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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불우한 선비의 대명사로 꼽히는 초나라의 충신 굴원.-이런저런 이야기-1

작성자북경노인|작성시간24.12.22|조회수44 목록 댓글 0

중국에서 불우한 선비의 대명사로 꼽히는 초나라의 충신 굴원.

윗사람도 아랫사람을 잘 만나야 그 조직이 잘되지만 아랫사람도 윗사람을 잘 만나지 못하면 자신의 꿈과 능력을 꽃피울 수 없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근본적인 차이는 육(育)과 우(遇)로 나뉜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길러 낼 수가 있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길러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저 어떤 윗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지금이야 ‘불우이웃’이라는 말에서나 쓰이고 있지만 원래 불우(不遇)란 자신을 알아주는 윗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혹은 자신의 좋은 운을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 점을 놀라울 정도로 현실감 있게 그려낸 인물이 중국 후한(後漢)에 있었다. 《논형(論衡)》이라는 책을 남긴 왕충(王充, 27~97년)이 그다. 총 41편으로 된 그 책에서 봉우(逢遇)라는 제목의 편이 바로 좋은 운(運) 혹은 명(命)과의 만남 문제를 다룬다. 봉(逢)이나 우(遇)나 모두 만나다의 뜻이다.

첫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뛰어난 사람의 행동은 늘 현명하지만 벼슬하는 사람이 항상 임금의 마음에 들 수는 없다. 뛰어난가 아닌가는 재질의 문제이며 임금의 마음에 드느냐의 여부는 시운(時運)에 달린 것이다.” 공자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기 개인의 호불호(好不好)가 아니라 아랫사람의 재덕(才德)을 잘 가려 써야 한다고 했다. 실은 공자뿐만 아니라 대부분 제왕학이나 군주론에서 원론처럼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왕충은 바로 이 지점을 시작부터 무력화하고 있는 것이다. “재질이 뛰어나고 행실이 고결해도 반드시 존귀하게 되리라고 보증할 수는 없다. 재능이 모자라고 행실이 비열해도 반드시 비천하리란 보증은 없다.”

왕충은 그 이유로 임금의 마음이 일정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의 군주가 문예를 좋아할 때 자신이 문예를 익혔다면 군주의 마음에 든다. 그러나 군주가 (마음을 바꿔) 무예를 좋아하면 군주의 마음에 들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신하가 뛰어난 임금을 만나 뛰어난 성취를 이루게 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태종 세종의 지우(知遇)를 받은 윤회(尹淮)

윤회의 자질과 사람됨을 알아 준 세종.

지우(知遇), 자신을 알아줌을 만나다의 뜻이다. 왕충의 주장을 따르자면 신하로서 가장 복된 일은 바로 지우를 받는 일이다. 조선 시대 태종과 세종 때의 천재 윤회(尹淮 1380~1436년)가 그런 경우다. 태종은 평소 “사람과 말을 보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임금이 치밀하지 못하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치밀하지 못하면 그 몸을 잃는다”고 강조하면서 인재선택에 신중에 신중을 다했던 임금이었다. 그런 태종과 윤회의 만남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윤회는 1401년(태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아버지 윤소종(尹紹宗)은 조선 건국에 기여한 신진 사대부의 핵심인물로 조선 왕실이 중국의 제왕학 책인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로 무장할 수 있게 해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학술을 중시한 집안 분위기로 인해 윤회는 이미 10살 때 주희의 《자치통감 강목(資治通鑑綱目)》을 다 읽었고 10대 때 경사(經史) 분야의 책 중에 읽지 않은 책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다만 술을 너무 좋아하는 게 흠이었다. 그 때문인지 윤회가 문과 급제 후 처음으로 실록에 이름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이었다. 문과에 급제한 그해 11월 3일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응봉사 녹사였던 그가 “사신관(使臣館)에 뽑혀 들어가 명나라와 무역하는 말[馬]의 장부를 담당했는데 하루는 술에 취하여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순군옥에 갇혔다.

1406년(태종 6년)에는 병조좌랑으로 있으면서 대궐 갑사(경호요원)를 구타했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 또 순군옥에 갇혔다. 1415년(태종 15년) 6월에도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는 승문원 지사로 명나라에 보낼 문서에 날짜 표기를 잘못해 우리도 잘 아는 부교리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의금부 감옥에 내려졌다. 정인지와 마찬가지로 학재(學才)는 뛰어났지만 관리로서의 이재(吏才)는 약했던 것이다. 물론 사안이 그리 심각하지 않아 두 사람은 나흘 만에 원래 직책으로 복귀하기는 했다. 그 때문인지 한달여 후에 태종이 가장 신뢰했던 하륜(河崙)이 밀봉한 글을 올려 “윤회는 경사(經史)를 널리 통하여 대언이 될 만하다”고 하니 태종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 즉위년(1418년)에 윤회가 동부대언으로 발탁됐다는 점이다. 이때 주요 인사는 상왕인 태종이 할 때이니 실은 아들 세종을 잘 보필할 신하로 윤회를 눈여겨 보아 두었다가 뽑아 올린 것이다. 당시 태종이 윤회에게 한 말이다. “경은 학문이 고금을 통달했으므로 세상에 드문 재주이고, 용렬한 무리와 비교할 바가 아니니 경은 부디 힘쓰라.”

이 무렵 세종은 제왕학 수련 기간이었는데 경연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읽은 책이 《대학연의》였고 그 핵심 진강자가 바로 윤회였다. 대를 이어 조선왕실에 이 책을 강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 다시 술이 문제가 된다. 사헌부에서 윤회가 종묘에서 예를 행하는데 술에 취해 불경을 저질렀다고 상소를 올린 것이다. 세종은 윤회를 불러 꾸짖었다. “너는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술 마시기를 도에 넘치게 하는 것이 너의 결점이다. 이제부터 양전(兩殿)에서 하사하는 술 이외에는 과음하지 말라.” 실은 윤회를 감싸 안아 준 것이다. 그후 세종은 윤회에게 술을 석 잔 이상 못 마시도록 했다. 이에 윤회는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시자 세종은 “내가 오히려 술을 더 권한 셈이 됐다”며 웃었다. 줄곧 외교문서를 관장했고 세종의 큰 배려 속에 병조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세종 18년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나기는 했지만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계유정란의 피바람 속에 어떤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참고로, 신숙주(申叔舟)는 윤회의 장남 윤경연(尹景淵)의 사위다.

중국사에서 불우(不遇)의 대명사 굴원(屈原)과 가의(賈誼)

한나라 문제 때의 문신 가의.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열전에서 시대도 다르고 나라도 다른 초(楚)나라의 굴원(屈原, 기원전 343~278년)과 한나라 문제(文帝) 때의 가의(賈誼, 기원전 200~168년)를 나란히 ‘굴원 가생(賈生-가의) 열전’에 싣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윗사람의 지우(知遇)를 받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굴원은 초나라 회왕(懷王) 때 좌도(左徒-좌정승)로 있었다. 사마천은 그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이 많고 기억력이 뛰어나며 잘 다스려질 때와 어지러울 때의 일[治亂之事]에 밝고 글을 쓰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말한다. 전국시대 때 초나라는 제(齊)나라, 진(秦)나라와 더불어 3국이 대립하고 있었다. 굴원은 제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설(合縱說)을 주장했으나 초나라 회왕과 중신들은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진나라 장의(張儀)의 책략에 속아 오히려 굴원이 실각했다.

그후 초나라 상황이 점점 열세에 놓이게 되자 자살로써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장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해 죽었다. 사마천은 직접 장사를 찾아가 굴원을 추모했다. “장사에 가서 굴원이 스스로 빠져 죽은 연못을 바라보며 일찍이 눈물을 떨구고 그의 사람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뛰어난 재주에도 지우를 받지 못한 인재에 대한 추도사다.

필자의 관심은 굴원보다는 가의에게 있다. 좌의정에 해당하는 좌도를 지냈으면 사실 지우를 받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가의는 한나라 초기 문제 때 사람이다. 18세 무렵인 기원전 183년 시경과 서경을 모두 암송하고 문장에도 능해 당시 하남(河南)군수가 그를 문하에 불러 아껴 주었다. 3년 후에는 순자(荀子, 기원전 316~238년)의 제자인 학자 장창(張蒼, 기원전 254~152년)을 찾아가 춘추좌씨전을 배웠다. 얼마 후 하남군수가 선정으로 이름을 내자 문제가 불러올렸고 그 군수는 문제에게 가의를 천거했다. 이렇게 해서 황제의 학술자문을 맡는 박사(博士)에 임명됐다. 이때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제자백가의 사상에 두루 밝고 진(秦)나라가 급속하게 패망하게 된 원인에 대해 현실감 있는 진단과 멀리 내다보는 대안을 제시하는 가의에게 문제는 푹 빠져들었다. 진나라의 잘못을 진단한 명저 《과진론(過秦論)》을 쓴 것도 이 무렵이다. 불과 1년 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로 파격 승진했다. 이에 힘입어 유학의 인정(仁政)사상을 바탕으로 진나라 식의 가혹한 정치를 고치고 대신들의 권력을 제한할 것을 거침없이 말했다.

우리의 세종과 비슷한 품성을 갖고 있던 문제는 가의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그를 더 높여 공경(公卿)의 자리에 두려 했다. 그러나 문제는 중앙조정 훈구대신들의 지원에 힘입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한계를 갖고 있었다. “나이도 어리고 학문도 얕은데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어지럽히려 한다”는 훈구대신들의 비판에 문제로서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177년 24살의 가의는 장사왕(長沙王)의 태부가 돼 멀리 남쪽으로 쫓겨갈 수밖에 없었다. 하필 장사는 굴원이 죽은 곳이기도 했다. 실제로 가의는 이때 굴원이 자살한 곳을 찾아 굴원을 조문하는 시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짓기도 했다. 그렇다고 굴원처럼 자살로 간하는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다. 4년 후 문제는 가의를 불러 자신의 막내아들 양회왕 유읍(劉揖)의 태부로 삼았다. 다시 문제 가까이로 온 것이다. 직접 중앙정치에 관여할 수는 없었지만 문제는 종종 가의를 불러 정치의 근본에 관해 물었고 가의는 그 사이에 갈고 닦은 실력을 더해 의견을 올렸다. 이 무렵 그는 나라를 잘 다스려 안정시키는 방책을 담은 《치안책(治安策)》을 저술했다. 완급조절의 지혜만 보완한다면 언젠가는 문제를 보필하게 될 기회 또한 보장된 듯했다.

그런데 그의 나이 32살 때인 기원전 169년 양회왕 유읍이 실수로 말에서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했다. 가의는 유읍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받아들였다. 1년여를 슬피 울던 가의는 33살의 젊은 나이로 꿈을 더 이상 펼쳐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장사에 쫓겨가 있을 때 가의는 복조부(鵩鳥賦)라는 시를 지었다. 복조란 초나라 사람들이 부엉이를 가리키던 말이다. 그중 한 대목이다. 〈저 오나라는 강대했으나 부차는 패했고 월나라는 회계에 숨어 살았지만 구천은 세상을 제패했네. 이사는 유세에 성공했으나 오형(五刑)을 받았고 부열은 죄수였으나 무정의 재상이 됐도다. 재앙과 복이 어찌 꼬인 새끼줄과 다르리오.〉 좌천의 서러움을 이겨 내려는 마음의 고투가 물씬 묻어 나온다. 사마천은 불우(不遇)로 굴원과 가의를 엮었지만 《한서(漢書)》 가의전(賈誼傳)에서 반고(班固)는 정반대의 평가를 내린다. “가의가 일찍 생을 마쳤고 비록 공경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불우하지는 않았다.” 훈구대신들의 견제로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그를 일찍 알아보고 천거해 준 하남군수가 있었고 학문을 이끌어 준 스승이 있었으며 그의 능력을 한때나마 인정해 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지우를 받지 못했거나 운(運)을 만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장수(長壽)의 명(命)을 만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하겠다.

때로는 허망하기까지 한 임금의 마음

다시 왕충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왕충은 임금에게 아무런 보탬이 없었는데도 좋아했던 인물로 굉유(閎孺)와 등통(鄧通)을 든다. 특히 문제 때의 총신 등통은 가의와 큰 대조를 이룬다. 굉유는 (한나라) 혜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등통은 문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이들은 조그마한 재주나 미미한 능력조차 없었는데도 체형이 뛰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워서 임금의 마음에 들었다. 아름다운 용모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이니 임금의 마음에 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왕충의 맺음말은 오늘날의 우리들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군주의 좋고 싫은 감정이 일정하지 않아서 신하는 군주가 흡족해할 바를 알 도리가 없으니 우연히 들어맞게만 돼도 그런대로 괜찮다.”⊙

[출처] 이한우의 지인지감〈7〉 아랫사람도 윗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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