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말씀 해설

[독서]2026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제1독서 (1열왕 21,17-29)

작성자모아|작성시간26.06.16|조회수20 목록 댓글 0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 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27-29)
 
여기까지는 엘리야를 통해 전해진 아합과 이제벨을 향한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 신탁과(20-24), 저자가
아합에 대한 심판의 정당성을 부연하여 밝힌(26,27절) 내용이 기술되었다. 이어지는 21장의 마지막
단락인 27-29절에서는 하느님의 심판 신탁을 들은 아합의 회개와 그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심판
유보 사실을 기술한다.

그 중에서 본문은 다섯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아합의 회개하는 행위 마치 눈 앞에서 이루어지듯이
자세히 묘사한다. 옷을 찢거나(2사무13,19 ;욥기2,12,) 맨 몸에 자루옷을 걸치는 행위(굵은 베로 몸을
동이는 행위 ; 2열왕6,30)는 전형적인 회개의 모습이었으며, 단식을 하는 것은 매우 강력한 자기 부인의
표현이다. 그리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니는  행보를 천천히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일종의 근신의
표시로 일상생활 모두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내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렇게 아합이 회개의 모습을 보였을지라도, 인간의 관점으로 보자면 그는 결코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없는 자였다. 백성을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게 하여 파멸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22절) 자신이
돌보아야 할 백성인 나봇을 탐욕으로 인해 모함하여 살해하는 등의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아합에게 크나큰 자비를 베푸시어 심판 실행을 
유보하여 주신다.(29절)





이처럼 극악무도한 아합의 회개까지도 받으시는 하느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죄에 대해서 만큼은

철저히  징계하시지만, 죄인이 회개할 때에는 죄인 자체는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때의 아합의 회개가 진실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아합의 모습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아합은 하느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자비에 의해 자신에게 임할 재앙이 자신을 비켜 아들의 시대로
옮겨가자 몇 년이 못 되어 다시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아람과 전쟁을 벌이다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22,37.38)

즉 엘리야가 먼저 선언한 대로, 그의 가문 전체의 파멸은 일시적으로나마 그가 보인 겸손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로 잠시 유보되었지만, 비참한 죽음을 당하리라는 아합 개인에 대한 심판 예언은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 예언은 아합 이후 아하즈야를 거쳐 요람 시대에
예후의 쿠테타로 성취되어진다.

'그 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8)
 
아합의 회개하는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또 다른 계시의 말씀을 주셨다. 첫번째
신탁 나봇을 죽이고 그의 기업인 포도밭을 강탈한 아합왕과 그의 일가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였으나 
본절 이하에 나오는 두번째 신탁 심판을 유보하신다는 메시지였다.

아합 같은 악인에게도 하느님의 자비가 베풀어진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이해를 따라서 내려지는 자비가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고 자비로운 성품에 근거해서 
내려지는 신적 자비이다. 분명 하느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지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이사42,33; 마태12, 20) 죄인이 죄를 떠나 회개하면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 (29ㄱ)


의문문으로 되어 있는 본문은 죄인이 하느님 앞에 회개하여 돌아오자마자 즉각적으로 반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잘 드러내준다.(루카15,7)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유발했던 행위를 나타내는
새 성경의 '(자신을)낮춘 것'(겸비, 겸손)에 해당하는 '니크나으'(niknah)의 원형 '카나으'(kanah)는, 
'무릎을 꿇다', '엎드리다'라는 의미이며, 본문처럼 수동형일 때에는 '낮아지다'(2열왕22,19), 
'뉘우치다'(2역대32,26)라는 의미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합이 하느님께 대적하기를 멈추고 하느님 앞에 낮아져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자, 
이에 대해 자비를 베푸시고 심판을 유보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한편, 본 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와 같은 하느님의 자비가 부각되는 내용이 수록된 것은 저자가 본장에서
강조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서 저자가 속한 당시의 상황과 이를 일차적으로 읽을 대상들, 즉 하느님의 징계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독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서 저자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은 죄로
인한 것임을 아합의 범죄와 이에 대한 판 선언을 통하여 분명하게 인식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심판
선언 이후에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있다. 이같은 본문의 결말은 궁극적으로 이를 읽는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 (29ㄷ)


본문의 '그의 아들' 요람을 지칭한다. 본문의 말씀과 같이 아합의 아들 요람은 예후의 활에 맞아 
전사하여 나봇의 밭에 던져지게 된다(2열왕9,21-26). 한편, 이렇듯 아합의 죄로 말미암아 그 아들이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당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아비의 죄로 인해 죄의 책임을 자손들에게 전가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불의한 아비로 인해 의로운
자손을 처벌하시는 분은 더더욱 아니시다.

그러므로 본문의 심판 예언은 하느님께서 아합의 아들이 어떤 인물임을 이미 알고 계셨고, 아버지의
악한 영향을 받은 아합의 아들 요람을 당신이 죄 가운데 그대로 버려 두신다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같은 일들을 예고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심판의 시기를 유보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를 받아들이는 아합의
아들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아합이 회개를 통해
가문이 멸절되는 심판을 유보받은 것처럼, 이를 전해 듣는 아합의 아들 요람도 그의 아버지와 같이
회개하였다면, 그 심판은 지속적으로 유보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피앗사랑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