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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비둘기(dove)같은 성령

작성자바위섬|작성시간18.04.09|조회수47 목록 댓글 0

비둘기(dove)같은 성령

 본문: 마3:13-17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다가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장면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신줄 알고 예수님에게 세례 주는 것을 거절했으나 예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함당하다고 하심으로 세례를 예수님께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올라올 때 세가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 하늘이 열렸습니다.

2.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렸습니다.

3.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적극적으로 비둘기로 상징되기는 바로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물로 세례를 주었을 때입니다.


  사복음서는 모두 성령이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1:10, 마3:16, 눅3:22, 요1:32) 이처럼 성령께서 새의 형체로 나타나는 유일한 다른 예로는 창1:2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 하시니라”고 되어 있으나 원래는 운행이 “품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보금자리에서 알을 품고 있는 새의 그림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하필 성령을 다른 새나 물건으로 나타내지 아니하고 비둘기로 표현하고 비둘기의 형체로 임하였는지 비둘기의 특색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비둘기는 平和의 상징입니다.

 우리나라에 외국사절단이 방문하거나, 어떤 특별한 행사 때마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날려보냅니다. 특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지리적으로 지중해의 요지로 싸움이 많은 나라이기에 그들의 인사가 “샬롬” 즉 평화입니다.  그리고 옛날 사람들도 이나라 저나라와 전쟁을 하여서 싸움에 승리하게 되면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봉화불을 피우고, 싸움이 끝났다는 표시로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화평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것도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시켜 주시려고 오셨다 했습니다.


엡2:13-16 “이제는 전에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십이라.......


 聖靈은 화평케하시는 신이십니다. 성령을 받게되면 무슨일을 만나든지 좋게 해결하려고 힘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믿는자는 가는 곳마다 화평의 역사를 이룹니다.


 성. 프랜시스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범죄한 인생은 살기가 참으로 고달프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화목하고, 용서하고, 위로하고, 감싸주고, 동정해 주기는커녕, 서로 미워하고, 오해하여 다투고 하다가 고민한 나머지 병들고 늙어 죽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라도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야만 화평의 사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염소를 키워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이 염소란 짐승은 괜스레 자기의 뿔로 잘 싸우는데, 만일에 싸울일이 없으면 언덕을 파헤치든지 나무를 되받든지 하곤 합니다. 교회에도 평화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염소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뿔을 잘라버지 않으면 그 모난 뿔로 누구할 것 없이 잘 받습니다. 이런 못된 뿔을 성령의 불론 잘라버려야 겠습니다.


마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둘째, 비둘기는 溫柔하고 謙遜함의 상징입니다.

마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성령 받으면 교만이 꺾어지고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그러나 시시때때로 마귀는 우리 마음을 강팎하게, 완고하게 만들려하며 우리 심령에 교만함을 줍니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ex) 독립운동가요 교육가인 고당 조만식 장로님이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가르친 제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어느 주일날 주기철 전도사님이 설교를 한창 하시는데 늦게 도착한 조장로님이 교회문을 열고 들어오시는데 주전도사님이 보시고 호령하기를 “조장로님! 의자에 앉을 생각 마십시오!” 했더니 책가방을 들고 있는 채 그대로 예배를 드리더랍니다. 오늘날 장로님들 같으면 “당회원도 못된 전도사 주제”에 하면서 뺨을 때리든지, 멱살을 잡고 내려오라 하며 당장 우리 교회에서 나가라고 할텐데 말입니다. 설교가 끝난다음 주전도사님이 “저 뒤에 계시는 조장로님! 기도해 주십시오!” 했더니 “하나님이여! 이 죄인 놈을 용서하옵소서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여서 예배시간에 늦게 와서 주의 종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던 죄를 용서하옵소서!”하고 엉엉 우는 소리로 기도하자 온 교인들이 조장로님의 겸손에 크게 감동받아 눈물바다가 되었답니다.


우리가 일평생 축복된 믿음의 생활을 하며 살려면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셋째, 비둘기는 純潔을 상징합니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성경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비둘기는 더러운 것, 지저분한 것을 싫어합니다. 성령받으면 거룩한 생활을 하려고 힘을 씁니다.


넷째, 비둘기는 ‘높이 나르는 새’입니다.

 시편55:6에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라”고 한바 비둘기가 높이 나는 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둘기는 원래 땅에 사는 새입니다.  그러나 땅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늘높이 날으면서 창공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새입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으면 이땅에 살면서 저 높은 본향을 사모하게 됩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眞理란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다섯째, 비둘기는 ‘슬피우는 새’입니다.

나훔 2:27 “....그 모든 시녀가 가슴을 치며 비둘기같이 슬피우는도다”

시 59:11 "우리가 곰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 멀도다


 성령받으면 내 죄를 보고 슬퍼하며 웁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시시때때로 범죄하여 살기에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오라 하실때에 날 부르소서”(찬송 337장)라는 찬송가를 부르면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해야겠습니다.


  은혜 충만한 설교가로 유명한 휫필드는 설교할 때마다 울었다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목사님 왜 설교하실 때 마다 웁니까”하니 다시 눈물 흘리면서 “여러분들이 울어야 되고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으므로 내가 대신 울어주노라”했답니다.


  한국의 부흥사 임종순 목사님께서도 설교하실 때 특히 십자가에 대해 말하실때면 항상 엉엉 울었답니다. 한국교회에 이 눈물이 말라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런데 눈물이 있는 교회는 주의 긍휼이 충만하며, 주의 사랑이 넘쳐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거둡니다. 그러나 눈물이 없는 교회는 삭막하기 그지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와 네 자녀를 울라”하셨습니다.


여섯째, 비둘기는 ‘괴롭히면 떠나버리는 새’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반역하고 섭섭하게 하면 떠나십니다. 목회생활이나 신앙생활이나 할 것 없이 제일 답답할때가 영력이 없어 기도도 찬송도 안될때입니다.


 범죄한 다윗의 눈물로 고백하기를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라”(시51:11)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대해 조심해야 합니다.

1. 성령은 부인하지 맙시다.

2. 성령을 근심시키지 맙시다.

3. 성령을 거스리지 맙시다.

4. 성령을 훼방하지 맙시다. (마12:31)

5. 성령을 소멸치 맙시다. (살전 5:19)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며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일곱째, 비둘기는 ‘기쁜소식을 전해주는 새’입니다.

 창세기 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육체가 된 아담의 후손들을 물로 심판하실 때 의인인 노아의 8식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방주에 들어감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가 탄 방주는 150일이 지난 7월 17일에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칠월 곧 그달 십칠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는데 노아는 40일을 지난후에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았습니다. 그 까마귀는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다고 합니다. 노아는 그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했으나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방주에서 비둘기를 내어 놓았더니 저녁무렵에 돌아온 비둘기의 입에 감람새 잎사귀가 있었습니다. 이때 노아는 이 지면에 홍수심판의 물이 걷히고 감한줄 알고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가 이 땅에서 물러가고, 이제는 평화의 새로운 삶의 장이 이땅에 펼쳐지라는 것을 비둘기를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까마귀를 보냈을 때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비둘기를 두 번째로 보냈을 때는 다시 돌아와서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최대로 기쁜소식이 무엇입니까?

승진입니까? 주택을 구입한 것입니까? 결혼입니까? 네! 물론 이러한 일들도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기쁨은 福音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 충만하게 되면 이 기쁜 소식을 복음을 들고 열심히 전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행 8: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행 8: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행 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행 9: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여덟째, 비둘기는 祭物로 쓰이는 새입니다.

레 1:14-15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 비둘기나 집 비둘기 새끼로 예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져다가 그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고 피는 단 곁에 흘릴 것이며”

눅 2: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은혜를 받으면 제물된 삶을 살게 됩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제물이 있는곳에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대하7:1) 비둘기는 대체로 제물로 사용되며 일반적으로 산비둘기, 길들어진 집비둘기와 제물된 비둘기로 구분되는데 이것을 신앙인에 비유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산비둘기 : 정처없이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 하는자


② 집비둘기 : 정해진 거처에 사나 그것밖에 모르고, 길들어지기는 했지만 자기밖에 모                르는 신앙인으로 오로지 자기의 명성과 권위만을 위해 사는자


③ 제물된 비둘기 : 이름도 빛도없이 희생의 삶을 사는자

우리는 제물된 비둘기처럼 이름도 빛도없이 살려고 부단히 노력해야겠습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祭物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어야 되겠습니까?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① 목이 비틀리고 (레1:15) → 자아부인(자존심을 꺾으라)


② 목이 자르고 (레1:15) → 驕慢을 꺾고


③ 피를 빼고 (레1:15) → 血氣를 없애고


④ 날개를 자르고 (레1:15) → 내 수단, 방법, 이성,지식을 버리고


⑤ 발목을 자르고 (레1:17) → 세속적인 삶, 풍습, 버릇, 습관을 버리고


⑥ 가죽을 벗기고 (레1:16) → 세속적인 명예, 권세를 버리고


⑦ 각을 뜨고 (레1:6) → 犧牲하며


⑧ 더러운 것을 내어버리고 (레1:16) → 자범죄를 회개하고


⑨ 놋 제단을 드린다 (레11:17) → 주를 위해 산다.

롬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살고

            가정이 살고

            내 영이 살고

            한시대가 삽니다.


반면에 내가 살면 내 영이 죽고

                 내 가정이 죽고

                 내 교회가 죽고

                 한시대가 죽고 맙니다.

내가 죽읍시다, 내가 죽으면 삽니다. 


아홉째, 비둘기는 ‘바위틈에서 사는 새’입니다.

렘 48:28 “모압 거민들아 너희는 성읍을 떠나 바위사이에 거할지어다. 깊은 골짜기 어귀에 깃들이는 비둘기같이 할지어다”


  모압은 예로부터 태평하고 번영한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에는 「그모스」라는 우상이 있어서 숭배하였고, 그들 민족은 지극히 오만했습니다. 모압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포로 되어 갈 때 조롱했는데, 마치 도적을 조롱하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조롱 받는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형벌로써 적군이 쳐들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성읍을 떠나 반석이나 굴혈에 피난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깊은 골짜기 어귀에 깃들이는 비둘기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주님과 깊은 영적교제를 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열번째, 비둘기는 ‘사랑’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아 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신앙생활도 예쁘고 단정하고 사랑스럽게 해야합니다. 비둘기는 사랑받는 동물입니다. 우리도 은혜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의 사랑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나 여러분들은 사랑 받고 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요삼 2)

저나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요일 4:7-11, 요 13:34-35, 롬 12:19)


결   론

 지금까지 비둘기 같은 성령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의 속성처럼 화평과 온유와 겸손과 고상한 신앙에 힘쓰며, 성령을 쫓아 행하므로 전도하고 내 자신을 항상 제물로 만들며 깊은 영교의 삶을 사는 우리들이 다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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