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자기 얼굴에 묻은 것을 거울에서 떼려고 하지는 않는가
작성자모아작성시간26.06.22조회수20 목록 댓글 02026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마태 7,1-5)
복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오래전 학생 수도자들을 양성 책임자로 살 때였습니다. 당시 공동체에는 신학교와 신학원에 다니던 젊은 형제들로 북적였습니다. 당시 젊은 형제들은 막 운전면허를 취득한 초보운전자들이었는데, 소년원이며 분류 심사원, 법원 등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접촉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과속, 신호 위반 등으로 딱지가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초보들이니 그러려니 했었는데, 한번은 일주일 사이에 세 장의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날을 잡아, 모두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했습니다.
“우리가 수도자로서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데다 과도한 지출을 한다는 것, 이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제발 시간 넉넉하게 출발하고, 양보 운전, 방어 운전 잘하면서 앞으로 제발 딱지 안 날아오도록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공동체 분위기가 싸해졌겠지요. 다들 어색한 침묵 속에 저녁 식사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들 조심하겠지 했는데, 바로 그 다음 날 또 하나의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봉투를 뜯어보는 제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뜯어보니 과속에 신호 위반에 법칙금이 7만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또 이렇게 날아오는구나, 하는 마음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습니다. 범인이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날짜와 시간, 장소를 확인해보니, 범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황급히 수녀원 새벽 미사를 가던 중에 찍힌 것입니다. 저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은밀히 은행에 가서 범칙금을 납부했습니다. 지난 시절 돌아보니, 그런 부끄러운 케이스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니 그 시절,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이웃의 부족함이나 실수에는 가차 없는 잣대를 들이대지만, 내 부족이나 실수 앞에는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참 인간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도 않고 파악하려고도 애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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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기 얼굴에 묻은 것을 거울에서 떼려고 하지는 않는가?>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며 어떻게 이웃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사실 이런 개요, 돼지의 수준의 사람에겐 성체를 줘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마태 7,6 참조).
그런데 사람이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그럴 처지가 아님을 알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저의 모습은 사실 제가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나 신학생 때 사제를 비판했던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때는 사제가 아니었기에 사제를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니 내가 심판했던 사제의 모습으로 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본당 사제들이 성당에서 권위적인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모습의 사제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순간순간 찍은 저의 사진 속에는 교만한 사제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제가 비판했던 사제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에서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깊이 숙이고 90도로 인사하는데, 저는 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악수를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면 제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저도 몰랐을 것입니다.
저는 사제들이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클러지 셔츠만 입겠다고 다짐했고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도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비판했던 사제들보다 더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옷은 많아서 입지 않는 것이 더 많고, 스마트폰은 최신식이며, 차는 이천cc 중형차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비판했던 사제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까맣게 잊고, 또 내가 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하는 사제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를 심판하던 모습과 같습니다.
남을 심판하는 일은 결국 자신 안의 죄를 감추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죄를 짓지 않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죄의 씨앗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이웃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 안에 아름다움이 있으니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고, 더러움을 아니까 더러운 게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는 이유는 백 퍼센트 내 죄를 합리화하기 위함입니다. 남을 교만하다 심판하면 반드시 그 사람도 교만하고 남을 이기적이라 심판하면 그 사람도 반드시 그렇습니다. 지금은 안 그래도 언젠가 그 교만과 이기심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날이 올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나무를 먹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심판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생명나무인 성체를 영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인간이 예수님이 되지 않는 이상 심판은 저절로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합니다.
타산지석은 ‘다른 산의 나쁜 돌이라도 자신의 구슬을 가는데 유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내가 이웃에게서 보는 단점은 반드시 내 안에 있는 죄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화가 난다면 그것으로 자신을 바꾸려 해야 합니다.
나의 얼굴에 묻은 것은 털어내려면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이 내 얼굴에 묻은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다른 사람들의 단점만을 바꾸려 한다면, 이는 마치 자신의 얼굴에 묻은 것을 떼어내려고 계속 거울만 긁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웃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들보’라고 번역된 단어는 건축에 쓰이는 큰 나무를 말합니다. 그리고 ‘티’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것들을 잘게 쪼개면 나오는 작은 나뭇가지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들의 눈에서 보이는 작은 나뭇가지들을 다 모으면 내 눈의 들보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의 총합은 결국 내 눈에 있는 들보입니다. 남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을 다 모으면 나의 자아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들보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 이웃을 심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 호흡이 열 번 정도 남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그 호흡으로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이웃에게 단점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거울을 긁지 말고 그 손을 나의 얼굴로 향해야 합니다.
출처: 복음말씀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