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의 유래에 대한 여러 주장이 있길래 여기 퍼와봅니다.
읽어보시고 어느 것이 옳은것인지 판단은 직접 내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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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란 국가의 권위와 존엄을 표상하는 상징으로서 그 국가의 전통과 이상을 특정의 모양과 색깔로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국기는 국가와 민족을 상징하는 신성한 표지이며 국가·민족과 더불어 영고성쇠 (榮枯盛衰)를 같이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상징으로서 국기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875년 개항을 요구하며 인천 앞바다에 접근한 일본군함 - 당시 거기에는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음 - 에 발포한 『운요호(雲揚號)』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후 조정에서는 우리나라를 표상하는 국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던 중 1882년 8월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인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갈 때 태극도형(太極圖形)과 4괘(卦)를 담은 태극기를 우리나라의 국기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대외적으로 국기를 최초로 사용한 예라고 하겠으며, 태극도형은 우리 민족이 옛부터 일상생활에서 즐겨 사용하여 오던 전통문양인 태극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듬해인 1883년 음력 1월 27일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도형과 4괘가 그려진 국기를 공식으로 제정·반포하였으나 구체적인 작도법 등이 정해지지 않아 개인이나 단체에 따라 다소 다른 문양의 태극과 4괘 도안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태극기는 애국선열들이 독립운동에 바친 고귀한 희생의 현장에서, 조국 광복을 맞는 기쁨의 현장에서 언제나 우리를 지키고 늘 우리와 함께 하여 왔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정부에서는 이때까지 조금씩 다른 도안으로 사용되어 온 태극기 문양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당시 문교부에 사학자·미술가·언론인 등 사계 권위자 42명으로 "대한민국국기시정위원회(大韓民國國旗是正委員會)"를 구성·설치한 후 전문적인 검토를 거침과 아울러 국민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수차의 회의를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은 태극기를 국기로 채택하기로 하고, 1949년 10월 15일 이를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그후 1984년 2월 21일 국기의 제작·게양방법 등 기본적인 사항을 정한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대통령령 제11361호)을 제정·공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의 상징이며 민족의 얼이 깃들어 있는 태극기를 자랑스럽게 게양하고 예절을 지키는 일은 나라 사랑의 작은 실천이며 조국에 대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손쉽게 표현하는 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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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태극기는 박영효가 창안,도안한 것이 정설이지만..실은 고종의 독창적인 작품...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도쿄에서 발행된 일간신문 「시사신보」(1882년 3월 창간,1936년 폐간) 는 당시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 수신사 일행과 기자 회견을 갖고, 태극기는 자국의 국기를 모방하라는 청나라의 압력을 뿌리치고 고종이 직접 도안을 하고 색깔까지 지정한 것으로 보도했다. 박영효는 고종이 구상한 작품을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일본으로 가던 도중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시사신보 기사는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태극기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최초의 태극기가 게재된 시사신보 축쇄판을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단독 입수, 지난 광복절날 일간신문(동아, 한국일보)을 통해 태극기 그림을 공개한 서울시청 총무과 송명호씨에 의해 밝혀졌다. 송씨는 당시 일간지가 서둘러 보도하면서 최초의 태극기 발견 사실에만 기사의 초점을 맞추고 정작 태극기가 고종의 작품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한 점을 중시, 이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관련 자료를 작성, 주요 도서관과 학술연구기관에 무료 배포하기에 앞서 뉴스피플에 제공했다. 그가 제공한 화제의 시사신보 관련 기사는 「잡보」란을 통해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일본 방문을 조선의 유신이라고까지 장황하게 극찬한 다음 「조선국기」라는 캡션이 붙은 태극기 그림과 함께 국기의 재정 배경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원문에는 지나로 표기했으며 청나라를 지칭함)의 마건충(청나라 덕종때 사람으로 1882년 군함 수척에 군인 4천5백명을 인솔, 조선에 와 임오군란을 조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대원군을 천진으로 압송하는 등 조정에 친청파를 구축하며 내정에 깊이 간여한자임)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 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국왕(고종)은 분하게 여겨 절대로 중국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고 해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모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이 신문의 관련 기사 첫 머리는 「지난달 28일(1882년 9월 28일 가리킴) 하나부사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이라고 돼 있어 박영효 수신사 일행중 한명과 인터뷰를 통해 기사를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개혁파 지식인들인 김옥균, 서광범 등도 박영효와 동행했다고 이 신문은 적고 있어 이들중 한명과 인터뷰를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련 기사에서 고종은 청나라 마건충의 강요에 분노하며 독창성을 발휘, 도안과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 직접 언급하고 있다. 이는 국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세를 단호히 배격했음을 의미한다.
당시는 청나라가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임오군란을 이용, 제물포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자국군의 서울 주둔을 강요하며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열강의 틈사이에서 국왕이 국정을 제대로 펴기조차 힘든 시기였음을 볼 때 고조의 이같은 자주정신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송씨는 설명했다.
태극기 연구가이기도 한 그는 「관련 기사가 발견되기 전에는 주역의 태극도를 그렸다는 등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별의별 억측이 많았으나 이젠 이러한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82년 9월 25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날 박영효 일행이 고베에 도착,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 옥상에 국기를 게양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그로부터 사흘 뒤 일행이 도쿄에 도착했고 이를 시사신보 기자가 취재해 10월 2일자에 보도한 겁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나라 태극기는 모두 다섯 번의 변천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첫 번째는 시사신보의 보도처럼 고종의 지시에 따라 박영효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두 번째는 1885년 고종이 외무담당 미국인 데니씨에게 선물한 태극기로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세 번째는 1896년 독립신문 제호에, 네 번째는 1900년 파리박람회 때 사용했던 태극기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1949년 정부에서 42인 국기제정위원회를 구성, 제정한 것이다. 그동안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언급한 것은 1961년 진단학회가 펴낸 「한국사」로 전문가들 사이에 금과옥조로 여겨왔다.
우리 나라에서 국기문제가 논의된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부터 대두됐다.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이를 눈치챈 중국이 황준헌을 통해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그려서 전국적으로 사용하라는 간섭을 했다. 그후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했는데 우리측 위원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 위원은 마건충이었다. 그러나 국기 제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수신사 박영효 일행은 일본을 방문하게 됐고 이때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로부터 내략을 받았다.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동숭한 수신사 일행, 영국 영사관 아스톤, 선장 제임스 등과 태극 8괘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4괘의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 제작했다. 아마 이 결정은 일본으로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가 지시한 대로 따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사」도 고종이 지시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고종이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태극 무늬의 모양과 색, 4괘, 바탕색까지 지정하는 등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지나치고 말았다. 시사신보의 보도 내용에 대해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는 처음 듣는 말이라며 「최초의 태극기 제정 배경 등 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남 연구관도 이같은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태극기 변천사를 다시 써야 할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최초의 태극기를 발견한 송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자료가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고 일본서 찾게된 것은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태극기의 역사가 제가 만든 자료를 근거 삼아 새로 정리할 수 있게 된 점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종의 지시대로 박영효가 완성시킨 최초의 태극기는 애초 3점이 제작됐으나 왕조의 몰락 등 격변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실물이 자취를 감춰 아쉽다는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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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한국의 정체성이라던지 한국인의 고유한 것을 잘 부정하는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욕을 한바가지로 얻어먹고 있는데
오늘 메일을 확인하는 중
어떤 사람이 태극기 그림을 같이 보내면서
"이 더러운 인간아 한국인이면서 한국을 비난하는 반민족적 인간쓰레기야 태극기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느냐"
나야 워낙 욕먹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써서 그렇지만 일단 엠파스메일로 온것으로 보아 여기에서 나를 본것 같은데 태극기에 대해 한마디만 해보자
태극기는 우리나라혼을 상징하는 마크가 아니라 중국이 조선은 속방임을 나타내는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맨 처음 조선이 국기에 대해 논의하게 된것은 황준헌의 조선책략이라는 책이 조선에 들어왔을때부였다
황준의 조선책략은 조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적어놓은 책으로 그 당시 조선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그 내용은 제쳐놓고 국기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조선은 청에 주청을 올려 청의 용기를 그대로 조선의 국기로 사용하게 하라 "
아무튼 이 내용을 보고 조선에서는 국기에 대한 논의가 일게 되었는게 조선은 한심하게 나라의 국기에 관한 것을 모두다 청나라에 물어본다
그 후 외교문서에 국기에 관한 것을 어떻게 정하면 되겠느냐고 청나라에 물어본결과 그당시 청나라의 실력자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은 중국의 용기를 써도 무방하다는 답변이 나오고 용기가 조선의 국기로 채택을 할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후에 시간이 지나서 조미수호통상을 위해서 중국의 마건충이라는 사람이 조선에 도착해서 전권부사 김홍집과 국기에 관해서 논의하게 되는게 이 내용이 청국문답이라는 문서에 있다
그 내용을 간략히 보면
조선의 국기에 관한 내용은 중요하므로 그것은 반드시 중국의 허락을 받아야 해야 하고 마건충은 중국의 용기를 그래도 사용하는것보다 조선은 국왕은 홍포를 입고 관리들은 청색관복을 입고
일반백성들은 흰옷을 좋아하므로 백저청운홍룡기
즉 바깥은 흰색배경에 푸른 구름무니에 붉은용을 그려놓은 기를 조선의 국기로 하는것이 어떻냐 제안해서 김홍집은 이에 흔쾌히 응하고 좀 시간이 지나서 또 다시 국기에 대해 논의하는데 김홍집이 백저청운홍룡기는 그리기가 너무 힘들므로 이응준이라는 사람이 만든 기를 약간 변형하는해서 조선에 국기로 하는것이 사용하는 것이 어떻냐고 한다
(이 내용이 중요하다 그 당시 조선은 청과 일본이 주도권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이응준이라는 사람이 그린 기의 형태는 자세히 알수 없지만 마건충이 이응준이 그린 국기는 일본의 일장기와 비슷해서 안된다는 부분이 나온는걸로 봐서 조선은 자기나라 깃발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청과 일본의 눈치를 보는 참으로 한심한 국가였다 )
그러자 마건충은 새로운 제안 태극기의 제안을 한다
"백저청운홍룡기가 만들기 힘들다면 조선은 팔도니 팔쾌로
겉을 꾸미고 태극을 그려놓으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이에 김홍집은 아주 좋다고 한다
바로 우리에 태극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을 하나로 모아주는 이 위대한 태극기가 사실은 중국의 마건충이라는 사람이 만들어주었다니
(사실 마건충은 학식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중국역사상
문법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마건충은 젊었을때부터 어학을
공부해서 중국어의 최초문법을 만든 "마씨문통"이라는 책을 만들
정도로 대단한 지식인이었다)
여러분들은 혹시 중국의 강시영화같은 것을 본적이 있는가
거기에 보면 점술사들이나 중국의 도사같은 사람들이 입고있는 옷이나 방을 보면 팔쾌와 태극이 그려져있다
원래 태극이라는 것이 주역의 계사전의 만물생성과정을 그림으로 그린것으로써 명초기때부터 민간에 유행하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에게 아주 친근한 상징이다
지금도 중화권을 가보면 태극이라는 것은 중국인과 아주 가까이 있다
태극이 분명히 중국의 상징임을 알고 중국의 마건충은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라는 표시로 태극기를 만든것이다
그 후로 제물포조약후에 임오군란이후 일본에게 사과하러 사죄사로 가는데 (그때 조선정부는 돈이 없써서 일본공사에게 돈을 꾸어서 간신히 일본에 도착한다)박영효가 사죄사 대표로 가게 되었는데 배안에서 태극기에 관한 조언을 영국의 제임스선장에게 듣게 되었다
송기무처서에 보면
"팔쾌와 태극그림은 대단히 휼륭하나 팔괘는 배열이 너무 빽빽해서 조잡해 보여서 퍽 보기 좋지 않습니다 이것을 사괘로 바꾼다면 좋지 않을까요"
그당시 조선은 국기에 대한 지식도 전무하고 박영효가 생각하기도 국기에 대한 지식이 있는 외국인이 그렇다면 틀림없겠다싶어서 사괘로 바꾼다
그후로 여담으로 박영효는 각고의 노력으로 일본에서 17만엔을 빌려서 5만엔은 임오군란때 일본에게 당한 피해를 갚고 12만엔을 빌려서 조선에 돌아온다
이것을 보고 일본이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했을까 자기나라로 오는 배운임도 없이 일본공사에게 돈을 빌리더니 이건 뭐 일본에게 사과하러오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빌리로 오다니 일본입장에서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과연 정상적인 나라인지 의심했을것이다 거기중에 상거지나라 라고 생각했을것이다
암튼 중국이 우리나라의 속방임을 나타내기 위한 태극기가 이제 우리나라의 국기가 되었고 그 또한 아무지식없이 영국인 선장 제임스가 하자는 대로 즉흥적으로 팔괘에서 사괘로 만든 태극기
그분이 과연 이런 태극기의 정체를 알고 한국 사람 나라 사랑을 외치는지
왠지 오늘따라 기분이 꿀꿀해진다
읽어보시고 어느 것이 옳은것인지 판단은 직접 내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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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란 국가의 권위와 존엄을 표상하는 상징으로서 그 국가의 전통과 이상을 특정의 모양과 색깔로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국기는 국가와 민족을 상징하는 신성한 표지이며 국가·민족과 더불어 영고성쇠 (榮枯盛衰)를 같이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상징으로서 국기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875년 개항을 요구하며 인천 앞바다에 접근한 일본군함 - 당시 거기에는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음 - 에 발포한 『운요호(雲揚號)』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후 조정에서는 우리나라를 표상하는 국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던 중 1882년 8월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인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갈 때 태극도형(太極圖形)과 4괘(卦)를 담은 태극기를 우리나라의 국기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대외적으로 국기를 최초로 사용한 예라고 하겠으며, 태극도형은 우리 민족이 옛부터 일상생활에서 즐겨 사용하여 오던 전통문양인 태극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듬해인 1883년 음력 1월 27일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도형과 4괘가 그려진 국기를 공식으로 제정·반포하였으나 구체적인 작도법 등이 정해지지 않아 개인이나 단체에 따라 다소 다른 문양의 태극과 4괘 도안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태극기는 애국선열들이 독립운동에 바친 고귀한 희생의 현장에서, 조국 광복을 맞는 기쁨의 현장에서 언제나 우리를 지키고 늘 우리와 함께 하여 왔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정부에서는 이때까지 조금씩 다른 도안으로 사용되어 온 태극기 문양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당시 문교부에 사학자·미술가·언론인 등 사계 권위자 42명으로 "대한민국국기시정위원회(大韓民國國旗是正委員會)"를 구성·설치한 후 전문적인 검토를 거침과 아울러 국민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수차의 회의를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은 태극기를 국기로 채택하기로 하고, 1949년 10월 15일 이를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그후 1984년 2월 21일 국기의 제작·게양방법 등 기본적인 사항을 정한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대통령령 제11361호)을 제정·공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의 상징이며 민족의 얼이 깃들어 있는 태극기를 자랑스럽게 게양하고 예절을 지키는 일은 나라 사랑의 작은 실천이며 조국에 대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손쉽게 표현하는 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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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태극기는 박영효가 창안,도안한 것이 정설이지만..실은 고종의 독창적인 작품...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도쿄에서 발행된 일간신문 「시사신보」(1882년 3월 창간,1936년 폐간) 는 당시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 수신사 일행과 기자 회견을 갖고, 태극기는 자국의 국기를 모방하라는 청나라의 압력을 뿌리치고 고종이 직접 도안을 하고 색깔까지 지정한 것으로 보도했다. 박영효는 고종이 구상한 작품을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일본으로 가던 도중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시사신보 기사는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태극기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최초의 태극기가 게재된 시사신보 축쇄판을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단독 입수, 지난 광복절날 일간신문(동아, 한국일보)을 통해 태극기 그림을 공개한 서울시청 총무과 송명호씨에 의해 밝혀졌다. 송씨는 당시 일간지가 서둘러 보도하면서 최초의 태극기 발견 사실에만 기사의 초점을 맞추고 정작 태극기가 고종의 작품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한 점을 중시, 이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관련 자료를 작성, 주요 도서관과 학술연구기관에 무료 배포하기에 앞서 뉴스피플에 제공했다. 그가 제공한 화제의 시사신보 관련 기사는 「잡보」란을 통해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일본 방문을 조선의 유신이라고까지 장황하게 극찬한 다음 「조선국기」라는 캡션이 붙은 태극기 그림과 함께 국기의 재정 배경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원문에는 지나로 표기했으며 청나라를 지칭함)의 마건충(청나라 덕종때 사람으로 1882년 군함 수척에 군인 4천5백명을 인솔, 조선에 와 임오군란을 조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대원군을 천진으로 압송하는 등 조정에 친청파를 구축하며 내정에 깊이 간여한자임)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 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국왕(고종)은 분하게 여겨 절대로 중국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고 해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모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이 신문의 관련 기사 첫 머리는 「지난달 28일(1882년 9월 28일 가리킴) 하나부사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이라고 돼 있어 박영효 수신사 일행중 한명과 인터뷰를 통해 기사를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개혁파 지식인들인 김옥균, 서광범 등도 박영효와 동행했다고 이 신문은 적고 있어 이들중 한명과 인터뷰를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련 기사에서 고종은 청나라 마건충의 강요에 분노하며 독창성을 발휘, 도안과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 직접 언급하고 있다. 이는 국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세를 단호히 배격했음을 의미한다.
당시는 청나라가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임오군란을 이용, 제물포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자국군의 서울 주둔을 강요하며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열강의 틈사이에서 국왕이 국정을 제대로 펴기조차 힘든 시기였음을 볼 때 고조의 이같은 자주정신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송씨는 설명했다.
태극기 연구가이기도 한 그는 「관련 기사가 발견되기 전에는 주역의 태극도를 그렸다는 등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별의별 억측이 많았으나 이젠 이러한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82년 9월 25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날 박영효 일행이 고베에 도착,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 옥상에 국기를 게양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그로부터 사흘 뒤 일행이 도쿄에 도착했고 이를 시사신보 기자가 취재해 10월 2일자에 보도한 겁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나라 태극기는 모두 다섯 번의 변천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첫 번째는 시사신보의 보도처럼 고종의 지시에 따라 박영효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두 번째는 1885년 고종이 외무담당 미국인 데니씨에게 선물한 태극기로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세 번째는 1896년 독립신문 제호에, 네 번째는 1900년 파리박람회 때 사용했던 태극기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1949년 정부에서 42인 국기제정위원회를 구성, 제정한 것이다. 그동안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언급한 것은 1961년 진단학회가 펴낸 「한국사」로 전문가들 사이에 금과옥조로 여겨왔다.
우리 나라에서 국기문제가 논의된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부터 대두됐다.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이를 눈치챈 중국이 황준헌을 통해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그려서 전국적으로 사용하라는 간섭을 했다. 그후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했는데 우리측 위원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 위원은 마건충이었다. 그러나 국기 제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수신사 박영효 일행은 일본을 방문하게 됐고 이때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로부터 내략을 받았다.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동숭한 수신사 일행, 영국 영사관 아스톤, 선장 제임스 등과 태극 8괘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4괘의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 제작했다. 아마 이 결정은 일본으로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가 지시한 대로 따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사」도 고종이 지시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고종이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태극 무늬의 모양과 색, 4괘, 바탕색까지 지정하는 등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지나치고 말았다. 시사신보의 보도 내용에 대해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는 처음 듣는 말이라며 「최초의 태극기 제정 배경 등 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남 연구관도 이같은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태극기 변천사를 다시 써야 할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최초의 태극기를 발견한 송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자료가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고 일본서 찾게된 것은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태극기의 역사가 제가 만든 자료를 근거 삼아 새로 정리할 수 있게 된 점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종의 지시대로 박영효가 완성시킨 최초의 태극기는 애초 3점이 제작됐으나 왕조의 몰락 등 격변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실물이 자취를 감춰 아쉽다는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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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한국의 정체성이라던지 한국인의 고유한 것을 잘 부정하는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욕을 한바가지로 얻어먹고 있는데
오늘 메일을 확인하는 중
어떤 사람이 태극기 그림을 같이 보내면서
"이 더러운 인간아 한국인이면서 한국을 비난하는 반민족적 인간쓰레기야 태극기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느냐"
나야 워낙 욕먹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써서 그렇지만 일단 엠파스메일로 온것으로 보아 여기에서 나를 본것 같은데 태극기에 대해 한마디만 해보자
태극기는 우리나라혼을 상징하는 마크가 아니라 중국이 조선은 속방임을 나타내는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맨 처음 조선이 국기에 대해 논의하게 된것은 황준헌의 조선책략이라는 책이 조선에 들어왔을때부였다
황준의 조선책략은 조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적어놓은 책으로 그 당시 조선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그 내용은 제쳐놓고 국기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조선은 청에 주청을 올려 청의 용기를 그대로 조선의 국기로 사용하게 하라 "
아무튼 이 내용을 보고 조선에서는 국기에 대한 논의가 일게 되었는게 조선은 한심하게 나라의 국기에 관한 것을 모두다 청나라에 물어본다
그 후 외교문서에 국기에 관한 것을 어떻게 정하면 되겠느냐고 청나라에 물어본결과 그당시 청나라의 실력자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은 중국의 용기를 써도 무방하다는 답변이 나오고 용기가 조선의 국기로 채택을 할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후에 시간이 지나서 조미수호통상을 위해서 중국의 마건충이라는 사람이 조선에 도착해서 전권부사 김홍집과 국기에 관해서 논의하게 되는게 이 내용이 청국문답이라는 문서에 있다
그 내용을 간략히 보면
조선의 국기에 관한 내용은 중요하므로 그것은 반드시 중국의 허락을 받아야 해야 하고 마건충은 중국의 용기를 그래도 사용하는것보다 조선은 국왕은 홍포를 입고 관리들은 청색관복을 입고
일반백성들은 흰옷을 좋아하므로 백저청운홍룡기
즉 바깥은 흰색배경에 푸른 구름무니에 붉은용을 그려놓은 기를 조선의 국기로 하는것이 어떻냐 제안해서 김홍집은 이에 흔쾌히 응하고 좀 시간이 지나서 또 다시 국기에 대해 논의하는데 김홍집이 백저청운홍룡기는 그리기가 너무 힘들므로 이응준이라는 사람이 만든 기를 약간 변형하는해서 조선에 국기로 하는것이 사용하는 것이 어떻냐고 한다
(이 내용이 중요하다 그 당시 조선은 청과 일본이 주도권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이응준이라는 사람이 그린 기의 형태는 자세히 알수 없지만 마건충이 이응준이 그린 국기는 일본의 일장기와 비슷해서 안된다는 부분이 나온는걸로 봐서 조선은 자기나라 깃발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청과 일본의 눈치를 보는 참으로 한심한 국가였다 )
그러자 마건충은 새로운 제안 태극기의 제안을 한다
"백저청운홍룡기가 만들기 힘들다면 조선은 팔도니 팔쾌로
겉을 꾸미고 태극을 그려놓으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이에 김홍집은 아주 좋다고 한다
바로 우리에 태극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을 하나로 모아주는 이 위대한 태극기가 사실은 중국의 마건충이라는 사람이 만들어주었다니
(사실 마건충은 학식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중국역사상
문법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마건충은 젊었을때부터 어학을
공부해서 중국어의 최초문법을 만든 "마씨문통"이라는 책을 만들
정도로 대단한 지식인이었다)
여러분들은 혹시 중국의 강시영화같은 것을 본적이 있는가
거기에 보면 점술사들이나 중국의 도사같은 사람들이 입고있는 옷이나 방을 보면 팔쾌와 태극이 그려져있다
원래 태극이라는 것이 주역의 계사전의 만물생성과정을 그림으로 그린것으로써 명초기때부터 민간에 유행하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에게 아주 친근한 상징이다
지금도 중화권을 가보면 태극이라는 것은 중국인과 아주 가까이 있다
태극이 분명히 중국의 상징임을 알고 중국의 마건충은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라는 표시로 태극기를 만든것이다
그 후로 제물포조약후에 임오군란이후 일본에게 사과하러 사죄사로 가는데 (그때 조선정부는 돈이 없써서 일본공사에게 돈을 꾸어서 간신히 일본에 도착한다)박영효가 사죄사 대표로 가게 되었는데 배안에서 태극기에 관한 조언을 영국의 제임스선장에게 듣게 되었다
송기무처서에 보면
"팔쾌와 태극그림은 대단히 휼륭하나 팔괘는 배열이 너무 빽빽해서 조잡해 보여서 퍽 보기 좋지 않습니다 이것을 사괘로 바꾼다면 좋지 않을까요"
그당시 조선은 국기에 대한 지식도 전무하고 박영효가 생각하기도 국기에 대한 지식이 있는 외국인이 그렇다면 틀림없겠다싶어서 사괘로 바꾼다
그후로 여담으로 박영효는 각고의 노력으로 일본에서 17만엔을 빌려서 5만엔은 임오군란때 일본에게 당한 피해를 갚고 12만엔을 빌려서 조선에 돌아온다
이것을 보고 일본이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했을까 자기나라로 오는 배운임도 없이 일본공사에게 돈을 빌리더니 이건 뭐 일본에게 사과하러오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빌리로 오다니 일본입장에서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과연 정상적인 나라인지 의심했을것이다 거기중에 상거지나라 라고 생각했을것이다
암튼 중국이 우리나라의 속방임을 나타내기 위한 태극기가 이제 우리나라의 국기가 되었고 그 또한 아무지식없이 영국인 선장 제임스가 하자는 대로 즉흥적으로 팔괘에서 사괘로 만든 태극기
그분이 과연 이런 태극기의 정체를 알고 한국 사람 나라 사랑을 외치는지
왠지 오늘따라 기분이 꿀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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