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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목 주일설교

2026년 6월 14일(거룩한 전염: 선 긋는 종교에서, 선을 지우는 사랑으로)

작성자김소리|작성시간26.06.13|조회수65 목록 댓글 0

 

 

2026614일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9:9-13, 18-26

거룩한 전염: 선 긋는 종교에서, 선을 지우는 사랑으로

 

교회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질문이 무의미해 보일 만큼 당연한 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정확하게 구별하고 색출해내는 것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을 지키는 것일까요? 죄인과 의인을 정의 내리고, 이 기준으로 철저히 선 긋고 경계를 나누는 것이 신앙의 핵심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 물음들을 더 선명하게 던집니다.

 

마태복음은 대략 AD 80년대, 어느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파괴되자, 성전과 제사 중심의 유대교는 재편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는 유대교의 이단으로 낙인찍혀 각 지역의 회당들에서 쫓겨나고 축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신약학자들은 마태복음이, 바로 이런 유대교의 배타적 선 긋기와 갈등에 맞서 기록된 서사로 봅니다. , “진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사람들이며, 율법(토라)의 참된 완성자는 누구인지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회당들에서 쫓겨난 변방의 그리스도 공동체가 그 그리스도 예수를 어떤 분으로 증언하고 함께 기억했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어떤 공동체로 여겼는지가 곳곳에 물씬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의 구조에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5장에서 7장까지는 그 유명한 산상수훈입니다. 예수께서 산 위로 올라가 가르치십니다. 유대인 독자라면 이 장면에서 즉각 구약의 한 위대한 인물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시내 산 위로 올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포한 모세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모세처럼 산 위에서 말씀하십니다. “율법이나 예언자들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성취)하려고 왔다면서 율법들을 거듭 재해석하여 선포하십니다.(5:22, 28, 32, 34, 39, 44,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예수를 율법의 원래 뜻을 주권적으로 해석하고 성취하시는 입법자이자 메시아로서 구조를 통해서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8-9장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직후 베푸신 10가지 기적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것 역시 출애굽 당시 모세를 통해 일어난 10가지 기적을 연상시킵니다. 차이가 있다면, 모세의 10가지 기적은 핏물과 죽음, 종기와 어둠, 파괴와 심판을 가져온 재앙의 기적이지만, 예수의 10가지 기적은 치유와 회복, 나음과 부활, 생명을 가져온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태 공동체가 예수를 새 모세이면서 그 모세를 뛰어넘는 메시아로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치유와 생명으로의 길을 여시는 그리스도로요.

8-9장의 예수께서 행하신 10가지 기적들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걸음이 언제나 당시 종교와 사회가 쳐놓았던 금기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행보였다는 공통점입니다. 예수께선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율법이 결코 만지지 말라 명했던 심한 피부병 환자에게 손을 뻗어 체온을 나누십니다. 유대 사회가 이방의 개처럼 여겼던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 한마디로 고치십니다. 오직 성전과 제사 체계 아래에서 허용되던 속죄의 권한을 뛰어넘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직접 죄 사함을 선언하시며 견고한 당시 종교 제도의 경계를 허물어버리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도 그 경계 넘기의 행보가 계속될 뿐만 아니라, 세 겹으로 집중하여 나타납니다.

 

먼저, 예수께선 가버나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를 바라보십니다. 그리곤 자신의 제자로 부르시고, 그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친교의 식사를 나누십니다. 세리는 로마 제국의 세금 징수를 위탁받아 동족에게서 세금을 거둬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들은 율법을 등진 사람, 하나님의 백성 자격을 스스로 내던진 사람들로 취급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하며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지만, 1세기 유대 문화에서 식탁을 함께한다는 것은 사회적 교제로, 당신을 인정하고 함께한다는 연대와 수용의 의미가 짙습니다. 그러니 거룩을 자처하던 바리새인들이 따질 수밖에요.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금업자들과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가?” 이 질문은 오늘날 죄인이라 낙인찍힌 자들과 어울릴 때 듣는 혐오의 언어와 정확히 닮아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12년 동안 출혈병을 앓고 있는 여성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레위기 15장에 따르면 혈루증을 앓는 여성은 의례적으로 부정하며, 그녀가 만지는 것도 부정해집니다. 정결법의 방향은 항상 부정이 정결을 오염시키는 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앉은 자리도, 그녀가 만진 것도 부정해집니다. 그녀는 성전에도, 공동체의 종교 생활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열두 해. 긴 시간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녀는 그 경계 밖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이 예수를 만지는 순간, 방향이 역전됩니다. 예수가 부정해지지 않습니다. 예수로부터 치유가 흘러갑니다. 그리고 예수께선 이 여인에게 말씀하시는데, 개인적으론 새한글성경이 번역한 예수의 말투가 더 와닿습니다. “힘내세요, 따님!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어요.” ‘구원하다라는 헬라어(σζω, 소조)치유하다의 뜻도 있습니다. 여성은 몸이 나았을 뿐 아니라, 오래 배제되었던 공동체 안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종교적 사회적 배제의 사슬을 끊고 하나님의 이라는 원래 지위를 회복한 것입니다.

 

셋째로는, 딸이 죽었다며 살려달라는 관리의 요청에 그 집에 가셨습니다. 도착하셨을 땐 이미 피리 부는 사람들과 우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소녀의 죽음은 공식화되어 있었습니다. 민수기 19장에 따르면, 시신과의 접촉은 가장 심각한 부정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선 들어가셔서 그 소녀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율법의 문자는 예수가 가장 심각한 부정에 오염되었다고 비명을 질렀겠지만, 복음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예수가 죽음에 전염된 것이 아니라, 예수로부터 나오는 생명에 의해 죽어있던 소녀가 일으킴을 받았다(ἠγέρθη, ἐγείρω)고요. 일으켜졌다는 표현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의 부활을 말하는 전형적인 용어입니다.

 

이처럼 마태는 예수의 행보를 종교적, 사회적 경계를 뛰어넘는 것으로 증언하고 기록합니다. 학자들은 이 패턴을 거룩한 전염(Contagious Holiness)’이라고 부릅니다. 기존에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것과 예수가 접촉했을 때, 구약 율법의 원리가 깨어집니다. 예수가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거룩함이 흘러가 부정한 자들을 정결케 합니다. 구약의 정결법은 부정한 전염을 막기 위해 장벽을 세우고 사람을 격리하는 예방적 차원의 율법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필요한 율법이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정결법의 패러다임은 새롭게 전환됩니다. 예수가 죄인과 닿고, 부정한 사람과 닿고, 시신과 맞닿을 때마다 그 부정함이 예수를 이기고 전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거룩이 그 부정함에 치유와 회복, 부활과 생명을 흘려보내게 됩니다. 그야말로 생명의 역사,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마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예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본문 사이에 배치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예수라는 새 포도주는 정함과 부정함, 거룩과 속됨의 장벽을 세우고 높이는 방식의 옛 부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 경계를 허물고 뛰어넘어 생명을 전하고 흘려보내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을 맥락과 구조를 통해 더 확고히 말하기 위해서요.

 

마태 공동체만이 이 경계를 넘으시는 예수를 기억했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초대교회 전체가 이 거룩한 전염을 자신들의 핵심적인 정체성으로 공유했음을 보게 됩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부정한 이방 땅 거라사의 무덤가에 갇힌 자를 찾아가 치유하시고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를 들으시며 유대인과 이방인의 견고한 민족적 경계를 거침없이 허무시는 분으로 기억하고, 누가는 사마리아인이 경계를 넘어 강도 만난 유대인들을 돕는 비유를 드시는 예수를 기억하고, 요한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시며 대화하시는 예수를 기억하고,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부정한 것을 받지 말라는 평생의 금기를 넘어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바울도 그 예수를 전했습니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고,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3:28)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식탁 교제에서 물러선 것을 공개적으로 책망합니다. 바울에게 경계를 다시 세우는 것은 복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 곧 그것이야말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249-262년에 역병(키프리아누스 역병)이 로마제국을 강타했다고 합니다. 그때 무수히 많은 병자들이 거리에 방치됐다고 합니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이들을 모두 내다 버린 것이지요. 그렇게 친구도 가족도 사회도 국가도 이들을 외면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나섰다고 합니다. 자신을 아끼지 않고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구분 없이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자신들도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그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당시는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하고 박해하던 시대이고, 전염병의 원인을 자신들로 돌리며 더 모질게 굴던 시기인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과는 별개로 경계를 넘어 모두를 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길거리에 방치된 시신들의 장례까지 치러줬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런 모습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될 것을 우려해 황제 율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의 장례 의식을 낮에 치르지 못하도록 하는 칙령까지 내린 적 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불경한 갈릴리인들이 인간애를 실천하면서 자기 가난한 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가난한 자들까지 먹인다.”며 말하기도 했답니다.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전염의 힘이 어떠한지를 교회에 적대적인 통치자가 스스로 증언하게 만든 것이지요. 역병의 시대에도 경계를 넘어 손 내밀었기 때문에, 박해 속에서도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흘러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면 참 좋겠지요?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정체되고 변질되는 것을 늘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무의식적으로 경계와 장벽을 세우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앞서 역병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자기 내집단의 일원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며 환자들을 돌보고 장례를 치러준 이 그리스도인들을 파라발라니(Parabalani)’라고 지칭앴습니다.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고통받는 모든 이웃을 위해 기꺼이 경계를 뛰어넘어 고통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경계를 뛰어넘는 신실한 사랑의 이름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됐을까요? 교회가 핍박을 벗어나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고 권력을 쥐게 된 400년대 초반, 파라발라니는 가장 끔찍한 광신적 폭도로 변질되고 맙니다. 병자들을 돌보며 눈물을 닦아주던 선배들의 손과는 달리 그들의 손에는 어느새 몽둥이와 흉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권력이 된 교회를 지키겠다며 자신들만의 정통과 거룩의 울타리를 아주 높게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이교도들, 유대인들, 그리고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학자나 이웃들을 부정한 자’, ‘마귀의 자식으로 낙인찍어 대낮에 길거리에서 잔인하게 폭행하고 살해하는 짓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가 이들의 폭력성과 숫자를 제한하는 법령(테오도시우스 법전)을 내려야 했을 정도로, 그들은 혐오와 폭력의 선봉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목숨을 걸고 허무셨던 그 배제와 정죄의 장벽을, 그리고 그 예수의 삶과 정신을 함께 기억하며 따르고자 애썼던 초대교회의 정신을 망각하고 짓밟아버렸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이웃에게 피를 묻혀가며 견고한 장벽을 다시 세워버린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있었으나 정작 세리와 함께 식탁에 앉으시고, 부정한 자의 만짐을 받으시고, 죽은 자의 손을 잡으셨던 예수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이름만 있고 내용과 정신은 사라진 것입니다.

 

실은, 이런 주제의 설교를 자주 다루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고민스럽습니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아닌가, 너무 이쪽으로만 읽고 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비슷한 주제와 내용을 표현만 달리해서 반복해서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괴로움과 고민이 다소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내에게 토로했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진리라는 게 그렇지 않냐, 성경 곳곳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거고,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그 말을 들을 때 한결 마음이 편해졌고, 위로와 힘을 받았습니다.

 

실은, 본문의 이야기들은 마태복음에만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가와 누가도 이것을 전합니다. 그런데 구조와 맥락 외에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 13절로, 호세아 6:6을 인용하는 예수의 어록입니다. “가서 배우세요. ‘내가 바라는 것은 한결같은 사랑이지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요”(새한글성경) 다른 복음서들은 이 호세아를 인용하지 않는데, 마태는 본문 외에도 12장에서 안식일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한 번 더 인용하시는 것으로 기록합니다. 그만큼 당시 마태 공동체는 이것을 중요하게, 핵심적인 정신으로 여겼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호세아 6:6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헤세드(חֶסֶד)입니다. 이는 단순한 동정이나 일시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언약의 사랑, 한결같은 사랑, 신실하고 변함없는 사랑, 상대가 어떤 상태에 있든 그에게 향하는 충성스러운 사랑입니다. 상대가 세관의 바닥에 앉아있든, 12년 동안 피를 흘리며 격리되어 고립되어 있든, 차가운 시신으로 누워 있든 개의치 않고, 그를 향해 끝까지 찾아가 살려내고야 마는 하나님의 완고하고 변함없는 한결같은 사랑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와 비교하신 희생제물이란 누가 정결하고 누가 부정한지를 촘촘하게 가르고 통제하던 바리새파적 배제와 격리의 체계 전체를 상징합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잣대와 거룩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율법이 살려내야 할 소중한 생명들을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차갑게 정죄해 버리는 폭력적인 방식을요.

 

또한, “그대들은 가서 배우세요.”라는 표현은 당시 랍비들이 성경 해석을 선언할 때 쓰던 표현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그토록 목숨 걸고 수호하려는 그 텍스트가, 사실은 옛적부터 어떤 방향을 향해 흐르고 있었는지 전면적으로 다시 공부하라는 것을 그들의 표현으로 응대하십니다. 그 말씀, 성서의 원천인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원하시는 것은 배제의 체계가 아니라, 신실한 사랑이었다고. 경계 밖의 사람들에게도 향하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었다고요.
예수께서 세리와 식탁에 앉으실 때, 혈루증 여성의 만짐을 받으실 때,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실 때, 예수께서는 이 한결같은 사랑을 자신의 삶으로 해석하셨습니다. 모세오경이 세운 정결법의 경계들을 예수는 그 법의 본래 의도인 신실하신 사랑으로 재해석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의인들이다, 정한 자들이다, 거룩한 자들이다 여기며 다른 이들과의 경계를 세우고 배제하는 사람들을 향해 선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르심은 언제나 경계 너머도 포함하고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태 공동체는 바로 이 예수와 그 정신을 자신들 공동체의 정체성으로 함께 품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 신실한 사랑으로 모든 경계를 뛰어넘은 예수의 공동체다. 바로 이 예수의 제자들 공동체다.”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신 그 예수가 살아계시는 공동체로요. 그래서 이 거룩한 전염이 자신들의 삶과 공동체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구하고 기도하며 서로를 격려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걸으셨던 행보, 신실한 사랑에 의해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예수의 걸음이 자신들의 걸음이 되기를요. 자신들의 시대와 사회와 상황과 환경에 맞게 재해석되며 계속해서 내딛기를 함께 애썼을 것이며, 그것을 증언하는 게 지금의 마태복음입니다.

 

우리도 묻습니다. 우리 시대와 사회가 세운 경계들은 무엇입니까? 종교와 이념, 신분과 계층, 지역과 세대, 종파와 교파. 그 경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를 그렇게 밀어내고 싶어 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경계 앞에서 어느 쪽을 향해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예수를 모든 경계를 넘으신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면서, 그 예수의 삶과 의미를 자신들의 시대와 이웃에 맞게 해석하며 살았습니다. 그 경계를 넘을 때마다 거룩한 전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에게서 일어났던 그 일이 그들을 통해서도 일어났습니다. 부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명이 흘렀습니다. 치유가 흘렀습니다. 마태 공동체를 비롯한 모든 공동체는 그것을 함께 기억하고 물려주고 이어가기 위해 힘썼습니다.

헤세드. 엘레오스. 한결같은 사랑. 언약적 신실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 그 사랑이 경계를 넘을 때, 부정함이 정결함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이 전염됩니다. 생명이 전염됩니다. 사랑이 전염됩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의해 시작된 새 시대, 새 창조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삶과 공동체가 시대와 사회와 종교와 이념이 세운 경계들을 뛰어넘어 포용하고 화해하는 역사를 일궈가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전염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한결같은 사랑을 힘입어 일어납니다. 세리와 함께 앉으시고, 부정한 자의 만짐을 받으시고, 죽은 자의 손을 잡으신 예수와 그 정신이 우리 가운데 살아있다면, 우리도 그 인도를 따라 신실하고 한결같고 변함없는 사랑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고 이끄시는 그 거룩한 전염의 역사가, 경계를 뛰어넘어 다가가고 함께하는 신실한 사랑의 역사가 우리와 이 세상에 가득 흘러넘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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