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시절의 쑨리런. 1948년 가을, 난징(南京) 소재 육군 부 총사령관 집무실. [사진 김명호 제공]
1956년 6월, 전 육군 총사령관 쑨리런(孫立人·손립인)이 관저에서 쫓겨났다. 부인과 함께 군사정보국이 지정한 타이중(臺中)의 거처로 이동했다. 연금생활이 시작됐다.
장징궈 사망 이후 연금서 풀려나
“대륙 시절 중국군 위용 과시
대만 안정에 초석 놓았다” 평가
쑨리런의 새로운 거처는 높은 담장이 사방을 에워싼, 군 소유 안전가옥이었다. 경비도 삼엄했다. 대문 앞 모래주머니 위에 장착한 기관총이 거리를 향하고, 국방부가 파견한 특수요원들의 눈빛은 보기만 해도 오싹할 정도였다. 군사정보국은 별도로 쑨리런의 거처를 감시했다. 옆에 3층짜리 건물 짓고 지휘부를 차렸다. 높은 곳에서 쌍안경으로 일거일동을 살폈다.
쑨리런은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외출이라도 할 때는 무장병력 탑승한 차량이 뒤를 따랐다. 총통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지시가 추상같았기 때문이다. 주방 요리사들도 대검을 차고 있었다. 구출하러 잠입한 사람의 목을, 한칼에 날릴 수 있는 무술의 고수들이었다.
20년이 흘렀다. 1975년 4월 총통 장제스가 세상을 떠났다. 장제스는 쑨리런에게 자유를 허락한다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아들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뒤를 이었다. 1988년 1월 18일, 철혈(鐵血) 통치자 장징궈가 사망했다. 33년 전 자취를 감춘 쑨리런의 이름이 지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언론 매체들이 쑨리런의 가족과 연결을 시도했다. 즈리완바오(自立晩報)가 “33년 전 발생한 항일명장 쑨리런 사건의 진상”을 보도했다. 온갖 매체가 뒤를 이었다. 쑨리런의 억울함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시키라는 내용이 연일 지면을 도배했다.
장징궈의 국장(國葬)이 끝났다. 국방부장이 두 차례 쑨리런을 방문했다. 온갖 예의 갖추며 입을 열었다. “행동과 언론의 자유를 누리기 바랍니다. 가고 싶은 곳 어디를 가도 좋고, 만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누구를 만나도 간섭할 사람이 없습니다.”
쑨리런에게 기자들이 몰려왔다. 자유를 회복한 소감을 물었다. 쑨리런은 담담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자유는 없다. 영원한 의무만 있을 뿐이다.” 야당 민진당(民進黨)도 여러 차례 쑨리런을 방문했다. 장제스의 잔인하고 포악한 면을 발표하라고 종용했다. 역시 “민족 영웅”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매번 거절했다. 답변도 한결같았다. “총통은 나의 상관이었다. 내겐 하늘 같은 존재였다. 허물을 말하는 것은 부하된 도리가 아니다. 내가 어려움을 겪었다고들 하지만, 총통의 명령이었다. 개의치 않는다.”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 언제였느냐는 질문에는 웃음을 보였다. “칭화대학(淸華大學) 시절이다. 군관학교 생도 시절도 즐거웠다.” 쑨리런은 바오딩(保定)군관학교나 황푸군관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국민당에 입당원서를 제출한 적도 없었다. 황푸 출신들이 우글거리는 국민혁명군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칭화대학과 미국 퍼듀대학 토목공정학과를 마치고 남부의 웨스트포인트라 일컫는 버지니아 군관학교를 졸업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쑨리런(맨 왼쪽)은 칭화대학 시절을 평생 잊지 못했다. 왼쪽 둘째는 중국 물리학계의 원로 저우페이위안(周培原). 1923년 봄 칭화대학 물리학과 휴게실. [사진 김명호 제공]
1990년 11월 중순, 쑨리런이 90세 생일 사흘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연금해제 2년 8개월 후였다. 각계의 평이 쏟아졌다. 서구 군사학자들의 평은 비슷했다. “쑨리런 장군은 출중한 재능을 갖춘 군사가였다. 2차 세계대전 내리, 남들이 부러워하고도 남을 만한 전적을 세웠다. 기계화부대 지휘에도 능했다. 서구 군사학자들은 장군을 동방의 롬멜이라 부른 지 오래다.”
칭찬에 인색한 대논객 리아우(李敖)도 “쑨 장군은 가장 걸출한 지휘관이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부분을 열거했다. “학문의 깊이, 정교한 연병(練兵), 엄청난 전공(戰功), 몸에 남은 수많은 탄환 자국, 국제적 명망, 그 어느 것도 비견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붓을 버리고 군문에 투신, 남북과 이국(異國) 전선 누비며 피와 땀을 아끼지 않았다.” 억울함도 빠뜨리지 않았다. “장제스의 직계가 아니다 보니 가는 곳마다 황푸군관학교 출신들의 견제를 받았다. 대륙에서 낙백(落魄)한 장제스는 대만에 정착, 쑨 장군 내세워 미국의 지원을 쟁취했다. 조진궁장(鳥盡弓藏), 더 이상 잡을 새가 없으면 활은 창고에 던지는 법, 핑곗거리 만들어 연금시켰다.”
칭화대학 총장도 쑨리런의 일생에 경의를 표했다. “쑨리런은 잊힐 수 없는 인물이다. 잊어서도 안 된다. 대륙 시절 중국군의 위용을 세계에 과시했고, 대만의 안정에 초석을 놓았다. 대만 민주기지 건설의 기초는 쑨리런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쑨리런은 격식 갖춘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임종 직전, 옆에 있던 의사와 가족 부하들이 제각각 다른 유언을 공개했다. 의사는 “국가에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별말이 없었다며 멋쩍어했다. 가족은 “나는 결백하다”는 말을 남겼다며 훌쩍거렸다. 옛 부하들은 “나는 억울하다”가 장군의 마지막 말이라며 씩씩거렸다. 명장 쑨리런이 그랬을 리 없다며 씁쓸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쑨리런의 생애와 35년 전에 발생한 “쑨리런 사건”의 진상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계속>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