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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삶의 이야기

고려 왕씨 멸족 사건을 아시나요?

작성자박중영|작성시간16.06.27|조회수1,758 목록 댓글 0

고려 왕씨 멸족 사건을 아시나요?


이성계 이놈~

나라를 지키라 했더니 임금의 목을 쳐

고려를 없에버려~


 


 

윤방경 등이 왕씨(王氏)를 강화 나루에 던졌다. 

손흥종 등이 왕씨를 거제 바다에 던졌다.

 

<태조실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위  화  도   회  군   (威化島.回軍)

위화도는 의주의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

당시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 매우 긴장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1388년에는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도사(遼東都司)의 관할 아래 두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고려가 크게 반발해 결국 요동 정벌로 이어졌다.


고려조정내에는 친명파와 친원파로 갈려져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친명파는 말 그대로 명과 친하게 지내자는 쪽이었고, 

이성계는 친명파였다. 

우왕과 최영은 명나라도 도둑놈 들이라서 

우리 힘으로 놈들을 모두 몰아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당시에 요동은 비어있었기에 우왕과 최영은 요동을 공략할 방안을 기약하게 됩니다.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崔瑩)이 강력하게 주장해 요동정벌이 실행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에서는 8도의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세자와 여러 비(妃)들을 한양산성(漢陽山城)으로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禹玄寶)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게 한 뒤 

우왕과 최영은 서해도(西海道)로 가 요동정벌의 태세를 갖추었다.


동원된 총 병력은 좌·우군 3만 8,830명과 겸군(傔軍) 1만 1,600명, 

그리고 말 2만 1,682필이었다. 

곧이어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 머물면서 독전하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평양을 출발해 다음 달에 위화도에 둔진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했고, 

마침 큰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자, 

이성계는 이러한 실정을 보고하면서 요동 정벌을 포기할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 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하여 회군을 단행한다.





고려군의 5만, 좌군 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 

팔도 도통사에 최영 이렇게 구성하게 된 고려군은 우왕과 최영의 명령으로 

북으로 군을 끌고가게 됨니다..

하지만 가는 속도가 너무느려서 삼십일이 지나서야 위화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역성혁명의 주인공인 이성계는 대국인 명나라를 공격하게 되면 

자신의 인생은 전쟁터에서 보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좌군 도통사인 조민수를 설득하게 이르지요. 

요동성을 공격해서 점령해도, 재공격을 막으려면 

인생을 요동땅에서 보낼것을 한심하게 생각했고, 

조민수만 설득하여 회군하면 자신의 세상을 만들 수 있을것으로

생각하여 위화도 회군을 할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성계는 위화도까지 가려던 최영을 

우왕을 붙들어서 평양에서 묶어두어으나

그러나 최영은 왕명을 보내서 강을 건널 것을 재촉하게 합니다. 

최영의 재촉에 이성계일행은 군사들을 일단 위화도에 상륙을 시키게됨니다. 

이에 이성계는 사 불가론 으로 사자를 우왕과 최영하게 보내

명나라를 치는것은 불가 하다는 논리로 회군 할것을 요청하나 

최영이 반대하며 요동정벌을 계속하게 됩니다.

 


결국 이성계는 오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되돌려서 개경으로 진군합니다.

중간에 최영의 군과 조우하게 되지만, 

고작 몇천밖에 되지않는 최영군은 간단히 해치우고

개경으로 진입하여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은 폐위시키기에 이릅니다.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 등은 최영의 군대와 일전을 벌인 끝에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으로 유배,

우왕을 폐위, 강화도로 방출, 

이로써 이성계 등은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

이를 바탕으로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다만 회군 당시부터 이미 역성혁명(易姓革命) 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족을 없에 버리기 위하여 

말 그대로 고려 왕가의 왕씨들을 좋은 곳으로 이주 시켜준다고 하여   

배에 태워 강화도, 거제도 로 데려 가다가 

그냥 중간에서 수장해 버렸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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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의 이 한 줄은 대대적인 왕씨 숙청 작업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태조 3년 고려 왕씨 복권 운동을 우려해 왕씨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의논이 여러 차례 열립니다.

다들 멀리 섬으로 보내버려서 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고 결정이 났지만, 

실은 모두 물에 빠트려 아예 왕씨 들을 멸족 시키자 는게 목적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이주하는 배에 올랐던 많은 왕씨들이 그렇게 희생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육지에서도 왕씨 숙청 작업이 잔인하게 속전 속결로 진행되었죠. 

애어른 할 것 없이 왕씨는 살아남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때 많은 왕씨들이 전씨나 옥씨 등으로 성을 바꾸고 산속으로 들어가 살았다고 합니다.

 

이방원은 의외로 왕씨 멸족 사건에 대해 반대론 자였다는 것도 언급해둡니다.

 

아무튼 이때 고려 왕가의 여인이 한 사람 살아남습니다.


이 여인은 실은 고려가 망하기 전 신흥 조선의 실세가 된 

동지사부 총관의 아들과 약혼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 약혼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동지사부 총관은 원래 여인의 아비와 친구였는데, 

자신의 아들을 고려 왕가로 정략결혼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자 약혼을 파기해 버린 것이죠.

 

여인은 원래 혼인을 하기로 했던 부총관의 아들 덕분에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전 약혼자가 집에 간신히 숨겨놓지만 하녀 신세가 되고 맙니다.

참 기구한 운명이네요.

 


 

하녀로 전락한 왕족의 여인과 신흥 조선의 엘리트 관료가 된 전 약혼자!

 

이 둘의 사랑과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역사로맨스 소설 서리연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개성 왕씨의 인구수는 2000년 기준 6,148가구 19,808명이며 한국의 270여 성씨 중 

82번째이다. 현재 개성왕씨가 가장 많은 지역은 서초구 서초동이다.




이성계의 씨 멸족


고려 왕조의 마지막 임금 34대 공양왕은 원주로 내쳐젔다가 다시 간성으로

간성에서 또 다시 삼척으로 옮겨젔다

그의 두 아들과 같이 유배의 길에 오른 공양왕은 쓸쓸한 죽음의 날을 기달리고 있었다

비록 이성계의 압력에 의하여서였지만

우왕과 창왕을 왕명으로 강화에서 죽인바 있는 공양왕은 

자기 죄를 생각하며 모두를 체념하였다

그래도 왕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려 애를 썼다

밖에서 전교를 받으시요하는 정남진의 굵은 음성이 들려 왔다

끝까지 공양왕을 따라 왔던 몇명의 시녀들은 이미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이성계의 구구절절 긴 어명은 치사스런 변명이었다.


  “내가 여러 사람의 추대로서 임금자리에 나가게 된것은 이 또한 하늘의 이치인데 

  그대가 이제 관동지방에 살게 되였고

같은 왕씨 성들은 각각 편안함을 얻어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바

이제 동래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정등이 모반을 도모하여

그대와 그대 친족의 명운을 맹인 이홍무에게 점첬으나

일이 탄로되어 죄를 실토하였다

그대는 알지 못하고 일이 여기에 이르렀거니와

대간과 법관등이 연이어 상소하기 무릇 12차례에 걸첬으며

대소 신료들의 상소 또한 막을 길 없어 내 이제 할수 없게 되어 

그대에게 죽음을 내리게 하니 그대는 모름지기 나의 고충을 알아 주기 바라노라.”


죽는자 앞에서 구질구질한 변명의 어명을 읽고 나니 

금오랑이 포교 두 명을 재촉하여 방으로 몰려 들어 왔다

공양왕은 내가 자진을 할 터이니 저리들 물러 가라.” 하였지만 

포교들의 올가미는 이미 공양왕의 목위에 얽혀저 있었다


두 왕자들은 이를 보고 흐느끼고 있었으나 

그들도 또한 올가미로 개 끌리 듯이 허무한 죽음을 당하였다.


같은 날거제도에 귀양을 가있는 수천명의 왕씨들은 바다에 던저져서 수장을 당하였다

이쯤 되니 정도전 등은 이왕 죽일 바에야 중요한 왕씨 일문 뿐만이 아니라

왕가 성을 가진 자는 모조리 없애야겠다는 계획 아래,

이번에 위에서 왕씨 성바지들에게 새로 섬 하나를 마련하여 길이 영주의 고향을 삼아

편안케 하고자 하니 왕씨들은 강화 해안에 모두 모이라


기일 안에 모이지 않는 자는 크게 벌을 받으리라.” 이러한 방문을 장안 곳곳에 써 붙혔다

그러지 않아도 불안에 떨던 왕씨들은 이제야 살판 났다./ 

죽이지는 않겠지/  

몇 해 귀양살이 하다가 풀려나면 살 수가 있다.” 생각을 하고 희망을 안고 

모두 강화도 해안에 모여 들었다

수 십척의 배가 등대하고 있었는데 왕씨들은 모두 배에 올랐다

얼마 후에 자기들이 어복에 장사지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왕씨들을 보내는 친지와 일가들의 모습이 저 멀리서 아물 아물 하였다

그 때에 돌연 배 안에서 이상이 생겼다


누가 했는지 일시에 배밑창의 널판이 여러장 떼어지며 

바닷물이 용솟음을 쳐서 올라 왔다

아비규환이었다허나 어찌하랴수 천명이 또 수장 되였다.


그 날 밤 태조 이성계의 꿈에 

왕건 태조가 칠장 곤룡포를 입고 나타나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내가 삼한을 통합함에 공이 이 백성 위에 크게 군림하였거늘 

네가 내 후예들을 모조리 없애려 하니 내 반드시 큰 보복을 행하리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지는지라

태조는 크게 두려워 하여강비의 아들 방번의 장인 왕우로 하여금 

고려 왕씨들의 제사를 받들게 함으로 오직 한 사람사돈 왕씨의 목숨을 붙이게 하였다

 

한편 산속으로 도망을 처서 숨어 있던 왕씨들은 

대개 <>씨나  <>씨나  <>씨나  <> <>씨 등으로 성을 적당히 개칠을 하여 

바꾸어 그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까지 살아 남은 진짜 왕씨는 몇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남아 있는 왕씨는 대개가 이성계의 아들 방번의 장인 왕우의 자손뿐이라고 한다.


이성계의 대학살 – 왕씨 척살 어명

 

用 씨는 원래 씨 였다.

왕씨의 고려제국이 무너지면서한동안 조선에서는 왕씨를 학살한다

이성계는 역성혁명으로 고려왕조를 멸하고

왕씨 성을 가진자는 잡아 죽이도록 명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태조가 되자, “왕씨 성을 가진자는 모두 잡아 죽여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리하여왕씨는 절에 들어가거나

임금 에서 획수를 가하여 등의 한자로 변환하여 성씨를 바꿔서 숨어 살게 된다.


야사에서는 이성계 일파가 공양왕을 내친 후에 

고려왕실인 왕씨일가들을 모두 멸족시킬 목적으로 전국에 방을 붙여 

왕씨들을 모이게 한 후에 바다에 수장을 시켰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방의 내용은 왕씨들에게 쌀 한 섬씩을 줄 테니 강화 해안에 모두 모이라는 것이었다

공양왕이 왕위에서 쫓겨난 후에 불안에 떨고 있던 왕씨들은 

이런 약속을 믿고 강화도행의 배를 탔다가 모두 수장되었다 한다.

바다 한가운데서 수장되었는데

다행히 수영을 하여 해안가로 나왔어도 관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모든 왕씨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개성하거나 종모성하라>.. 

(태조실록 태조3년 5월 26왕명에 따라..고려조의 모든 왕씨가 모()의 성을 따랐거나 아니면..

(), (), 강(姜), (), (), (), (), 최(崔), 윤(潤) 氏등 기타 여러 성으로..

변성된 이래 태조 이성계의 7째 방번의 처남인 盧爠(-)와 盧琯(노관)만은..

왕씨의 제사를 모시게 한다는 명분을 찾아 어명을 받아 왕씨로..

복성(그간 외가의 성을 따라 노씨로 변성)하였을 뿐..

나머지는 영영 변성된채 혈통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타성으로 행세하며 숨어살면서 혈통을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조선 정조 때에 비로소 문헌 등을 조사하여 왕씨로 다시 성을 바꾸어..

세보를 만들고 왕건이 수도로 정한 송도(개성)을 본관으로 .. 

왕원을 1세 조상으로 모신다.


고려가 멸망된 후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함께 

멸족의 참변을 당합니다

왕손인 왕씨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고려조 복위를 기도할 수 있으므로 

후환을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왕우의 모반사건이후 태조는 왕손이 아닌 왕씨는 외가의 성을 따르라고 명한다.

야사에 의하면 한국 전(), ()씨에는 고려 왕씨가 변성한 계통이 있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한 후에 조선의 개국과 함께 멸족을 당하는 참변을 당했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이때부터 변성을 하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했다.
씨 등으로 임금왕(王)자를 숨기거나 

아예 다른 성씨를 사용하며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곳이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신 종묘이다

고려가 망했으니 종묘를 헐어버린 것이다

()씨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옥(), (), (등으로 

자신의 성씨인 왕(자를 글자 속에 숨기고 살아야 했다.

그리하여 현재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숫자가 적은 것이다.


위화도회군과 역성혁명 조선 탄생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쳤다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후 역성혁명을 통하여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덕이 없어 민심을 잃은 왕을 하늘의 뜻으로 내쫓고 

왕의 후손이 아닌 자가

왕위에 오르는 일을 역성혁명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통하여 조선을 건국하고

조선의 초대왕이 되었습니다.

 

명나라의 요동을 빼앗기 위해 군사를 이끌었던 이성계는 

위화도에 진을 쳤다가 말을 돌려 일는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것입니다.

 

 

개경을 함락시킨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명령한 최영 장군과 우왕을 내쫓고 

정권을 손에 쥐었으며,

왕을 갈아 치우며 정적(정치적인 적)을 없애던 이성계 일파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인 정몽주마저 죽였습니다.

 

위화도회군이란?

명나라가 고려에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자 최영은 명나라의 요구를 무시하고, 

요동을 점령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성계 등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으며,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는 동안 왜구가 쳐들어올 염려가 있고,

여름철엔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으며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수 있어 전쟁이 불가하단

'사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이성계와 조민수 등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의 최영을 친후 유배 보냈다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고 합니다.

 

1392년 7월 마침내 이성계는 역성혁명으로 신진 세력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고, 

고려는 34왕 

47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으며, 

새나라 조선 왕조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지 10여일이 지나자 임금으로서 최초의 교서를 내렸는데, '

그 내용은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고려라 하고, 

모든 제도를 전 왕조와 같이 하겠노라." 였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나라 이름을 당장 고치지 않았는데요, 

그것은 민심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함 이었습니다. 

또한 태조는 나라를 다스릴 17가지 정책을 발표하였으며, 

며칠 뒤에는 막내 왕자 방석을 세자로 삼았고, 

개국 공신 44명에게는 상을 내렷습니다.

 

조정 대신들도 바꾸었는데, 문하부 좌시중에 배극렴, 

우시중에 조준이 각각 임명되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나라가 첫발을 내디뎠지만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아 이성계는 많이 당황했습니다.

 

점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정도전, 조준 등이 국호를 바꿀 것을 건의했고, 

태조 2년(1393) 2월 15일에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이라는 국호가 정해진 배경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로운 왕조의 수립을 알리는 한편, 

국호를 바꾸 겠다는 뜻을 전했으며, 

명나라는 이를 승인하였고, 이에 이성계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국호를 정해 

1392년 11월 예문관 학사 한상질을 명나라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세조 때의 권신이자 한명회의 조부이기도 한 

한상질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아 돌아옴으로써 

새로운 왕조의 이름이 결정되게 된 것입니다.


광종의 배반

평산(평주)박씨 거대한 권력이.,.,.
고려 4대 국왕 광종(光宗)때 박수경·박수문 형제의 평산 박씨 세력은 광종의 최대 후견 세력 이었고, 

평주의 호족 박수문, 박수경 형제는 정종 사후 광종의 즉위를 적극 지지해 왕에 오르게하고, 

이들의 세력이 막강하였으므로 광종은 자기 가문의 외손이나 

연고자를 왕위로 앉히려는 다른 호족들을 견제한다.  

964년(광종 15) 광종의 즉위를 도왔으나 

그의 정책에 반발하던 평주의 호족 사도 박수경(朴守卿)일가를 숙청한다. 

박수경 가문에서 그에 대한 불만 여론이 터져나왔다. 

광종은 바로 사도 박수경의 아들 승위(承位), 승경(承景), 승례(承禮) 형제를 투옥했다가 

사형에 처하였고, 

아들들의 투옥과 처형 소식을 접한 박수경 역시 그해 8월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여 몰락하였다. 

박수경 가문을 숙청한 이유는 광종에 의한 호족억압정책에 대한 박수경 가문의 불만의 토로였다. 

광종의 호족 세력약화와 왕족숙청, 1차 2차 호족숙청.,

[권력무상, 시기질투,,견제..정변..등을 .맞이하여..평산박씨 후손이 줄어들므로..

후손들이 원본관인 죽산박씨를 다시.,후손이 다시 권문세족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서 

평산박씨 357가구 1,156명.. 

평주박씨 32가구 82명으로 아주 적은 이유는 

광종시대의 호족세력 숙청 변고 때문일 것이다.





과거제도 실시와 제도 정비[편집]
 과거 제도, 문벌 귀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노비안검법 실시로 호족의 힘이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화되자 

광종은 958년 '과거제 도입'이라는 폭탄선언을 하였다.[13] 

958년(광종 9년) 5월 광종은 마침내 쌍기를 지공거(知貢擧)로 임명하고 시, 부(賦), 송(頌), 책(策)으로써 진사 갑과에 2명, 명경과에 3명, 복업(卜業)과에 2명을 선발했다.[11] 

신라시대에 일부 시행되었다가 폐지된 과거 제도를 다시 실시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과거 제도를 주관하여 정착하게 한다. 

이때 최초로 진사 갑과에 합격한 인물은 최섬 외 1인(진긍)이었다.[11] 

788년 신라 원성왕 때에 과거 제도인 독서삼품과를 도입했다가 얼마못가 호족들의 반발과 압력행사, 

왕권약화로 폐지된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호족들의 반발과 출신 성분을 알수 없는 인물들을 함부로 등용한다는 반대에도 

그는 계속 과거를 주관하였고, 

서서히 과거 합격자의 수를 늘려 과거 제도로 진출한 관료들의 수를 늘려나갔다.

과거제도 도입은 호족들이 중심이 된 공신세력에게 크나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고려의 건국과 통일 과정에서 전공을 세웠거나 무력을 제공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무인들이 대다수였다.[13] 

때문에 학문을 기반으로 하는 과거제도 실시[13] 는 그들 자제들의 정계 진출을 제도적으로 봉쇄하는 

장치가 되었다. 

958년 5월 광종은 과거 제도를 통해 실력있는 인사를 인재로 선발하겠다고 공표하였다. 

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며 문벌이나 재력으로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공표했다. 

이는 조정 내에서 호족의 전횡을 막을 새로운 세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이었다.

처음 과거가 실시된 지 2년 후인 960년에는 시, 부, 송만 가지고 다시 시험을 쳤고, 

이후 4년 뒤에는 다시 시험과목을 조정하여 

964년 시, 부, 송, 시무책을 가지고 시험을 쳤다.[11] 

그는쌍기에게 명하여 시무책이라는 것을 시험 과목으로 추가하여 당시 사회의 상황과 개혁 방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했다.

이처럼 시무책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한 사실들을 통해 개혁에 걸맞은 인사에 대한 광종의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11] 

광종은 과거 제도를 통하여 전국에 학교가 세워지고 학풍이 일어나길 바랐다.[11] 

또한 문치적 관료체제가 갖춰지길 원했는데, 계속된 과거 시험으로 고려 전국에 이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그의 뜻이 이뤄진다.[16] 

과거 제도의 도입으로 우수한 인재들의 중국 유출을 막는 한편 과거로 선발된 신진 관료들을 

대폭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발탁한다. 

문벌과 배경이 없었던 이들 신진관료들은 광종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였다.


문과 무과 외에도 승려들이 응시하는 승과(僧科) 역시 채택했다. 

승려의 국가 고시 제도인 승과로는 종선(宗選)과 대선(大選)을 지정, 

종선은 총림선(叢林選)이라고도 하며 각 종파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종선의 합격자들은 국가에서 응시하는 승려고시 대선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국가에서 실시하는 본고사 대선은 크게 선종선(禪宗選)과 교종선(敎宗選)으로 나누어졌는데, 

선종선은 주로 광명사(廣明寺)에서, 교종선은 주로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되었다. 

이 승과는 고려 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과거 시험으로 선발한 인재들은 인맥과 배경이 없었으므로 쉽게 그의 측근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백관의 품계에 따른 관복의 복제(服制)를 제정하여 관료의 서열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또한 승려들의 품계를 지정하여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선사(禪師)·

대선사(大禪師) 등의 선종법계(禪宗法階)와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수좌(首座)·승통(僧統)의 교종 법계 등 승려들의 계급도 친히 지정하였다.

그러나 개혁 과정에서 중국에서 귀화해온 세력에게 지나치게 많은 힘을 실어주어 

내국 관료들의 원망을 들었다.[17] 

또한 관리의 복제를 제정하여 관등에 따라 자색, 단색, 비색, 녹색으로 서열을 구분케 하였다.

관복 제정[편집]

960년 광종은 직접 백관의 관복제도를 제정한다.[18] 

이미 956년 설문우가 고려를 방문했을 때 이미 후주의 세종이 고려의 공복을 

중국식으로 정비 하라고 했지만 이뤄지지 못하다가 이때에 비로소 관복제도를 확립한 것이다.[18]

959년 광종은 후주의 쌍철과 일단의 귀화인들을 조정에 끌어들인다.[18]

960년 3월 지체없이 관복 제도를 확정했다.[19] 당시의 관복은 신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통일전쟁과 호족들의 영향력 증대로 서열에 따른 관복은 확정되지 못했다. 

서열이 낮아도 부유하면 좋은 옷을 입었고, 서열이 높아도 가난하면 보잘것 없는 옷을 걸쳐야 했다. 

이는 서열에 관계 없이 재정적으로 풍부한 자가 항상 우위에 있는 듯한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광종은 이처럼 무질서한 복장이 조정의 기강을 흐트리고 왕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위에 따라 모든 공복의 색깔을 달리하게 하였다. 

원윤 이상은 자삼(자색 웃옷), 중단경 이상은 단삼(붉은 색 웃옷), 도항경 이상은 비삼(진홍색 웃옷), 

소주부 이상은 녹상(녹색 웃옷)을 착용토록 하였다.[19] 

관복을 4가지 색으로 구분한 것은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과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 체계의 확립을 의미한다.[19]

대중국 외교 정책[편집]

변방을 수축하여 동북면과 서북면의 성곽을 보수, 중건하는 한편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951년 후주에 사신을 파견, 귀환한 뒤 그해 12월 후주의 연호를 시행하였으며 

이후 꾸준히 후주에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 

952년 봄에는 광평시랑 서봉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953년 후주에서 사신으로 위위경 왕연과 장작소감 여계빈을 보내, 후주 세종으로부터 광종을 특진 

검교태보사 지절 현도주 도독 충 대의군사 겸 어사대부 고려국왕(特進檢校太保使持節玄州都督充大義軍使兼御使大夫高麗國王)으로 책봉하는 교서를 받았다.

955년 대상 왕융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광평시랑 순질을 후주에 보내어 

공제의 즉위를 경하하였고, 

956년 후주는 장작감 설문우를 보내 광종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開府義同三司檢校太師)로 봉하였고, 

이때부터 후주의 복식과 제도를 도입, 백관의 의관을 중국 제도에 따라 하게 하였다. 

959년 봄 좌승 왕긍과 좌윤 황보위광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그해 가을 다시 사신을 후주에 보냈다. 후주에서도 959년 좌효위대장군 대교를 보냈고, 

그해 겨울 다시 사신을 후주에 보냈다. 

960년 후주의 시어 청주수 쌍철, 고려에 왔고 쌍기를 좌승으로 임명하였다.

칭제 건원[편집]

960년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불경을 구해오게 했는데, 

그해 오월의 제5대 황제 전숙(錢瞞, 錢弘俶)이 사신을 보내어 《천태론소》(天台論疏)의 교전과 

그 밖의 불전을 보내왔다.

후주가 몰락하고 송나라가 일어나 패권을 다투기 시작, 광종은 이 같은 중국의 혼란이 계속되자 

후주의 연호를 버리고 다시 

960년(광종 11년)부터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17] 

또한 개경을 황제의 수도인 황도(皇都)로 개칭하여 황제(皇帝)의 면모를 갖췄다.[17] 

그는 자신을 황제의 지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스스로가 절대 권력자임을 신하들에게 주입시키려 했다.[19] 이에 따라 호족들은 광종의 절대 권력에 도전하게 되었고, 

광종은 무자비한 숙청작업을 통해 공포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권력과 대결해 나간다.[19]

그러다가 송나라가 후주를 무너트린 후 안정을 찾고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자 

963년 12월부터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왕권 강화와 정적 숙청[편집]

친위세력의 강화[편집]

과거 제도 시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쌍기는 광종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더욱더 많은 중국인들을 귀화시켜 고려 조정으로 끌어들인다.[16] 

세력 기반이 약했고 신진관료들만으로 친위 세력의 구성이 힘들다고 판단한 그는 

계속적으로 중국의 인재들을 영입하려 한다. 

5대 10국이 송나라에 멸망, 통합되면서 각 나라들의 관료, 학자, 망명객들 역시 

고려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과거제가 처음 부활된 이듬해인 

957년 쌍기는 자신의 아버지 쌍철을 고려로 불러들였고, 

광종은 쌍철을 좌승으로 임명하여 개혁작업에 동참시킨다.[16] 

또한 쌍씨 부자가 고려의 실세로 떠오르자 많은 중국인들이 고려로 귀화하였고, 

광종은 그들 대부분을 관리로 임용하였다.[16]

광종은 이들을 통해 친위세력을 구성하고 호족들을 견제하게 했다.


광종이 귀화인들을 적극 영입, 유치하는데는 친위세력 강화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노비안검법을 실시, 강행함으로써 내국의 호족들과는 등을 돌린 상태였다.[16] 

그런데 조정은 그들에 의해 거의 장악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호족을 견제할 새로운 신하들이 필요했고, 광종은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들로 

그 자리를 메웠다.[16] 

귀화인들을 적극 중용한 광종은 호족들의 집과 별장을 빼앗거나 몰수한 뒤 

이들 귀화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중용한 나머지 광종은 내국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귀화인들에게 지급하기도 했다. 

내국의 신하들은 귀화인들에 대한 광종의 지나친 대우에 반발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서필이었다.[16] 

자택과 별장을 강제로 빼앗긴 것에 불만을 품은 호족들은 이들 신하들과 힘을 합치거나 

뒤에서 조종하면서 광종의 귀화인 우대 정책을 비판하고,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기를 포기하고 

세력을 형성하려 한다며 광종을 비판하게 된다.

서필은 광종의 행동을 못마땅히 여겼다.[16] 

그래서 광종에게 자신의 집을 바치겠다고 말한다.[18] 

광종이 그 이유를 묻자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자손들 대에서 집을 빼앗길 바에야 

미리 그 집을 바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한다. 

이에 광종은 분노하지만 나중에는 서필의 말이 옳음을 깨닭고 

다시는 신하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고 한다.[18] 

그러나 호족들의 집과 별장은 계속해서 빼앗는다.

광종은 집권 내내 귀화인들을 위주로 정치를 펼쳤으며, 이에 호족들이 반발하자 

가혹한 숙청작업을 벌여 공포정치를 실시하게 된다.[18] 

후일 최승로는 이 일에 대하여 광종을 비판하고 있다. 

광종의 지나친 귀화인 임용으로 내국인이 설 자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귀화인과 내국인의 정권 대립이 가속화되는 바람에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는 것이다.[16]

왕족 숙청[편집]

광종은 왕권의 강화에 걸림돌이거나 자신에게 도전한다는 의심이 드는 인물에게는 냉혹하였다. 

광종은 호족과 대신들 뿐만 아니라 골육과 종실에 대해서도 왕권 강화에 장애요소가 된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제거하였던 것 같다.[20] 

광종은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과 동복 형인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을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처형시키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이자 태자인 주(경종)를 의심할 정도로 역모에 민감해졌다.[21]

945년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22] 은 혜종이 죽자 출궁하여 어머니와 함께 절에서 살다가 

후에 광종 즉위 후 경화궁부인을 따라 궁으로 들어가 함께 살았다. 

그러나 960년 이후 벌어진 왕족 숙청때에 이복 조카이자 처남인 흥화궁군을 처형했고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도 처형했다. 

그 밖에 태조의 15서자인 효은태자 역시 군소배와 사귀면서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효은태자는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23] 
혹은 동양군(東陽君)이라고도 불렀는데 성격이 난폭하였으며
작당하여 반역을 꾸미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므로 광종이 사약을 내렸다.
그의 아들 왕임(王琳)과 왕정(王禎)은
 효은이 자결할때 어렸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여 도망칠 수 있었다.[24]

효은태자는 이름이 왕원으로 동양대군으로도 부르는데, 

태조의 후궁이자 고려의 개국공신인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광종은 이복동생 효은태자 왕원을 성격이 난폭하였으며 작당하여 반역을 꾸미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24], 군소배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다른 뜻을 품었다[24] 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최승로는 기록으로 남겼다.

경신년(960년, 광종 11년)에서 을해년(975년, 광종 26년)까지의 16년간은
간악한 자들이 다투어 진출하여 참소가 크게 일어나니 
군자는 몸둘 곳이 없고, 
소인만이 제뜻대로 되었다.
심지어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종이 그 주인을 고소하기까지 하여
상하가 마음을 합치지 못하고 옛 신하들과 이름난 장수들이 차례로 죽음을 당하고
골육과 인척도 모두 멸하였다.
하물며 혜종이 능히 형제를 보전한 일과 정종이 능히 나라와 가문을 보존한 일은
은혜와 의리를 논한다면 중하다고 이를 수 있는데,
두 왕 모두 다 아들 하나만이 있었는데도 왕은 그 생명마저 보전치 못하게 하였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아들까지도 의심하고 꺼렸다.
그런 까닭에 경종은 태자로 있을 때 항상 불안에 떨다가 다행스럽게도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아! 어찌 처음에는 잘하여 좋은 명예를 얻었는데 뒤에 잘하지 못하여 이지경에 이르렀는지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21]

958년부터 과거제도로 선발한 인재들과 독자적으로 육성한 친위대인 시위군졸을 통해 궁궐을 장악, 

문무 양면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기반이 되었으며, 

이들을 배경으로 정치적 적대세력을 과감하게 숙청할 수 있었다. 

960년 개경 황도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별다른 혐의가 없던 자신의 첫째 아들 주를 갑자기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효화태자의 요절로 왕자 주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군제 개혁[편집]

호족들에게서 노비들을 석방, 해방시킴으로써 사병들의 수를 축소시키게 했다. 

그러나 그는 호족들의 사병을 완전히 몰수할 생각을 했지만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의 반발이 계속되었으므로 사병 몰수 계획은 백지화시킨다.


960년(광종 11년) 초 그는 그의 정책에 반발하는 호족, 공신세력의 숙청을 계획한다. 

광종 11년부터는 새로운 왕권 강화정책에 불만을 품운 훈구 대신이나 호족 세력을 본격적으로 축출,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와 이울러 호족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뒷받침할 만한 새로운 제도적 조처가 

마련되기도 하였다.[25]

고려의 건국 이래 병권 장악의 최고 기관으로서 유공호족들의 아성이었을 순군부(循軍部)가 

군부로 개편되었고 시위군(侍衛軍)인 내군(內軍)이 왕권강화를 뒷받침하는 장위부(掌衛部)로 

개편되었다.[25] 

또한 물장성(物藏省)이 보천(寶泉)군으로 바뀌어저 왕성시위군졸의 증가에 따른 군수를 담당한 것은 

모두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이다.[25] 

또한 궁궐에 병력을 증원하여 이중, 삼중으로 호위하는 동시에 군부 내 호족세력을 대폭 해임, 

파면함으로써 호족세력의 군권 강화와 만일에 사태에 대비한 암살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961년 왕궁을 증축하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계획하고 

자신의 5촌 당숙 왕육의 집으로 임시 거처를 옮긴다.

1차 호족 숙청[편집]

호족 숙청의 시발점은 960년에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3] 이 

대상(大相) 준홍(俊弘)과 좌승(佐丞) 왕동(王同)을 역모 혐의로 고변하면서부터였다.[21] 

대상 준홍이나 좌승 왕등은 각기 4품과 3품에 해당되는 관계를 가진 사람들로서 

당시 상당한 실력자[26] 의 한사람이었다.

친국을 단행한 후 광종은 이들을 귀양 보냈으며 이때부터 참소하는 사람이 많아 

죄없이 죽는 사람도 많았다. 

준홍과 왕동이 쫓겨나고 광종의 주변에 대한 경계는 더욱 강화됐다.[21] 

준홍 등이 제거된 후 희생된 사람은 너무도 많아 따로 임시 옥사를 설치할 정도였다.[26]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이 참소하기를 

대상(大相) 준홍, 좌승(佐丞) 왕동 등이 역모를 꾸민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내쫓았다.
이때부터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충성심 있고 현량한 사람들을 모함하였으며
노비가 제 주인을 고소하고,
아들이 제 아비를 참소하여 감옥이 항상 가득 차게 되었다. 

이리하여 따로 임시 감옥까지 설치하였다. 

죄 없이 잡혀가는 자가 계속 생겨나고 시기하는 버릇이 날로 심해졌다. 

왕실의 일족들도 많이 잡혀 죽었고 왕의 외아들 주(胄)까지도 역시 의심을 받아 

왕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되니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마주 않아서 이야기도 하지 못하였다.[26]

 
— 고려사 권 2, 광종 11년조 기사

고려사 등에 의하면 이 사건 이후부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충량(忠良)한 사람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이 그 부모를 참소하여 

감옥이 항상 가득 차서 따로 가옥(假獄)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시기부터 호족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숙청으로 

광종 자신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들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후 공신들에게 관직에서 내쫓거나 새로운 관직을 주지 않았고, 광종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다른 왕자군의 배경세력인 외척 세력 호족들을 전면 숙청, 처형한다. 

그리고 즉위 초 자신을 도왔던 평주의 박씨까지 제거하게 된다.

그러나 호족들이 숙청되자 호족들은 반기를 들었고, 광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 

961년 왕궁을 수리, 영건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는 당숙인 왕육(王育)의 집으로 옮겨간다. 

이때의 이궁은 공신숙청의 잡음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27] 

광종은 왕궁 증축을 목적으로 이어하였으나 '왕육가로의 이어가 호족들의 거센 반발로부터 

광종 자신을 지키기 위해 취해졌다고 하는 견해[20]'가 있다. 

964년 왕육의 사제로 이어했다가 환궁하면서 조서를 내렸다.[27]

2차 호족 숙청[편집]

961년 당숙 왕육의 집으로 이주한 이후 일시적으로 호족 숙청을 중단한다. 

그러나 964년(광종 15) 광종의 즉위를 도왔으나 그의 정책에 반발하던 

평주의 호족 사도 박수경(朴守卿)일가를 숙청한다. 

964년 내린 조서에서 그는 부조리와 문제가 있으면 기탄없이 말하라고 한다.

오랫동안 이궁(離宮)에 있으면서 백관이 일을 아뢰는 것을 내가 친히 듣지 않는 것이 많으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혹시 의심하고 막힘이 있을까 염려한다.
이제는 궁궐의 수리가 끝났으므로 정사를 들을 곳이 있으니 모든 백관들은
각기 자기의 일을 조심하여 그 전대로 나와서 아뢰도록 하라.
물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군신이 즐거움을 같이 하여 서로 막힘이 없도록 하라.
[27]
 
— 고려사 권 2, 광종 14년조 기사

이에 의하면 군신이 함께 즐겨 군신간에 막힘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27] 

그런데 박수경 가문에서 그에 대한 불만 여론이 터져나왔다. 

광종은 바로 사도 박수경의 아들 승위(承位), 승경(承景), 승례(承禮) 형제를 투옥했다가 사형에 처하였고, 아들들의 투옥과 처형 소식을 접한박수경 역시 그해 8월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여 몰락하였다. 

박수경 가문을 숙청한 이유는 광종에 의한 호족억압정책에 대한 박수경 가문의 불만의 토로였다.[27] 

이어 혜종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과 정종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의 친정아버지이며 

청주의 호족인 원보 김긍률(金兢律) 역시 숙청되었다.

970년(광종 21년) 봄에는 최지몽(崔知夢)을 숙청하였다. 

그해 봄 귀법사를 방문한 광종은 여기에서 술에 취한채로 발언을 한 최지몽을 강등시키고 

외지로 내쫓은 것이다.

일찍이 광종을 따라 귀법사에 갔다가 술에 취하여 예를 잃은 죄로 강등되어
외걸현(隈傑縣)에 가서 11년이나 있다가 경종 5년에 소환되어 대광, 내의령에 제수되었다.
[20]
 
— 고려사 권 92, 최지몽전

최지몽은 사형당하지는 않았지만 광종이 죽고 5년이 지난 뒤에야 경종에 의해 복직된다. 

최지몽이 술에 취해서 한 발언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후대의 학자들은 그가 광종의 개혁에 불만을 터트렸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

그가 어떠한 내용으로 죄를 얻었는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이도 역시 광종의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가 광종의 노여움을 사게 된 것이라 보인다.[20]'는 

견해와 '그가(최지몽) 득죄하여 폄출되었다는 사실은 곧 그가 훈신숙장의 계열로서 

광종의 귀법사를 통한 사회적 지지세력의 확대기도를 반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한다.[28]'고 추정한다.

집권 후반기의 광종은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면 어느 누구를 가리지 않고 숙청을 감행했다.[17] 

이 때문에 호족들은 역도로 몰리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고, 

한편으론 광종에 대한 불만을 고조시켰다.[17] 

고려사의 열전 최승로편에 의하면 "옛 공신과 장수들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고, 

경종이 즉위할 때 살아 남은 사람은 40여명 뿐이었다"고 전한다.

태조 삼한공신이 3,200명[29] 이었는데 광종 말년에 가면 이들 공신 또는 공신가 사람은 

40여 명만 남았다는 것이다.

중국의 혼란기[편집]

조광윤 을 일으켜 맹위를 떨치는 한편 후주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18] 

959년 후주의 시어로 있던 쌍철이 갑자기 고려로 내왕하여 고려의 신하가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18]

후주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송나라가 건국하면서 

다시 송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재개한다. 962년 겨울 광평시랑 이흥우를 송나라에 보냈고, 

963년 12월부터는 송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12월에 송나라에서 책명사 시찬을 보냈으나 폭우와 풍랑을 만나 사절단을 태운 배가 좌초되고 

시찬만이 폭우 속에서 홀로 살아 남아 당도했다. 

광종은 친히 나가시찬을 맞이한 뒤 시찬을 성대한 환영회를 베풀어 후대하고 위로하여 되돌려보냈다. 

965년 2월 왕족인 대승 내봉령 왕로를 송에 보냈다. 

송나라에서도 화답으로 왕로에게 상서 좌복야의 식실봉 3백호를 내렸다. 

972년 2월 8월 내의시랑 서희를 송에 보냈다.

또한 송나라와 공식 무역 관계를 체결했다. 

개경에서 30리 길인 예성강 포구의 벽란도이다.[30] 

광종 때 송나라와의 공식 무역 관계가 열린 이후부터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크게 자리잡게[30] 되었다.

중국의 정세 변화에 광종은 수시로 정보를 접하며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거란족은 태조 때 수교를 거절한 일에 앙심을 품고 변방을 약탈할 조짐을 보였고, 

여진족은 매년 그에게 사절을 보내 공물을 바쳤지만 그는 여진족도 불신하였다. 

광종은 후주, 송나라와의 돈독한 외교관계를 바탕으로 거란, 여진족 세력을 견제하였다.

불교 장려[편집]

사상적 통합을 목적으로 불교를 적극 장려하기도 했고, 

각지의 사찰 중수와 공양 시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953년 화엄종 승려 겸신을 국사로 봉하였다. 이후 겸신의 입적 이후 혜거를 초빙하여 국사로 삼는다.

960년(광종 19년)에는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칠곡의 고찰 도덕암을 대중수하여 

칠성암(七星庵)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사적이 전해온다. 

당시 고려 광종은 혜거국사를 왕사로 모시려고 여러 번 사람을 보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고 한다.[31] 

광종이 친히 어가를 몰아 도덕암으로 와 혜거국사를 왕사로 모실 것을 권했으나 또다시 거절당했다. 

이에 광종이 돌아가려 가자 대사는 ‘이것도 속세의 인연’이라며 며칠간 쉬면서 속병을 고치시라 했다. 

그래서 광종은 여기에서 3일간 쉬면서 절에 있던 샘물을 복용했더니 씻은 듯이 속병이 나았다고 한다.[31]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이 샘물을 어정수(御井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아직도 극락보전 뒤편에 

샘물이 남아있다. 

이 일로 광종은 절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이 절을 칠성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후세사람들이 어정수를 약물이라 부르고 있다.[31]

963년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와 재회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펴나간 것은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귀법사의 승려 균여(均如)·탄문(坦文) 등을 통하여 호족세력에 반발하는 일반민중들을 포섭하고,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다.[32] 

968년에는 충청도 논산에 혜명이 관촉사를 창건할 때 지원하였다.


967년에는 최행귀에게 명하여 균여의 보현원십가를 한문으로 번역케 하였다. 

968년(광종 19)에는 고승들을 나라의 스승으로 초빙하여 국사·왕사의 이사제도(二師制度)가 시작되었다. 

광종은 혜거(惠居)를 국사로 삼아 홍화사(弘化寺)·삼귀사(三歸寺)·유암사(遊巖寺) 등의 절의 창건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고, 탄문(坦文)을 왕사로 삼았으며 

974년에 혜거가 죽자 탄문을 국사로 삼았다. 

잇단 왕족과 호족들의 처형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불교 법회 등을 통해 달래려 했다. 

그러나 불교 승려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발생한다. 

968년(광종 19년) 균여가 다른 뜻을 품었다는 이유로 고발당하고 탄문이 귀법사를 장악한다.[33]

한편 970년(광종 21년)부터는 충청남도 논산에 대규모의 석불을 중수하였다. 

이 석불은 광종 생전에는 완공을 못보고 1006년(목종 9년)에 이르는 37년이라는 오랜 불사 끝에 

완성되었다.[34] 

석불조각 공사가 수월하지 않자 고민하던 혜명 스님의 눈에 어린 아이가 흙을 가지고

 '부처를 모시는 놀이'를 하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모래를 쌓고나서 그 위에 부처를 세우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그 방법을 적용해 

불상을 세우게 된 것이다.[34]

광종이 이처럼 커다란 미륵불을 조성하게 한 이유는 나라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아 

왕권확립의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에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는 상징물로 

거대한 부처를 조성하게 한 것이다. 

미륵불을 건설할 마땅한 장소로는 옛 백제를 그리워하는 유민들에게 

이젠 새 왕조가 열렸음을 상기시켜주기 위해 후백제의 고토 논산이 그 장소로 적합했던 것이다.

생애 후반[편집]

961년 4월 홍수가 나자 광종은 궁궐 수호와 복원의 목적으로 수영도감(修營都監)을 설치하고 

당숙인 정광(正匡) 왕육(王育)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35]

한편,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長靑)·위화(威化)·무주(撫州)·안삭(安朔)·습홀(濕忽)·송성(松城)·낙릉(樂陵)·운주(雲州)·

신도(信都)·안융(安戎) 등 주로 평남·북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長平)·박평(博平)·고주(高州)·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에 축성하였다.

965년 2월 첫째 아들 왕자 주(후일의 경종)를 태자로 책봉하고, 장생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광종은 자신의 아들인 태자 주 또한 의심하였지만 

둘째 아들 효화 태자가 요절한 관계로 태자 주 이외엔 왕위를 물려줄 다른 아들이 없었다.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던 태자 주는 일체 자신의 뜻을 외부로 표출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광종 말년에 이르러서는 세상이 어지럽고 형장이 잇달아서 

역세(歷世) 훈신숙장이 죽음을 며치 못했던 바 경종대에 살아남은 구신은 겨우 4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29] 

965년 7월에는 그의 측근이었던 내의령 서필이 병사하였다. 

이후 그의 불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968년 악몽을 꾼 후 재회를 열었으며 방생소를 두고 도살 금지령을 내렸다.

971년 12월 고려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각지의 호족과 백성들은 왕의 탓으로 돌렸고, 

이를 겨우 수습하였으나 972년 2월 다시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이 무렵 그는 악몽을 꾸고 그해 8월 죄수들을 대대적으로 사면하는 대사면령을 내렸다. 

972년말 내의시랑 서희를 책봉주청사로 송나라에 파견하여, 

송나라 황제로부터 조칙으로 광종에게 식읍과 칭호를 받고, 

책봉주청사로 파견된 서희, 최업, 강례, 유은 등도 특별히 송나라의 관작을 제수받고, 

송나라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다.

최후[편집]

973년 함경남도 장평진, 박평진과 고주에 성을 쌓았고, 신도성을 수축하였다.

974년(광종 25년) 양주 자재암의 중수를 명하여 각규대사가 중창케 했다.[36] 

그해, 서경 사람 연가(緣可)가 반역을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하였다. 

그해 국사 혜거가 76세로 사망하자 탄문을 국사로 삼았다. 

그러나 탄문도 975년 3월 병으로 76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975년 여름 갑자기 병환이 나서 그해 5월에 몸져누웠고, 

며칠 뒤 개경 황궁의 정침(正寢)에서 붕어하였다. 

그의 나이 향년 51세였다. 

묘호(廟號)는 광종(光宗)으로 하고 대성(大成)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능은 경기도 개풍군에 위치한 헌릉(憲陵)이다.

평가와 비판[편집]

왕이 즉위한 처음에는 신하를 예우하고 정치를 현명하게 처결했으며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보아 주고 선비들을 존중했다.
밤낮으로 쉼 없이 정무에 힘쓰니 거의 태평성대가 찾아온 듯 했다.
그러나 중반 이후로는 참소를 믿어 사람들을 많이 처형시켰고
지나치게 불교를 신봉했으며 절도없이 사치한 생활을 했다.
 
— 고려사 권 2, 광종 26년조 기사

“광종은 아랫사람을 예로 대하였고 사람을 알아 보았으며,
친하고 귀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고 호강(豪强)한 자는 항상 꺾었으며,
소천(疎賤)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환과(鰥寡)를 돌보아 생기를 북돋아 주었다.
즉위한 해로부터 8년까지는 정치와 교화가 맑고 공평하였으며 형벌과 상이 알맞았다.
쌍기가 등용된 이후로는 문사(文士)를 높이고 중히 여겨 은례(恩禮)가 지나쳤다.
이로 말미암아 재주 없는 자들이 함부로 벼슬길에 나와 차례가 없이 뛰어올랐으며,
주식(酒食)과 잔치 놀이가 연이어 끊어지지 않았다. 

남쪽의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다투어 투의(投依)하기를 원하고 후생(後生)이 다투어 

벼슬길에 나오고, 옛 덕이 있는 사람들이 점점 쇠진하여졌다.

다시는 서정(庶政)을 부지런히 하지 않고 신료를 접견하지도 않았으므로 

시기가 날로 심하고 군신 사이의 의논이 날로 막혀서 

시정(時政)의 득실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더구나 부처의 일을 혹신하고 법문(法門)을 과중하게 하여, 

오로지 수복(壽福)을 구하고 기도만을 일삼아 한도가 있는 재력을 다하고 한도가 없는 인연을 

지으며, 스스로 지존(至尊)을 가볍게 하고 작은 선(善)을 짓기를 좋아하였다.


궁실은 반드시 제도보다 넘치게 짓고 복식(服飾)은 모름지기 호화스러움을 다하며, 

토목의 공사를 알맞은 때에 아니하고 꾸미는 일은 쉬는 날이 없었다. 

말년에 와서는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경신년으로부터 을해년에 이르기까지 16년 간에는 간흉이 다투어 나오고 

참소와 헐뜯음이 크게 일어나니, 군자는 용납될 곳이 없었고, 소인은 활개를 쳤다. 

드디어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종이 그 주인을 논박하기까지 되어 

상하가 서로 마음이 떠나고 군신(君臣)은 해이(解弛)해졌으며, 

구신(舊臣)과 숙장(宿將)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고 골육 친척이 모두 멸망되었다. 

더구나 혜종이 형제를 잘 보전하고 정종이 방가(邦家)를 잘 보존한 것은 

은혜나 의리로 논할 것 같으면 무겁다 할 만한데, 양조(兩朝)가 모두 아들 하나만 있었는데 

그들의 성명(性命)을 보존치 못하게 하였으니, 

그의 덕을 갚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다시 그들의 원한을 깊이 맺었던 것이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한 아들까지도 의심하고 꺼렸으므로 

경종(景宗)이 동궁에 있을 적에 매양 편안치 못해 하였는데 다행히 왕위는 잇게 되었다. 

아, 어찌 처음에는 선(善)하였으면서 뒤에는 선하지 못함이 이에 이르렀는가?”

 
— 고려사 최승로 열전, 최승로의 광종에 대한 평

평가[편집]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익재 이제현은 그를 평하기를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은 일은, 

광종이 본래 문(文)의 전아함을 가지고 풍속을 변화시키려 했던 뜻을 보았음이 있고서 

쌍기 역시 그 뜻을 받들어 따라서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으니, 

도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有以見光宗之雅 有用文化俗之意 而冀亦將順 以成其美 不可謂無補也)"라고 

평하였다.

광종의 과감한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였다.[17] 

또한 과거제를 통하여 신진세력이 대거 등장함으로써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며, 

문화적으로도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발전을 일궈냈다.[17]

 혜종과 정종은 각각 박술희(朴述熙)와 왕식렴(王式廉)으로 대표되는 다른 강력한 세력기반에 의지하여 

왕권을 부지하였으나, 광종은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쌓아 왕권을 확보하는 데 힘썼다. 

권신·부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근친결혼을 장려하고 외척의 폐를 없애려 했다.[37] 

광종은 고려 초기 왕권강화를 위하여 가장 끈기 있고 정력적으로 노력하여 큰 성과를 거둔 왕으로서 

주목된다.[38]

그가 과거 제도를 본격 도입, 정착시켜서 실력에 따른 인재등용의 길을 확립했다는 평가도 있다. '

신분적 제약이 많던 신라 시대에도 최치원 등 육두품 관료들이 학문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신문왕이 국학을 설립하고(682년), 원성왕이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788년

유학을 진작시켜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광종에 의해 과거 제도가 본격 도입되지 않았다면 시험에 의해서 관리를 등용하는 제도는 

쉽게 마련될 수 없었을 것이다.[16]'라는 평이다.

비판[편집]

광종 개혁정치는 새 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신감과 위엄을 과시하고 

새로운 국가체제와 정치질서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높이 살만하나 

개혁의 범위가 주로 정치에 한정되어 중앙의 정계개편에 치중한 결과, 

지방제도 개편이나 광범한 경제·사회적 제도의 개편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그는 개혁 과정에서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해 내국 관료들의 원망을 들었으며, 

호족은 물론 혈육과 친인척에 대해서도 자기에 대한 적대 행위의 가능성을 항상 경계하고, 

역모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신하들은 물론 가족과 친척마저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남겼다. [17] 

수 많은 호족들과 이복아우인 효은태자, 조카인 혜종의 아들 흥화군,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등 

왕족들이 숙청을 당하였고 그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과 혼란이 가중됐다.

그리고 노비안검법 시행이 가져온 부작용도 존재하였다. '노비로 있던 자가 자신의 옛 주인을 헐뜯고 

욕하는 일로 싸움이 벌어지는 사건도 잇따라 터졌고, 

노비와 양인 계층의 이반으로 신분질서가 문란해저 사회적 토대가 흔들리는 양상도 일부 발생했다.[15] 

또한 광종 근위세력과 호족세력간의 충돌로 인해 정계의 대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15]'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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