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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목 주일설교

2026년 6월 21일(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작성자김소리|작성시간26.06.20|조회수47 목록 댓글 0

 

 

2026621일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5:38-48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지난 주일, 마태복음은 거시적인 구조를 통해서도 예수께서 새 모세이면서 모세보다 뛰어난 메시아, 율법의 본뜻을 해석하고 성취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그리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산상수훈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 산상수훈에는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새번역 성경을 따르면,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22, 28, 32, 34, 39, 44, ἐγδλέγω μν)”

이 표현은 기존의 율법들을 각각 말씀하신 후 새롭게 해석하시면서 말씀하시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로 앞인 520절에도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λέγω γρ μν).”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말로는 같아 보이는데, 헬라어로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1인칭 대명사 에고(ἐγώ)’의 유무입니다. 헬라어는 동사 어미에 이미 주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합니다(λέγω)”라는 동사 하나로 내가 말합니다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없어도 되는 인칭대명사(ἐγώ)를 문장 첫 부분에 썼다는 것은 그 의도가 있어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야말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라며 ‘‘를 강조하여 말하는 선포이자 선언입니다.

 

예언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라며 하나님의 권위를 빌려 말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에 기록하기를”, “현인들이 이르기를이라며 언제나 자신보다 높은 권위나 전통에 기대어 말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예수는 그 어떤 외부 권위도 인용하지 않으십니다. 과거 시내 산 위에서 율법이 주어졌던 것처럼, 이젠 예수께서 친히 산 위에 앉으셔서 새로운 생명의 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다른 권위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마태 공동체는 이 예수의 말씀을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율법을 주신 것처럼 여기고, 자신들의 삶과 공동체의 핵심 정신으로, 정체성으로, 삶의 방향과 지침으로 삼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하나님께서 산 위에서 율법을 주셨듯, 예수께서 산 위에서 주시는 새 시대의 법, 새 생명의 법은 기존의 율법을 무시하거나 파괴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본뜻과 취지에 맞게 재해석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율법이나 예언자들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성취)하려고 왔다.” 그리고 여러분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것보다 흘러넘치지 않으면, 여러분은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5:17-20) 이 말씀 뒤에 예수께선 그러나 내가, 바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라는 말로 새 시대의 해석을 자신의 권위로 내놓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향하던 가장 깊은 지점, 하나님의 본뜻까지 파고들어 성취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선언이 두 번 울립니다.

39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마세요.(μὴ ἀντιστναι τπονηρῷ).” 앞 절(38)눈에는 눈, 이에는 이”(21:24)는 복수를 권장하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복수를 제한하는 법이었습니다. 당한 것 이상을 갚지 말라고 제한하는 법정 원리로, ‘받은 만큼만 되돌려줄 권리를 보장한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보복의 논리 자체를 끊어내시고 해체하십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대라. 속옷을 가지려 하면 겉옷도 주어라.” 비굴하게 굴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보복의 연쇄를 내가 먼저 끊고, 합법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 자체를 포기하라는 새 시대적 해석이자 말씀입니다.

이 의미는 맞서지 말라로 번역된 헬라어 안티스테미(ἀνθίστημι)’를 들여다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 단어의 접두어가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누군가를 반대하거나 강하게 적대할 때 쓰는 안티(Anti)’의 어원입니다. , 지금 내 눈앞에서 뺨을 치며 모욕을 주고, 억지 소송으로 내 속옷마저 강탈하려는 사람, 힘과 권력, 무력을 앞세워 나를 억압하는 바로 그 가해자와 똑같은 분노와 잣대로 마주 서서 함께 괴물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반사하는 거울이 되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십자가의 방식으로 적대의 고리를 끊어내라는 그리스도의 강력한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삶의 한복판에 쳐들어와 내 숨통을 조이는 그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가해자 앞에서, 피에 사무치는 그 분노 앞에서도, 기어이 보복의 사슬을 끊어내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라고, 자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으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참 쉽지 않은 가르침이자 말씀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44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세요. 또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사랑하라기도하라는 모두 문법적으로,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현재 지속해서 계속해서 품으라는 뜻입니다. 원수 역시 지금 나를 미워하는 바로 그 구체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해를 비추시는 하나님을 닮는 것이 그의 자녀의 길입니다.” 이 역시 쉽지 않은 길입니다.

 

이번 주 목요일은 625일입니다. 그 전쟁이 남긴 것이 76년이 지났지만, 이 땅에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적과 동지를 가르는 사고방식, 증오와 적대의 논리, 피아 색출의 언어가 지금도 사람에게 색깔을 입히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합니다. 가장 마음 아픈 것은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게 조심스럽습니다.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도 아니고, 공산 치하의 핍박과 박해를 직접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에 의해 재산을 빼앗기고, 가족을 잃고, 또 전쟁을 몸으로 겪으신 분들의 고통과 울분이 어떠했을지 저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특히, 교회는 재산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또 예수쟁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야말로 몰수 당하고 삶의 터전을 강탈당해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간신히 적응 좀 할까 하는데, 침공을 하여 전쟁을 일으키니 얼마나 미웠을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2천 년 전 예수는 자신의 앞날에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보복을 제한하는 기존 율법의 뜻을 더 나아가 그러나 나는, 바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자신에게 해를 가한 그 악한 사람에게 보복하기 위해 맞서지 말라말씀하시며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네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 미워하라라고 여겼던 당시 시대에 그러나 나는, 바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 공동체는 유대교 및 회당과의 갈등 상황에서 예수께선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렇게 말씀하셨다며 자신들과 공동체의 정체성으로 함께 기억하고 격려하며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비단 마태만이 아닙니다. 누가 역시 예수의 모습을,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죽이고 모욕하고 조롱하고 핍박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며 기도하는 예수를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 스데반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성전과 율법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며 핍박과 박해를 받고 끝내 그들이 돌로 자신을 죽이는 순간에도 예수께서 그러셨듯, 그들을 위해 주 예수께 이 죄를 그들에게 묻지 마시라 기도합니다.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증언들입니다. 바울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로마 교회에 말합니다. 베드로전서도 박해 받아 풀뿌리 흩어진 공동체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그러셨듯이, 악을 악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복을 빌라권합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이 광풍을 선동하고 증오를 부추기는 데 앞서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그분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후손들이 겪은 고통과 고생, 그로 인한 원망과 분노, 원한이 어떠했을지 가늠할 순 없지만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선택해야 한다면, 이 중 어떤 길을 걸을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핵심으로 삼아야 할지 고민하고 숙고하고 기도한다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들에게 원한의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들과 똑같이 사람에게 무작정 프레임을 씌워 고문하고 억압하고 누명을 씌워 핍박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일만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피하고자 조심하지 않을까요?

 

이런 고민을 한 현대 인물이 있습니다. 1956년생인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입니다. 그는 옛 유고슬라비아, 현 크로아티아 출신입니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각 구성 공화국들은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시작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인데, 그 날짜가 공교롭게 1991625일입니다. 유고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군대를 파병합니다.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 마케도니아 등 여러 민족의 독립 분쟁, 독립 전쟁, 분란전으로 10년간 참혹한 전쟁의 시기를 보냅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는 민족을 학살하는 민족 청소등 참혹한 전쟁 범죄들이 서로 빈번하게 다수 자행됩니다. 우리나라도 분단 이후 한국전쟁 기간까지 남북, 좌우 서로 간에 얼마나 많은 테러와 살인, 학살이 자행됐습니까.

그런데 볼프 자신은 이 전쟁 전에도 피해자였습니다. 그는 유고 공산 정권 시절, 군 보안부의 한 대위에게 억울하게 끌려가 수개월 동안 가혹한 심문과 심리적 학대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개인적인 고통과 더불어 조국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참상 한가운데서 그는 뼈저리게 고뇌했습니다.

내 민족을 무참히 학살하고 내 영혼을 짓밟은 저 원수들을,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가? 가해자들을 용서하라는 것은 억울하게 피 흘린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또 다른 폭력이 아닌가?”

이는 그저 책상머리에 앉은 학자의 가벼운 질문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현실 속에서 토해낸 피맺힌 절규라는 점에서 울림이 큽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그의 스승인 위르겐 몰트만 교수가 그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몰트만은 나치 이후 희망이 없던 독일에 희망을 말했던 신학자여서 희망의 신학자라고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미로슬라브 볼프 역시 몰트만에게 수학한 뒤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한 신학자입니다. 몰트만이 볼프에게 이 질문을 한 이유는, 1993년 한창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전쟁하던 때 볼프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끌어안으셨듯이 우리도 원수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몰트만이 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향 땅에 쳐들어와 사람들을 강제 수용소에 몰아넣고, 성범죄를 자행하고, 교회를 불태우고, 도시를 파괴하는 그 세르비아 군인들도 끌어안을 수 있겠느냐라고요.

볼프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아뇨,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로서 나는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고뇌하고 고심하였고, 그 숙고의 과정과 결론을 담아낸 그의 책이 배제와 포용(Exclusion and Embrace: A Theological Exploration of Identity, Otherness, and Reconciliation)입니다.

그는 이 숙고의 과정에서 자기 신앙이 그 자체로 모순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자술합니다. 이 하나님과 저 하나님 사이에서 많이 혼란스러웠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약한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저버리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희생자들을 위해 정의를 성취하라는 명령과 가해자를 끌어안으라는 부르심 사이에서 자기 신앙 자체가 분열될 것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동족이 짐승처럼 짓밟히고 있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이성을 잃을 것 같은 가운데, 그 와중에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적합한 반응을 묻고 물으며 구하고 구하며 그 길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오랜 고통과 묵상 가운데 하나의 두려운 진실을 깨닫습니다.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억울함과 아픔만을 계속해서 되새기고 기억할 때, 자신을 보호하려던 그 기억의 방패는 어느새 상대를 찌르는 폭력의 칼로 변모한다는 사실입니다. 내 상처의 크기만 바라보고 있으면, 나 역시 억압자의 폭력을 모방하게 되고 스스로 원수의 거울이 되어 똑같은 가해자로 전락한다는 뼈아픈 통찰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불의를 덮는 값싼 화해나 기억을 지우는 용서를 말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말하는데,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십자가는 타자를 배제하려는 나의 정당한 권리마저, 나를 찔러 죽이는 그 원수들을 향해 정죄하고 배제할 수 있는 나의 정당한 권리마저 스스로 포기하고, 그 타자를 자기 품 안으로 안아들이는(embrace) 궁극적인 화해의 사건이다. 죄는 죄라고 명백히 꾸짖고 책망하되, 행위자에게는 보복 대신 그 빚을 탕감하는 십자가의 은혜를 베푸는 것, 내가 받은 그 은혜를 나 역시 흘려보내는 것, 보복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닌 은혜를 흘려보내는 주권적 행동, 사랑에 의해 자발적으로 모든 이들의 종이 되신 메시아 예수를 뒤따르는 제자로서의 주권적 행동이다.”

이 역시 결코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복의 정당성마저 예수 앞에 내려놓을 때, 피의 악순환이 멈출 수 있다는 것은 명명백백해 보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처음을 이 말씀으로 시작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복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위로를 받을 테니까요.

복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땅을 물려받을 테니까요.

복 있습니다, 정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그들이 배부르게 될 테니까요.

복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그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을 테니까요.

복 있습니다,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 불릴 테니까요.

복 있습니다, 정의 때문에 박해를 받아 온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까요.”

예수께선 피눈물 나게 슬퍼하고, 힘이 있어도 보복하지 않으며, 남을 불쌍히 여기다 도리어 박해를 감수하는 자를 지금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나 선인이나 악인이나 고루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한결같은 사랑을 좇고 구하고 시대와 상황과 삶의 자리에 맞게 해석하며 적용하며 실천하려 고뇌하고 고민하고 숙고하고 기도하고 묻는 자에게 하늘의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친히 아버지의 통치 아래에 순종할 때 받으셨던 그 위로를 지금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며 말씀하시며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 내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뼈저리게 고뇌하며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정신을 선택하고 뒤따르기 위해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 악한 자에게 똑같이 보복하기 위해 맞서지 않고, 내게 총부리를 겨눈 원수들을 품어내며,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 좁은 길을 기어이 걷고자 묻고 애쓰고 숙고하며 몸부림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 내장이 끊어지듯 아파하며 한결같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그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실하게 모두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도 2천 년이라는 시공간을 넘어 예수께선 말씀하십니다. 온 세상과 우리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여러분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바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맞서지 마십시오, 그 악한 자에게 되갚아주기 위해.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원수들을.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내 안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적대 가운데서도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창자가 끊어지는 신실하고 한결같은 사랑에 휩싸여 나의 정당한 보복의 권리마저 내려놓고 기어이 증오와 적대의 고리를 끊어내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각자 자기 일상과 상황에서 주님의 말씀을 고뇌하며 숙고하며 해석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이념과 증오로 갈라진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평화를 일구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기를 끝내 구하신 예수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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