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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의 발자취

고려판 '왕자의 난'? 혜종의 죽음과 정종의 즉위를 둘러싼 의문들...

작성자박중영|작성시간17.07.31|조회수430 목록 댓글 0
궁예의 축출 이후 벌어진 일련의 반란들과 후백제로의 투항은 고려가 호족연맹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이 전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태조는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극복하고자 혼인을 통한 지방 세력들과의 연대를 도모했고

 

그 결과 삼한일통의 대업을 완수하게 되지만,

 

그가 자그마치 29 명의 부인을 맞아 들이여 남긴 25 명의 후사는

 

훗날 고려가 왕위  쟁탈전에 휘말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태조의 장남으로 일찍이 10살의 나이에 정윤에 책봉되어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비고

 

후백제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던 혜종. 이처럼 그에게는 확고한 정통성과 대통을 이어받을만한 자질이 있었으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의 집안이 한미했던 까닭에 가세를 등에 업은 이복동생들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됩니다.

 

장화왕후는 태조가 즉위하기 이전 궁예 휘하에서 나주를 정벌할 당시 우연히 인연을 맺었던 사이로,

 

그녀와의 혼인은 훗날 태조가 왕권 확립을 목적으로 맺게 되는 정략결혼들과 그 성격을 달리 했습니다.
왕후가 일찍이 포구의 용(龍)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는 놀라 깨어 부모에게 말하니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 얼마 안되어 태조가 수군 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출진하여

 

목포에 배를 대고 강가를 바라보았더니 오색 구름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리로 가 보았더니  왕후가 빨래하고 있는지라 태조가 불러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러나 왕후의 집안이 미천하므로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이부자리에 사정(射精)해 버렸으나,

 

왕후가 즉시 이를 자신의 몸 속에 집어넣어 마침내 임신하고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혜종은 얼굴에 이부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두고 ‘주름진 임금’이라 불렀다.

《고려사》 열전 제1권, 후비, 장화왕후 오씨
이런 혜종에게 박술희는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었습니다.

 

궁예의 호위병 출신으로 태조를 도와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관등이 대광(2품)에 이르렀던 박술희는

 

어린 혜종을 정윤으로 옹립하였던 장본인이었으며

 

일리천 전투에서 혜종을 보위했고

 

또한 훈요십조를 받든 태조의 고명대신으로서 혜종의 앞날을 부탁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혜종이 태어나 일곱 살이 되었을 때 태조가 그를 후계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의 어머니 오씨(吳氏)가 미천한 가문출신이어서 불가능할까 우려한 나머지,

 

오래된 상자에 자황포(柘黃袍)를 담아서 오씨에게 내려주었다.

 

오씨가 옷을 박술희에게 보이자 박술희가 태조의 의도를 짐작하고서

 

혜종을 세워 정윤(正胤)으로 삼기를 주청하였으니, 정윤은 바로 태자이다.

 

태조가 죽음에 임박해 나라 일을 부탁하면서, “경은 태자를 옹립했으니 잘 보좌해 주시오.”라고 하니,

 

박술희는 한결같이 유언을 받들었다.

《고려사》 열전 제5권, 제신, 박술희
박술희의 지지에 힘입은 혜종이 순리대로 보위에 오르면서 정국은 안정을 되찾는듯 보였지만

 

이윽고 혜종이 병석에 드러눕게 되자 고려 왕실은 다시 한번 왕위를 둘러싼 암투에 휘말리게 됩니다.

 

혜종에게는 의화왕후 임씨 소생의 흥화궁군 그리고 궁인 애이주 소생의 태자 왕제 두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나이가 어렸기에 장성한 숙부들로부터 자리를 보전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따라서 대세는 왕위 계승 서열 2, 3위이자 충주의 유력 가문을 외척으로 두었던

 

정종, 광종 형제에게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들 형제는 그러나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옹립할 음모를 획책하고 있었던 혜종의 장인 왕규에 의해서

 

반역자로 모함을 받습니다.

 

하지만 혜종은 동생들을 추궁하지 않았고 도리어 광종을 자신의 사위로 삼아 형제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합니다.
혜종(惠宗) 2년(945)에 왕규는 왕의 동생 왕요(王堯 : 정종)와 왕소(王昭 : 광종)가 모반한다고 참소했으나

 

혜종은 무고임을 알고서 동생들에게 더욱 두터운 은혜를 베풀었다.

 

사천공봉(司天供奉) 최지몽(崔知夢)이, 유성(流星)이 자미원(紫微垣)을 침범했으니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나올 것이라고 보고했다.

 

혜종은 왕규가 왕요와 왕소를 모해하려는 징조라고 판단해

 

장공주(長公主)를 왕소의 처(妻)로 삼게 해줌으로써 친족관계를 더욱 강화하니 왕규가 음모를 실행하지 못하였다.

《고려사》 열전 제40권, 반역, 왕규
왕규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번에는 혜종을 시해하기로 마음먹고

 

두 차례에 걸쳐 자객을 보내지만 이 역시 무위에 그치고 맙니다.

 

혜종은 암살 기도의 배후가 자신의 장인임을 알면서도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또한 왕규는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번은 밤에 왕이 깊이 잠든 것을 보고서

 

자신의 부하를 왕의 침소로 잠입시켜 시해하려고 했다.

 

마침 혜종이 잠에서 깨어 한 주먹으로 쳐 죽인 후 시종들을 시켜 끌어내게 하고는 다시 따져 묻지 않았다.

어느 날 혜종이 몸이 불편해 신덕전(神德殿)에 있었는데

 

또 최지몽이, 장차 변란이 일어날 것이니 적당한 때를 보아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건의했다.

 

혜종이 은밀하게 중광전(重光殿)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왕규가 밤에 일당과 함께 벽을 뚫고 침실로 들어갔으나 이미 비어 있었다.

 

왕규가 최지몽을 보더니 칼을 빼어들고, “주상이 침소를 옮긴 것은 필시 너의 꾀이리라.” 하고 욕하였으나

 

최지몽이 끝까지 입을 닫고 있자 물러갔다.

 

혜종은 이것이 왕규의 소행인줄 알고 있었지만 죄를 주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 제40권, 반역, 왕규
이후 혜종이 붕어하자 왕위는 정종에게로 넘어갔고 그 과정에서 혜종의 심복이었던 박술희가 제거됩니다.

 

정종은 박술희가 역심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유배보냈고

 

평소 박술희와 반목하던 왕규는 기회를 틈타 왕명을 참칭하여 박술희를 주살합니다.

 

숙부 왕식렴 휘하의 서경 병력과 합세한 정종은 이후 왕규마저 반역의 죄를 물어 처형시키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혜종의 병이 깊어지자 박술희는 왕규(王規)와 서로 반목한 나머지 군사 1백여 명을 친히 데리고 다녔다.

 

정종이 그가 반역의 뜻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갑곶(甲串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으로 유배하니,

 

왕규가 왕의 명령이라고 사칭하여 그를 죽였다.

《고려사》 열전 제5권, 제신, 박술희
왕규가 진작부터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미워하다가

 

혜종이 죽은 후 정종(定宗)의 명령을 사칭해 박술희를 죽였다.

 

애초 혜종의 병이 위중해지자 정종은 왕규가 역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고서

 

은밀히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의 대광(大匡) 왕식렴(王式廉)과 의논해 변란에 대비하였다.

 

왕규가 변란을 일으키려 하자 왕식렴이 병사를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와서 숙위하니 왕규가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

 

이에 왕규를 갑곶(甲串)으로 쫓아낸 뒤 사람을 뒤딸려 보내 참수했으며 그 일당 3백여 명도 처형했다.

《고려사》 열전 제40권, 반역, 왕규
기유일에 왕규가 대광 박술희(朴述熙)를 죽였다.

 

술희는 성품이 용감하여 나이 18세에 궁예의 위사(衛士)가 되었으며,

 

후에 태조를 섬겨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유명(遺命)을 받아 혜종을 보좌하였다.

 

혜종이 병환이 나자, 드디어 왕규와 서로 미워해서 군사 백여 명을 데리고 다녔는데,

 

왕이 그가 딴마음을 품었는가 의심하여 갑곶(甲串)으로 귀양보냈더니,

 

왕규가 이어 임금의 명이라 속이고 그를 죽였다.

 

후에 엄의(嚴毅)란 시호를 내리고, 태사(太師)를 증직하였다. 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왕규가 처형을 받았다.

 

그전에 왕이 왕규의 역모를 알고 은밀히 서경(西京)에 있던 대광 왕식렴(王式廉)과 모의하여 변고에 대비하게 하였다.

 

왕규가 난을 일으키려 하자, 왕식렴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호위하니,

 

왕규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왕규를 갑곶으로 귀양보냈다가 사람을 뒤쫓아 보내어 그를 베어 죽이고, 그 도당 3백여 명을 베어 죽였다.

《고려사절요》 제2권, 혜종 2년(945년) 9월
이상의 기록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를 용상에 앉히고자 형제를 이간질했고

 

임금을 시해하려 했으며 또한 충신을 살해한 난신적자였고,

 

정종은 그런 난신적자를 척결하여 사직을 보위하고 왕통을 바로 세운 충신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바로 정종이 혜종의 두 아들을 대신하여 즉위하게 된 경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록에는 혜종이 정종에게 양위한 사실이 전혀 보이지 않고 다만 혜종이 죽자

 

정종이 "스스로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고 적혀있는데,

 

이는 왕위 승계가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정종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定宗至德章敬正肅文明大王)은 이름이 왕요(王堯)이고 자가 천의(天義)이며,

 

태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聖王太后) 유씨(劉氏)이다.

 

태조 6년 계미년(923)에 났으며 혜종 2년(945) 9월 무신일에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

《고려사》 세가 제2권, 정종 총서
혜종께서는 2년 동안 병으로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흥화낭군(興化郞君)이란 아들을 두고 있었으나 나이가 어렸고,

 

또한 여러 아우들에게 뒷일을 충분히 부탁하실 수 없었습니다.

 

정종께서는 스스로 여러 신하들로부터 추대를 받아 왕위[大業]를 이으셨습니다.

《고려사》 열전 제6권, 제신, 최승로
정종이 즉위함과 동시에 명백한 반역의 증좌도 없이 혜종의 측근들인 박술희와 왕규를 유배보내고

 

이 과정에서 무력을 동원한 사실은 반정의 가능성을 뒷받침합니다.

태조의 고명대신이자 혜종의 장인으로 당시 권력의 정점에 서있었던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를 굳이 옹립하기 위해 혜종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대목입니다.

 

더군다나
왕규의 외손자였던 광주원군은 태조의 제16비였던 소광주원부인 왕씨의 소생으로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서열이 한참 낮았습니다.

 

혜종의 죽음으로 득을 보게 될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왕규도, 광주원군도 아닌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정종이었습니다.

왕규가 정종의 명을 참칭하여 박술희를 죽였다는 기록 역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왕규와 박술희는 같은 곳(갑곶)으로 유배되어 같은 날(기유일)에 주살되었는데

 

어떻게 왕규가 왕명을 사칭하여 박술희를 죽일 수 있었는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박술희에게 반역의 죄를 뒤집어 씌워 그를 유배보냈던 사람은 정종이었고,

 

그에게는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혜종을 따르던 박술희의 목숨을 거두어야 할 확실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정종이 혜종을 사칭하여 고려국왕으로 책봉받은 사실은 찬탈 의혹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정종은 즉위 직후 두 차례에 걸쳐 후진에 사신을 파견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혜종의 죽음과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이러한 실상을 알지 못했던 후진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이미 세상을 떠난 혜종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합니다.

 

신오대사》, 《송사》, 《고려도경》을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이 고려 왕실의 세계에서 정종을 빠뜨린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겨울 10월 정축일에 고려(高麗)가 광평시랑(廣評侍郞) 한현규(韓玄珪), 예빈경(禮賓卿) 김렴(金廉) 등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신오대사》 제9권, 진본기, 출제 개운 2년(945년) 10월 14일
무자일에 고려(高麗)가 병부시랑(兵部侍郞) 유숭규(劉崇珪), 내군경(內軍卿) 박예언(朴藝言)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신오대사》 제9권, 진본기, 출제 개운 2년(945년) 10월 25일
11월 무술일에 왕무(王武, 혜종)를 봉하여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삼았다.

《신오대사》 제9권, 진본기, 출제 개운 2년(945년) 11월 5일
11월 무술에 왕무를 대의군사 고려왕(大義軍使高麗王)으로 삼은 다음 통사사인(通事舍人) 곽인우(郭仁遇)를 사신으로 보내

 

유지(諭旨)를 내려 거란을 치게 하였다.

 

곽인우가 고려에 이르러서 고려의 군사가 약한 것을 보고,

 

지난날 말라가 한 말은 모두 왕건을 위해 과장하여 떠벌렸을 뿐 실지로는 거란과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곽인우가 되돌아오자, 왕무가 다시 다른 일로 변명을 하였다.

《자치통감》 후진기 제6권, 제왕 개운 2년(945년) 11월 5일
경진일에 사신에게 명하여 고려국왕(高麗國王) 왕무(王武, 혜종)를 책봉하게 하였다.

《구오대사》 제84권, 진서, 소제 개운 2년(945년) 12월 18일
모든 정황이 정종의 찬탈을 가리키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혜종의 죽음이 병사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혜종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임종을 맞이한 사실은 그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는 기록과 달리

 

그의 죽음이 갑작스러웠음을 암시하며,

 

혜종을 수차례에 걸쳐 시해하려 했던 사실 역시 그가 불치병을 얻어 오늘내일하였다면 이해하기 힘든 대목입니다.

만약 정종이 혜종의 암살 기도 배후였고, 암살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반정을 일으켜 혜종의 측근들을 제거한 연후

 

혜종을 시해하였으며,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왕규에게 모든 누명을 씌웠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중국으로부터 숨기고자 혜종을 사칭하여 책봉을 받았다면

 

혜종의 죽음과 정종의 즉위를 둘러싼 의문들이 자연스레 풀립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정종이 왕식렴을 필두로 한 패서(패강(예성강)의 서쪽, 오늘날 황해도 일대) 세력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태조의 스물아홉 후비들 중 아홉명을 배출했고 정치, 군사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고려 건국과 후삼국통일에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던 패서 지역의 호족들은

 

황폐화 된 평양을 복구하여 제2의 도읍이자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던 태조의 이주 정책에 따라

 

국초부터 서경을 거점으로 세력을 키워 왔고,
당시 서경의 경영과 수비를 총괄하고 있었던

 

태조의 사촌동생 왕식렴은 이들 세력의 구심점이자 군사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태조 원년(918)에 평양이 황폐하다하여 염주·백주·황주·해주·봉주의 백성을 이주시켜 민호를 채우고 대도호부로 삼았다가 얼마 후 서경(西京)으로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 제3권, 북계, 서경유수관 평양부
이 해에 대승(大丞) 질영(質榮)과 행파(行波) 등의 가족[父兄子弟]과 여러 군현(郡縣)의 양가(良家) 자제를 이주시켜 서경(西京)을 충실하게 하였다.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새로 관부와 관리를 두었으며 비로소 재성(在城)을 쌓았다. 〈왕이〉 직접 아선성(牙善城) 백성이 거주지를 정하였다.

《고려사》 세가 제1권, 태조 5년(922년)
태조가 평양(平壤 : 지금의 평양특별시)이 황폐하였으므로 백성을 이주시켜 그 곳을 채우고, 왕식렴에게 명령하여 그 지방에 가서 지키게 하였으며, 또한 안수진(安水鎭 :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시)과 흥덕진(興德鎭 :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시) 등지에 성을 쌓도록 하였다. 왕식렴이 이 일에 공을 세웠으므로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승(佐丞)이 되었다. 왕식렴은 오래 동안 평양을 진수하였으며, 항상 사직을 보위하고 국토를 개척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고려사》 열전 제5권, 제신, 왕식렴
정종이 왕규 일파를 제거하고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숙부 왕식렴과 평산 박씨 일가의 공이 가장 혁혁했고,

 

이들과 얽힌 이해관계는 그가 즉위 이후 서경으로의 천도를 추진하게 되는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서경 천도는 그러나 개경 기득권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왕식렴이 죽고 그가 옹립했던 정종 역시 재위 4년만에 병을 얻어 요절하면서 전면 백지화됩니다.

정종은 어린 외아들 경춘원군이 왕위를 찬탈당할 것을 우려해 동복동생 광종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세상을 떠나지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이 왕족들과 공신 세력을 숙청했던 광종은

 

경춘원군은 물론 혜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처남이었던 흥화군의 목숨도 살려주지 않았습니다.

 

고려왕조 오백년은 그렇게 골육상쟁의 피비린내 속에서 반석 위에 올려졌습니다.
더구나 경신년(광종 11, 960)부터 을해년(광종 26, 975)까지 16년간은 간흉(姦兇)들이 앞을 다투어 진출하면서 참소하여 헐뜯음이 크게 일어나서, 군자는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소인은 그 뜻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자식이 부모를 거스르고 종[奴]이 그 주인을 논박하기에 이르러, 상하 간에 마음이 떠나고, 군신간이 해체되었습니다. 구신(舊臣)과 숙장(宿將)들은, 서로 차례로 죽어 멸족을 당했고[誅夷], 가까운 친인척들은, 모두 다 전멸(翦滅)당하였습니다. 더욱이 혜종께서 형제의 〈우애〉를 온전히 이루시고, 정종께서 나라를 잘 보존하셨으니, 그 은혜와 의리를 논한다면, 가히 중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임금께서는 다 오직 외아들만 두셨는데,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지 못하였으니, 그 〈두 분〉의 덕을 갚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다시 그들과 원한을 깊이 맺게 한 것입니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외아들에까지 의혹과 시기를 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경종께서 태자로 계시면서 늘 편안하고 행복하지 못하다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셨습니다. 아아! 어찌하여 처음에 잘 하셔서 명망을 얻었다가, 뒤에 잘 못하시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깊이 통탄할 일입니다.

《고려사》 열전 제6권, 제신, 최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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