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7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창립 14주년*홍지훈목사
에베소서 2:14-22
교회는 성령의 처소
오늘 설교제목의 의미는 “교회 안에는 성령이 거한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과연 교회 안에 성령이 계시는지 의심이 들 때가 너무 많습니다. 왜냐하면, 도무지 교회에서 벌어진 일이라고하기에는 부정한 소식들이 언론매체들을 통해서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안 그랬는가하고 생각해 보면, 똑같았는데 오늘날 인터넷 발달이 소식을 신속하게 잘 전해주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는 가짜뉴스도 많아져서 사실이 무엇인지 따져보아야만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판단력”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동의하고 칭찬하기 전에, 혹은 비난하고 몰아붙이기 전에 깊이 숙고하고 판단해야합니다.
교회를 둘러싼 잡음들과 불편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들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평가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둘러싼 온갖 문제점들은 교회의 역사공부를 통해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당시 예루살렘교회가 개인 소유대신 선택한 공동소유로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들을 돕던 일에 동참했던 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일부는 감추어두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에게 내놓았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책망을 듣고서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아내 삽비라도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베드로에게 거짓말을 하다가 또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들은 온 교회는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헌금강요에 이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공동소유로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돕던 예루살렘 교회의 예를 현대에 똑같이 강요해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한 시대는 항상 그 시대만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 특징의 외형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서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습니다. 언제나 상황(contect)이 문서(text)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상황에 처하면 그 문서(text)는 그 시대에 맞게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모두 취하려고 속임수를 썼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다 채우면서 동시에 교회의 칭찬도 받으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통해 배우는 교훈은 첫째, 교회는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과, 둘째, 교회는 욕심과 칭찬 둘 다 가질 수 없는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자기의 이익을 보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교회라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약 250년간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신흥종교였으며,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조차도 경멸할 정도로 인간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한 것은 종교재판이 아니라, 정치재판이었습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를 통치자, 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통치나 종교권력의 통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들에 저항하였습니다. 예수를 스승이나 왕으로 여긴다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조차 2000년 전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을 놓고 우리는 우리 시대의 해석을 내놓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단순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대로, 아무런 비판정신 없이 무조건 따르면 그것이 예수의 제자로 사는 줄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속한 교회 안에 정말 성령의 인도가 있는지 숙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었는지를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엡2:14) 이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든 분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가로막힌 담을 당신의 몸으로 허물어서 원수된 것을 없애고, 이 둘을 예수 안에서 하나의 새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었다고 에베소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로막은 것을 허무는데 몸을 바쳤다는 말은 자기의 몸을 희생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할 만큼 화해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평화로우려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서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지금 거의 지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약 365평방킬로미터 안에 220만명의 인구가 몰려 삽니다. 밀도를 계산하면 1평방 킬로 안에 6,185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인구밀도가 552명인 것에 비하면 대단하지요. 물론 서울시와 비교하면 서울이 더 심합니다. 만일 서울이 가자지구처럼 곤경에 처한다면 그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산지가 2/3나 되니, 우리의 체감인구밀도는 세배 잡아서 약 1600명 정도입니다. 그러니 6천명이라는 밀도는 상상할 수 없는데, 거기에 전쟁의 공포가 가득합니다. 가자지구 면적은 광주광역시의 3/4크기이고, 인구는 광주보다 더 많으니, 광주시 인구밀도의 두 세배 이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낸 구호물자를 싣고 들어가던 배가 공해상에서 이스라엘군에게 나포되어, 활동가들이 붙잡혀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 꿇고 엎드린 사진을 보셨을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국민 2명도 있었다가 겨우 풀려났습니다.
이런 사건을 보면서 교회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가 당신의 몸을 희생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높은 담을 허물어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에베소서의 말씀은 환상에 불과할까요? 아니면, 에베소서에 나오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니까, 오늘의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옛날이야기 일뿐일까요?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예수의 가르침은 “이제는 제발 그만 싸우고 평화롭게 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평화롭게 살려면 서로 이해하고 양보도 해야 하지만, 공의가 지켜져야 모두가 평화에 공감하지 않겠습니까? 미국과 이란의 전쟁을 보면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하나의 땅덩어리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위기가 닥치고 위험이 다가오면 공동운명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처소라는 제목을 내건 이유는 에베소서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역사를 공부한 저 개인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거기서 결정적인 것은 우리 개인들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성령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교회 안에서 성령이 무슨 말씀을 하실는지 생각해야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장로님이신 할아버지의 보호아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며 살았습니다. 교우여러분들 중에도 세상에서 제일 즐겁고 재미있는 곳이 교회라는 생각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 따라 분가해서 마포구로 이사했는데, 할아버지는 유년주일학교는 한곳에서 반드시 졸업해야한다는 명분으로 매주 토요일에 저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용산구 후암동에서 마포구 염리동까지는 버스를 갈아타면 돈이 드니 지금의 숙대입구역까지 버스를 타고 거기서부터 한참을 걸어 해방촌 산위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요일에 다시 집에 데려다 주실 때는 반드시 효창운동장이 있는 용마루 고개를 넘어 1시간 30분 가량을 걸어서 데려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일 년 반을 걸어 다녀 주일학교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신앙은 주일에는 절대로 교통비도 쓰면 안 된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버스에 협조하면 안 된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으로 교육을 받은 제가 고등학고 1학년 때 교회 다니는 것을 중단한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다시 합가한 할아버지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때 다니던 교회 교사가 참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행사 계획표에 따라 순종하지 않고 저의 입장을 설명하자마자, 저는 불신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올 거면서 주목받으려고 저런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사에게 “제가 오나 안 오나 두고 보시라”고 말하고는 고교졸업 때까지 교회를 끊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난리가 났지요.
저도 그때 참 못된 행동을 했지만, 이후부터 그리스도인은 무례한 말을 입 밖에 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특히 교회의 중직자들은 더 그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확대하면,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똑같이 예의를 갖추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화해와 평화의 길을 선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5월 24일이 성령강림주일이었는데 마침 그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연세대학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렸는데, 이유가 있었습니다. 10년 전에 해운대의 한 절에서 기독교인이 불상을 훼손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이 설교자 신학교수가 주지스님에게 사과하고 불상재건을 위한 모금운동을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대학에서 해직되었다가 8년 만에 복직하여 그날 설교를 담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날 설교제목이 <부처님 오신 날 성령강림>이었습니다. 불상재건 모금액을 주지시님은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일이니, 그 돈을 이웃종교를 이해하는 교육에 사용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계신다면, 그리스도인이 어떤 마음자세로 세상을 살아야하는지는 너무나도 자명한 일입니다. 에베소서의 결론은 성령 안에서 그렇게 연결된 우리 개개인들이 서로 연결되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성전이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미워하고 질시하고 자랑하고 교만하면서 “오늘 이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건물을 성전이라고 말하면서, 그 안에 모인 우리 자신이 거룩한 몸으로 서로를 대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목교회는 오늘 창립 14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저의 모(母)교회도 6월 첫 주가 창립주일인데, 올해는 68주년입니다. 교회를 “끊었던” 제가 다시 신앙을 회복한 것은 그 모교회 덕분입니다. 거기서 저는 자유를 얻었고, 신학공부를 하고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퇴해서 강원도 평창에 27년째 살고 계신 목사님이 가끔 연락을 주시는데, 늘 그러십니다. 40년 개척과 목회를 하는 동안 잘한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저는 그렇게 답을 드립니다. 목사님의 가르침 속에서 제가 배운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저도 평화목교회에서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제가 배운 것은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관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였습니다. 그러려면 주입식 교육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문제를 찾고 스스로 풀어야합니다. 목사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정답을 찾아주고 따르도록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개인에게 맞는 답을 찾도록 참고자료를 알려주는 것뿐입니다. 성서를 읽어야 할 사람에게는 성서 소개하고, 성서해석을 알아야할 사람에게는 해석하는 방식을 전해주고, 찬양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찬양할 기회를 마련해드리고, 묵상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묵상방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이와 성별, 환경 등등을 초월한 똑같은 정답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평신도 중심의 교회라고 저는 배웠고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평화목교회는 교우의 숫자를 보면 14년 동안 평균 일 년에 한 분씩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한 분 한 분이 아무런 생각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100명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구성원이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모으고 깊이 숙고하는 것은 정적인 작업입니다. 생각 없이 무조건 행동에 옮기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데 14년의 세월이 걸렸다면, 이제는 움직이기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서로가 성령 안에서 신뢰를 쌓았다면, 어떤 일이라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계획을 세우던지, 성령, 다시 말하면 오늘에 맞게 다시 해석된 예수의 정신이 이끄는지를 항상 고민하고 행동에 옮긴다면, 우리 평화목교회는 성령의 처소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으로 서로 끈끈하게 연결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