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2일 금요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운명하시면서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하느님!><몸은 편안하나...
작성자모아작성시간26.06.12조회수36 목록 댓글 02026년 6월 12일 금요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마태 11,25-30)
복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운명하시면서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하느님!>
또 다시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 성심 공경에 대한 근거는 요한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 금요일 오후 세시,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
십자가형은 형 집행 방법 중에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유명합니다. 체력이 좋은 사형수들은 십자가 위에서 이틀 사흘까지 견딥니다. 집행관들도 피비린내 나는 사형장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겠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사형수들의 얼굴을 유심히 봅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적당한 때가 되었다 싶으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다리를 부러트립니다. 그럼 체중이 아래로 쏠리고 심장에 압박이 가해지면서 즉시 운명하게 됩니다.
마침 다음날이 안식일이어서, 유다인들이 군사들에게 빨리 좀 처리해달라고 청합니다. 집행관들이 먼저 좌도와 우도의 다리를 꺾고 난 다음, 예수님 다리도 꺾으려고 봤더니, 이미 운명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 사살 차원에서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뭐가 나왔을까요?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예수님의 옆구리, 곧 예수님의 심장, 예수 성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물은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을 의미합니다. 피는 새로 태어난 백성을 양육하는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많은 분이 사제인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미사 중 성찬의 전례 시작 때, 포도주에 물을 살짝 부으시던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 포도주가 너무 독해서 물로 희석시키는 의미인가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 19장 34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들은 포도주잔에 물을 살짝 첨가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사 경문에 살짝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미사 집전 사제는 포도주잔에 물을 넣으면서 마음 속으로 한 문장을 읽게 되어있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물은 인성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결국 포도주에 물을 넣는 행위는 죄인인 우리의 인성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 곧 예수 성심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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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몸은 편안하나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한 자매님이 저에게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중년 자매님이었는데 집도 넉넉하게 잘 살고 자녀들도 말썽 안 부리고 성당 잘 다니며 남편도 가정에 충실하고 직장에서도 착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무슨 일로 밤에 혼자 앉아 눈물을 자주 흘린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허한 것 같은데 원인을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입니다. 몸이 편하다고 다 편한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해서 다 편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까지 편해야 합니다. 몸은 잠을 자면 되고, 영혼은 자기 생각을 멈추고 주님 말씀 안에 머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마음도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마음도 안식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몸은 물질로 되어 있어 물질적인 환경에서 쉴 수 있고, 영혼은 정신적이라 정신적인 환경 안에서 쉴 수 있지만, 마음은 영적이라 영적인 관계 안에서만 쉼이 가능합니다.
영은 사랑입니다. 나의 마음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안에서만 안식을 누립니다.
영국의 문인 부르크가 미국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부두에는 전송객으로 많은 사람이 북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전송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운함을 느낀 부르크는 부두에서 놀고 있는 한 어린아이에게 “얘야! 내가 네게 6실링을 줄 테니 내가 저 배를 타고 떠날 때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렴”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6실링을 받은 아이는 정말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르크는 고백합니다.
“돈 받고 흔드는 손을 보고 나는 더욱 큰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사랑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내가 먼저 누군가의 마음을 쉬게 해 주는 마음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의 쉼터가 되어주지 못했다면 누구도 나의 쉼터가 되어줄 수 없습니다.
뉴스에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한 청년이 차 안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호흡이 멈춘 할머니를 구 강대 구강 호흡법으로 살리려고 하는 장면이 찍힌 것입니다.
손자는 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호흡의 어려움을 겪고 의식을 잃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를 모시고 온 손자는 100% 자신도 바이러스에 전염될 것을 알면서도 구강 대 구강 호흡으로 할머니를 살리려고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운명하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행복한 죽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런 손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자가 아무것도 받지 않았는데 그런 사랑을 베풀 줄 알았을까요? 그만큼 할머니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할머니도 손자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을 자신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하늘나라에서도 안식을 취하시겠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처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처는 결국 할머니가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 마음 안에 자신의 안식처를 만들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알려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의 스승이셨습니다.
온유함은 사람을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항상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고 상대가 더 영광을 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입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우신 교회에서 안식을 누리셨고, 우리는 또한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영적인 자녀들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다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가, 아니면 화를 내고 심판하는 마음으로 대하는가.
내가 먼저 안식처가 되어주지 않으면 누구도 나에게 마음 쉴 곳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출처: 복음말씀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