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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묵상

2026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정말 필요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식별력!><베풀면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작성자모아|작성시간26.06.23|조회수28 목록 댓글 0

2026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마태 7,6.12-14)

 

복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정말 필요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식별력!>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오 복음 7장 13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이며 친지, 세상의 부귀영화 다 버리고 깊고 깊은 사막으로 들어간 수도자들의 삐쩍 마른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초췌한 얼굴, 그러나 깨달음의 기쁨에 빛나는 얼굴!

세상에 살던 그들은 어느 순간 느꼈을 것입니다. 갖은 유혹거리들로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 한가운데 있다가는 평생 헤매도 진리를 못 찾겠구나, 일생일대의 깊은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수밖에...그들은 결연히 세상을 등지고 혈혈단신으로 아무도 없는 깊은 사막 어두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선택과 집중이었습니다. 진리 중의 진리이신 하느님을 보다 더 잘 파악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 하느님의 말씀의 핵심을 깨닫기 위한 선택과 집중이었겠지요.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에너지의 99퍼센트를 기도와 묵상에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나머지 1퍼센트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한 것이었겠지요. 그러니 아마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의 포기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다니는 맛집이며, 골프 투어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사막에서의 단독 수도 생활의 필수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섭생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묵상에 묵상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취미가 단식이요, 특기가 고행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극단적 선택과 집중의 결과가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의 실체를 손에 잡힐 듯이 바라보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고 단 것인지를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그들은 이제 하산할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그 소중한 깨우침을 고통당하는 백성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과 함께 사막을 걸어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보다 큰 선이요 아름다움이요 절대적 가치관이신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옛날 사막의 교부들처럼 가족과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사막으로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매일의 삶 안에서도 사막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매일 매 순간 ‘좁은 문’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일상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 시대 참된 영성가들은 바로 이 선택과 집중을 잘 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좋은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빨리 오라고 우리를 손짓합니다. TV나 컴퓨터를 켜면 즉시 이거 사라 저거 사라 외치는데,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꼭 필요한 물건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영성가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필요한 많은 것들 가운데 정말 필요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식별력, 그것이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모든 일을 다 할 수도 없고 다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영성입니다. 자신이 꼭 서 있을 자리에 반드시, 그것도 항상, 기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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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베풀면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은 세상도 익히 아는 위대한 법칙, 이른바 황금률을 담고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똑같이 베푸는데, 어떤 베풂은 사람을 살리고 어떤 베풂은 사람을 망칩니다. 어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을 성인으로 키우고, 어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을 폭군으로 키웁니다. 그 둘을 가르는 경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저는 이 한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무엇을 주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주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먼저 우리의 민낯을 봅시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무조건적인 허용과 타협으로 곧잘 착각합니다. "신부님, 무조건 퍼주고 다 이해해 줘야 참사랑 아닙니까. 자식이 엇나가도, 이웃이 무례해도 십자가 지는 마음으로 참아야지요." 듣기엔 거룩한 희생 같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다를 때가 많습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서, 갈등을 감당하기 싫어서 질서를 뭉개 버린 비겁함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선악의 경계를 허물고 스스로 영적 호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을 말씀하시기 바로 직전에 무서운 경고를 박아 두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무턱대고 내어 주는 가짜 사랑이 어떤 파국을 부르는지 미리 일러 두신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진주가 짓밟히는 까닭은 진주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워하며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주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두려워서 주거나 어쩔 수 없이 주는 것은, 사실은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기는 것입니다. 강요당해 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요당해 내놓은 것은 상대를 결코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도리어 "내가 으르렁대면 저 사람은 내놓는구나" 하는 것을 가르쳐, 상대의 교만과 탐욕만 키웁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온 토르라는 개가 이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순하게 생긴 이 개는 온 식구를 지배하며 가스라이팅을 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밥을 먹으려 하면 사납게 으르렁대며 덤볐습니다. 가족은 개가 화낼까 눈치를 보며 벌벌 떨면서도 밥을 챙겨 주고 비위를 맞췄습니다. 이를 본 훈련사가 일침을 놓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저 개에게 사냥감처럼 몰이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두려움의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가족은 분명 매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며 주었기에, 그 줌은 개를 길들이기는커녕 개를 폭군으로 키웠습니다. 두려움의 냄새를 맡은 짐승은, 받을수록 더 사납게 무는 법입니다.

같은 일이 사람 사이에서도 벌어집니다. 한 양육 프로그램에 나온 여섯 살 아이와 어머니의 사연입니다. 아이가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어머니를 때리며 무법자처럼 구는데도, 어머니는 혼내지 못합니다. "우리 애가 기죽을까 봐요" 하며 달래기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머니에게는 어린 시절 제 친정어머니에게 한 번도 칭찬받지 못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 결핍을 보상받으려고, 제 자식만은 무조건 오냐오냐 키우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아이를 올바로 이끌려고 준 것이 아니라, 제 옛 상처를 달래려고 주었습니다.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준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연민으로 덧칠된 줌 앞에서, 아이는 통제 불능의 돼지가 되어 어머니의 삶을 물어뜯게 되었습니다.

이 어긋난 사랑이 한 집안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구약의 엘리 사제가 똑똑히 증언합니다. 그의 두 아들 홉니와 피느하스는 주님께 바치는 거룩한 제물을 가로채고 성소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대사제이자 아버지인 엘리는 마땅히 하느님의 율법으로 이들을 엄히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식을 향한 눈먼 정 때문에 "얘들아, 그러지 마라."(1사무 2,24 참조) 하는 솜방망이로
그치고 맙니다. 거룩한 제물을 두 돼지에게 계속 던져 준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진노하며 물으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존중하느냐?"(1사무 2,29 참조) 결국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비참히 죽고, 하느님의 궤는 빼앗기며, 그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율법의 선을 지우고 맹목적 정에 휘둘린 그 거짓 사랑이, 결국 온 집안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엘리는 자식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식과 부딪치기를 두려워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자식을 목숨처럼 사랑하고도, 정반대의 열매를 거둔 어머니가 있습니다. 눈물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입니다. 젊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 집에 돌아왔을 때, 모니카는 "그래도 내 자식이니 품어야지" 하며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단에 빠진 아들을 향해 단호히 집 문을 걸어 잠그고, 한 상에서 밥 먹는 것조차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십시오. 모니카가 문을 닫은 것은 아들이 미워서도, 아들이 두려워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닫힌 문 뒤에서 평생을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단호함은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엘리는 자식이 두려워 진주를 던져 주었고, 모니카는 자식을 사랑하여 진주를 거두어들였습니다. 그 차이가 한 집안은 멸문으로, 한 아들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렇다면 호구가 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참된 줌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기쁘게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저마다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지, 아까워하면서 하거나 마지못해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두려워서 주는 것도, 마지못해 주는 것도 하느님의 줌이 아닙니다. 강요당한 줌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쁘게, 자유로이 주는 것만이 참된 사랑이며, 그런 줌만이 받는 이를 변화시킵니다. 두려움의 냄새를 풍기며 주면 상대의 탐욕을 키우지만, 기쁨의 향기를 풍기며 주면 상대의 마음을 녹입니다.

이것을 가장 완전하게 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협박당해 십자가에 오르신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목숨을 빼앗기신 것이 아닙니다.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8 참조) 그분께서는 두려움 없이, 기쁘게, 당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강요당해 빼앗긴 줌이 아니라 자유로이 바친 줌이었기에, 그 줌은 온 인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두려워서 빼앗기는 줌은 폭군을 키우고, 기뻐서 바치는 줌은 세상을 구원합니다.

베풀면서도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두려움과 자기 연민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상처를 메우려고, 혹은 미움받기 싫어서 마지못해서 주지 마십시오. 그런 줌은 사랑이 아니라 강요당한 헌납이며, 상대의 교만만 살찌울 뿐입니다.

상대를 교만하게 하는 내어줌은 가장 안 좋은 내어줌입니다. 겸손하게 만드는 내어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줄 때는 기쁘게 주고, 거두어야 할 때는 사랑으로 단호히 거두십시오. 내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건히 서서 두려움의 냄새를 지울 때, 비로소 우리의 줌은 기쁨의 향기를 풍기며 사람을 좁은 문으로 이끄는 보람된 사랑이 될 것입니다.

 

 

 

 

 

출처: 복음말씀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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