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아합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예언자들을 카르멜 산에 모이게 하였다. 엘리야가 온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20-21) 엘리야와 우상 숭배자들의 대결 장소인 '카르멜'(karmel)은 '동산' 혹은 '과수원' 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카르멜 산이 동산이나 과수원을 연상시킬 정도의 울창한 숲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명칭으로 보인다. 카르멜산은 팔레스티나 지중해 연안 중앙부에 돌출한 산악지대로 남동으로 24km가량 이어진 일련의 산맥이다.(예레46,18) 카르멜 산맥 동남단 최고 높이는 표고 546m에 달하지만, 서북쪽으로는 갈수록 점차 낮아져 하이판만의 남단의 정상 부근은 겨우 169m에 불과하다. 카르멜산은 평야와 바다를 광범위하게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있었으며, 많은 동굴과 무성한 숲으로 인해 고대로부터 우상 숭배 처소로 널리 이용되어 왔다. 특히 카르멜 산은 바다로부터 몰려오는 비가 내리는 육지의 첫 지점이었기 때문에, 그 정상에는 '기후의 신'을 섬기는 성소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과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시돈의 중간 지점이었다. 따라서 이곳 카르멜 정상은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가 참 신(神)의 능력을 겨루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대결 장소는 카르멜 산 동단에 있는 '번제의 장소'란 뜻을 지닌 현재의 '엘 무라카' 라고 한다. 한편,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간의 카르멜 산 대결은 참 신과 거짓 신과의 승부로서 너무나 당연하게 주 하느님만이 유일한 참된 신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열왕18,38.39)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21) 엘리야는 16절에서 20절 단락에서 아합을 만나 우상 숭배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한 바 있다. 이제 21절에서 40절 단락에서는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들과의 본격적인 대결이 카르멜 산에서 벌어지게 된다. 이것은 '누가 살아있는 참 신인가?'를 판가름하기 위한 대결이었다. 본문은 엘리야가 바알 예언자들과의 대결에 앞서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양다리를 걸치고' 로 번역된 '알 셋테 핫쎄입핌'(al shethe hasseippim ; between two opinions) 에서 '핫쎄입핌'은 '분리하다'라는 뜻의 동사 '싸아프'(ssaph)에서 유래된 명사 '싸이프'(ssaiph)의 복수형 '쎄입핍'(sseippim)에 정관사 '하'(ha)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같은 어근을 가진 '싸이프'(ssaiph)에서 찾을 수 있다. '싸이프'는 바위의 갈라진 '틈'(판관15,8)이나 나무의 '가지'(이사17,6)를 뜻한다. 따라서 '쎄압핍'은 바위의 갈라진 틈이나 갈라진 나무의 가지처럼 '갈라진 의견이나 생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문의 '셋테 핫쎄임핌'은 '두 가지 다른 의견' 즉 '바알 신앙과 하느님 신앙'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엘리야는 본절에서 이 단어가 지닌 '의견'이나 '생각'이라는 이차적 의미만을 나타내기보다는 '바윗 틈'이나 '나뭇가지'라는 일차적 의미도 함께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절뚝거릴 작정입니까'로 번역된 '포쎄힘'(posehim ; halt, waver)과 '사이에서'로 번역된 '알'(al ;between)이란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포쎄힘'은 '(다리를)절다'(2사무4,4), '절뚝거리다'라는 뜻을 지닌 '파싸흐'(passah)의 분사형이며 '알'(al)은 '~사이에서'라는 뜻보다는 '~위에서' 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는 전치사이다. 따라서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두 바위 틈 혹은 두 개의 나뭇가지 위에서 절뚝거리고 있느냐?'가 된다. 이것은 하느님 신앙과 바알 신앙이라는 두 신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혼합주의적 신앙 양태를 보이고 있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즉 두 개의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마치 곡예를 하듯, 그것도 성한 몸이 아니라 절뚝거리는 다리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절뚝거리다' 란 의미로 사용된 '파싸흐' 동사는 26절에서도 사용되어 바알의 예언자들이 단(壇) 주위에서 춤추는 동작을 나타내는 '절뚝거리며 돌았다'(뛰놀았다 ; leaped, danced)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용어의 일치는 절름발이처럼 하느님과 바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은 사실상 바알의 예언자들과 장단을 맞춰 '춤을 추는 것'(파싸흐 ;passah)이나 마찬가지임을 암시하기 위한 문학적 기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21) 하느님이든 바알이든 어느 한 쪽을 택하라는 엘리야의 촉구에 대해 백성들은 한 마디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제벨은 아합을 앞세워 바알의 신당을 짓고 바알 숭배를 조장함(16,31-33) 은 물론, 그 반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주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18,4) 반면, 하느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된 신앙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극단의 신앙 싸움에서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양다리를 걸치고 일종의 혼합주의 신앙으로 그들의 편리만을 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더 큰소리로 부르며,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찔러댔다' (28)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 배후에 있는 '그 규례'가 정확히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런 행동에 대해, 인신 제사를 대신한다는 견해에서부터, 피의 유출은 신과 예배자 사이의 계약적 유대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는 견해에 이르가까지,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으로 단언할 수 없다. 다만,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해(自害)행위가 바알 예배의 한 정규 의식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관습을 금지시킨다. (신명14,1 ; 예레16,6 ; 41,5 ; 47,5참조) '물을 네 항아리에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시오. 그런 다음에 그는 "두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그들이 두 번째도 그렇게 하자, 엘리야는 다시 "세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하고 일렀다. 그들이 세 번째도 그렇게 하였을 때, 물이 제단 둘레로 넘쳐흐르고 도랑에도 가득찼다.' (34-35) 물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12 항아리나 부어졌다. 이로써 제단 전체가 완전히 물에 젖게 했다. 이것은 거기 모인 모든 이들에게 어떤 인위적인 속임수에 의해 제단에 불이 붙었다고 하는 일체의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서 엘리야가 의도적으로 취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같은 행동은 이를 명하는 엘리야가 하느님의 응답과 하느님의 행하실 역사에 대해 얼마나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또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 피앗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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