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과 설교
(서명범 목사)
A. 서 론
설교에 대한 인식은 그의 설교 사역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설교자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자기 인식도 설교자로서의 자세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에 대한 인식은 그의 설교 사역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을 것이며 목회자로서의 자기 인식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목회자요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살펴보면서 칼빈이 인식한 설교와 설교자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의 실제 설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은 종교 개혁 당시 교회의 개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인물임엔 틀림없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와 신구약 주석을 통해 신학자로서 주석가로서 널리 알려 졌다. 그리고 이 문서들을 통해 종교 개혁의 큰 일들을 이루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설교자로서의 칼빈보다는 신학자요 주석가요 행정가로서의 칼빈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 불구하고 그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사역은 바로 그의 설교 사역이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보통 격주로, 주일에 두차례(신약과 시편에 관하여) 그리고 주 중에는 매일 설교를 했다. 그는 불어로 설교했다.
그 자신의 시대에나 그가 고인이 된 이후 수십년 동안, ‘기독교 강요’가 인기를 얻었던 것도 그의 설교 때문이었다. 목회자가 없는 교회에서는 자주 그의 설교를 강단에서 낭독하곤 했다. 이렇게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그의 사역의 중심에 있었다.
우리는 설교없는 종교 개혁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종교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입”이 되어 종교 개혁의 큰 일을 수종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의 시대와 매우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따라서 “과연 당시의 설교 행태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와 문화는 바뀌어도 전혀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타락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여전히 진리며 인간은 여전히 타락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당시나 오늘이나 본질상 변화된 것은 없다.
우리가 칼빈의 설교를 살피려는 것은 그 설교를 모방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칼빈이 설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으며 설교자로서 그는 무엇을 말했는가를 알아 오늘날 우리의 설교에 대한 자세에 도전을 삼고 성경적 칼빈주의적 설교로 돌아가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당시의 말씀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그 말씀의 사역자로서 헌신했던 한 시대의 개혁자를 통해 우리의 자세를 되돌아 보고자 함이다.
최근 칼빈의 설교에 대한 연구가 확산 되면서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이해 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국내에도 칼빈의 설교집이 속속 출판 됨으로써 설교자로서의 칼빈의 면모를 다시 대할 수 있게 됨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B. 본 론
1. 칼빈의 설교자(목회자) 직분에 대한 인식
1) 하나님을 대표하는 설교자
우리는 칼빈의 설교의 연구에 앞서 교회의 직분자인 목사에 대한 칼빈의 생각을 알아보고자 한다. 설교자에 대한 칼빈의 인식은 그의 설교에 대한 인식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교회의 권위에 있어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다스리시는 유일한 권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 강요 4권3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를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고 전제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눈에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은 그의 이 권위를 사람들의 봉사를 통해 이루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게 우리들 중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마26:11),사람들의 봉사를 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말로 명백하게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직분은 최고의 영광스런 직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먼저는 우리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심인데 사람들을 택하여 자기의 사자(고후5:20)가 되게 하시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시며 하나님을 대표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사람들의 겸손을 위한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훍에서 나온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 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증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4: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임명된 한 사람의 목사를 통해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제자로 부름받은 많은 사람들이 한 입으로 공통된 교훈을 받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일을 통해 교회를 한 끈으로 묶으셔서 연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2) 사도의 계승자인 설교자
그리고 칼빈은 “현대의 교사들(오늘날의 주일학교 교사가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맡은 사람으로서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 세운 직분 혹 신학교수들)은 고대의 선지자에(듣지 못한 새로운 복음을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목사(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제자 훈련과 성례를 집행하며 경고와 권면하는 일을 하며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직분)는 사도에 해당한다”고 했다(기독교 강요 4권 3장 5).
그는‘“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인데 교회의 사역자들은 주께서 자기의 사자로서 파견하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나 12사도와는 구별되는 직분(듣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전하는 사명에 있어서)이라고 했다.
목사가 사도와 같은 책임(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하고)을 맡았다는 것은, 주님이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 사함을 얻게 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오늘날의 목사들이 동일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기독교 강요 4권 3장 5).
그리고 칼빈은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한 말이 오늘날의 목사에게도 해당된다’고 하였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9:16-17).(기독교 강요 4권 3장 5).
사도는 전 세계를 위해 활동했지만 목사는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 해야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사도와 동일한 직분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눅10:16)라는 말씀을 목사의 말씀 사역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목사에 대한 고등한 관점이 그를 말씀 사역에 더욱 정진토록 했던 것이다.
2. 설교에 대한 칼빈의 인식
이러한 칼빈의 설교자에 대한 관점은 그의 설교에 대해서도 고등한 관점을 갖고 행하게 했다.
오늘날 설교를 마치 “도적적 훈화”나 교장 선생님의 “지당한 말씀” 정도로 생각하는 일부의 사람들은 이런 칼빈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
칼빈은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고 선언했다.
그는 Person(인격)과 Funtion(기능)을 구분하였다. 그는 기독교 강요 4권3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말은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입을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행하시는가?
칼빈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먼저는 우리에 대한 자기의 관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택하여 자기의 사자(고후5:20)가 되게 하시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시며 하나님을 대표하게 하셔서 인간들에 대한 자기의 관심(사랑)을 보여주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사람들의 겸손을 위한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훍에서 나온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 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증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4: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목적에 의해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것이다.(기독교 강요 4권 3장 1)
그래서 그는 자기도 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됨을 이렇게 말했다.
“말은 내가 하지만 교육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도 내가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만일 저 높은 곳으로 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 (=복음을 듣고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이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나를 유익되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소리는 허공에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설교는)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라고 했던것이다.
2) 성례전의 신비와 동일한 신비로운 설교
그러나 칼빈은 설교자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칼빈은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동안 성령께서 계속 감동할 여지가 있어야 함을 확고히 믿고 있었다.
칼빈은 (딤후1장 9,10절)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오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거나 역사함이 없이는 또는 믿음으로 오지 않는다면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다.
그러므로 청중의 가슴 속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조명과 믿음의 수반없이는 말씀의 성실한 설교일찌라도 청중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라”는 성령의 내적사역을 강조하는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설교는 성령의 권능으로써만 능력을 부여 받을 수 있을 뿐이며, 외적인 말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효력도 청중에게 미칠수 없다” 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능력이 말씀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주이시고 구주이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설교자는 설교에 앞서 기도로써 준비하여 말씀을 전달하는 그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설교가 그 자체로서는 듣는 이들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도 없음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성경은 회개의 은사도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이 없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회심의 역사, 구속과 영생의 기쁨이 죄인들의 영혼에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설교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성령의 권능의 결과인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칼빈은 성령의 감동을 설교의 효력에 결정적 요인으로 말했다.
그러나 칼빈은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은 기록된 성경과 동등하다”고 주장한 루터와는 달랐다.
또한 쯔빙글리나 재침례파와 같이 설교를 단순히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로 보지도 않았다.
칼빈은 성경을 성령의 독특한 영감을 통해 기록된 형태로 주어진 하나님의 객관적 말씀으로 믿었다. 그리고 설교는 기록된 말씀을 풀어 해석하는 것으로써만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칼빈은 객관적 계시로서의 기록된 성경과 기록된 성경을 풀어 해석하며 적용하는 설교와는 구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령께서 설교자와 청중들을 다 감동하실 때만이 설교가 구속적(救贖的)인 효과를 가진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객관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설교 할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록된 말씀과 같은 권위로 임하고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례전에 관한 그의 교리와도 통하는 견해인 것이다.
즉 성례전에서 주님의 은총이 임하듯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이다.
성례전의 떡과 포도즙은 객관적 실체이다. 그것은 떡과 포도즙 그대로 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무 효력이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주님이 약속하신 실재(예수님의 피와 살)를 먹게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에게 효력이 나타난다.
이와같이 설교자의 설교를 청중이 믿음으로 받을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약속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이 말씀이 믿는 자의 속에서 역사한다는 것이다.(살전2:13).
설교는 기계적으로 효력을 발(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 효력을 발(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령의 감동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어떤 설교도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신비로운 감동하심의 역사로 말씀을 사용하실 때 그 설교는 효과적이 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성례에 참예하는 자들이 주님이 약속하신 살과 피를 먹음같이 믿음으로 설교자의 말씀 듣는 자가 주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례(聖禮)와 설교가 기록된 말씀에 의존해야 하나, 둘다 성령의 은혜로운 임재로 채워질 때에만 실재적 은혜의 방편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 구원과 심판의 이중 음성의 설교
칼빈에 의하면 설교에는 두 가지 목소리 (이중음성)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온유한 음성이고, 둘째는 이리와 도둑을 쫓는 노성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사야 주석 55:11에서 “말씀이 신자들을 구원하는데에 효과적인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증거의 역할은 죄인들에게 반발심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까지 반발심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과를 나타내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한 향기가 이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로 다른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 역사함과 같은 의미(고전2:15-16)인 것이다.
실제로 칼빈은 자신에 대한 많은 비난과 반대자들을 극복해야 했다.
베자(Beza)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제네바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르는 개들을 “칼빈”(Calvin)이라고 부름으로써 개혁자에 대한 자신의 경멸감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는가 하면, 혹자는 칼빈의 이름을 줄여 가인(Cai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 칼빈에 대한 증오심”을 핑계삼아 성찬에의 참여를 중단하였다고 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무익하게 된다... 만족할 만한 복음설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라는 말만이 필요하다. 선하고 진실한 목자는 성경을 간신히 해설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덕을 주기 위하여 진지하고 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는 어려움이 많아도 진실해야 됨을 가르친다. 무엇이 선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청중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비록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눈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말하지 않을지라도, 복음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말미암아 설교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을 듣는 자가 곧 내 말을 듣는 자라고 말하셨습니다. 모든 교직자가 주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야 된다는 것을 배웁시다. 그리고 우리자신은 그 설교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또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 듣기를 멀리하는 자들은 마치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힘을 거절하고 또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멀리 뿌리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그의 구속적 간섭을 거절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복종하지 않으려 한 "여러 사람들의 반역"을 이야기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사역을 옹호하였다.
"아무것도 아닌 이 버릇없는 인간들은 자기네들이 잘못을 범하였을 때 그 사실을 자기들에게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 들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곧 '당신들이 우리에게 명령할 순 없어!'라고. 그렇다면 하나님도 않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밀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임하신 때문입니다...." "누구든,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쪽으로 가야한다는 식으로 명령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전념해 가르치기란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한 분 주님이 계시고 그 분은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이름으로 여기 서있는 것도 아니고 그 무엇도 나를 통해 전진시키기 원치 않으며, 내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올 생각도 없으며 오직 내가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반박하는 자들이 있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복종해야 하며, 모든 거만한 것들이 꺽여야만 하고 또 큰 자나 작은 자 할 것 없이 자신이 복종해야 할 이에게 주둥이를 내밀거나 눈울 치켜 뜨는 피조물이 있어서는 않됩니다."고하여 설교를 통해 다스리시고 명령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항해서는 않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복음의 제시는 꾸밈없이 용기있게 제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과 전쟁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왜곡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할 내가 악을 허용하고자 한다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같은 일이 정당하게 되거나 또는 우리가 이런 것을 구실로 이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무리 이것 저것 갖다 붙여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매우 꾸짖게 됩니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 20장 18절 이하를 설교하면서 “...나는 이처럼 내가 내 양심에 따라 해야 할 바를 수행하도록 사람들이 허락지 않든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내게는 전혀 합법적이지 않는 일을 하라고 사람들이 날 강요하든 간에 나는 내가 해야할 일 이외의 것을 넘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자유로이 설교하고 또 여러분에게 봉사할 수 있는 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이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는 그의 욥기33:1-7 설교에서 말씀 사역자와 청중에 대해 이렇게 설교했다.
“...하나님을 따라 곧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에 시선을 돌려서는 안됩니다. 만일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거나 칭찬을 받는 일에 좌우된다면 우리에게 선한 원리가 하나도 없을 것이고, 결국 고통 밖에는 당할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문제가 될 때에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만일 피조물에 불과한 인생들을 보고서 두려워져 마땅히 말해야 할 바대로 자유롭게 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처사가 아닐까요? 어떤 세상 군왕이 한 사람을 파송하였는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비웃고 그 임무를 마땅히 행하지 못하게 해도 가만히 있으며, 자기가 위임 맡은 메시지를 감히 전하지 않고 있다면, 그 겁장이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먼지에 불과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당신을 섬기도록 받아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영예로운 임무를 주시고, 모든 권위와 경외심을 옷입혀 그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무섭게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왜곡시켰다 합시다. 아니면 그 하나님의 진리가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위를 더 이상 갖지 못하게 그 진리를 전한다고 합시다. 그만큼 하나님의 질책을 받을만한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목에서 두 가지의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목회자로 가르침의 직무를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은 결연한 자세를 가지고 예레미야가 말하듯이 어느 것에도 관여치 말고 싸우는 날의 장수처럼 담대해야 합니다(참조,예레미야 15:20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왜냐하면 세상에는 말할 수 없이 강퍅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망각하여 자기들을 창조했고 조성하신 하나님께 복종할 수 없는 때, 도저히 남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관성을 지니고 우리의 의무를 감당할 때도, 적수를 만나거나 불쾌함을 맛보게 될 것임을 당연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적과 불쾌함을 만나더라도 결코 믿음을 굽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목회자로 장립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그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또한 여기서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인 교훈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우리 죄를 책망하는 것을 듣고 오만한 자세를 취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노를 격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등을 가볍게 문질러 주는 것을 가지고 노를 격발할 정도로 분개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해야 마땅한 것처럼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거나 주제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속에 어떤 선한 기질이 있는 체 하면서 우리를 아껴달라고 요구해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전파된 것은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들을 내맡기게 함이기 때문입니다....우리는 각자 누구나 다 그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왕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마땅히 하나님의 진리가 전파될 때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압시다. 왜 그렇습니까? 왕들이라 할지라도 그 점을 의식해야만 함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설교하는 그 사람이 어떠한 주인, 어떠한 상전으로부터 보냄 받았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복종을 받아야 하고 온 인류를 지배하는 주권적인 통치권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까불댄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더러 본성을 바꾸시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낮추라고 덤벼드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마귀적인 무모함이 아닙니까? 그러니 모든 겸손과 겸비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의 순종이 이러한 방면에서 시험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응당 그래야 하듯이 어느 누구도 그러한 시금석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모든 허물이 곧바로 드러나고야 맙니다.
이렇게 칼빈은 설교자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설교자 자신은 그 말씀을 변개할 수 없고 청중은 그 말씀을 거부해선 않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교인들의 취미와 즐거움에 영합하여 자기 인기를 위해 온전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설교자들은 이런 칼빈의 음성을 들어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의 설교를 비판이나 하고 경청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거절하는 자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3. 칼빈의 설교 연구
칼빈은 이런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설교 사역을 이루어 갔다.
그럼 칼빈의 설교 내용의 특징은 어떠한가?
1) 성경을 그 본래의 의미를 찿아 간결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종교 개혁 초기교회의 사역자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철저히 아는 것을 제일차적인 임무로 삼았다. 말씀을 전하는 그들의 태도 자체가 이 일을 불가피하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제일차적 참고 자료는 성경이었다. 그리고 성
경 강화가 그들의 설교였다.
칼빈도 예외일 수 없었다. 칼빈은 그의 주석의 원칙을 명료성과 간결성에 두었듯이 설교에서도 이 원칙을 따르려 노력했다.
칼빈의 설교집을 출판한 스위스의 인쇄업자인 콘라드 다비우스는 칼빈의 설교집 머릿글을 통해 설교에 대한 그의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바디우스는 칼빈의 설교집(1557년 판)을 내면서 자신의 설교에 대한 관점이 칼빈과 일치함을 표명했다.
바디우스는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의 교회를 풍요롭게 하시려고 사용하신 훌륭한 선물들 가운데서, 가장 유용하고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설교라는 은사이다. 이 은사는 성경의 내용이 가지는 참되고 본래적인 의미(Very et neturel sens)를 따라 그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또한 그 뜻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순전하게 설명하기 위한 목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설교자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 말씀을 자기 자신의 시대에 바르게 적용하는 방법을 깨닫기 위한 목적에서 존재한다”
바디우스는 칼빈의 설교야 말로 이런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설교임을 칼빈의 설교집 머릿글에 밝혀놓은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출판)을 통하여, 즉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 우리들에게 말씀의 꼴을 공급해 주고 있는 푸른 목장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나라에 있는 자신의 양떼들을 위한 목자들로 임명하신 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단순하고, 순수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어떠한 두려움과 열심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선포되는가를 알게함으로써 그들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바디우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살스러운 재담과 “세속작가들이 쓴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이야기들”을 섞어서 멋드러지게 말하는 “훌륭한 웅변가들”을 더 좋아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경건성을 잠식하는 것으로 보고있다.
바디우스의 설교관은 바로 칼빈에 의해 만족감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성경을 본래적 말씀을 각자의 시대에 단순하고 순수하게 적용시키되 관계되는 사람에게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순히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훈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도록 권고하는 것도 포함되는 것이다.
칼빈은 연속적 강해를 했기 때문에 특별한 서론이 없다. 단지 지난 번에 한 강해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는 것으로 서론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설교할 때 미리 정한 어떤 사상의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다만 본문의 말씀이 놓여진 순서를 따라서만 해 나갔다. 그래서 어떤 주제나 제목을 잡지 않았다.
욥기 강해 설교(욥38:1-4)의 설교를 살펴보면 “우리는 앞에서 엘리후 자신도 죽을 인생이라는 걸 단언한 것이 욥을 책망키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엘리후가 그렇게 말한 것은 욥으로 하여금 너무 높은 권세로 취급받는다는 불평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 그의 설교를 시작하고 있다. 그의 서론이 그의 설교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는 방식(사람들을 방편으로 사용하시어 말씀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하고 명료하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보다 더 자유롭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려 함이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분량 밖에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전혀 회개의 가망이 없이 굳어지고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리지 않는 자에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시기 위해 위엄을 입고 서신다고 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하나님께 충성을 드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을 이렇게 강해해 갔다.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임재의 표증을 욥에게 보여주시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하여 폭풍같이 자신을 내 보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뇌성을 타신다는 말씀을 자주 합니다. 자기를 안 믿는 미친 자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실 때 말입니다. 그러나 특히 여기서는 그 장소와 상황을 알아 보아야 합니다. 욥은 아직 완전히 유순한 자세를 가지지 않고 있는 만큼 하나님께서 욥에게 무서운 권세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이 까닭에 욥으로 하여금 주인(主人)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천둥을 치시며 폭풍 속에서 운행하신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패역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무섭게 드러내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근하게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 수 있기만을 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꺼이 복종할 때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능한한 인정어리게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악함이 있음을 보시면 처음부터 우리를 납작하게 만드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멸시를 받거나 아니면 그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전혀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반포하실 때 천둥으로 두렵게 하며, 나팔 소리가 들리게 하며, 모든 사람들이 그걸 듣고 무서워 떨게끔 하신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모두 죽고 엎드러지겠나이다”라고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째서 그처럼 온 땅을 요동케 하셨고 그의 목소리로 무섭게 만드셨습니까? 백성들을 철저하게 견책하사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하나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라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오히려 백성들의 거만함을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표적이 함께 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엎드리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폭풍가운데 욥에게 말씀하신 것이 쓸데없지 않았음을 잘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온 힘을 쏟았던 그처럼 거룩한 사람에게도 그런 식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면 우리야 어떠하겠습니까? 욥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 봅시다.욥은 마치 천사적인 거룩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인물입니다... 그가 인간으로서는 가장 극한 고난을 받으며, 불만을 토로했고, 과격한 진술을 했지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원리만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부분적으로 넘어지기는 했지만 보편적으로 그 원리는 갖고 있었습니다....
... 이제 우리는 다음 말씀으로 넘어가 봅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 지니라” 먼저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비웃음 어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욥이 패역한 것 만큼 말입니다. 욥이 생각할 때는 이치를 통해서 자기의 입장을 아뢰어 지기가 이길 것 같이 느꼈으니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는 누구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누구인지를 보여줄 때, 그것은 우리의 모든 거만을 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사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신들을 자랑합니다. 자기들이 어떤 존귀함이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잘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게서는 그들 속에서 악취만을 맡으실 뿐이라 그들을 슬어 버리십니다. ...비록 우리가 그처럼 어리석도, 우리 자신이 어던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함으로 자랑하는 주제넘음에 빠진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을 비웃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을 잃도록 하기 위해 단 한마디 말씀이면 족합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사람이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은 우리에게서 모든 자랑할 기회를 한꺼번에 박탈해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한 방울의 선도 없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 자신을 앞세워 내세울 만한 어떠한 경우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라고 덧붙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네가 갖고 싶은 것으로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마치 거인인 양 스스로 생각하며, 잘 차려입고, 네가 할 수 있는 한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장을 해 보거라. 그런다 할지라도 네가 결국 그것을 통해서 무슨 유익을 얻겠느냐? 이 불쌍한 피조물아, 내가 너를 대적할 것이면 네가 스스로 버틸 한 가지 길이라도 생각해 낼 수 있겠느냐? 네가 무엇을 가졌느냐?”
....하나님께서 이러한 차원에서 말씀하실 때 한 두사람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인류 전체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까지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영광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수치와 혼미스러운 것 밖에 아님을 알고서 말입니다. “너는 누구냐?”라는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사도 바울이 다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과 같습니다.“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하나님께서 어째서 자신이 창조한 자들을 버릴 것인가? 어째서 까닭없이 하나님은 사람마다 차별하시는가? 이 사람은 구원받도록 부르시고, 저 사람은 버려 두시니 그게 어찌 이치에 합당한 일인가?”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논박할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의 도전을 사도바울은 그렇게 제압합니다.....사도 바울이 하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너의 인생이여, 너는 누구냐? 네가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려 드느냐?” “너는 누구냐?”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요점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각자 거만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뿔사! 너는 누구냐?”...
자 이제 특별하게 “대장부 처럼 허리를 묶으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은 온 세상이 있는 힘을 다해 무장하고 과시한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 욥이여 스스로 무장하고 거인처럼 차려 입거라. 아니면, 이 세상에서 가장 날센 사람처럼 차려 입거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욥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을 훨씬 더 분명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또한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선언하시는 것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밀한 것에 대한 생각 다음에는, 분명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모든 두려움을 진지하게 가지고 나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치’란 말을 통해서 욥이 말한 높은 것들을 나타내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자, 이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높은 비밀들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경외심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그러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순전하신 선하심을 통하여 그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실 의향을 가지지 않는 한,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알아내려고 주제 넘게 굴어서는 안됩니다....그러면 어째서 그러한 논란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하나님을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술 취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민활한 사람들이고, 성경을 가장 많이 체험한 삶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마당히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런 방식으로 성경이 기록된 순서에 따라 설교해 나갔다. 그래서 한 설교에 여러 개념들이 설명되고 있다. 그는 성경의 구절 구절을 기록된 순서대로 강론하며 그때 그때 적용을 했던 것이다. 그는 흔히 대지를 구분하는 식으로 설교하지 않았다. 그는 본문의 흐름에 따라 본문의 순서대로 설교해 나갔다. 그리고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고 설명하여 성도들의 삶에 적용토록 호소했다.
2) 칼빈은 성경 중심의 설교를 했다.
오늘날 흔히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신문” 들고 설교하라고 말한다. 어떤 때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성경을 선택하여 설교하기도 한다. 이 시대의 상황과 성경 말씀에 의한 조명은 무시할 수 없는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현대 프로테스탄티즘에 있어서는, 설교학의 주요 원천이 성경이나 신조가 아닌 시구(詩句)나 매일 발행되는 신문이 되어가고 있다. 국제적 회합에 대한 논문들이나 잇슈(issue)가 설교의 자원이 되기도 한다. 비록 이런 일이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의 두드러진 특징이긴 하지만, 보수주의자들도 그런 기풍에 젖어들고 있다.
종교개혁 초기의 사역자들은 성경 연구를 철저히 하여 제일차적 참고자료는 성경이었다. 그후 17세기엔 설교자들의 주 자원이 교의와 신조였다. 성경이 무시된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수사술(修辭術)이 설교의 구조를 장악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성경이나 신조가 아닌 당시의 시사성 있는 문제나 일간 신문, 잡지등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상황에 따라 설교하지 않았다. 그는 소위 오늘날 흔히 말하는 상황에 따른 설교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절기에 대한 설교도 거의 찿아볼 수 없다.
그가 쫓겨났다가(스트라스부르그에서 사역함) 제네바로 다시 돌아온 날 그는 그의 설교에서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서나 자신의 처지와 심경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 기대했으나 그는 쫓겨나던 당시의 본문을 가지고 계속하여 강해해 나갔던 것이다.
칼빈은 이 일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설교하기 위해 회중 앞으로 갔습니다. 각자는 큰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분명 기다렸던 사건들에 대한 언급은 완전히 침묵 속으로 흘러 보냈고, 나는 나의 사역의 원리들을 간단하게 발표했으며, 그 다음, 나를 부추겼던 신앙과 공명정대함을 상기 시켰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다음 나는 강해할 본문을 택했는데 그것은 내가 전에(추방 전에) 멈추었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통해 내가 가르치는 임무를 그만 두었었다기 보다는 잠시 중단했었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성경을 최고의 본문으로 삼고 상황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대와 상황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죄인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상황이 설교를 좌우하는 경향이 있으나 칼빈은 성경이 상황을 극복해 가도록 했던 것이다.
3) 칼빈은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했다.
또한, 칼빈의 설교는 항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섭리를 확신하는 가운데 전달되어 졌다. 하나님은 설교자를 위한 권위요 동기일 뿐 아니라, 모든 설교의 자원과 대상이요, 모든 설교의 중심적인 요점이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성삼위적인 충만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매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신다. 그는 신명(神名)을 칭할 때 ‘하나님’이라는 포괄적인 칭호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였다.
루터는 매우 의도적으로 성경의 매 대목을 강해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았다. 루터가 그리스도를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설교한 반면에, 칼빈은 성삼위 구속주 하나님을 보다 더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설교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칼빈은 복음을 제시할 때 하나님 중심적으로 복음을 제시했다.
칼빈은 교회를 중심에 삼고 있는 로마교회 체계와 사람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자유 사상가들의 철학을 배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성삼위의 제 2격위나 제3격위에만 촛점을 맞추어 강조하려는 종파들의 잘못된 경향을 논박할 의도도 갖고 있었다.
칼빈은 성령을 중심삼는 종파는 치명적인 주관주의로 빠져들어가는 제일보를 내디딘 것이라고 확신한 것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에 삼고 있는 것은 휴머니즘에 한 발짝 더 가까와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칼빈에게 있어서 모든 영광스로운 충만함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은 모든 설교안(說敎案)의 근원이요 꽃이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중심의 설교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강조에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교리는 마음의 주림을 채워주는데 있어서 끈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상처를 싸매는 붕대였다. 칼빈의 사상에 있어서 섭리와 보전의 교리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지를 주목하는 것은 흥미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구별되어 있으면서도, 자주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데 함께 처방되는 일이 흔하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통일된 과정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섭리적이고 구원론적이고, 자연적이고 영적으로 통일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 칼빈은 창조와 구속, 곧 성삼위 하나님 안에 포용되어 있는 창조와 구속 속에서 드러난 그 섭리를 힘 있게 전하는 설교자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의 궁극적인 차원은 계시된 뜻이라기 보다는 계시되지 아니한 뜻이다. 이러한 관점이 드러나지 아니한 칼빈의 설교는 거의 없다.
칼빈의 목회신학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는 것들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다루시는 모든 행사의 모든 궁극적 비밀을 역시 강조하고 있다. 그는 고통 당하는 심령들에게 주권적인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게 가지고 계신 비밀스러운 목적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처럼 좋은 위로는 없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그의 욥기34:21-26의 설교에서 이렇게 설교한다.“...우리가 이미 논의한 진술 바로 다음에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완력으로 그러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님을 덧 붙여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큰 징계가 주어져, 능한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쓰러지고 나라가 적에게 정복당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시행하시는 까닭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게서 그 일을 통해서 공의를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냉혹하게 처리하시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지각할 수 없지만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것을 아는 지식을 활용하여, 여기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만족하게 여겨야 합니다. ...어째서 우리가 하나님의 판단에 대하여 변론하거나, 그 판단이 우리에게 이상하게 보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길을 판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에 동조해야 합니다. 어째서 그러시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행사는 언제나 정당하고 선한 이유를 기초하고 있음을 인식합시다.”
또한 칼빈은 (욥기1:20-22)의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고난 받을 때 까닭없이 일어난다고 생각해서는 않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도록 역사하심을 확신할 은헤를 주십사고 기도합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환난을 잘 참아내게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게 만들것입니다...” 라고 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믿고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가 안식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맹목적인 절망을 꾸짖었다. 삶을 의미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마치 밝혀지지 않은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온전히 다 이해할 것처럼 생각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에 대해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도가 엿보이는 곳에선 승리에 차서 그 하나님의 의도를 펼쳐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당하는 여러가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풀려고 애를 쓰거나, 그들의 슬픔을 완벽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가 회중들에게 목회자로서 주었던 위로는 결국 한 가지만으로 충분하였다. 다시 말하면 주권적인 하나님의 감추어진 은혜였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신적 난해성(難解性)에 대해 하나님 중심으로 강조하는 것과 함께 선택교리에 대한 강조가 그의 설교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선택은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광범위하고 사활적인 요점이다. 그것은 하나의 신학적 파편이거나, 성경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또한 본문이 요구할 때만 간헐적으로 언급된 것도 아니다. 모든 설교에서 이 선택교리는 은연 중에 깔려있고, 하나의 분명한 선(善)으로 자주 힘 있게 두드러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예정론의 입장에서 모든 거짓된 교리를 논박하는 경향을 띠고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로마교회의 근본적 오류는 믿음으로 의롭다하는 문제였던 반면에, 칼빈에게 있어서 로마교회의 근본적 오류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주도권을 준다는 점이었다. 셀베투스(Servtus)로부터 재침례파등, 칼빈에게 정죄당한 모든 사람들은, 다른 실수는 고사하고라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고 선택을 거부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것이 결국에는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이 기각당한 것이다.
칼빈이 선택을 설교한 방식,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다. 그것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이 정의하는 것과 같다. 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사람의 ‘죄와 비참’에 대한 ‘오직 유일한 위로’로 전한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추상적이거나 교의학의 한 페이지로 장식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이 은혜와 떨어진 것은 더욱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주권적 은혜가 모든 설교의 테마였던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욥의 고난도 주권적 은혜의 한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칼빈은 (욥기5:17-18) 설교에서 “...언뜻 보기에 하나님께서 상처를 내 놓고 그 상처를 치료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평안하고 풍부한 자리에 앉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실까?....여기서 우리는 이중적 은혜를 엿보게 됩니다...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게 하실 때 우리의 유익을 위하시고, 우리로 회개케 하시며,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에서마저 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그것이 첫번째 은혜입니다. 그다음에 두번째 은혜가 여기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내신 상처를 싸매시고 치료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언급한 바 입니다(고전10:1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허락지 아니하시며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으로 유익을 얻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유익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해 나갔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그의 설교의 날줄과 씨줄이었다.
4) 칼빈은 문답을 사용하여 청중의 이해를 돕는 교육적 설교를 했다.
칼빈은 그의 설교에서 자주 질문을 사용한다. “그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질문하고 그리고 답하면서 그의 강해를 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설교의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질문을 통해 문제를 좀더 확대해 나가거나 심층적으로 다루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청중이 알아듣고 이해하기 까지 반복적인 설명을 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말하면” “왜냐하면” “좀더 설명하면” “바꾸어 말하면” 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따라서 문자로 기록된 칼빈의 설교들을 보면, 흔히 한 가지 요점을 전개시켰다가 다시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확인하느라고 되돌아 오곤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것은 어떤 요점들을 청중들이 이해하기 까지 그 요점을 떠나지 않는 지극한 섬세함을 보이는 대목들인 것이다. 그는 그의 설교에서 재빨리 눈치채지 못하게 이 일을 다루어 가고 있다. 그는 이렇게 청중의 이해를 돕고자 그의 재능을 다 사용하기에 힘썼다.
예를 들면, 칼빈은 그의 십계명 설교(신5:21)에서 죄의 깊이와 멸망케하는 성격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거듭 거듭 설명하고 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단지 하나, 혹은 둘, 아니면 세 가지 정도의 죄만을 지었습니까? 정확히 말해서 일단 우리가 지은 죄의 수를 세기로 한다면, 우리 모두는 지옥에 던지우는 것이 마땅하며, 우리가 당혹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여기에서 우리들이 헤아린 수십만 가지의 죄들은 실상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저지른 죄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죄에는 끝이 없고 또 그것을 헤아릴 만한 방법 또한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한량없으신 긍휼로써 우리를 받아주심으로 말미암아, 마치 우리가 율법 전체를 다 이루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완전 무결한 상태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들을 그렇게 의로운 자들로 여기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므로, 우리들은 주님을 믿는 그 믿음에 의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깨달아야 하겠으며, 아울러 주님을 향하여, “주여, 우리의 구원이 당신의 순전하신 선하심과 은총 가운데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영광을 그 분께 돌려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의 무수한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또한 우리를 자신의 의의 옷으로 다시 입혀주시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가 우리들의 연약한 부분을 얼마나 극진히 떠 받쳐 주고 계신가 하는 것을 입증해 보이시는 증거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고로 비단 우리의 욕심이 셀 수 없이 많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고, 또한 우리가 마치 거대한 산들에 의하여 파묻혀 있는 것처럼 엄청난 죄악에 묻혀 있다는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겨 줄 때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너무나 가혹하게 대하시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절망 가운데 버려두시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오히려 우리가 쓰러지더라도 지체없이 다시 일어나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까닭에 믿는자들은, 비록 자신들이 정죄된 자리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죽음의 심연에서 건지시고 또 우리들이 하나님의 순전하신 은혜 가운데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이와 같은 파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더욱이, 설사 우리들이 매일 우리의 몸 안에 수 백만의 죄가 있음을 느끼게 되더라도, 우리가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것을 밀쳐내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죄를 멀리 할 것을 권고하는 가운데, ‘너희 안에 죄가 거할 곳이 없도록 하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죄로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바꾸어 말해서, 죄가 언제나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고 했을 때, 그렇게 말하는 근본적 목적은 우리에게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 대하여 일깨워 주려는데 있으므로, 우리들에게는 죄를 상대로한 매일 매일의 전투가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으며, 이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힘과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보다 더 강건하게 해 주실 것을 그 분께 기도하면서 한층 더 뜨겁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칼빈의 자신의 청중들이 충분히 깨달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질문과 함께 다시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C. 결 론
칼빈의 설교는 성경의 충실한 해설과 적용이었다. 그의 설교는 설교자로서의 자기 인식과 설교에 대한 성경적 확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적확(適確)한 뜻을 찿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칼빈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눅10:16)라는 말씀을 목사의 말씀 사역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입이며 그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고한 신앙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또한 설교란, 성경이 충실히 그 본래의 의미를 찿아 설명 되어지고 가르쳐 질때, 하나님의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성경 강설(講說)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다. 그는 “말씀의 사역자” “말씀의 종”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의 생애를 말씀 사역에 헌신했다. 설교자의 자기 인식 없이는 설교 사역의 변혁도 없는 것이다. 설교자의 자기 인식과 설교에 대한 개혁자의 인식을 재 발견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설교사역을 새롭게 변혁시킬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불행히도 설교 사역에 대한 회의와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설교에 대한 확신이 사라져 가고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표자요 하나님의 입” 이라는 설교자의 자기 인식이 없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눅10:16)라는 말씀을 믿으려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대 일수록 개혁자 칼빈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개혁자 칼빈의 설교에 대한 확신이 오늘 우리들의 사역에 도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해 동안 제네바에서 칼빈의 동료로 활동했던 니콜라스 데 걀라르(Nicolas des Gallars)의 말을 끝으로 이 논의를 마치고자 한다. 니콜라스 데 걀라르(Nicolas des Gallars)는 칼빈의 목회활동을 다음 말로 요약했다.
“얼마나 많은 일과, 얼마나 많은 철야와 얼마나 많은 염려를 그는 감당했던가, 얼마나 날카롭게 얼마나 민감하게 그는 위험을 예견했던가, 얼마나 열심히 그는 이 위험들을 피했던가, 얼마나 신실하고 지성적으로 모든 이에게 관심을 가졌던가, 어떤 친절과 감사로 자기에게 말 걸어오는 자들을 영접했던가, 얼마나 신속히 그리고 솔직히 그는 중대한 질문을 자기에게 해 오는 자들에게 대답했던가, 사람들이 자기 앞에 내 놓는 난관과 문제들을 사적이건 공적이건 얼마나 현명하게 해결하였던가, 얼마나 부드럽게 그는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낙담하며 용기를 잃은 자를 부추겼던가, 어떤 열심으로 그는 교만한 자들과 고집불통들을 쓰러드렸던가, 그가 불행을 참아 낸 것은 얼마나 큰 영혼의 위대함인가, 그가 번영 속에서 어떤 절제로 행동했던가, 얼마나 능란하게 또 도약적으로 그가 참되고 신실한 종의 모든 의무에 전념했던가, 나는 이 모든 것을 분명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 참고 서적 *
1. 죤 칼빈, 김종흡외 3인 공역, 기독교 강요(하), 생명의 말씀사, 1989.
2. ______, 엄성옥역, 요한 칼빈 설교집(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은성, 1989.
3. ______, 이종태역, 칼빈의 설교집, 세종문화사, 1978.
4. ______, 서문 강역, 칼빈의 욥기강해(욥과 하나님), 지평서원, 1988.
5. ______, 김동현역, 칼빈의 이사야 설교, 기독교연합신문사출판국, 1992.
6. 박건택 편저, 칼빈과 설교, 도서출판 나비, 1988.
7.리챠드 스타퍼, 박건택역, 목사로서의 칼빈, 신학정론, 도서출판바라,1990.
8. 벤자민 팔리 편역, 박희석 옮김, 칼빈의 십계명 설교, 성광문화사, 1991.
9. 로날드 윌리스, 이종태역, 칼빈신학의 이해, 생명의 말씀사, 1991.
10. 죤 맥아더외, 김동완역, 강해 설교의 재발견, 생명의 말씀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