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의 고고학적 흔적
출애굽의 시기
출애굽 시기는 크게 두가지 설로 나뉩니다. 빠른 연대설은 BC 1447년, 늦은 연대설은 BC 1290년 부근입니다.
처음에 많은 학자들은 출애굽기 1장11절에 나와있는 내용인 이스라엘 민족이 국고성 라암셋(람세스의 재산이라는 뜻)을 건설하는 노역에 동원되었다고 하는 내용을 근거로 출애굽이 람세스2세의 재위기간인 BC1290년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반면, 알프레드 J 허트와 같은 현대의 성서고고학자들과 최근의 여러 정황들은 빠른 연대를 지지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BC 971년에 왕이 된 솔로몬 재위4년에 480년 전에 출애굽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부분과(왕상 6:1), 사사기 11장에서는 입다가 이스라엘이 이미 그 땅에 거주한지 300년이 되었다고 진술하는 부분에서 더 탄력을 받습니다. 사사기의 300년은 늦은 연대설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기간이지요.
<출애굽의 연대(빠른연대설) >
이집트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출애굽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출애굽과 관련한 이집트의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늦은 연대설의 람세스2세 시절에는 강력한 통치력으로 어느 시절보다 기록활동이 왕성하였음에도 출애굽이나 모세의 재앙과 관련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늦은 연대설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다른 연대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고 그 중 일부 학자들은 이집트 기록이 잠시 끊겼던 시대인 '힉소스 점령시대'에 주목하게 됩니다.
지우고 싶은 역사는 과감히 삭제한 이집트
이집트 족보는 골칫거리를 의식적으로 제거하거나 특별히 중요하지 않았던 이름들을 잘라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고대 이집트 역사가들이 힉소스 점령시대(BC 1663년~BC 1555년 기간 동안 셈족 혹은 히브리계열의 외부민족이 이집트를 점령하였던 시기) 전체를 언급하고 있지 않은 부분입니다. 애굽왕들의 목록들이 12왕조에서 18왕조로 갑자기 뛰어넘어버리는 것이지요. 얼마나 철저히 삭제했는지 다른 기록들도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어 현대 학자들은 재위했던 왕이 누구였는지 재위순서는 어떠했는지조차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애굽의 수치라 할 수 있는 출애굽 사건 또한 공식 기록에서 충분히 배제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점령군 힉소스 왕조의 수도였던 '타나스'에 나중에 국고성 '라암셋'이 세워지며 지명도 라암셋으로 바뀌었다는 것인데, 늦은 연대설의 근거였던 도시 '라암셋'이 빠른 연대설에서도 수도로서 규모있는 도시였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지하는 빠른 연대이자, 애굽에서는 지우고 싶던 역사인 바로 이 힉소스 시대에 요셉이 애굽으로 들어간 것이라면, 고고학적 증거들은 어떻게 이를 뒷받침하고 있을까요?
가나안인들을 종으로 썼다는 애굽 문서
성경 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집트 문서 중에는 한 애굽 가정의 종들 이름을 열거한 12왕조~13왕조(힉소스 초기왕조) 시대의 것으로 감정된 파피루스가 있는데, 종들 중 45명이 팔레스타인 출신이며, 몇 명은 십브라, 므나헴 같은 완벽한 히브리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요셉처럼 팔려왔을 것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다시 애굽 왕 이야기로 돌아가 애굽 남방에서 재기를 노리던 아흐모스(재위 BC 1550~BC 1525)는 세력을 규합하여 다시금 수도를 탈환하며 힉소스 왕조는 종식하게 됩니다. 새로운 정권은 당연히 요셉을 알 리가 없었으며, 이방민족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여 철저한 압제에 들어가지요. 자신들과 같은 방식으로 왕조가 바뀔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잘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 즉 '왜 기록하기 좋아했던 현명한 이집트인들은 자신의 선조들과 사이좋게 지냈던 요셉과 이스라엘을 어느날 갑자기 모르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출애굽기 1:8~10)
출애굽기의 바로 : 아멘호텝2세
새로운 왕조의 왕 중 투트모스3세의 아들 아멘호텝2세(재위 BC1450경-BC1425경)는 활로 7.5센티미터 두께의 구리 과녁을 뚫었다는 허풍을 기록으로 남길 정도로 용맹하게 보이기를 원했던 왕으로, 곧 이 왕이 전기 연대에 따른 출애굽 당시의 애굽의 왕입니다. 실제 그는 운동을 좋아했으며 언제나 전쟁의 선봉에 앞장섰다는 기록이 있으며 성서 고고학자들은 그의 이러한 강한 성격과 허영심 때문에 모세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장자를 잃은 아멘호텝2세
주목할 부분은 아멘호텝2세의 뒤를 이은 투트모스4세(재위 BC1425-BC1417)가 아멘호텝의 장자가 아닌 둘째 아들이라는 견해인데, 이 것은 모세의 마지막 재앙과 딱 맞아떨어지게 되어 더욱 주목 받음과 동시에 또한 가장 인정받고 있기도 합니다.
투트모스4세가 장자가 아닐 것이라는 것에 대한 근거는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진 기자의 대 스핑크스와 관련된 내용으로, 바로 그 앞발 사이에 있는 '꿈의 석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꿈의 석비는 투트모스4세가 꾼 꿈에 관한 기록으로, 그가 왕자시절 사냥을 나갔다 잠시 잠이 들었을 때 그의 꿈에 갑자기 스핑크스가 나타나 모래에 파묻힌 자신을 꺼내주면 왕좌에 오르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합니다. 투트모세4세는 깨어나자마자 자신이 잠자던 자리의 모래를 파기 시작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무려 지어진지 1천년이나 지난 그 유명한 대 스핑크스를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 그는 왕이 되었고, 자신에게 왕좌를 준 스핑크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발 사이에 기념비를 세우게 되지요.
만약 그가 장자였다면 스핑크스가 그런 제안을 했다고 떠벌릴 일도, 기념비를 세울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아멘호텝2세의 장자로 그와 함께 그의 무덤에서 미라로 발견된 왕자 웨벤세누(Webensenu)를 지목합니다. 웨벤세누의 미라는 11세 정도의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으며, 먼저 죽어 미라로 만들어진 후 아버지의 묘에 함께 안장되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입니다. (이미지를 보고싶으신 분은 http://mummipedia.wikia.com/wiki/Webensenu 클릭)
아멘호텝2세의 정벌시기
용맹했던 왕 아멘호텝 2세는 두 차례의 정벌을 떠납니다. 1차인 BC 1450년에는 아시아로, 2차인 BC 1446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는데 이 2차 정벌시기가 빠른 연대의 출애굽 시기와 일치합니다. 이에 따라 메릴(E.H Merrill)과 같은 학자는 이 2차 정벌이 바로 유대민족을 추격한 정벌이라는 가설을 세우기도 합니다.
아마르나의 토판 편지
고고학적 증거 중 주목할 것은 출애굽 시기인 기원전 14세기 초 팔레스타인 지역 여러 왕실에서 애굽으로 보낸 편지인 아마르나의 토판편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완전하지 않은 도시체계를 갖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의 가나안 왕들은 애굽의 속국을 자처하며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는데, 이 왕과 왕자들은 일제히 ‘하비루’라는 족속의 위협 속에 빠졌다며 애굽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비루는 그 전부터 있었던 말로서 요즘 언어로는 침략자나 배신자를 비하하는 ‘빨갱이’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표현이며, 고고학자들은 ‘하비루’가 ‘히브리’와 언어적 관계가 있다는 것에 대체로 의견을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 중 가나안 지역 예루살렘의 왕자 압두헤바가 바로에게 쓴 호소문을 보겠습니다.
“나의 주, 왕에게... 보시옵소서. 나는 왕의 한 목자이며, 왕실의 공물을 나르는 사람입니다. 나를 내 아버지 집에 둔 것은 내 아버지도 아니고 내 어머니도 아니라 능하신 왕의 팔이었습니다... 나의 왕께서는 당신의 땅을 생각하시옵소서! 왕의 땅이 유실되었나이다. 그 전체가 제 손에서 벗어나버렸나이다. 내게 대항하는 전쟁이 있나이다... 하비루가 왕의 성읍들을 함락시켰나이다... 왕께서는 당신의 땅으로 궁수대를 보내주소서! 그러나 만일 올해에 궁수대가 여기 없다면, 왕께서는 지방 방백을 보내시고, 나는 내 형제들과 함께 당신에게로 데려가셔서, 우리로 하여금 나의 주 왕의 곁에서 죽게 하소서!”
또다른 흥미로운 편지에서는 므깃도의 왕자 비리디야가 세겜의 방백 라바유에게 위협을 받았는데 라바유가 하비루에게 넘어가 그들과 함께 자신을 공격한다는 내용이었으며, 이에 겁을 집어먹은 라바유는 자신이 아니라 게셀의 왕자 밀킬루가 하비루와 교제한 것이라는 변명의 편지를 또 보냅니다. 웃긴 것은 밀킬루 또한 애굽 왕에게 자신을 하비루로부터 구원하여줄 것을 호소하였다는 것이지요.
고고학자 해럴슨(Harrelson 1957)은 이 편지들 중 세겜의 방백 라바유에게 주목하는데 그가 기억해낸 성경 내용은 출애굽 중 여호수아와 세겜 간의 전투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라바유를 비롯한 세겜의 주요 세력들이 이스라엘과 친목을 도모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없었을 것이고 이것이 주변국들의 경계를 부추켰을 것이라는 견해를 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이 아마르나의 토판 편지들은 대부분 묵살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애굽의 내부 상황에 있었습니다.
애굽은 출애굽 사건 이후 하나같이 병약한 왕이 들어서게 되어, 아멘호텝2세의 아들 투트모스4세는 요절하였고, 그 아들 아멘호텝3세(BC1386-BC1349)는 성인이 되자 정치는 왕비에 맡겨놓은 채 쾌락에 빠져있다 잇몸병으로 사망하고(아멘호텝3세의 장자도 아버지보다 일찍 죽는다), 뒤를 이은 아멘호텝4세는 종교개혁과 수도 이전에 분주해 주변국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지요.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에서 출애굽 이후 애굽과의 충돌을 기록하고 있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러한 애굽의 내부적인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애굽왕 메르넵타의 승전비
애굽의 기록 중 이스라엘 사람들을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기록은 BC 1207년에 세워진 애굽왕 메르넵타의 승전 기념비입니다. 왕의 승전보를 나열하면서 ‘이스라엘은 황량해졌고 그 씨가 말랐네’라고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지요.
애굽의 가나안 지역에 대한 지배욕은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성경에서도 열왕기상 14:25-28에서 이집트의 시삭 왕이 예루살렘을 치러 와서 성전 보물들을 싹 다 털어갔다고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의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또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다 빼앗은지라”
메르넵타의 정벌보다 훨씬 후인 BC 925년의 일입니다.
글을 마치며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과 관련된 고대 근동의 고고학적 기록들은 기대만큼 완전하지도 않고 발굴된 조각들 또한 서로 퍼즐처럼 맞추어 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비슷한 시기의 우리의 고조선에 관한 정식기록인 삼국유사의 집필시기가 무려 주후 1281년인 것을 생각해보면 고대 근동 자료에 대한 연구성과가 얼마나 풍부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성경 외에 다른 기록이 있다면 성경의 내용이 훨씬 신뢰가 가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성경 외적인 증거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의 고고학적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고 심지어 노아의 방주조각이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신앙이 생기는 문제는 전혀 별개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증거, 증거를 외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증거를 보여달라는 자들 앞에서 조용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우리의 믿음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증거이자 그 실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