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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목 주일설교

2020년 8월 2일(종점에서)

작성자파파스머프|작성시간20.08.01|조회수85 목록 댓글 0


첨부파일 2020년 8월 2일 (히12 종점).hwp


202082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히브리서 12:1-3

종점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는 버스 종점이 있는 동네에서 많이 살았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용산구 후암동 종점 근처가 집이었고, 청소년 대학시절에는 서대문구 봉원동 종점이 집이었습니다. 제대로 버스를 타기만 하면 쿨쿨 잠을 자도 절대로 지나쳐 갈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번호를 잘 못보고 버스를 탄 채 종점까지 와버리면, 정말로 낯선 버스 종점에 홀로 남게 됩니다. 만일 그 버스가 막차라면 정말로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요즘처럼 다양한 대체 이동수단이 있다면 모르지만, 전에는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도 있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2장은 <달리는 경주>라는 상징어를 사용합니다. 앞장인 11장의 주제가 <믿음>이기 때문에, 12장에서도 믿음에 관한 교훈이 이어서 나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히브리서는 수신자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의 계보를 잇는 분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바울의 신학과 유사한데, 저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그리스도교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성경입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정확한 연대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서신이 인용된 처음 기록이 주후 96년경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내용으로 볼 때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던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믿다가 박해가 두려워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나, 신앙을 아예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또 믿음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알려주어, 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전()이해를 가지고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2장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종점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했는데, 종점에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은 오로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함입니다. 아침에 부지런히 나선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인생을 줄인 것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소천(召天)이라고 해서 하늘로 부름을 받는다.”는다고 죽음을 표현했습니다. 요즘에는 별세(別世)라고 합니다. 가톨릭은 선종(善終)이라고 하는데,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줄임말입니다. 세상에 나서 선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 복되게 마친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의 종점에 선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도 사실 태어나고 죽는 인생 전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역시 종말론이 그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인생의 끝을 생각하며 기록한 성경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치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의 종점에 섰다고 생각하면서 히브리서를 읽어보면, 무언가 남다른 교훈을 얻게 될 것이고, 그 교훈 덕분에 정말로 내 인생의 종점에 다다를 때까지 세상을 더 소중하게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가 기독교 박해라는 상황에서 기록된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받은 박해의 감정이 매우 유사하게 중첩됩니다. 천주교는 전래 초기에 수많은 순교자를 낳을 정도로 모진 박해를 받았고, 개신교는 일제에 항거하다가, 또 공산주의에 대항하다가 심한 박해를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고난과 박해 이야기는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동시에 전통적인 유교문화 속에서 교회에 나가는 일은 가정에서도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특히 제사문제 때문에 그런 차별과 박해를 당할 때에, 단골로 등장하는 권고가 인내하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21절과 딱 맞는 말입니다.

2020년 교회주제를 정하면서 드린 말씀입니다만, 성경을 읽고 삶의 지표로 삼을 때에, 겉으로만 읽지 말고 그 속뜻을 이해하자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기록된 때와 오늘날 사이의 시간과 공간과 문화와 상황의 차이를 고려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말씀은 따르고, 어떤 말씀은 버리는 선택을 자의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는 성경을 바르게 대하는 태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전체(tota scriptura)의 맥을 찾아야 합니다.

히브리서만 해도 구약성경을 여기저기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참 어려운 성경입니다. 지금 첫마디에 나오는 증인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여기의 나오는 허다한 증인들은 바로 구약시대의 히브리인들입니다. 그들도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세월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의지하고 참아내었다는 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본 받아서, 우리도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아무리 힘든 박해와 고난이 닥쳐와도 인내하면서 그 길을 열심히 달려가자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말씀의 핵심이 되는 말이 2절에 나오는데,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는 십자가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사건을 참아내었는데, 장차 다가올 기쁨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다고 그 결과까지 알려줍니다. , 이런 결과를 예상한다면, 지금의 이 박해상황을 참아 볼 만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이 말씀을 우리의 상황으로 한 번 끌어들여 보겠습니다. 우리 인생의 힘든 경주 속에서 인내하라는 말씀으로 말입니다. 일단 지금은 기독교가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박해도 아니고, 가정에서 교회 못나가게 하는 박해도 이제는 무의미 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현실의 삶 속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을 신앙으로 극복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참아내신 것은 자기 개인문제로 인한 고통과 시련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남을 위한 십자가라는 뜻이 담겨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참은 것입니다. 인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인생의 시련과 고통은 정도 차이만 있지 모든 사람이 다 겪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당하는 고통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보다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던 안 믿던, 그래서 누구나 인생의 시련을 참으며 삽니다. 그리고 대부분 어떻게 해서든지 견디어 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단순히 내 삶 속의 고통문제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요점을 놓치고 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로 하는 인생의 경주는 적어도 세 가지 차원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첫째, 그리스도인의 인생경주는 벗어버리는 경주입니다. 1절에 나오는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라는 말에서 벗어버릴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해줍니다. 짐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죄는 무엇일까요? 원문을 비교해보아도 단어의 문자적인 뜻 이상의 의미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전체 성경 속에서 무엇이 인생의 짐이고 무엇이 나를 얽어매는 죄인지를 묵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로 경주한다.” 또는 참으면서 달려간다.”는 말은 살면서 겪는 고통과 시련을 참는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짐과 죄를 벗어버리는인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짐과 죄가 무엇인지 중요합니다.

사람이 참기 제일 어려운 때가 어느 때인 줄 아십니까? 사고나 질병으로 당하는 고통은 피할 수 없던 일이기에 그저 참고 나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해가 생겼다면, 오해를 풀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합니다. 수입이 적어서 먹고 사는 일이 빈궁하다면, 더 열심히 일하면서 가난을 견디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합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손에 다 잡았다가 빠져나간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입니다. 잡았던 물고기를 미끄러뜨려서 놓친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저 고기가 내 물고기인데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 견공이 그 물속에 비친 고깃덩이를 빼앗으려고 짖다가 자기가 물고 있는 것을 물속에 빠뜨렸다는 동화를 아시지요? 무거운 짐이란 자기가 만든 욕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얽어매는 죄란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려는 유혹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경주는 욕심과 유혹을 벗는 경주입니다.

 

2.둘째,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경주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입니다. 종점에 사는 사람이 아침에 종점에서 버스타고 나갔다가, 다시 종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 신앙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예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스승이 되신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기쁨으로 알았던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도 예수님과 좀 비슷한 구석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가 믿음의 창시자(αρχηγος)라는 말은 믿음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과거의 믿음이 종식되고 새로운 믿음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말 아닙니까? 유대교 신앙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뜯어 고친 분이 예수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던가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해서 후세에 신앙의 자유와 기쁨을 알게 해준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믿음의 완성자(τελειωτης)입니다. 완성자라는 말 속에는 목표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인내로 달려가는 경주의 골인지점, 즉 종점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두 번째의 차원을 동행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예수와 목적지까지 동행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이미 곁에서 동행하는 예수님을 느끼는삶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동행하시는 주님을 느껴보십시오.

 

3.셋째, 우리의 경주는 낙심하고 지치는경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선한 일을 하는 분들이 선한 일을 계속하다가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동참하려는 사람이 매우 적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어디엔가 분명히 선한 일을 하는 동지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지쳤기때문입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보이면 사람은 피곤한 줄 모릅니다. 밤을 새워서 시를 짓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힘든 노동을 해도 기쁨이 있으면 지친 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주는 당장은 그 기쁨을 볼 수 없거나, 결과가 느껴지지 않는 경주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인내가 절실히 필요하지요. 그때를 위해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라고 말입니다. 바꾸면 이런 말이 됩니다. “네가 죄인일 때에 그토록 반항했어도 내가 참고 기다렸다.” 예수께서 우리의 반항을 끝까지 참고 기다려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참고 견디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위로입니다.

 

평화목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걷다보면 언젠가는 인생의 종점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지요. 그 종점에 서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될 때, 나와 동행해주신 예수께 고마운 마음이 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욕심과 유혹의 짐과 죄를 그래도 덜 지고 살게 채찍질 해주신 것과, 날마다 나를 달래고 용서해주면서 참아주신 덕분에 종착지까지 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나의 삶이 힘들어도 그리스도의 더 큰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인내로써 경주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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