다는 의미로……폴리카르 프 신부가 75원을 가지고 서대문 경찰서의 초야 외사계주임을 찾아와서 사소하나 마 국방헌금으로 접수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1940년에 들어서자, 국제정세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그들은 또다시 20세기 국제정치에 좌우되었다. 1950년까지 한국에 남아 있었던 백계 러시아인들의 운명은 비극 그 자체였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서울에서 체포되어 심문받았고, 구금당한 뒤 평양으로 이송되었 다. 그 뒤 만주 국경으로 이송되었다. 이른바 ‘죽음의 행진(Марш к сме рт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압록강 남쪽 둑 을 따라 계속 행진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행진 도중에 죽었고 양화 진 외국인묘역에 묻혔다.
원문출처 - http://kiss.kstudy.com/public/public2-article.asp?key=5089450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