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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경험

조선의 기근과 식인(인용글)

작성자travel|작성시간16.12.22|조회수1,090 목록 댓글 2

출처:http://blog.naver.com/alsn76/40209844165

본 사이트에서는 중복은 없는 것으로 검색되나 이전 발제글과 중복일 수 있음


들어가기 앞서

 


조선시대 때 가장 큰 재난은 무엇이었을까?



 


전쟁?


 


물론 임란과 호란으로 


총 300만명의 인명이 손실됐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재앙이 있었다.


바로 기근이었다.



 


17세기 후반 동아시아를 휩쓴 


소빙하기의 여파로




경신대기근(1670년)과 을병 대기근(1690년)으로만 


260만명의 인명 손실이 있었고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대대적인 엘리뇨 현상과 




장기간의 흉년으로


250만명 이상의 인명 손실이 있었다.


 


따라서 17세기 후반 ~ 19세기 초까지의 기근으로만


총 500만명 이상의 인명 손실이 있었다. ☞ 참고


 


 


게다가 임란과 호란 중 


인명손실이 컸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농촌이 피폐화되어 기근자가 넘쳐 


굶어 죽는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즉 기근의 파괴력은 


전쟁조차 능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기근은 


농경국가의 숙명이기도 했다.


 


결코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뭐임?"


 



"농업에 의존하는 경제는


곧 기후에 의존하는 경제를 뜻하지."


 



"그런데?"


 



"기후라는게 예측한대로 


이뤄지지는 않잖아."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계절풍 기후대에서는 더더욱.."


 


때문에 한 해 농사가 잘되면


농민은 풍족해지고


 


잉여생산물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게 되고


국가적으로는 재정이 충족해질 수 있었지만,


 


기상이변 등으로 


한 해 작황이 좋지 않기라도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속수무책이었다.


 



"과거에 흉년이 들면


흔히 기근 + 역병 + 민란이라는 쓰리콤보로 연결됐지."


 



"어떻게?"


 



"기근이 발생한다 → 식량을 찾아 유랑자가 발생한다 →


마을은 텅텅비고 농촌은 피폐화된다 →" 





"백성들은 거지가 된다 → 


그러다가 도둑(민란)이 된다 → 중앙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한다."


 



 



"흉년의 피해가 생각보다 엄청난데?"


 



"또 사람들은 못 먹다보니, 면역력이 약해져서


기근이 들면 늘 역병이 친구처럼 따라다녔지."


 


 


 



"그래서 쓰리콤보로군."


 


그 뿐만이 아니었다.


기근을 한번 겪게되면




국가적으로는 


인구가 크게 줄어들게 되었으니


 


이는 곧 노동력 감소 + 국방력 감소 + 재정의 감소라는 


피해로 이어졌고




궁극적으로 '왕권의 약화'로 


이어지는 부분이었다.



 


때문에 기근이 들면


누구보다 안절부절하지 못했던게 임금이었고


 


정부에서는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쟁여놓았던 곡식을 풀고




공짜로 죽을 먹이는 등의 


거국적인 대책을 시행했다.


 



"우와! 조선시대 임금들 훌륭했네."


 


하지만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기근이 발발하면 세금을 내야할 농민들이


농삿일을 때려치우고.."





"대갓집의 노비로 


전락해 들어가 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게 되면, 양반들이야 좋았지만


임금으로서는 자신의 세금줄이 줄어드는 꼴이 되었지.


 



"때문에 적극적으로 


구휼하고자 했던거임."


 


사실 이런 역학관계를 염두하고


조선시대의 구휼정책을 바라보면, 좀 더 상황이 잘 들어온다.


 


 



"아, 그래서 선조나 인조 같은 임금도


그토록 백성들을 위해 구휼 사업을 행했던 것이군."


 


어쨌든 조선시대의 기근은 


가장 중대한 국가적인 시안이었고


 


기근이 일어날 때마다


정부는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근은 예외없이 자주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국가는 


대대적인 홍역을 앓아야 했다.


 


여기서는 기근 당시에 


백성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떠했었는지, 


 


그 참담한 상황을 


실록을 찾아서 정리해봤다.






● 보릿고개




보릿고개는 봄철 기근을 말한다.

"왜 봄철에 기근이 심했던거지?"

"가을에 추수한 쌀은 
보통 봄에 바닥이 나게 되는데.."

"그때를 대비해서 예전부터 봄, 여름철에 먹을 용도로
보리나 밀을 가을쯤에 심었지."

"그런데?"

"가을에 흉년이 들면 
쌀은 생각보다 빠른 시기에 바닥이 났어."

"그래서?"

"보리나 밀은 5~6월은 지나야
제대로 여물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것만 기다리면서 
쫄쫄 굶주려야만 했어.

"그런데 이 시기가 
워낙 고달팠기 때문에.."
 
"보리를 기다리는 시기라고 해서
흔히 '보릿고개'라고 했던거임."





그렇다면 조선시대 보릿고개는 


과연 어땠을까?




1409년 윤 4월 22일 조선왕조실록
 
 태종 
"작년 가을에 흉년이 들었는데,
올해 밀과 보리는 언제 수확이 가능한고?"
 
"지금 밀과 보리가 
거의 익어가고 있는데,"

"다만 굶주린 백성들은, 먼저 익은 이삭을 골라서 볶거나 쪄서 
겨우겨우 먹고 살아간다고 하옵니다."

 태종 
"저런 저런, 
그래서 제대로 먹을 수나 있겠는가?"
 
"맞사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백성들은 언제 한번 배불리 먹어보는게 
소원이라고 하옵니다."


1461년 3월 8일 조선왕조실록
 
세조는 신료들에게 대차게 따졌다.
 
 세조 
"지금 도성 인근 지역에 사는 백성들 중에서
300가구가 양식이 떨어져서.."

 세조 
"의창에 보관된 곡식으로 
이를 구호해달라고 부탁하던데,"
 
 세조 
"왜 이 지경이 되도록 
구휼하지 않은거임?"
 
그러자 좌승지 김종순이 아뢴다.
 
 김종순
"오해가 있사옵니다."

 김종순
"제가 듣기로는 요즘 시장에서는 
쌀을 흔하게 팔고 있다고 하던데,"

 김종순
"도성 인근의 백성들은 식량이 떨어졌다고 하니
좀 이상하지 않사옵니까?"
 
 세조 
"레알?"
 
하지만 임금은 반신반의했고
환관들을 시켜서, 직접 민가에 나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환관들이 알렸다.
 
 환관
"전하, 민가에 가봤더니
백성들 사는 처지가 매우 딱해 보였습니다."
 
 세조 
"그래 어떻더냐?"
 
 환관
"고작 쌀 몇되 정도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세조 
"뭣이, 그러면서 시장에 쌀이 팔리고 있다고
백성들의 구휼을 게을리해?"

 세조 
"여봐라! 
얼른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하라."






1629년 윤 4월 19일 조선왕조실록




인조가 명령했다.
 
 인조
"지난번에 구휼미 풀었잖아.
지금 어떻게 됐는지 상황 파악하고 보고하도록."
 
그렇게 호조판서 심열에게 시켰으니,
심열이 현장을 조사하고 보고했다.
 
 심열
"전하, 조사해봤는데,
구휼이 잘 안된 듯 하옵니다."
 
 인조
"아놔, 소상히 말해보거라."
 
 심열
"광주리에 도시락을 싸온 자가 있어
함 풀러보라고 했습니다."

 인조
"도시락 속에 뭐가 들었더냐?"

 심열
"곡식은 한톨도 없고
죄다 풀과 나무 뿌리 밖에 없었나이다."




 인조


"이런, 이런.."






● 가을 흉년




사실 보릿고개보다 


더 위험했던 상황은 가을 흉년이다.





"보릿고개야 두어달 버티면 됐지만,


가을 흉년은 겨울부터 봄까지, 쭉~ 고난의 행군이었지."





"그 사이에는 추운 겨울도 있어서


더 힘들었겠네."





"맞아. 기근으로 굶어죽는 사람들은


보통 1~3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나왔지.





"이런 상황은 


중국이나 일본도 비슷했어."




그렇다면 가을 흉년의 피해는 어땠을까?






1733년 5월 25일 + 10월 11일 조선왕조실록




1733년. 가을흉년이 


2년 연속 나라를 휩쓸었다.




먼저 5월의 일이다.




 영조


"그래, 이번에 경상도 지역에
기근이 심하다던데 피해 상황이 어떠한고?"





"진휼장(난민구제소)에 나온 
굶주린 백성이 17만 9,865명이었고.."

"떠도는 거지가 1만 1,685명, 
사망자가 총 1,326명이었습니다."
 
 영조
"헐! 피해가 막심하구나."




하지만 그해 가을에도 흉작이어서 
기근의 피해는 여전했다.
 
이번에는 
전라도의 피해 상황 보고다.
 
전라감사 조현명이 
전라도 해안가의 백성들의 참상을 보고했다.
 
 조현명
"전남 고흥에는
원래 4만여명이 살고있는데.."
 
 조현명
"이번에 흉년이 들어 죽은 사람이 
총 2만여명이옵니다."

 영조
"한 고을에서만 
2만명이나 죽었단 말인가?"

 조현명
"그렇사옵니다. 이는 임진년과 병자년의 
전쟁의 참혹보다 훨씬 심한 참상이옵니다."
 
 영조
"이..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조현명
"현재 마을에는 닭과 개는 
모두 멸종된 상태라고 하옵니다."






1422년 12월 28일 조선왕조실록




사실 보릿고개는 
매년 겪는 것이지만

여름에 홍수나 가뭄이 들어 겪게되는 
가을 흉년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고,

때문에 그 피해는 
훨씬 극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고을 수령의 가렴주구까지 더해진다면
백성들은 그야말로 살 길이 막막해졌다. ☞참고
 

이럴 경우에는 아예 살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수 밖에 없었다.
 
 
"전하, 올해 평안도, 함길도, 강원도, 황해도 등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이 살 수 없어
유랑을 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세종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전라도와 경상도에 
풍년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식량을 구하러 그곳으로 떠나는 행렬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하옵니다."

"때문에 요즘 서북 지방에는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다고 하옵니다."

 세종
"그런가?"
 
  
"그런데 이들 유랑민을 붙잡고자 
평안감사와 서북지방의 수령들이.."
 
  
"백성들의 이동을 금지하기를 청하고 있는지라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종
"백성들이 서북 지방에 남아 있으면
감사와 수령들이 구휼이라도 해줄거란 말인가?"

  
"그건, 좀.."
 
 세종
"백성이 기근을 피해 떠돌아 다니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세종
"그보다 지역마다 유랑민을 위한 
진제소를 설치하여 구휼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당시에는, 떠도는 백성들이 많았어도
굶어 죽은 백성들은 적었다고 한다.






● 양반들까지 구휼해달라고 하니




조선시대 구휼미는


기본적으로 나라의 담세자인 상민이, 




노비가 되는 것(면세자가 되는 것)을 막고자 


나라가 직접적으로 나서 구휼했던게 근본적인 이유였다.





때문에 구휼미를


면세자인 양반이나 




그들의 재산인 노비들이 


타먹으면 원칙적으로 잘못이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이랬다.






1409년 윤 4월 22일 조선왕조실록





"근자에 보릿고개가 극심하여
나물 캐는 사람들이 산과 들에 널려 있사옵니다."

 태종 
"알고 있어. 그래서 구휼미를 풀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랬습니다. 하온데, 이들 중에 양반들도 다투어 와서
양식을 받아가려고 하니 큰일이옵니다."
 
 태종 
"아니, 백성들 구휼하는데
왜 사대부까지 와서 곡식을 탐낸단 말인가?"
 
"그만큼 민생이 
어려워졌다는 얘기옵니다."

 태종 
"그래도 그렇지. 
평소 세금 한푼도 안내는 것들이.."
 




1639년 3월 25일 조선왕조실록




하지만 보통은 양반이라는 체면 때문에


굶주릴 지언정,




구걸하거나, 진휼소에 나가서 


손을 벌리는 경우는 적었다.


 




때문에 기근이 들면


체면 치례하느라 




산 입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


양반들의 고통이 어쩌면 더 극심할 지도 모른다.




인조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인조


"올해도 보릿고개가 심하다던데,
그래, 어떤 소식이 있는가?"





"신이 들으니, 어떤 사대부가의 부인이 
혼자 살다가 굶주림에 지쳐서.."

"비통한 말을 벽에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옵니다."
 
 인조
"저런, 저런..." 
 
"또 경북 예천에서 어느 행상이 
양반 집에 들러 밥 지을 쌀을 내어주었는데,"
(당시의 여행객들은 흔히 이런 식으로 숙식을 해결했다.)

"시간이 지나도 밥을 내어주지 않아서 
양반 주인에게 영문을 물었다고 하옵니다."
 
 인조
"그래서?"

 
"그랬더니, 
양반이 행상에게 하는 말이.."

"굶은 지가 오래되어
아이들이 다투어 먹는데,"

차마 빼앗지 못해서 이미 다 없어졌다고 말하면서
옷으로 보상하기를 청했다고 하옵니다."
 
 인조
"이런, 어찌 양반이 되어서.."
 
 
"하지만 상인은 
양반 댁을 불쌍히 여겨.."

"아무 것도 받지 않고 
도리어 양식을 나누어주고 갔다고 하옵니다."
 
 인조
"참으로 가상한 인물이도다."
 
 
"그런데 나중에 
상인이 다시 그 마을에 들러 물어보았더니," 

 
"그 양반댁 사람들은
모두 굶어죽고 없었다고 하옵니다."
 
 인조
"쯧쯧쯧.."

 
"나라에 기근이 들어도
선비들은 감히.." 

 
"문 밖에 나가 빌어먹을 수 없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 가족을 버리고 달아나다




작황이 좋지 않아 수확량이 적게 되면
겨울부터 고민이었다.




그리고 유랑민들은 


이 시기에 급증하게 된다.



 




1437년 1월 13일 조선왕조실록





"전하, 전라도에 
올해 수확량이 괜찮다고 하여.."

"다른 지방에서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전라도에 가서 얻어 먹는다 하옵니다."

 세종
"그런가!"
 
"그런데 어린아이를 
먹이지 못하여.."

"길가에 버리거나
나무에 매어놓고 가기도 하고,"
 
"남의 집에서 하룻밤 자기를 청하고서
그대로 버리고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하옵니다."

 세종
"아니, 이런 경우가 다 있는가!
그래 얼마나 된다고 하는가?"
 
"이번에 보고된 어린 남녀의 수가 
모두 32명이 되옵니다."

 세종
"그럼 그 아이들을 구휼하도록
공문을 보내도록하라."
 

1593년 7월 15일 쇄미록




임진왜란 중에는 
사정이 더욱 급박했다.
 
여름 어느 날, 
오희문이 길을 걷다 보니

7~8세 되는 아이가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
 
여인 하나도 길가에 앉아서 
얼굴을 가리고 역시 슬피 울고 있었다.

 
괴이해서 물어보았다.

 오희문 
"왜 그렇게 울고 있는가?"
 
 
"지금 제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습니다."

 오희문 
"왜 버리고 갔는가?"
 
"원래는 세 사람이 
떠돌면서 구걸했는데.."

"이제는 더이상 빌어먹을 곳이 없어서
장차 모두 굶어 죽게 생겼으니,"
 
"제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간 것입니다."
 
 오희문 
"저런.."
 
"우리는 정녕 이대로 굶어죽을 수 밖에 없구나 싶어 
이렇게 울고 있는 것입니다."
 




● 떠돌다 죽는 유랑민들




하지만 유랑민들 중에서는 상당수가 


떠돌다 지쳐 굶어죽거나 스스로 죽거나 했다.






1554년 3월 19일 조선왕조실록




 


"전하, 지금 경상도에 파견한 
어사의 보고문을 보고 왔는데.."

 
"경상도 의령 지방이 
기근으로 매우 참혹하다고 합니다."
 
 명종
"그래? 어느 정도던가?"
 
 
"유랑민들이 떠돌다가 죽어,
길가에 시체가 널려있고,"

 
"개들이 그 시체를 먹고 있다고 하니
참담하기가 그지 없다고 하옵니다."






1594년 4월 3일 쇄미록




임진왜란 당시에는 
굶어 죽는 유랑민들이 더욱 많았다.
 
 오희문 
"근래에는 왜 갑자기
유리걸식하는 유랑민들을 볼 수 없는가?"

 
"왜겠습니까?
유랑민들은 결국 모두 굶어죽었기 때문에,"

 
"이젠 마을에서도 구걸하는 걸인들 보기도 
힘들어진 것이죠."
 
 오희문 
"그렇다면 이 고을 길가에 죽은 시체들은
모두 굶어죽은 유랑자들이란 말인가?"
 
 
"네, 맞사옵니다."






1757년 1월 4일 조선왕조실록




그런가하면 굶어죽을 바에 
차라리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조
"충청도 지역이 지난 가을 흉년이 심했다는데
요즘 상황이 어떠한가?"
 
"충청도 동쪽 지역이 가장 심하여.."

"그곳 백성들 중에는 
소금물을 마시고 스스로 자살한 자도 있고,"
 
"혹 부부가 마주보고 
목을 매어 죽은 자도 있다고 하옵니다."
 
그러자 영조는 
매우 놀라 탄식했다.




 영조


"아!"






● 진휼소(진제장)의 폐단




진제장은 기근자를 위한 
무료급식소였다.

이곳에는 주로 죽을 쑤어 
백성(원칙상 상민)들을 구호했다.

죽은 보통 쌀을 끓여서 간장으로 간을 맞추었고, 
기에 미역 등을 넣기도 했다.
 
성인에게 끼니마다 쌀 2홉,
노약자에게 1.5홉 분량을 주도록 정해져 있었다.

참고로 1홉은 
180cc 정도의 분량으로

2홉의 죽이라고 해봤자,
겨우 허기를 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만 노동하는 사람에게는 
턱없이 모자라는 양이라서 좀 더 지급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마저 
중간에 농간을 부려 

곡물을 떼어먹은 뒤에 물을 더 넣어 
희멀건 죽을 쑨 경우가 있었으니

이럴 때면 배고픈 백성들은 
더욱 힘들 수 밖에 없었다.
 

1593년 11월 13일 조선왕조실록

 선조
"이번에 진제장 상황은 어떠한가?"

 
"이달 15일 남쪽 진제장에 달려가 보니,
굶주린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죽의 상태가 
너무 안좋다고 호소했습니다."
 
 선조
"이런 고얀. 벼룩의 간을 빼먹지.
그래, 보니깐 어떻든?"
 
 
"죽은 그저 맹물과 진배 없었고,
겨와 쭉정이 등의 잡물이 잔뜩 섞여 있었습니다."

 선조
"아니, 그걸 먹였단 말인가!"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먹기 힘들다고 원통해했고,"

 
"신이 보다 못해서
새 죽을 끌여먹이라고 조치했사옵니다."
 

1696년 1월 25일 조선왕조실록
 
구휼소까지 삥땅이 이뤄지고 있었으니
임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때문에 숙종은 진휼소를 차리면서
죽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하도록 단단히 명령했다.

"전하 설죽소(죽 제공소)에서 
여전히 꼼수가 많다고 하옵니다."
 
 숙종
"아니, 지난 번에는 넣은 쌀 분량이 
넉넉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건 보여주기였을 뿐이고
최근 몰래 시찰해보니," 

"예전보다 곡물량이 크게 줄었고
곡물 중에도 쌀이 들어간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숙종
"이러면 애초에 백성들을 구휼하자는 취지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맞사옵니다."
 
 숙종
"앞으로는 설죽소의 죽 상태를 
더욱 면밀히 체크해서 배급하도록 하라!"
 




● 아비규환의 진휼소(진제장)




'국물도 없다'라는 말은 
설죽소에서 줄을 섰다가 

국물과 같은 죽마저 얻어먹지 못했던 사람들이 
섭섭해 하던 말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출처 : 송기호 시집가고 장가가고 p.241)
 
그리고 이런 죽을 배분할 때는
서로 먹으려고 맹렬하게 달려들었기 때문에

아수라장과 
아귀다툼이 되기 십상이었다.

 
'엉망 진창'이란 말의 어원은
사실 '엉망이 된 '진장(진제장)' 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출처 : 송기호 시집가고 장가가고 p.242)






1666년 3월 7일 조선왕조실록




진제장에서 힘 없는 백성들이
사대부집 노비들에 밀려나는 경우가 있어 문제가 됐다.

 현종 
"그래, 이번에 
진휼소 상황은 어떠한고?"
 
 
"전하, 죽을 마련하여 구휼하는 것은
오로지 굶주린 백성(상민)을 위한 호구책인데,"

  
"지금 죽을 먹는 3,4백 명은 
거의가 사대부집의 노비이고.."

 
"호소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들은 
수십명에 불과하오니, 정말로 한심한 지경입니다."
 
 현종 
"무엇이, 이런 고얀!"

 현종 
"노비들은 사대부 것들이 알아서 챙겨줘여 하거늘
왜 나라의 곡식을 뺏어먹으려 한단말인가?"
 
 현종 
"물론, 선비가 가난한 경우라면
자기 노비들을 굶겨 죽일 수 없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쳐."
 
 현종 
"하지만 관직에 있는 사대부의 노비들까지
진제장에서 공짜 죽을 얻어먹으려고 한다면.."

 현종 
"이는 진제장을 설치한 
본래의 뜻에 반하는 처사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1439년 3월 18일 조선왕조실록




그런데 진제장에서 백성들을 구호할 때에는
지켜야할 수칙이 있었다.

무엇보다 뜨거운 죽을 주는 것을 금기시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하, 예전에 중국에서도 죽을 쑤어서 
굶주린 백성들을 먹였다고 하옵니다."
 
 세종
"그렇구나."
 
 
"그런데 굶주린 백성들은 
참을성이 없어서.."

 
"무조건 목구멍 속으로 집어넣으려고만 해서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세종
"그게 대체 뭔가?"
 
 
"사람들이 배가 고픈 상황에서
뜨거운 죽을 급히 먹게되자,"

 
"먹고나서는 100보도 걷지 못하고 
거꾸러져 죽었다고 하옵니다."
 
 세종
"그게 사실이라면 
꽤 큰 일이구나."

 세종
"여봐라! 앞으로 죽을 배급할 때는
충분히 먹기 좋게 식었는지를.." 

 세종
"고을 수령들이 일일이 점검을 한 후 
배급하도록 하여라."




이랬다.






● 초근목피 : 똥구멍이 찢어졌다




기근이 심할 때에는 초근목피(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

▲ 구황식물 채취 (윤두서)

특히 기근에 비상으로 먹는 음식물을 
구황식물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나라는 유독 
이러한 구황식물이 발달해 있었다. ☞참고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구황식물만 851종이고,"

"평소 농촌에서 식용으로 할 수 있는 것도 
304종에 달한다고 하더라."

"하긴 나무 껍질, 솔방울까지 먹는다하니.."
 
"사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말은.."

"소나무 껍질이나 솔잎 따위의 
거친 식물성만 너무 먹어서.."

"변비에 걸려 변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곤궁한 사정을 나타내는 말임." 


(출처 : 송기호 시집가고 장가가고 p.244)






1594년 2월 23일 + 4월 10일 쇄미록




때는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오희문 
"부인, 왜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고 있는게요?"
 
 오희문 처
"지금 먹을 쌀이 떨어져서요."
 
 오희문 
"그런데 내 밥상에는 
쌀밥이 올려지지 않았소!"
 
 오희문 처
"그건.."
 
갑자기 오희문의 
가슴이 매어왔다.

자신이 집안의 가장이라고 
식구들이 배려해주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집에는 양식이 모두 떨어졌고
이후로 오희문도 구황식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두 달 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오희문  
"마른 회화나무 잎에 콩과 보리를 조금 섞어 
저녁식사를 만들었다."
 
 오희문  
"처자식들과 그렇게 먹고 있자니
그 광경이 실로 처참했다." 






1594년 3월 10일 조선왕조실록




이런 기근은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도 피해갈 수 없었으니

임진왜란 당시 실록을 보면 이렇다.
 
 선조
"나라에 기근이 심각하구나."

 선조
"요즘 백성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고 들었는데.."

 선조
"병사들도 버티기 힘들어 
구황식을 찾으러 다닌다지?"
 
 
"맞사옵니다.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다보니
모두 파리하여 얼굴색이 흙빛 같으니.."

 
"10리만 행군해도 쓰러지는 자들이 
70~80%는 된다고 하옵니다."

 
 
"남아 있는 군사들도 모두가
느릅나무 껍질이나.." 

 
"소나무 껍질을 가루로 만들어
군량으로 삼고 있다고 하옵니다."
 

1594년 2월 24일 쇄미록




한편 당시에는 소금도 
중요한 구황식품이었으니,

평시에 기근 대비용으로 
구황염을 미리 마련해두어야 했다.

 
"소금도 구황식품이 됨?"
 
"소금만 있으면 곡물이 없더라도
대충 나물에 섞어서 연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그러니깐 소금으로 간을 쳐서
맛없는 푸성귀들을 넘기기 위함이었구나."
 
"맞아. 소금 없이 그냥 나물만 먹으면
목에 잘 넘어가지 않는다고 함."

"그래서 소금이 없을 때에는 
해초를 달여서 먹기도 했다고 함."
 
소금의 중요성은 
쇄미록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오희문 처
"큰일이옵니다. 소금이 떨어지고 있으니.."
 
 오희문 
"정말이오?"
 
 오희문 처
"근래에 오랫동안 소나무 껍질에 흰죽을 쑤어 먹다보니
소금이 다 떨어지게 됐습니다."
 
 오희문 
"어허, 소금 없이 앞으로 
어찌 초근목피를 먹을 수 있단 말이오!"
 
오희문은 몹시도 애석해했다.
 




● 흙까지 파먹었다


 
1444년 4월 24일 조선왕조실록

황해도 지방에 기근이 들었다.
임금은 신하를 파견해서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세종
"그래 어떤가?
그곳 백성들이 흙을 파서 먹을 정도라는데?"
 
"해주 백성들 중에
흙을 파서 먹는 자가 무릇 30명 정도 되었고.."

"장연현이라는 고을에서는 두 사람이 흙을 파서 먹다가
집이 무너져 깔려 죽었다 하옵니다."
 
 세종
"저런!"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기근은 
아닌줄 아뢰옵니다."
 

성호사설 만물문
 
실학자 이익은 
직접 흙으로 만든 떡을 먹기도 했었다.
 
 
"이게 뭔줄 아옵니까?"

 이익 
"뭔가?"
 
 
"충청도 청양 어느 골짜기 주민들이 
진흙을 퍼다가 쌀가루에 섞어서 만든 떡이옵니다."
 
 이익 
"어디 함 줘보게."
 
이익은 호기심에 씹어봤다.
 
 이익 
"음.. 끈적끈적한 것이
흙냄새가 조금 나지만, 그래도 먹을만 한걸."
 
그런데 서양에서도 식량이 부족하면
흙을 섞어 먹기도 했다.
 
843년 프랑스의 기록을 보면 
농민들이 흙을 섞어 만든 '흉년기의 빵'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11세기 중엽 기근 동안에는
기아를 이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진흙에 약간의 밀가루를 섞어 
빵을 구워 먹곤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굶주림을 피해보려는 사람들은
결국 모두 굶어죽고 말았다고 한다.
(출처 : 맛시모 몬타나리 중세의 음식문화 p.85~86)
 

그런데 이런 얘기는 
꼭 먼 옛날 얘기만은 아니다.
 
얼마 전에도 서인도제도의 아이티라는 나라에서
진흙으로 쿠키를 구워먹는다는 기사가 나왔다.


 아이티 주민1 
"진흙+소금+버터를 섞어서 만든 쿠키임.
배고플 때면 먹을만해."

 아이티 주민2 
"이래 봬도 돈 없으면 
이런 것도 못 먹는다능."
 

1554년 2월 9일 조선왕조실록

한편 기근이 들면 목화씨도 먹었다고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위험했던 모양이다.
 
특진관 정사룡이 
급하게 임금에게 아뢴다.

 정사룡
"전하 경상도 백성들이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어 목화씨까지 먹었다고 하옵니다."
 
 명종
"저런, 옷을 만들어 입어야할 것까지
허기를 달래는데 사용하다니.."
 
 정사룡
"그런데 목화씨를 먹는 백성들이
모두 죽었다고 하옵니다."
 
왜 죽었을까?

사실 면실유는 목화씨에서 짠 기름으로
우리가 흔히 즐기고 있는 식용유이다.
 

그런데 굶주린 사람들이 
목화씨를 먹고 죽었다니 도통 이해가 안된다.
 
혹시 빈 속에 너무 기름진 것을 먹어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목화씨만으로 


굶주림을 해결하기가 힘들었던게 진짜 이유일까?






● 기근으로 인한, 식인




기근이 들면, 가장 처참한 상황은 
뭐니뭐니해도 사람을 먹는 일일것이다.

사실 식인은 농경국가들이라면
동서고금 어디서든 만연했다.
 
특히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던
폐쇄 농경국가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 아즈텍인들의 식인

우리나라도 
삼국사기를 통해보면

고대시기부터 기근으로 인한
식인이 횡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47년 11월 17일 조선왕조실록




1447년 4월 황해도 지역의 보릿고개는 극심했다.

  
"전하, 황해도 서흥군에서 몇 달 전 있었던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세종
"어떤 일인데 그러는가?"
 
"올해 4월 보름 때 
그 고장에서 나무하는 아이 5명이 산에 들어갔다가.."

"웬 사내가 사람 고기를 구워먹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하옵니다."
 
 세종
"그래서?"

 
"나중에 가보니 
굽다 남은 머리와 다리 토막이 있었다고 하옵니다."
 
 세종
"어허. 그래서 범인은 잡았는가?"
 
 
"그렇사옵니다. 동네에 선군(船軍 : 해군)직에 있던 
'이우'라는 자였는데.."

 
"새벽에 몰래 산속에 들어가서 남의 무덤을 파서 
시신을 거둬 사람고기를 먹은 것이라 하옵니다."






1448년 1월 16일 조선왕조실록




하지만 이듬 해에도 황해도의 가뭄은 여전했고
식인은 더욱 횡행하고 있었다.
 
1448년 황해도 해주에서는
백주 대낮에 머리만 잘려서 

길가에 버려진 어린애 시신이 발견되어 
고을이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고을의 수령은
마을 사람들을 추궁해서

겨우 시신을 먹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두게 됐다.
 
이에 신료들은 임금께 상황을 보고 했다.
 
 세종
"어찌, 또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전하, 옛 역사기록을 봐도 
기근이 들면 이런 일이 잦았습니다."

 
"삼국사기에서도 사람을 잡아 먹었다는 기록이
한두군데가 아니옵니다." 

 
"흉년이 들면 항상 이런 일이 
필연적으로 발생했사옵니다."
 
 세종
"그래도 그렇지. 황해도에는 
얼마 전에도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이번에 황해도 지역의 가뭄으로
해주 지역에서만 1/5이 사망하였다고 하오니,"

 
"꼭 요망한 일로 바라볼 것은 
아닌줄 아뢰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은 세종은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면 크게 자책했다.






1564년 10월 15일 조선왕조실록




임꺽정이 활동했던 16세기 후반에도
조선의 농촌은 기근으로 피폐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근이 들자 
역시나 식인 사건이 나타났다.
 
"전하, 경상도 상주에 사는 정은춘이라는 자가
한 동네에 사는 7~8세 되는 아이를 꾀어.." 

"산속에 들어가 
배를 갈라 쓸개를 꺼내놓고,"

"살점을 베어내 구워 먹으려다가 발각되어 
고을 관아에 갇혀 있다고 하옵니다."
 
 명종
"뭣이라? 이런 쳐죽일!
흉폭한 중죄인을 당장 참하라 일러라!"






● 기근이 장기화 되면, 세상이 공포스러웠다




조선시대에는 식인 사건이 일어나면


무조건 참형으로 다스렸다.





"서양에서는 사람이 15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을 때는.."





"동료의 시체를 먹거나, 노예를 잡아먹어도 된다는 법을


17세기 국제해양법으로 만들고 있었지."





"헐! 노예는 같은 사람 취급도 안했네."




하지만 기근이 장기화 되면


식인이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되어서




국가로서도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었다.






1593년 12월 9일 조선왕조실록




비변사의 관리가 선조에게 보고했다.
 
"근래에 서울의 진제장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그 가운데 남쪽 지방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고 하옵니다."
 
 선조
"그래, 어떻단 말인가?"
 
"날마다 끊임없이 
시신들을 길가로 버려지고 있는데,"

"다른 굶주린 백성들은 그런 시체들을
몰래 베어가고 있다고 하옵니다."






1594년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 난중시사총록




임진왜란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연려실기술에서도 전하고 있다.




 


"근자에 사람들이 
서로를 죽여서 먹고 있으니.."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감히 마음 놓고 밖으로 다닐 수가 없었다."
 
"굶어죽은 사람들이 발생하면
백성들은 다투어 그 고기를 차지해 먹었는데,"

"심지어는 죽은 사람의 뼈를 발라 
즙을 내어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도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잡아 먹히곤 했다.."






1671년 1월 30일 + 3월 21일 조선왕조실록




1670년 경신대기근 때도 기근이 장기화되자, 


점차 식인 사건이 만연하고 있었다.




 


"전하 충청도 연산에 사는 
개집종 '순례'라는 자가.."

 
"깊은 살골짜기에서 자신의 5살된 딸과 3살된 아들을
죽여서 삶아먹었다고 하옵니다."
 
 현종 
"그게 정말인가?"
 
 
"마을 사람들이 여인을 추궁했더니
본인은 자식들이 병이들어 죽어서," 

 
"삶아먹은 것이라 
둘러댔다고 하옵니다."




당시 기근은 전국적으로 
만연하고 있었던 터라

이런 현상은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당시 제주도에서는 서로 먹고 먹히는 
'서바이벌'스러운 상황에서

섬 사람들은 밤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 맺음말




기근기 식인은 중국, 일본, 유럽 등 
과거 어느 나라에서도 있었던 얘기들이다.

특히 아즈텍에서는 
기근 때문이 아니라, 

단백질 자체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인육이 보편적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아예 상설매장을 통해 
널리 팔릴 정도로 성행하고 있었다.

 


참고 문헌 : 조선왕조실록, 쇄미록, 시집가고 장가가고(송기호), 중세의 음식문화(맛시모 몬타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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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언제나 그늘에서(경기) | 작성시간 16.12.22 감사합니다
  • 작성자코난.카페장(경기) | 작성시간 16.12.22 굶주림이 제일 무서운 재앙이죠 그런데 지금도 대부분의 자연재난이나 전쟁에서도 그자체보다 이후에 벌어지는 물류의 붕괴로 굶주림으로 고통격고 죽는 비율이 큽니다 지금 알레포같은 시리아 내전도시들도 도시전체가 고립되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개와 고양이를 먹다 굶어죽고 있죠 우리나라에선 더이상 저런 재앙이 없어야하는데 또 모를일이죠
    지금 전화 한통으로 치킨,피자 배달시켜먹고 항시 배부른거 정말 인류의 수십만년 역사상 첨이라는걸 알아야합니다
    '대기근이 온다' 책 빌려서라도 꼭 보세요 역사상 굶주림이란 재앙이 얼마나 자주왔는지 아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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