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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누가와 성령

작성자바위섬|작성시간20.03.07|조회수139 목록 댓글 0

누가와 성령

                                         - 성령세례 문제와 관련하여 -

  최갑종/백석대학교 교수

  

1. 문제점 제시

 성령세례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성령세례는 교회를 통해서 주어지는 세례(물세례)와 어떻게 다른가? 성령세례는 교회적 세례와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것인가? 성령세례와 중생(혹은 회심)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중생은 크리스천이 첫 번째 경험이며 반면에 성령세례는 그 뒤에 오는 두 번째 경험인가? 그래서 성령세례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없는 신자들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가? 아니면 예수 믿고 중생한자는 성령세례의 구체적인 체험 없이도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는가? 성령세례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성령세례를 받은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방언은 성령세례에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것인가? 초대교회에 있었던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반복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오늘도 교회 안에서 반복될 수 있는 계속적인 것인가?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창조, 그리스도의 오심, 죽으심, 부활, 승천 등과 같이 구원 역사적 사건의 한 부분인가? 아니면 모든 크리스천에게 개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구원 적용의 한 부분인가?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은 서로 다른가? 아니면 서로 같은 것인가? 전자는 한번만의 체험인 반면에 후자는 반복적인가? 

 

성령세례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령세례에서 주님은 단지 성령 파송자 혹은 수여자인가? 아니면 성령세례를 통해 그 자신이 친히 교회에(또는 개인에게) 오시는가?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과 관련된 이른바 “성령세례” 논쟁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단순히 전통적인 교회와 오순절교회(순복음교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전통적인 교회의 내적 문제로 발전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적인 교회로 볼 수 있는 많은 장로교 신자들과 목회자들까지 이 문제들에 대한 통일된 해답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같은 교단의 신학대학 교수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심각한 해석상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적 발전과 성장을 위해 이와 같은 논쟁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론 동일한 복음주의적이며 개혁주의 신학 노선을 추구하는 교단 신학자들 사이에도 해석을 달리하기 때문에 평신도는 물론 신학생과 목회자들까지도 혼란을 느끼고 있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성령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물론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성경이 주는 답변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적인 답변을 찾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금 성령론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신학교 교수들이 한결같이 높은 성경관을 가지고 있고 다같이 성경의 답변을 추구하면서도 그 결과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같이 성경을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다같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같은 본문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에 지난 7, 8년 동안 국내의 성령론 문제와 관련하여 쓰여진 단행본과 발표된 논문들을 수집하여 자세하게 읽어보았다. 모든 글들을 읽고 필자는 대부분의 글들이 주경학적 이라기보다 지나치게 조직신학적 혹은 교의학적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글들이 성령론과 관련하여 각자 하나의 통일된 교리나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성경의 여러 곳에서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하거나 응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성경저자 자신의 목소리나 의도를 듣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성경 저자와 원래 독자들의 역사적, 종교적, 사회적 상황에 돌아가서 저자의 본문을 보아야 하고, 그런 다음 저자의 신학적 과정 없이 성경을 마치 교리를 위한 백과사전처럼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도행전, 바울 서신 등 성경의 여러 본문들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성령론의 체계를 세우는 이러한 교의학적 성경접근이 과연 바람직한가? 일차적으로 성경 각 저자들을 그들 자신의 작품에 근거해서 보기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작품을 통해 그들을 해석하려고 하는 우 리의 태도가 정말 바람직한가? 바울의 눈으로 누가를 본다거나 혹은 요한의 눈으로 누가나 바울을 보는 것이 정당한가?

 

물론 필자는 이러한 성경접근방법이 전혀 가치가 없거나 불법적인 방법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의학적 접근방법이 올바른 주경학적 접근 위에 세워져야 하며 그 순서가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성경 각 저자들을 종합적으로 활용하기 전에 먼저 각 저자 자신의 작품에 근거해서 저자 자신의 의도를 붙잡아야 한다. 더구나 신약성경 각 권은 어떤 특수한 무시간적 교리체계를 위해 저자들이 도서관이나 연구실에 모여 함께 쓴 논문이라기보다 오히려 각 저자들의 독특한 역사적인 삶의 현장에서 자기의 독자들을 위해 쓰여진 목회적, 교회적, 선교적 작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주경학적 접근방법은 더욱 절실해진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에서 서로 비슷하고 다같이 “복음서”라는 동일한 장르에 속하기 때문에 “공관 복음서”로 불려지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만 서로 비교해보더라도 동일한 사건의 보도나 동일한 예수님의 말씀까지도 강조 점을 달리할 경우도 있고, 다른 배치나 다른 구성을 할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저자의 개성이 다르고 독자도 다를 뿐만 아니라 작품의 강조되는 의도와 목적도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태는 마태의 입장에서, 마가는 마가의 입장에서, 누가는 누가의 입장에서 보고 그들의 강조 점과 의도를 붙잡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론과 관련하여 신약성경 전체의 통일된 체계를 붙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성령론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누가, 바울, 요한 등 각 저자들의 입장을 그들 자신들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주경학적으로 파악한 다음, 그 위에서 교의학적 접근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들 자신들의 역사적 상황에 돌아가서 왜 그들이 성령론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지 그들의 성령이해와 그들 작품의 구성과 강조 점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 독자들과의 관련성은 무엇인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선입관이나 전 이해를 성경 본문에 가져가 채색하는 위험을 가능한 한 줄일 수 있을 것이며, 성령론 문제와 관련된 지금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성령세례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필자가 신약성경에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선택한 이유는 이들이 성령세례 문제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본문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성령세례 문제도 사실상 누가의 본문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의 글에서 인용되는 모든 한글성경 본문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희랍어 성경 Nestle Aland 제26판(1979년도)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본 연구와 관련하여 본문의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2. 누가와 성령세례

 

누가의 구원역사 이해와 성령

누가가 성령세례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한 권의 책으로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특별히 우리의 관심은 누가 자신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집필목적, 신학 및 전체적 구조와 관련된 성령의 역할문제이다. 왜냐하면 이어서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의 성령 취급은 자신의 저서에 나타나있는 신학 및 문학적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신약 저자들 가운데 누가는 누구보다도 성령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그가 누구보다도 자주 성령을 언급하고 있는 그 점에서는 물론 복음서나 사도행전의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성령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 전체에서 성령을 12번, 마가는 6번, 요한은 16번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복음서에서 18번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무려 57이나 언급하고 있다. 다음의 분석은 누가의 성령 언급이 누가 자신이 책을 통해 나타내려고 하는 신학적이며 문학적 구조와 어떻게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1) 누가복음

①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탄생(공사역 이전)과 관련하여(1:15, 35, 41, 67, 80; 2:25, 26, 27).

② 예수님의 공사역 시작, 즉 그의 세례, 시험 및 갈릴리 나사렛에서의 첫 사역과 관련하여(3:16, 22; 4:1, 14, 18)

③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즉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을 향한 여행(눅 9:51참조)과 관련하여(10:21; 11:13; 12:10, 12)

 

(2) 사도행전

① 오순절 성령 강림 준비와 관련하여(1:2, 5, 8)

② 오순절 성령 강림과 예루살렘 교회의 발전과 관련하여(2:4, 17, 18, 33, 38; 4:8, 25, 31; 5:3, 9, 32; 6:3, 5, 10; 7:51, 55)

③ 사마리아 지역 선교와 관련하여(8:15, 17, 18, 19, 29, 39)

④ 바울의 개종과 관련하여(9:17, 31)

⑤ 베드로의 첫 번째 이방인 (고넬료 가정) 선교와 관련하여(10:19, 38, 44, 45, 47; 11:12, 15, 16)

⑥ 안디옥 교회 설립과 관련하여(11:24, 28)

⑦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과 관련하여(13:2, 4, 9, 52)

⑧ 예루살렘 공의회와 관련하여(15:8, 28)

⑨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과 관련하여(16:6, 7)

⑩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과 관련하여(19:2, 6, 21; 20:22, 23, 28)

⑪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과 관련하여(21:4, 11)

⑫ 바울의 로마 선교와 관련하여(28:25)

 

위의 분석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듯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성령의 역할을 서로 비교해 보면 양자 사이에 뚜렷한 대칭관계가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누가복음에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성령이 예수님의 사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반면에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사역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의 준비를 취급하는 누가복음 1, 2장에서 성령이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엘리사벳, 사가랴, 시므온 및 안나 등과 관련하여 잠깐 언급되고 있으나,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시작을 가리키는 3장 이후부터는 성령이 전폭적으로 예수님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예수님에게만이 성령이 임했고 예수님만이 성령을 쫓아내신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 많은 사람, 즉 교회에 임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성령 오심의 체험을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한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복음 선교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낸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간다. 예수님이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은 것처럼 사도들 또한 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으며,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긴 여행을 한 다음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수난을 당하신 것처럼 사도행전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바울은 3차에 걸친 긴 선교여행을 한 다음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을 당하고 투옥된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하늘로 승천하신 반면에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보내어진다. 이처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에는 분명한 대조가 있다. 이 대조는 흔히 생각하듯이 예수님과 성령의 대조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과 교회의 대조로 나타난다.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여러 본문을 통하여 볼 때 이미 신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누가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적 전진을 “이스라엘 시대” “예수님 시대” 그리고 “교회 시대”등 3단계로 나누고 이 구원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성령의 사역을 전환점으로 삼고 있음이 분명하다. 누가복음 3장 16절에서 누가는 세례요한을 통해 세례요한과 오실 메시아(예수님)를 대조하여 세례요한을 “물로 세례를 주는 자”로 예수님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과 다른 차원의 시대에 속한다는 것은 사도행전 1장 5절, 10장 37-38절, 13장 25절, 19장 4절에서도 거듭 강조되고 있다. 누가에 따르면 이스라엘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으나,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특별히 세운 왕이나 선지자들, 예를 들면 다윗(행1:16; 4:25), 이사야(행28:26)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례요한 등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뒤에 더욱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이스라엘 시대와는 다르게 성령이 가시적으로 예수님 위에 임하셨다.(눅 3:22)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에게 임하게될 성령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사61:1)을 자신에게 임한 성령과 관련시켜 “오늘 이 성경이 너희 듣는 중에 성취되었느니라”(눅 4:21)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은 선지자의 약속의 시대가 아닌 이미 종말론적인 성취의 시대에 서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 한편 누가는 예수님의 시대와 교회의 시대 사이에도 분명한 구별을 하고 있다. 누가는 오실 메시아와 관련된 세례요한의 선언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 3:16)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사역과 관련시키기 보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의 사역과 관련시키고 있다. 누가에 따르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 세례요한이 예고한 “성령으로 세례”를 “내 아버지의 약속”(눅 24:49, 행1:4, 5)과 동일시하고, 이 아버지의 약속이 “얼마 후에”(행1:5) 성취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시면서 예루살렘에서 이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오순절 날 성령강림이 제자들에게 있은 다음, 베드로는 이것을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한다. 하나는 오순절 성령강림이 요엘 선지자가 한 에언(사2:28-30)의 종말론적 성취라는 점과(행2:16-18)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하신 “아버지의 약속”의 성취(행2:33)라는 점이다. 여기서 누가는 예수님에게 임한 성령강림 사건과 예수님의 승천 뒤 오순절 날에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강림 사건을 서로 대칭 시키고 있다.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한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심으로 예수님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요엘이 예언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심으로 새로운 교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가는 성령의 오심을 구원 역사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가와 성령세례의 의미

누가는 그의 복음서 1장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눅 1:35) 언급함으로써,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출생하였음을 전제한다. 그러나 누가에 따르면(마태 및 마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이 자기에게 임하고 하늘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언을 받은 다음(눅 3:21-22;참고 마3:13-17; 막1:9-11) 비로소 공식적인 메시아의 임무를 시작한다. 또 누가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뒤 예수님을 통해 그의 죽음과 부활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였으나(눅 24:44-53) 예수님의 분부대로 성령을 받은 다음 본격적인 선교의 사명을 감당한다.

 

어떤 이는 이러한 구절들에 근거해서 예수님도 성령으로 잉태하신 다음 다시 성령을 직접 받은 것처럼 오늘 우리 크리스챤도 비록 중생 하였다(제 1은사)할지라도 다시 성령세례(제 2은사)의 체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또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은 다음 다시 성령세례를 받았으니 우리도 물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다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이전에 이미 중생한 자들이었으나 오순절 날에 성령세례를 받고 비로소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다같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가 모든 크리스천의 모델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문제는 참으로 누가가 예수님의 성령세례와 관련하여 예수님을 모든 크리스천이 닮아야 할 윤리적인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누가가 참으로 예수님의 출생과 성령강림을 크리스천의 중생과 성령세례와, 그리고 요한의 물세례를 부활하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교회적 세례와 동일시하고 있는가? 누가가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성령세례와 관련하여 그들을 우리 모든 크리스천이 따라가야 할 참된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가? 만일 누가가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주장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주장을 누가의 본문에 집어넣는 경우가 될 것이다.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예수님께 성령이 임한 사건”(눅3장)과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행2장)을 자세하게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가 이미 사용하고 있는 “성령세례”라는 말의 의미를 누가의 입장에서 정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누가를 포함하여 신약의 그 어떤 저자도 “성령세례”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이 문제는 절실하다.

 

왜냐하면 어떤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의미 규정 없이 사용하게 되면 그로 말미암은 혼란을 배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성령세례 논쟁도 이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가 사용하지 않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우리가 계속해서 사용해야 한다면 누가의 입장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의 성령강림(눅3장)과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의 성령강림(행2장)의 경우는 물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성령이 임하신 모든 사건과 관련하여 누가가 사용하는 다양한 언어구사를 면밀하게 조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희랍어 성경을 사용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

 

(1) 누가복음

① 세례요한의 출생과 관련하여 :

“그는(세례요한) 모태로부터 성령으로 채워질 것이다.”(1:15, πνευματο αγιου πλη σθησεται).

②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하여 :

“성령이 너 위에 임할 것이요”(1:35, πνευμα αγιον επελευσεται επι σε)

③ 요한의 모친 엘리사벳과 부친 스가랴와 관련하여 :

“엘리사벳(스가랴)은 성령으로 채워졌다.”(1:41, 67, επλησθη πνευματο αγιου)

④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만난 시므온과 관련하여:

“성령이 그 위에 있었다.”(2:25, πνευμα ην αγιον επαυτον)

⑤ 세례요한의 자신의 사역과 오실 메시야의 사역과의 대조와 관련하여 :

“그는 너희를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3:16, αυτο υμα βαπτισει εν πνευματι αγιω και πυρι )

⑥ 예수님의 세례 뒤 성령강림과 관련하여 :

“성령이 비둘기처럼 보이는 형체로 그 위에 내려오셨다.”(3:22, καταβηναι το πνευ ηα το αγιον σωματικω ειδει ω περιστεραν επαυτον)

⑦ 예수님에게 성령강림이 임한 뒤의 상태와 관련하여 :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요단으로부터 돌아오셨다.”(4:1, a Ιησου δε πληρη πν ευματο αγιυ)

⑧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관련하여

“천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1:13, δωσει πνευμα αγιο ν)

 

복음서의 용법에 따르면 누가에게 있어서 성령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대상(1, 3의 신적 수동태 사용)이 되기도 하고 사람에게 직접 오시기도 하고(2, 6), 사람에게 계속 머물러 있기도 하고(4, 7), 그리고 메시아에 의한 세례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5) 그러나 뒤에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예수님에게만이 특별한 현상과 함께 성령이 임한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이와 같은 복음서의 용법이 사도행전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2) 사도행전

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눅 24:49;행1:4절)과 관련하여: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어질 것이다.”(1:5, υμει δεεν πνευ ματι βαπτνσθησεσβε αγιω )

② 선교를 위한 성령강림의 약속과 관련하여 :

“성령이 너희에게 임할 때에”(1:8 επελθοντο του αγιου πνευματο ευμα)

③ 약속의 성취로써 오순절 성령강림 자체와 관련하여 (다음 장에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누가는 오순절의 성령강림 자체를 다섯 가지 동사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하늘로부터 갑자기 맹렬한 바람을 동반한 소리(성령)가 있어”(2:2a εγενετο);

“(그 성령이) 그들이 앉아있는 온 집을 채웠으며”(2:2b επληρωσεν);

“방언들이 불처럼 나누어지면서 그들에게 나타났고”(2:3a ωθησαν);

“방언들이 제각기 하나씩 각 사람 위에 거하였으며”(2:3b εκαθισεν);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채워졌다.”(2:4a επλησθησαγ);

④ 오순절 성령 강림이 선지자 요엘의 예언성취라는 점과 관련하여 :

“내가(하나님) 나의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어주실 것이다.”(2:17, 18 εκχεω αποτου π νευματο μου).

⑤ 오순절 성령강림은 승천하신 주님이 수행하신 것이라는 점과 관련하여

“그가(예수님) 약속된 성령을 부어주셨으니라”(2:33 εξεχεεν);

⑥ 회개하고 세례 받는 자들에게 주는 약속과 관련하여:

“너희들이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2:38 λημεσθε)

⑦ 제자들에게 다시 성령이 채워진 사건과 관련하여

“모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채워졌다.”(4:13 επλησθησ απαντε);

“제자들이 성령으로 채워졌다.”(13:52 οι μαθηται επληρουντο);

⑧ 개인에게 다시 성령이 채워진 상태와 관련하여

“성령으로 채워진 베드로”(4:8 πλησθει);

“성령으로 채워진 바울”(13:9 πλησθει);

“성령으로 충만한 스데반”(6:3, 5; 7:55 πληρει);

“성령으로 충만한 바나바”(11:24 πληρη);

⑨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자기를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셨다.”(5:32 εδοκεν);

⑩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령 받음과 관련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8:15 ελαμβανον);

“성령이 그들에게 아직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8:16 επιπεπτωκο);

⑪ 바울이 성령 받음과 관련하여

“너가 성령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9:17 πλησθη);

⑫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과 관련하여

“성령이 그들 모두에게 임했다.”(10:44; 11:14 επεπεσεν);

“성령의 선물이 부어졌다.”(10:45 εκκεχυται);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10:47 ελαβον)

“내가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라는 주의 말씀을 기억하였다.”(11:16 βαπτι σθησεσθε);

“하나님이 우리(베드로를 포함한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주신 동등한 선물(성령)을 그들에게도 주셨다.”(11:17 εδωκεν)

⑬ 예루살렘 공 의회에서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성령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셨을 때에”(15:8 δουζ);

⑭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에게 임한 경우와 관련하여

“성령이 그들 위에 왔다”(19:5 ηλθα)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한 경우와 관련하여 누가의 언어법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어떤 언어에 기계적으로 매여있기보다 대단히 자유로운 구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동일한 사건의 경우에도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순절 날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경우와 관련해서 누가는 “세례 받다”(1:5), “오다”(1:8), “채워지다”(2:4), “부어주다.”(2:33) 및 “주다.”(15:8)를 사용하고 있으며,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한 경우와 관련해서는 “임하다.”(10:44; 11:15), “부어지다”(10:45), “받다”(10:47), “세례 주다. ”(11:16) 및 “주다.”(11:17; 15:8)등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그밖에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한 경우에는 “받다”(8:15, 17)와 “임하다.”(8:16 바울에게 성령이 임한 경우에는 “채우다 ”(9:17) 그리고 에베소의 제자들의 경우에는 “오다”(19:5) 사용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누가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한번 성령이 임한 사람들에게 다시 성령이 임한 경우에는 한결같이 “채우다”(눅 4:1;행2:4; 4:8, 31; 6:3, 5; 7:55; 11:24; 13:52)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누가의 이러한 언어 구사에 근거하여 자주 주장되는 바와 같이 소위 성령이 처음 오시는 경우를 “성령세례”로, 성령이 다시 오시는 경우를 “성령 충만”으로 엄격하게 나눌 수 없는 것은 오순절 날 처음 성령이 오신 경우와 바울에게 성경이 처음 오신 경우에도 동일한 동사인 “채우다”를 사용하고 있을 뿐더러(행2:4; 9:17), 기도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다시 채워진 사건과 관련하여(4:31) 누가는 성령이 처음으로 임하는 경우를 말할 때 사용하는 “주다”(행11:17; 15:8)를 또다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행5:32).

 

또한 뒤에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누가의 언어구사를 볼 때, 누가가 오순절의 첫 번째 성령 강림과, 그리고 그 뒤에 사마리아 사람들(행8장), 바울(행9장), 고넬료 가정(행10, 11장), 그리고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각각 처음으로 오신 성령의 경우를 어떤 질적인 의미에서 구분한다고 보기 힘드는 이유는 누가가 똑같은 언어를 서로 교체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순절 날 성령강림과 관련하여 사용된 여러 용어 가운데 “오다”, “주다” 및 “세례를 주다”는 고넬료의 가정의 경우에, “채우다”는 바울의 경우에, “오다”는 에베소 제자들의 경우에 각각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질문인 “누가의 입장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어떤 의미로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성령의 오심과 관련하여 누가가 복음서와 사도 행전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동사에서 파생한 명사 부사를 포함하여) 원형별로 다시 분류해 보자.

 

①“채우다”13번 (눅1:15, 41, 67;행2:2, 4; 4:8, 31; 6:3, 5; 7:55; 9:17; 11:24; 13:52)

②“받다” 4번(행2:38;8:15, 17; 10:47)

③“부어주다.” 4번(행2:27, 18, 33; 10:45)

④“오다” 3번 (눅1:35 행1:8; 19:8)

⑤“주다.” 3번 (눅11:13;행5:32; 15:8)

⑥“세례 주다.” 3번 (눅3:16;행1:5; 11:16)

⑦“임하다.” 3번(행8:16; 10:44; 11:15)

⑧“거하다.” 1번 (눅2:25)

⑨“내려오다” 1번 (눅 3:22)

⑩“도달하다.” 1번(행2:2)

 

위의 동사들을 성령 수여자와 수용자의 입장에 보면 일반적으로 수여자의 입장에서는 “부여주다”, “오다”, “주다”, “임하다”, “거하다”, “내려오다” 및 “도달하다”의 능동태 동사가 주로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수용자와 관련해서는 수동태 형태의 “채우다”, “세례 주다”와 “받다”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은 누가의 언어사용에 있어서 두드러진 차이점은 수여자와 수용자의 구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가 언어를 다르게 사용한다고 해서 마치 그가 다른 사건을 가리키거나 다른 의미를 강조한다고 보지 않아야 한다. 이점은 이미 지적한대로 누가가 동일한 사건을 다양한 언어로 구사하여 표현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언어를 여러 다른 사건과 관련하여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적어도 우리가 누가의 언어사용에 기반을 두고 말한다면 예수님에게 성령이 오신 경우나(눅3장),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신 경우나(행2장),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오신 경우나(행8장), 바울에게 성령이 오신 경우나(행9장),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오신 경우나(행10, 11장), 에베소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신 경우 모두가 차이점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동일한 성령의 오심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사건의 독특한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성령오심 그 자체의 차이점에서 찾기보다 오히려 그 사건이 놓여 있는 전후 문맥과 저자의 신학적, 문학적 구성 의도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 다시 우리의 주된 질문으로 돌아가자 만일 우리가 “성령세례”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면 누가의 입장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로 사용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말을 오순절 날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신 경우에만 사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성령이 임한 여러 사건에도 동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가?

 

이미 언급한대로 누가는 “성령세례”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복음서에서 세례요한이 오실 메시아의 사역과 관련하여 말한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 3:16)에서 “세례 주다.”의 미래 능동태동사를 한번 사용하고,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에 임하게 될 성령과 관련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어질 것이다.”(행1:5)에서 미래 수동태 동사를 사용하고, 똑같은 수동태 동사를 고넬료 가정에 동일한 오순절의 성령 이 임한 것과 관련하여 베드로가 기억한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행11:16) 다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에게 있어서 성령과 세례라는 복합적인 용어는 1차 적으로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연관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누가는 오순절의 첫 번째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이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뒤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높아지신 예수님이 아버지의 약속인 성령을 받아 부어주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우편으로 높아지셨을 때에 그 약속, 즉 성령을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2:33). 이러한 베드로의 설명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누가복음 24장 47절의 부활하신 예수님의 약속과 정확하게 부합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을 너희들에게 보낼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의 희랍어 사용상으로 볼 때 성령과 약속은 정확하게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성령의 파송은 예수님의 사역이라는 점이다.

 

이 성령의 파송이 예수님의 사역이라는 점은 사도행전 1장 5절에 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라는 수동태 구문에서도 거듭 확인되고 있다. 희랍어의 문법으로 볼 때 이 수동태 구문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밝히는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점은 일찍이 세례요한이 오실 메시아의 사역과 관련하여 “그는 너희를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눅3:16)라고 예언한 말씀과도 정확히 부합한다.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비록 누가가 직접적으로 “성령세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만일 우리가 “성령세례”라는 말을 “성령이 주는 세례” 혹은 “성령의 세례”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라는 의미에서만 사용한다면 이것은 누가의 의도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누가가 이 성령세례를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파송 하신 그 성령의 경우에만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위에서 성령세례와 관련하여 살펴본 누가의 본문들은 성령세례가 직접적으로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덧붙여 누가복음 24장 49절의 “내가 아버지의 그 약속을 너희들에게 보낼 것이다.”라는 말씀, “그러므로 너희들은 위로부터 능력으로 옷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서 머물러라”라는 말씀, 이와 부합하는 사도행전 1장 4절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라고 하신 분부는 분명히 어떤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한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순절 날에 비로소 예수님이 성령을 제자들에게 파송 하였고, 아버지의 약속이 실현되었고,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 전파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구비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본격적인 교회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가가 이 성령세례를 오로지 오순절 날의 성령 파송에만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성령세례의 가장 중요한 강조점은 어떤 특수한 시간이나 장소나 세례라는 말 그 자체에 있기보다 예수님이 성령을 파송 한다는 그것에 있다. 중요한 것은 성령과 관련된 예수님의 사역 자체에 있다. 누가는 24장 49절에서 예수님의 성령 파송과 관련하여 주어와 동사를 제일 먼저 앞세우는 강조형태 “내가 보낸다.”(εγω απο στελλω)라는 구문을 사용하여 이점을 분명히 하였다. 시간과 장소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앞서 조사해 본대로 누가가 오순절 날에 예수님께서 파송한 성령과 관련하여 “세례를 주다.”라는 용어만을 독점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채우다”, “부어주다”, “오다”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누가의 표현들은 우리가 “성령세례”라는 용어 그 자체의 노예가 되는 것을 방지해 준다. 누가의 주된 강조점인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역”이라는 사실만 유지된다면 성령세례라는 말 대신에 “성령을 보내다”, “성령이 오다”, “성령을 채우다”, “성령을 붓다” 등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성령세례라는 말과 이들 용어상에 근본적인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왜 누가가 동일한 사건을 두고 그처럼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였겠는가?

 

위에서 말한 우리의 추론이 정당하다고 한다면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의 경우에만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타나있는 그 밖의 성령 오심에 대한 사건들, 예를 들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령 받음(8장), 바울의 성령 채워짐(9장), 고넬료 가정의 성령 받음(10, 11장), 에베소 제자들의 성령 받음(19장)의 경우에도 동일한 성령세례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합법성을 갖게 된다. 더구나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한 경우와 관련하여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던 동일한 용어인 “부어지다”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10:45), 이때 베드로가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는 사실은(11:16) 누가가 고넬료 가정의 성령도 동일한 성령세례로 이해하였다는 점을 반영해준다.

 

그러나 필자가 “성령세례”라는 말을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모든 성령오심의 경우에 적용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는 그 점에 근거해서 마치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독특한 의미를 상대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곡해해서는 안 된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그 뒤의 어떤 성령강림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독특성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의 오심의 양태나 누가가 표현하고 있는 언어 자체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전체적 구조와 그 구조를 통하여 저자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전진과정에서 찾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누가가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예수님의 성령강림 사건과 병행시키고 있는 그의 구원 역사적 이해의 틀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강림의 독특성을 찾기 위해서 먼저 그와 쌍벽을 이루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 자체를 살펴보도록 하자.

 

성령이 예수님에게 오신 의미

누가는 마태 마가보다 더 분명하게 요단강가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일과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사건을 구분하고 그리고 성령이 임하신 사건을 예수님의 공사역의 결정적인 시발점으로 삼는다. 마태와 마가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세례요한에게 와서 그에 의해 세례를 받았음을 강조하고 있지만(마3:13-16; 막1:9) 누가는 요한의 이름을 생략한다. 마태와 마가는 다같이 부사 “즉시(ευθυ)"를 사용하여 예수님이 세례를 받자마자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다고 말함으로써 요한의 세례와 성령이 임하신 경우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지만(마3:16a; 막1:10a), 누가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 오심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는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간격을 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누가의 구원 역사적 관점에서 세례요한은 여전히 이스라엘 시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보았다는 그 점에서 이스라엘의 어느 선지자보다도 더 위대하고(눅 7:26) 여자가 낳은 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로 불릴 수 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도 요한보다 더 위대한 자로 불려진다(눅 7:28). 그렇다고 한다면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신 사건과 관련하여 누가가 특별히 강조하는 바는 무엇인가? 누가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물론 우리의 출발점은 누가의 본문 그 자체이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과 관련된 누가의 본문은 4개의 부정사 구문과 두개의 절대 분사구문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긴 문장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문장 형태는 신약의 다른 저자들로부터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누가 특유의 것이다. 본문을 가급적 누가의 언어 스타일을 그대로 살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백성들이 세례를 받고 있었을 때에

예수 역시 세례를 받고 그리고 기도하고 있을 때에

하늘이 열렸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보이는 형체로 그 위에 내려왔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너로 더불어 내가 기뻐하노라 라는 소리가 났다.

 

필자는 여기서 누가 본문 자체에 대한 상세한 주석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이미 우리 주위에 본문 자체를 잘 설명해주는 주석들이 상당수 있으므로 이 일을 여기서 되풀이하는 것은 불필요한 시간 낭비일 것이다. 필자의 근본적인 초점은 이 본문을 통해서 저자가 사도행전을 포함하여 누가가 자신의 모든 작품을 통해서 이 본문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 본문을 통해서 저자가 전달하려고 하는 중심사상은 무엇인가?

 

누가복음에서 이 본문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사실상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요한의 사역이 끝나고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전환점에 놓여있다. 이 본문 이전의 문맥에 보면 3장에서 시작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은 20절에 이르러 분봉왕 헤롯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힘으로 사실상 종결된다. 그리고 이 본문 이후의 문맥을 살펴보면 23절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삼십 세 때에 시작되었다는 언급과 함께,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에게 이르는 마태의 예수님 족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에게서 시작하여 아담과 하나님까지 소급되는 누가의 예수님 족보가 나타난다. 그 다음 4장 상반부에 예수님의 시험사건이 나타나고 4장 중반부터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공적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전후 문맥을 고려해 볼 때 누가가 이 본문을 요한의 마지막 사역이 끝나고 예수님의 새로운 사역이 시작되는 전환점으로 고려해 볼 때, 누가가 이 본문을 요한의 마지막 사역이 끝나고 예수님의 새로운 사역이 시작되는 전환점으로 삼고 있음이 자명하다. 세례요한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 겸 새 시대의 전령자로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줌으로 이스라엘 시대(구약)와 예수님 시대와 연결을 맺어주고 구원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요한이 무대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비로소 새시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이 성령을 예수님에게 보내시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공적인 선언을 하였을 때, 누가복음 4장 18절 이하가 밝혀주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함께 그 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예수님에게 보내신 의의가 무엇이며,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어떠한 의식과 소명감을 갖게 되었는가? 이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누가가 전하고 있는 예수님 자신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 자신의 시대에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령 보내심이 당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이해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님 당대까지 소급해 볼 수 있는 모든 유대적 자료에 따르면 성령은 항상 오실 메시아와 함께 도래하게 되는 새 시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의 죽음 이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범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성령을 거두어 가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예언자의 직분을 잠정적으로 중단되었으며 그 대신 토라(율법)가 메시아가 올 때까지 예언자의 역할을 대행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것은 이미 제 1마카비 문서와(4:46; 9:27; 14:41) 바룩의 묵시와(85:3)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과(Contra Apion, 1:41), 쿰란 등의 문서에서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그 대신 그들은 비록 현재에는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성령의 사역이 잠정적으로 중단되고 있지만 약속된 메시아가 오면 토오라를 통하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는 새로운 종말론적인 시대가 도래할 것을 기대하였다. 이처럼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성령”, “새 시대”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메시아의 오심은, 곧 성령의 오심이고, 성령의 오심은 바로 메시아 시대의 도래였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에서 일찍이 약속된 메시아의 오심과 함께 성령의 오심을 대망 하였다. 이점에 있어서 이새의 줄기에서 날 메시아에게 “여호와의 신”이 강림할 것이라는 이사야 11장 2절, 42장 1절, 61장 1절 이하와 메시아 시대의 백성들에게 약속된 에스겔 36장 27절, 37장 14절과 요엘 2장 28, 29절의 하나님의 영에 관한 말씀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솔로몬의 시편 18장 7절, 17장, 37절 에녹서 49장 3절, 62장 2절, 제4 에스라서 6장 26절, 이사야에 대한 여러 유대적 탈굼 문서들은 예수님 이전과 에수님 동시대의 사람들이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는 메시아와 성령의 오심을 얼마나 대망 하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이제 누가의 본문을 이와 같은 유대적 문맥에서 살펴보면 본문의 핵심적인 의도를 쉽게 간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누가의 본문에서 의도되는 중심 사상은 하나님께서 약속된 성령을 보내셨으며 따라서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 새 시대를 여는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유대인들이 대망 했던 그 종말론적인 성령이 다시 파송 되었고, 그 성령을 받은 메시아를 통해 약속된 새로운 시대가 출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점은 본문에서 유대인에게 있어서 종말론적인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하늘이 열렸으며”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던 “성령이 다시 보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이 이때에 공식적으로 동시대에 있어서 메시아의 호칭 가운데 하나인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워 지고 있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누가가 곧 이어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성령 오심을 이사야 61장 1절의 성취로 받아들인 점을 알리고 있는 것은 우리의 추론을 강하게 뒷 바침해 준다. 누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출생하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임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때에 비로소 성령을 통해 공적인 메시아로 취임하였으며 성령과 함께 새 시대를 도래하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누가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사건은 구약에서 메시아와 관련된 예언의 성취요, 같은 시대 유대인들이 갈망하였던 메시아 시대(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라는 강한 구원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적 점진과정에 있어서 약속의 시대가 성취의 시대로 다가올 종말이 이미 현재로 전환된 것이다. 누가에게 있어서 이러한 전환이 바로 예수님에게 약속된 그 메시아적 종말의 성령이 임하였을 때 일어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여전히 미래에 올 나라로만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너희 가운 데 있다.”(17:21), “내가 하나님의 손(성령, 마12:28절 참조)으로 귀신을 쫓아낼 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다.”(11:20)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된다.”(16:16) 그리고 나사렛에서 이사야 61편을 읽어보시고 “오늘 이 성경이 너희 듣는 중에 성취되어졌다.”(4:21)라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성령이 제자들(교회)에게 오신 의미

예수님에게 성령이 오심으로 구원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이루어졌다면 오순절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사건의 결정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전진 과정에 있어서 이 사건이 주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무엇인가? 우리의 초점은 여기서 누가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미 여러 번에 걸쳐 누가의 구원 역사적 이해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해가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 구성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를 마감하기 전에 다시 한번 사도행전 2장 서두에 나타나 있는 오순절의 성령강림사건 자체를 가까운 앞뒤문맥에서,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그리고 복음서를 포함하여 누가 자신의 전 작품의 문맥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필자는 이미 누가복음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과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 상호간에 유비 관계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양 본문을 가까이 서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볼수록 이러한 유비는 더욱 뚜렷해진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에서 가까운 앞의 문맥 즉 1장을 보면 마치 누가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이 자신의 사역 종점에서 백성들에게 오실 메시아를 통한 “성령세례”를 예고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어 이스라엘 시대와 예수님 시대를 연결시켜주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과 똑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성취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일찍이 세례 요한이 예고한 그 성령세례를 약속하심으로 친히 예수님 자신의 시대와 성령강림을 통한 교회시대를 연결시켜주고 지상에서 하늘로 떠나신다.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다음 기도하면서 성령강림을 준비하는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에수님이 약속한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한 사도를 뽑아 옛 이스라엘을 대체할 수 있는 교회적 준비를 한 다음 합심하여 기도에 들어간다 예수님이 기도 중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성령이 예수님께 임한 것처럼 기도하고 있는 모든 회중, 즉 교회 위에 성령이 임하신다. 예수님이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 메시아의 사역을 시작하는 것과 같이 (눅4:1, 14)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증언하는 교회의 사역을 시작한다.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장소와 숫자의 차이일 것이다. 예수님은 요단 강가에서 성령을 받은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등의 구속사역이 이루어진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았으며, 예수님은 홀로 성령을 받아 메시아 시대를 연 반면에 제자들은 모든 회중와 함께 성령을 받아 교회의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유비를 통해서 누가는 양 사건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부각시킨다.

 

이제 성경 본문을 통하여 오순절 성령강림 그 자체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행전 2장 14절 의 본문은 단회적인 행동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여섯 개의 과거동사가 여섯 개의 접속사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 본문의 내용을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필자 자신의 번역을 제시한다.

 

오순절의 날이 다 채워졌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장소에 함께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하늘로부터 맹렬한 바람을 동반한 소리가 왔다

그리고 그들이 앉아있는 온 집을 채웠다

그리고 방언들이 불처럼 나누어지면서 그들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각 방언이 그들 각 사람에게 임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이 그들에게 말하게 하심을 따라

여러 방언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 본문과 관련된 우리의 주된 관심은 세부적인 주석이 아니고 이 본문을 통해서 누가가 전달하려고 하는 중심 의도를 붙잡는데 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신 상황을 설명하는 이 본문의 중심골자는 무엇인가? 본문의 중심의미를 붙잡기 위해서는 본문을 통해서 누가가 제시하는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발견하는 것은 누가가 성령의 오심을 오순절 날과 관계시킨 점이다. 이날은 원래 유월절 후 50일이 지났을 때 첫 소산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었다.(출23:16; 레23:15-21; 신16:9-12) 그러나 누가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날이 언약과 율법이 주어진 날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누가는 오순절과 관련하여 수동태 부정사 구문(εν τω συμπλροθαι)을 사용하여 율법의 시대(유대종교)는 하나님에 의해 그 종점(또는 그 절정)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둘째, 누가는 오순절 율법의 시대가 그 종점에 이르렀을 때에 마지막 날에 보내질 것으로 약속된 성령이 와서 온 집을 채웠다고 한 점이다. 왜냐하면 누가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늘로부터 바람을 동반한 소리와 불처럼 나뉘어진 방언은 종말론적인 성령과 그 임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채워졌다고 하는 점이다. 누가는 여기서 앞서 오순절과 관련하여 사용된 똑같은 “채우다”라는 단어의 수동태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이제는 율법대신 성령으로 채우셨다고 말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채우셨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는 이미 우리가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경우에서 살펴본 바대로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되었던 성령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한다. 메시아에게 약속된 그 성령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것처럼 다가올 시대의 사람들에게 약속된 그 성령이 온 회중을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메시아 개인에게 임하셨던 그 종말론적인 성령이 이제는 온 회중(교회)에게 임하셨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여기서 누가는 온 회중(교회)을 율법중심의 유대교회를 대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백성으로 부각시킨다.

 

마지막으로 누가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주심을 따라 각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말한 점이다.

이 방언의 체험이 모든 회중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했음이 분명하다. 이 점은 본문 이후의 문맥에서 회중들이 여러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2:13)라고 오해하였을 때, 베드로가 회중을 대표하여 말한 설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베드로는 이제 성령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말라기 이후 중단되었던 그 선지자 직분을 다시 회복한 자로 등장한다. 성령을 받은 예수님이 메시아적 자의식 가운데서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시킨 것과 똑같이(눅 4:16-21)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바로 자신들에게 적용시킨다. 베드로는 요엘의 본문에 기계적으로 메이기보다 오히려 그 본문 을 변형시켜서 자신들에게 적용하기도 한다. 바로 2장 28절에서 “이후에”를 “마지막날에”(ευ ται εσχαται ημεραι)로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같은 시대 유대인들의 기계적인 구약 인용과 적용과 비교해볼 때 베드로의 태도는 사뭇 독창적이다. 베드로는 이미 일찍이 요엘 선지자가 대망만 하였던 그 종말론적인 성령이 부어진 성취의 시대에 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역과 그리고 부활하신 그의 인격과 사역을 해명하는 권위 있는 복음 전도자로 등장한다.(행2:14-36)

이처럼 누가에게 있어서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은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사건과 똑같이 구원 역사적 성격을 지닌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성령이 오셨을 때 예수님은 메시아의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시대를 연 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위해 약속된 그 성령을 파송 하셔서 교회의 시대를 여셨다는 것이다.(행2:33) 따라서 우리는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진정한 의의를 성령이 오신 강도나 양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누가가 강조하고 있는 구원 역사적 성격에서 찾아야 한다. 이미 앞서 지적한 바가 있지만 사도행전에서 누가의 본문 그 자체나 그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부터 다양하게 언급되는 성령강림의 차이점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누가는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오신 성령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오신 성령이나 고넬료 가정에 오신 성령과 에베소 제자들에게 오신 성령을 그 질과 양 에 있어서 전혀 차이점을 두는 것 같지 않다. 차이점이 있다면 오순절의 성령강림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구원 역사적 성격이다.

 

미래의 연구와 관련하여

이상에서 필자가 강조한 내용은 누가복음은 물론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여러 성령강림사건을 우리가 답습해야할 모델로 삼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 문제는 좀더 연구가 되어야 하겠지만 복음이나 사도행전에 있어서 누가는 “우리가 어떻게 성령 세례를 받을 것인가? 성령 세례의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씨름한 것 같지도 않고 그것에 대한 통일된 답변도 제시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누가의 주된 관심은 예수님과 성령 교회와 예수님 교회와 성령의 문제와 관련된 구원의 역사적 의미에 있는 것 같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성령이 오심으로 성령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모든 메시아 사역을 그 완성에까지 이끌어 가신 것처럼 오순절에 오신 성령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모든 교회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교회에 뿐만 아니라, 복음이 종교와 국경과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을 때마다 특별히 성령강림의 사건을 두고 있는 것은 사도행전으로부터 우리가 다양한 교리적 체계나 신앙인의 모델을 탐구하려는 것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누가의 관점에 돌아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전파되어져 가는 과정에(행1:8) 있어서 성령이 주도적인 위치에서 어떻게 사도들과 교회를 이끌어갔는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성령론 문제와 관련하여 바울이나 요한의 눈을 가지고 누가를 해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문제 역시 더 탐구되어야 하겠지만, 팔자가 보기에 바울과 요한은 제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 이어 요한은 요한으로 바울은 바울로 보는 연구가 계속 되어져야 한다. 바울과 누가의 차이점 중 한가지만 예를 들면, 누가에게 있어서는 교회 확장과 관련된 성령의 외부적 사역이 강조되고 있다고 한다면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크리스천을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가는 성령의 내면적 사역이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계속해서 오시는 성령에 초점이 주어져있는 반면에 바울은 성도 안에 거주하고 있는 성령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누가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점진과정의 관점에서 성령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고 한다면 바울에게 있어서는 기독론과 교회론의 관점에서 성령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서로의 관점과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바울은 바울로, 누가는 누가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체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있은 다음 비로소 전체의 통일성을 찾는 연구를 해야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무와 숲을 다같이 보아야 하겠지만 성경 연구에 있어서는 먼저 나무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이 논문을 먼저 읽고 유익한 논편을 해준 몇몇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두 가지 점에서만 간단히 해명 하고자 한다. 첫째, 이 글이 교의학을 가르치고 있는 분들을 간접적으로 비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필자의 의도가 아니다. 이 글에서 문제삼는 것은 성경을 먼저 주경학적으로 접근하기 보다 오히려 조직신학적으로 혹은 교의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론 그 자체이지 주경학자와 교의학자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교의학자이면서도 주경학자보다 학문적으로 더 깊이 있는 주경학적 접근을 할 수 있는 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그와 반대로 주경학자이면서 오히려 교의학자보다 더 성경을 조직신학적으로 접근하는 분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성경을 주경학자만의 전유물로 생각한다거나 주경학자만이 성경을 바르게 본다는 중세기적 논리는 있을 수도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법과 그 열매이지 소속이나 직책이 아니지 않는가!

 

둘째, 필자는 글이 성경의 영감과 계시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분들에게 당혹감을 줄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여기서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차후에 “성경 영감문제 신약연구”라는 제목 하에 이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취급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여기서 몇 마디 요점만 언급한다면 복음서나 사도행전 혹은 서신들을 신약 저자들의 목회적, 선교적, 신학적 작품으로 보고 그러한 관점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과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 곧 성령의 작품으로 보고 접근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이요, 그것이 바로 성경의 유기적 영감의 특성이요,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의도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인격처럼 성경의 신인 요소는 불가분리의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우리 신학은 이것을 분리시켜 한 면에만 치우쳐온 감이 없지 않다. 소위 보수적인 입장의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의 인적인 면보다 오히려 신적인 면에 치중하여 전체를 보려고 했고, 반면에 진보주의 입장의 학자들은 예수님과 성경의 신적인 면은 무시하고 인적인 면에만 치중해서 전체를 보려고 했다. 그래서 두 입장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생기게 되었고 자기 입장만을 절대화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점에서 필자는 진보주의자들이 이제 방향을 바꾸어 예수님과 성경의 신적인 면에 새로운 관을 기울여야 하는 것과 똑같이 보수주의자들도 이제 예수님과 성경의 인적인 면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할 것으로 본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인 연구가 진보주의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가장 엄정하고 가장 높은 수준의 성경 영감과 신적인 권위를 믿으면서 동시에 성경에 대한 가장 높은 수주의 학문적 열매들을 산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인적 요소 중심의 예수님과 성경 연구는 사실상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절름발이임을 깨달아 학문적인 오만의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가장 신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인적이며 가장 학문적인 동시에 가장 경건할 수 있는 일이 왜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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