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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출신인 아몬 괴트Amon Goeth는 17세에 나치 소년단에 입단하였고 19세에 나치당의 준군사조직에 입대했소. 그리고 22세가 되던 1930년에 당시 불법이던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하여 510964번의 당원번호를 받고. 같은 해에 나치 친위대에도 입대하오.
그는 폭발물 관련 혐의로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쫓기는 몸이 되자 독일로 도망치게 되오. 그의 나치 상관들이 그의 충성과 헌신을 높이 사 그를 친위대에 입대시켜 주게 되오. 그는 1939년에 아들을 낳지만 생후 1년때 원인모를 이유로 아들이 사망하오. 아몬은 전형적인 장교였고, 1942년 8월에 친위대가 폴란드에 거주하던 유태인 200만명 이상을 말살시킨 라인하르트 작전에 참가하여 훈장을 받소.
그가 플라초프 수용소 소장이 되었을 때가 그의 경력의 황금기였소. 그는 플라초프 수용소의 생활 여건을 최악의 수준으로 만들어 놓았소. 플라초프 수용소에 수감된 죄수가 4주 이상을 살아남는다면 운이 매우 좋다고 할 수 있었소. 여러가지 벌이 난무했고 고문과 사형은 일상다반사였소. 매일같이 그가 죽인 사람들의 수를 세는 것도 일이었소.
1943년의 유태력 욤키푸르 축일에 괴트와 그의 친위대원들은 감옥 밖으로 50명의 유태인들을 끌어내 그들을 사살하오. 그리고 15000명의 다른 죄수들이 보는 앞에서 여러 죄수들을 교수형에 자주 처하기도 했소. 쉰들러에 의해 살아남아 후일 이스라엘 대법관이 된 모세 베이즈스키가 전쟁범죄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때 이러한 것에 대한 증언을 했소.
"모든 사람들이 서 잇는 앞에서 두 사람이 교수대 앞으로 끌려왓습니다. 한 명은 15세 소년 하우벤스토크였고, 다른 한 사람은 기계공 크라우트비르트였죠. 그리고 그 둘을 사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젊은 하우벤스토크의 혐의는 수용소 안에서 러시아 노래를 불렀다는 거엿습니다. 그 소년이 목이 걸린 순간 다른 때도 자주 있었던 사고, 즉 로프가 끊어지는 일이 발생했지요. 그 소년은 밧줄 아래의 높은 의자 위에 서서 선처를 호소햇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다시 교수대에 매달렷고, 아몬 괴트가 그를 확인 사살했습니다.
그 동안 두 번째 의자에 앉아 있던 기계공 크라우트비르트는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소총과 기관총을 휴대한 친위대 병사들이 그에게 일제 사격을 했으며. 그리고 다른 죄수들도 그 꼴을 봐야만 했지요. 크라우트비르트의 시체는 손목의 동맥을 칼로 그은 상태에서 다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재판정에서 모세 베이즈스키는 아몬 괴트와 그가 수용소에서 저지른 다른 형벌들도 이야기하였다.
"올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딸이 지금 예루살렘에 살고 있습니다. 저도 그 여자애를 알지요. 올머는 아몬 소장한테 호출을 받았습니다. 아몬 소장한테는 롤프와 랄프라는 두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소장은 그 개들을 시켜 올머를 물어뜯게 했어요. 올머가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아몬이 총으로 그를 쐈습니다.
아블라데코만도라는 특별 그룹이 있었는데 그 그룹은 식량수송 열차에서 식량을 하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그 그룹이 식량을 훔쳐 은닉하다가 발각된 적이 있었지요. 아몬 괴트 소장이 그 음식이 어디서 난 거냐고 묻자 아무도 대답을 안했습니다. 그러자 아몬은 나흐만손이라는 청년을 끌어내어 사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디슬러라는 사람도 똑같이 쏴 죽였지요. 그러자 누군가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그 죽은 사람들이 식량을 훔쳤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요.
모든 죄수들이 연병장에 집결해 잇는데 만델이라는 사람이 막사에 누워 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탈주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나중에 발각되어 매를 맞았지요. 매의 댓수를 그가 직접 세야 했고 틀리게 댔다간 처음부터 다시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자 수용소의 노인들 중 하나가 자신이 대신 매를 맞겠다고 자처해서 대신 매를 맞았고 그 노인은 나중에 괴트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괴트는 그 노인에게 고맙다고 하더니만 그 노인과 만델을 쏴 죽여 버렸습니다. "
플라초프에서 살아남은 모세 베이즈스키의 형제인 도프 베이즈스키도 이렇게 증언한다.
"1944년 5월초 우리는 연병장에 집합해서 옷을 다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그 앞에서 달렸고 우리는 우측, 아니면 좌측-늙은이들, 허약자들, 환자들, 어린애들-으로 가게 되었지요. 이틀 후 왼편에 섰던 사람들은 수용소 내의 250명의 어린아이들과 함께 좋은 차를 타고 어디론가 끌려갔습니다. 죄수들은 울부짖었지만 친위대원들이 우리에게 총구를 겨누었고 확성기에서는 자장가가 울려퍼졌지요. 그 때 1200명의 성인과 250명의 어린이가 아우슈비츠 개스실로 끌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 때 12살인가 13살인가 먹은 에르지 스피로라는 아이만 혼자서 변기통 속에 머리만 내밀고 숨어 있었다고 하네요. 그 아이가 전쟁 끝날때까지 살아남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플라초프에서 아몬은 아침마다 그의 막강한 힘을 발휘했소. 저격소총으로 수용소 내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쏴버린 것이었소. 당시 14세였던 쉰들러의 유태인이던 레나 핀더는 후일 아몬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소.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어요"
또다른 쉰들러 유태인인 폴덱 페퍼버그는 이렇게 말하오.
"괴트, 그는 죽음의 사신이었소."
아더 쿤라이히라는 또다른 생존자는 이렇게 증언하오.
"나는 괴트가 유태인에게 개를 푼 것을 봤습니다. 개가 그 유태인을 마구 물어뜯고, 그 유태인이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괴트가 그를 사살했습니다."
쉰들러의 20살 먹은 공원이었던 이삭 필라는 괴트가 공장을 검열하던 날 작업 테이블에서 조는 실수를 범했소. 괴트는 오스카 쉰들러에게 그 조는 청년을 즉각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소. 쉰들러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 소년의 한쪽 얼굴을 때린 후 반대편도 때리고 나서 괴트에게 대들었소.
"그는 이것으로 충분히 댓가를 치렀소. 내게는 일손이 필요하단 말이오."
그리고 그 덕분에 이삭은 전쟁에서 살아남았소.
오스카 쉰들러는 아몬과 나치를 능가하는 재치를 보였소. 그가 그의 유태인들을 일하는 시간을 덜게끔 공장 근처로 옮겨놓으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쉰들러는 간수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막사에 식량과 약품을 밀반입했다고 하오. 쉰들러가 부정으로 관련해 2번이나 체포되었지만 괴트는 그 사실을 몰랐소.
그의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죽는 동안 쉰들러가 부자가 될수 있는 기회가 현실로 다가온 순간 쉰들러는 아몬과 기타 나치 장교들을 매수하기 위해 그의 돈을 마구 쓰고, 그 결과 그의 유태인 1100명을 폴란드에서 체코의 새 공장으로 빼내올수 있게 되오.
그의 초창기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쉰들러는 유태인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치 관료들을 매수하는데 그의 모든 재산을 털어붓고, 그래도 남은 돈은 유태인들을 먹여살리는데 투자했소.
아몬 괴트는 1944년 가을 수용소 내의 부패와 암시장 활동에 대한 감사에 걸려 나치 당국에 체포되고 이 수사의 결과로 카를 코흐와 헤르만 플로슈테트가 사형집행당하오. 괴트도 공금횡령 혐의를 받았으나 전쟁 끝날때까지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소.
그가 바드 톨츠의 친위대 요양소에서 휴식하던 1945년 2월에 미군 패튼 부대가 그를 체포하게 되고 곧 그의 신병을 폴란드에 인계하오.
인류 역사상 가장 엄청난 집단 살인마인 루돌프 헤스(아우슈비츠 수용소장)는 괴트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오.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우리에게 욕을 퍼부었소. 나는 순간 괴트를 알아볼수 잇었소. 만약 차가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군중이 던진 돌더미에 파묻혀 죽었을 거요."
폴란드 최고법원에서 당년 8월 27~31일과, 1946년 9월 2~5일에 걸쳐 진행된 재판에서 괴트는 수만명의 사람들을 죽인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소.
(1)1943년 2월 11일부터 1944년 9월 13일까지 플라초프(현 크라코프) 강제수용소 소장이었던 아몬 괴트는 8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최종 해결'하라는 명령을 내려 그들을 숨지게 했다.
(2)친위대 돌격부대 지휘관이던 시절의 아몬 괴트는 크라코프 게토에 대한 최종 폐쇄를 단행했다. 1943년 3월 13일부터 시작된 이 절멸작전으로 인해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플라초프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2천명이 죽었다.
(3)아몬 괴트는 대위 시절이던 1943년 9월 3일, 타르노프 게토 폐쇄를 단행했다. 이 작전의 결과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고, 수용소로 끌려가던 중의 기차 여행과 수용소, 특히 아우슈비츠 같은 곳에서도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다.
(4)1943년 9월부터 1944년 2월 3일 간에, 아몬 괴트는 자슬로 근교의 스제브니 강제수용소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그 과정에서 그곳의 수감자들을 죽이거나 다른 캠프로 이송토록 조치했다. 이로 인해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이 재판 기간 중 괴트는 그야 말로 화가 날 정도로 무신경한 모습을 보여주었소. 그는 플라초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시인하였소. 그는 자신은 전권을 다 위임받았으며, 오직 상관으로부터 내려온 명령과 검열만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진술했소. 그는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것은 자신의 수용소장으로서의 재판권과 독일 법규 준수를 위한 행위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소.
괴트는 대법원장에게 자비를 애걸했으나 대법원장은 그를 사면하지 않았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소.
아몬 괴트는 1946년 9월 13일 그의 수용소 근교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소. 그리고 그는 숨을 거둘때조차도 히틀러 총통에게 경례를 하여 그의 마지막 충성을 입증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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