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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그역사

[스크랩] 교황청 바로알기

작성자동주|작성시간26.06.21|조회수1 목록 댓글 0

작은 영토, 큰 나라 교황청 바로알기

 

 

   이탈리아 반도 로마시 서쪽 테베레강 건너에 자리 잡은 바티칸시국!

   영토로 보자면 서울의 창경궁 크기(0.44㎢)의 초미니 국가이지만, 12억 가톨릭신자들을 실제로 통솔하면서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173개국)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나라의 수장인 교황의 도덕적 권위가 세계최강임을  우리는 2005년 4월 요한바오로 2세의 장례식에서 목격하였다. 교황의 이 영향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이 정치 군사적 위력 아닌 정신적 도덕적 권위에서 나옴을 우리는 안다.

   우리나라는 1963년부터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맺고 상주 대사를 교환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3년과 1989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였고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교황청을 방문하여 친선을 다져왔다.

 

   ‘바티칸 시국’(Vatican City)은 흔히 ‘교황청’(Curia Romana)이라고도 불리고 가톨릭 신도들에게서는 ‘성좌’(聖座 The Holy See)라고도 불린다. 같은 말처럼 쓰이나 정학한 의미는 다르다. ‘바티칸 시국’은 0.44㎢의 영토를 의미하며 교황청이 국가로서 존립하는 기반이 된다. ‘교황청’은 교황이 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서 이끌어가는 행정기구(정부)이며, ‘성좌’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 퍼져 있는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종교적 권위를 일컫는다. 
   2005년에 즉위한 교황(Pope, 경칭: ‘성하’ 聖下 Holy Father) 베네딕토 16세에게는 ‘로마의 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수석 사도의 후계자’, ‘세계교회의 대사제’, ‘이탈리아 수좌주교’, ‘로마 관구 수석대주교’, ‘바티칸 시국 원수’, ‘종들의 종’이라는 여러 칭호가 공식으로 부여된다.
   한 왕조 혹은 국호가 2000년을 이어온 역사적 전례가 없는 만큼, 교황이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우두머리였던 베드로 사도의 265대 후계자라는 위치가 놀랍고,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여 전 세계에 산재한 12억 가톨릭 신자들이 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지도자라는 점에서도 교황청은 흥미로운 곳이며, 르네상스 예술의 건축과 미술이 한데 모여 있는 박물관이므로 찾아가 볼 만하다.

 

 

 

I. 교황과 교황청의 역사

 

   오늘의 바티칸 시국이 성립하고 교황의 국제적 역할이 생기기까지 서양사에 끼친 교황의 역할을 주요 사건별로 짚어 본다.

 

1.1. 쿼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예수의 열두 사도 중 베드로 사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겪고 그분의 부활 및 승천이라는 신앙체험을 한 뒤 예루살렘에서 선교를 시작했다가 안티오키아를 거쳐 제국의 수도 로마로 와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기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일어나자 목숨을 살리려고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 아피아가도의 삼거리(그곳에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 사건을 기념하는 쿼바디스 성당이 있음)에서 자기가 주님으로 모셨던 그리스도를 만나 이런 문답을 나누었다고 한다.

“주님, 어디 가십니까?”(Quo vadis, Domine?)

“너 대신 십자가에 다시 한 번 처형당하러 로마로 가는 중이다.”

그는 작심하고 로마로 발걸음을 돌렸고 체포되어 네로경기장(지금 성베드로 대성당 광장터)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뒤 경기장 밖 유대인 공동묘지에 묻혔다.

→ [표: 베드로의 묘지 발굴]

→ [PETROS ENI 사진 구하여 첨가할 것]

 

베드로의 묘지 발굴
  1949년 8월 22일자 <뉴욕 타임스>는 성베드로의 유골이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의 대제단 아래에서 출토되었으며, 교황 비오 12세의 지시로 그 장소를 조사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검사 결과 이 유골은 서기 1세기경 60대 셈족 남자의 뼈로 밝혀졌다. 유골은 전통적인 황제의 복색인, 자주색으로 물들이고 금실로 수를 놓은 천에 싸여 있었다. 유골이 묻힌 토기 묘실에는 PETROS ENI(‘베드로 여기에’)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서기 150년경 베드로의 묘라고 추정되는 장소를 표시해 놓은 것으로 추측한다.
교황 아나클레투스는 벌써 서기 90년경에 그 묘실 위에 기념 성당을 지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 묘실을 제단자리로 하여 성베드로대성당을 지었다(326년).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1626년 준공) 지금의 성베드로대성당도 그 묘실 위에 중앙제단을 설치하였다




1.2. “그리스도인들을 사자의 아가리로!”(CHRISTIANOS AD LEONES!)
   네로 박해 이래로 로마 제국의 시민들과 속주민들은 250년간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박해와 학살을 당했다. 콜로세움 경기장을 비롯하여 검투경기가 벌어지는 제국의 모든 경기장에서는 관객들이 경기에 싫증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을 사자 입으로!”라는 구호를 외쳐댔고, 그때마다 관리들은 경기장 지하 감방에 미리 대기시켜 놓은 그리스도인들을 경기장으로 내몰아 관람객의 눈앞에서 맹수들에게 잡아먹히거나 검투사들에게 유린당하고서 학살당하는 쇼를 펼쳤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테르툴리아누스)이라는 말처럼 그래도 신자들은 불어나기만 하였고, 황제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다 죽이다 못해 “저 백성이 모가지 하나라면 단 칼에 베어버릴 텐데!”라던 칼리굴라 황제의 말을 되뇌었다.
→ [영화 쿼바디스 장면 혹은 콜로세움 사진 첨가]



1.3. “이 깃발로 승리하리라!”(IN HOC SIGNO VINCES!)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7-337) 때는 이미 황실가족(모친과 누이)마저 그리스도 신자가 되어 있을 만큼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 이상 저지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자기 군대의 군기를 독수리에서 십자가로 대체하였다. 그가 막센티우스 황제와 결전을 벌인 로마 밀비오 다리 전투(321년) 전날 밤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고 “이 군기를 갖고 싸우면 그대가 승리하리라”는 말을 들었다는 전설도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황제 리키니우스와 밀라노에서 회담하여 313년 그리스도교에 종교자유를 허락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10년 뒤에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이교신앙을 금지하였다(323년).
→ [라파엘로의 그림 사진 첨가]



1.4. “무기 없는 병사들에게 패하리라!” [* 사진]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사방에서 야만족들이 로마를 침략하였다. 그중에서도 아시아에서 몰려온 훈족 임금 아틸라(재위 434-453)는 다뉴브강 유역을 유린하고 동로마제국에게서 조공을 받고 서로마제국으로 진출하여 골지방과 스페인까지 침략하는 바람에 “하느님의 채찍”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교황 레오 1세(재위 440-461)는 452년 이탈리아 반도로 진주하는 훈족의 군대를 맞아 민키우스강까지 나아가서 아틸라와 직접 회담하였다. 유럽을 떨게 하던 이 장수는 무슨 일인지 회담 후 순순히 퇴각하였다. 아틸라가 서로마로 진군할 적에 무녀였던 아내가 “당신은 모든 군대를 무찌르겠지만 무기 없는 병사들에게 패하고 돌아오리라”는 신탁을 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반달족 겐세리쿠스가 북아프리카 전부를 함락하고 455년에는 로마를 점령하여 약탈과 학살을 저지르자 레오 교황이 직접 나서서 약탈을 중단하고 퇴각하게 설득하였다.
→ [베드로성당 부조물 사진]



1.5. 신성로마제국의 탄생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서(476년) 유럽은 민족대이동으로 “중세 암흑기”를 맞았다. 교황 레오 3세(재위: 795-816)는 유럽의 평화와 정치적 재건을 염두에 두고 프랑크족의 샤를르 먀뉴를 로마로 불러 서기 800년 성탄절 라테란대성당에서 그를 ‘아우구스투스 황제(Imperator Augustus)'로 대관하고 서유럽의 정치질서를 바로잡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 칭호는 983년 오토 2세 때부터 ’로마 황제(Imperator Romanus)‘로 바뀌고, 1254년부터는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이라는 이름까지 쓰였다. 제후가 일단 황제로 즉위하면 대개 로마에 와서 교황한테서 대관식을 치렀다. 이 직위는  1000년간 지속하면서 유럽의 정치적 중심을 이루다 1804년 폐지된다.



1.6. “카노싸의 굴욕”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교황의 정신적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주교서임권(Investitura)을 두고 교황과 자주 분쟁을 일으켰다. 당시 주교는 종교지도자이자 해당 지역의 제후로서 세속사도 주관하였으므로 그 임명권은 정치의  중대한 변수였다. 대표적인 충돌이 1077년 소위 “카노싸의 굴욕”으로 나타났다. 게르만 국가의 강력한 중앙집권을 도모하던 신성로마황제 헨리 4세는 밀라노 대주교를 자기가 서임하겠다고 주장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재위: 1073-1085)와 충돌을 빚었다. 교황이 황제를 교회로부터 파문(破門)하고 황제는 교황을 폐위시키는 선언으로 맞서자 1076년 보름스 회의가 열렸으나 독일의 주교들과 황제 선출권을 가진 선제후(選諸侯)들이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그가 교황의 용서를 받아오지 않으면 황제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통첩이 나왔다. 헨리 4세는 하는 수 없이 1077년 중부 이탈리아 카노싸에 백작부인 마틸다의 손님으로 와 있던 교황을 찾아가 성 앞에서 사흘간 눈을 맞고 서서 참회하는 굴욕을 감수하였다. 교황의 사면으로 제권을 회복한 황제는 훗날 그레고리우스 7세를 잡아 유배 보내고 유배지에서 사망케 하고 라벤나 주교를 교황으로 임명하는 등의 보복을 행하였다.



1.7. 십자군 운동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후세인 처형은 그 뿌리가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유럽 정치사의 맥이다. 이슬람교가 정교일치(政敎一致)의 군사세력으로 북아프리카 전체와 소아시아를 점령하여 그 지역에서 그리스도교를 뿌리뽑자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문화대충돌”이 발생한다. 이슬람 군대 앞에 풍전등화가 된 동로마제국의 호소(1095년), 이슬람의 동구권 진출, 팔레스티나 성지를 순례하는 그리스도신자들에 대한 박해, 성지 유린 등을 이유로 교황이 나선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재위: 1088-1099)는 1095년 불란서 클레르몽에 교회회의를 소집하고서 성지회복을 호소하며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096년부터 1291년까지 무려 7차의 십자군이 일어났다.



1.8. 교황의 아비뇽 유폐
   신성로마황제 필립(재위: 1285-1314)은 교황이 속권 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교황 보니파치우스 8세를 군대로 무찌르고서 추기경 임명과 교황 선출을 좌지우지하였다. 1309년 교황이 된 클레멘스 5세는 아예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가톨릭교회를 통치하는 아비뇽 시대(1309-1377)를 열어 교황권을 형편없이 실추시켰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로 돌아오면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거처로 삼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 레판토 해전
   페르샤와 그리스 연합이 결전을 벌인 살라미스 해전(B.C. 480년), 나폴레옹의 해군이 영국의 넬슨에게 패배한 트랄팔카 해전(1805년)과 더불어 유럽 3대 해전으로 꼽히는 레판토 해전(1571.10.7). 이슬람 오토만 제국의 술탄 셀림 2세가 1570년 키프러스를 점령하고 지중해로 진격해오자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가 다시 위협을 느꼈다. 교황 피우스 5세(재위: 1566-1572)는 1571년(5.25) 베니스에서 베니스 공국, 제노아 공국,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군주들을 소집하여 회동하고 연합해군을 결성하였다. 아드리아해로 진군하던 터키 함대가 그리스 레판토의 파트라스해협에 진을 치자 그리스도교 연합함대 200척이 공격을 감행한다. 4시간의 전투 후 터키 함선 117척을 나포하는 등의 대승을 거두어 이슬람 해군의 서쪽 진출을 차단한다.



1.10. 이탈리아의 통일과 라테란 조약
   756년 프랑크왕국의 피핀이 라벤나와 부르군드 지방의 총독령을 교황에게 바치면서 시작되고 확장된 교황령은 봉건제도와 함께 서구 중세사회에서 막강한 세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신생 이탈리아는 로마를 빼놓고 반도를 통일하는 일이 불가능하였고 교황령을 마지막까지 수호하던 프랑스군마저 철수하자 1870년(9.20) 무력으로 로마를 점령하였다. 교황령이 소멸된 지 50년이 지나 교황 피우스 11세(재위: 1922-1939)는 바티칸과 이탈리아왕국 관계를 어떻게든 정립하려 나섰고, 교황청은 이탈리아왕국을 인정하고 또 이탈리아왕국 역시 교황청을 독립된 중립국가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라테란협정을 1922년 무쏠리니와 체결하였다.
⇒ 바티칸 제국



→ [박스 기사]: 통계로 본 교황청 (2005년)
        [한국 교세도 오른편에 대조하여 병행할 것]
신도수 
교구 숫자
수도회 숫자
추기경 
주교 
사제
남자수도자 
여자수도자 
외교관계 
국제기구 






II. 교황청: “인간 문제의 전문가”



   200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85세로 서거하였을 적에 서거 며칠 전부터 전세계 언론의 관심을 모았고, 장례식에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우리나라 이해찬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세계 (......._)개국 국가원수들과 행정수반들이 바티칸에 모였다. 전세계 정치지도자들과 매스컴을 교황의 장례식에 끌어들인 힘은 어디 있었을까? 그 힘은 인간존엄성을 비롯하여 전 인류가 안고 있는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두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정치와 경제, 군사의 논리가 아닌, 도덕적 윤리적 시각으로 해법을 설파해온 교황들의 음성에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동서양진영으로 갈라져 무수한 전쟁을 치른 인류는 12억 신도를 한 집단으로 엮어 도덕적 권위로 통솔하는 가톨릭 교회가 국제문제를 윤리도덕의 관점에서 조언하는 “어머니와 교사”로서, 각국 정부와 국민에게 인간존엄성을 외치는 “인간 문제의 전문가”로서 발언하고 행동함을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2.1. 교황의 이러한 가르침을 가톨릭교회는 ‘사회교리(社會敎理 Social doctrine)’라고 부른다. 인간 존엄성과 인권을 신장시키는 몇 구절만 꼽아본다면...



“인류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나누는 교회는 온 인류와 더불어 역사의 길을 따라 여행하고 있다. 교회는 인류 가족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복음에서 이끌어 낸 빛으로 비추어 주고 온 인류 가족에 대한 연대와 존경과 사랑을 여실히 드러낸다. 인간은 진정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사회교리 18)



“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이라는, 가견적 세계의 가장 중요한 핵심에 도달하였다. 사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그 깊은 경탄을 일컬어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달리는 그리스도교라고도 일컫는다.... 이 인간이야말로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 걸어야 하는 첫째가는 길이다.”(인간의 구원자 14항)



“교회는 근본적으로 인권의 수호와 증진이 종교적 사명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사회교리 159)



“인간 존엄성은 교회 사회 교리의 다른 모든 원리와 내용을 이루는 바탕이다. 이와 함께 공동선, 보조성, 연대성의 원리들이 있다.”(160)



“정치의 기본 목표는 공동선의 맥락 안에서 인간 존엄과 인간의 전인적 발전이 존중되도록 보장하면서 경제 과정들을 이끄는 것이다. 경제발전은 분명하고 명확한 규범의 맥락 안에서 전체  인류 가족의 도덕적 시민적 문화적 성장을 위한 폭넓은 계획에 따라 이루어질 때에만 지속될 것이다.”(372)



2.2 “평화는 정의의 열매”(Opus iustitiae pax)
   교황청이 국제사회를 향하여 보내는 첫 번 메시지는 평화이다. 그리고 개인들 사이에, 사회집단 사이에, 국가 간에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 한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선의를 가진 모든 인간이 평화의 운하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 각자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평화의 핵심입니다.”(2007.1.1 교황 베네딕토 16세 신년사)



“가장 고전적인 정의의 형태인 교환정의, 분배정의, 그리고 법적 정의에 대한 존중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일반 정의의 진정한 발전을 나타내는 사회정의에 더욱 큰 중요성이 부여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 차원의 사회문제와 관련하여 요청되는 사회정의는 사회 정치 경제적 측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의의 구조적 차원과 그 해결책과 관계된다.” (사회교리 201)



“정의는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평화가 정의의 열매라면, 오늘날 평화는 연대의 열매라고 단언할 수 있다.”(사회교리 203)



그리스도교의 이 사회윤리는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354-430)에게서 정립된다. 그는 정의 없는 국가는 강도떼와 다름없다고 설파하였다.



→ [이하 박스 처리]
정의 없는 국가는 강도떼
정의를 결여한 국가는 강도떼가 아니고 무엇인가? 강도떼도 나름대로는 작은 왕국이 아니던가? 강도떼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집단도 두목 한 사람의 지배를 받고, 공동체의 규약에 의해서 조직되며, 약탈물은 일정한 원칙에 따라서 분배한다. 만약 어느 악당이 무뢰한들을 거두어 모아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서 일정한 지역을 확보하고 거주지를 정하거나, 도성을 장악하고 국민을 굴복시킬 지경이 된다면 아주 간편하게 왕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런 집단은 야욕을 억제해서가 아니라 야욕을 부리고서도 아무런 징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당당하게 왕국이라는 명칭과 실체를 얻는 것이다.
사실 알렉산더 대왕의 손에 사로잡힌 어느 해적이 대왕에게 한 답변에서 이러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해적에게 무슨 생각으로 바다에서 남을 괴롭히는 짓을 저지르고 다니느냐고 문초하자, 해적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거침없이 이렇게 대꾸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폐하께서 전 세계를 괴롭히시는 생각과 똑같습니다. 단지 저는 작은 배 한 척으로 그 일을 하는 까닭에 해적이라 불리고, 폐하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다니면서 그 일을 하는 까닭에 황제라고 불리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4.4)



2.3  신국(神國)과 지상국(地上國)은 어떻게 나누어지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염원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신국과 지상국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교회를 다니거나 안다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믿지 않아서? 로마 가톨릭 신자냐 아니냐에 따라서? 천만에!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들어보자.



"두 사랑이 있으니 하나는 순수하고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상위의 도성을 생각하여 공동의 유익에 봉사하는데 전념하고, 하나는 오만불손한 지배욕에 사로잡혀 공동선마저도 자기 권력하에 귀속시키려는 용의가 있다. 하나는 평온하고 하나는 소란스럽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하나는 모반을 일으킨다. 하나는 그릇된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앞세우지만 하나는 무슨 수로든지 찬사를 얻으려고 탐한다. 하나는 우의적이고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바란다. 하나는 이웃을 다스려도 이웃의 이익을 생각하여 다스리지만 하나는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스린다.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랑은 선한 자들에게 깃들고 한 사랑은 악한 자들에게 깃들어서 두 도성을 가른다." (아우구스티누스, 『창세기 축자해석』 11.15.20)
⇒ 가톨릭 사회교리



III. 한국과 교황청



3.1. 천주교의 유래와 포교지(布敎地) 조선
   우리나라에 교황(敎皇)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610년경이고, 한편 교황청에 조선(朝鮮)이라는 나라가 알려진 것은 1660년이었다. 조선조 중기의 유학자 이수광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하면서 교황에 대해 “그 풍속에 군(君)을 교화황(敎化皇)이라 하고 결혼하지 않으며, 자식이 승계하는 일이 없고 현자를 뽑아 옹립한다”고 적었다. 한편 로마 교황청은 1660년에 중국에 남경(南京) 대목구(代牧區)를 설정하면서 그 안에 조선까지 포함시킴으로서 처음으로 조선지역의 포교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북경에 온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천주교 서적들을 구입하여 연구하던 남인파 학자들이 그 가르침에 흥미를 가졌고 그들의 대표로 북경에 간 이승훈(李承薰)이 1784년 북경의 북당(北堂)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동료선비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조선천주교가 창설된다. 1785년 초에 북경교구에 부임한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복음이 기묘하게 전래하고 발전한다는 소식을 1790년 교황청 포교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보고하고 포교성은 조선교회를 돌보는 임무를 구베아 북경 주교에게 위임한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에 선교사 1명을 파견하였는데 1801년의 박해로 그 선교사와 유능한 교회지도자들을 잃는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대목구(代牧區)로 설립하고 조선교회의 사목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 조선 대목구 설정으로 조선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직접 교류할 수 있었다.
1839년과 1846년의 박해로 3명의 선교사와 최초의 방인 신부 김대건을 위시하여 수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였다. 제3대 대목(代牧) 페레올 주교는 입국하자, 조선 순교자들의 전기를 작성하여 1847년 로마로 보냈다. 그래서 조선 순교자들의 시복(諡福) 수속이 정식으로 접수되고, 1857년에 조선 순교자 82명이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다. 그중 79명이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성베드로대성당에서 복자(福者)로 선포되었다. 1968년 다른 한국순교자에 대한 시복(諡福)이 다시 거행되었고 1983년 서울을 방문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103위의 순교자들을 성인(聖人)으로 시성(諡聖)하였다.
교황 요한 23세가 1962년 한국에 정식 교구(敎區)를 설정하여 서울, 대구, 광주 교구 등이 생겼다. 1962년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한국 주교단이 정식으로 참석하였다. 1969년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탄생하고 2006년 정진석 추기경이 두 번째로 서임되었다.



3.2. 대한민국과 교황청
   광복 후 대한민국정부를 제일 먼저 승인한 곳은 교황청이었다. 1947년 교황청은 한국에 교황사절(敎皇使節)을 파견하였고 1949년에는 서울에 상주 교황사절관이 설치되었다. 메리놀 선교사 교황사절 번주교는 6.25 전쟁 중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은 1963년 바티칸 시국과 공사급 외교사절을 교환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당시 교황사절 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가 초대 교황 공사로 승진되었고, 우리 정부는 주스위스 이한빈 대사를 초대 주교황청 공사에 겸임시켰다. 3년 후 양국은 공사급 외교사절을 대사급으로 승격시켰다. 델 주디체 교황공사가 교황대사로 승진하고 정부에서는 정일영 주스위스 대사를 주교황청 대사에 겸임시켰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는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교황이 됐다. 요한바오로 2세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순교자들의 시성식(諡聖式)을 주례,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탄생시킴으로써 한꺼번에 1백 명이 넘은 성인을 교황청 밖에서 시성하는 첫 기록을 남겼다.
그로부터 6년만인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기해 방한한 교황은 여의도에서 세계성체대회를 주재, 한국과 우리 겨레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표현했다. 교황의 2세의 두차례 방한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갈구하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한국교회가 급성장하는데 일조했다.
2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교황청을 국빈 방문하여 친선을 돈독히 하였다.
→ [교황의 방한 사진 첨가]



3.3. 한반도 북핵 사태와 교황청 관심
→ (최근 한반도에 관한 교황청 발언) [첨가]
2003.7.4 / 2004 성탄 / 2005 성탄
2006.12. 일본대사 부임까지의 교황청 발언






IV. 교황청의 흥미 있는 몇 가지



   교황청을 방문할 때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몇 가지를 설명해 본다.



4.1 교황 선거와 시스틴 경당의 굴뚝 연기
   가톨릭 신자 12억의 수장인 교황은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고 임기는 종신직이다. 이론상으로는 세례 받은 가톨릭 남자라면 누구나 피선거권이 있으나 실제로는 추치경단에서만 뽑혀 오고 있다.
3세기의 사료에 의하면 로마주교도 로마시의 성직자와 신도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러나 점차 교황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로마황제, 귀족가문, 후대에는 신성로마황제들과 제후들이 교황선거에 간섭하게 되었다. 그러나 속권의 개입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고 니콜라우스 2세 교황은 1059년 교황선거권을 추기경들에게 국한시키는 교황선거법을 제정하여 교황선거에서 세속인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1179년에는 교황에 피선되려면 추기경단의 3분의 2의 다수결표를 얻어야 한다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선거인단을 일정한 장소에 가둬넣는 콘클라베(conclave) 제도도 생겼다. 이탈리아 비테르보에서 있었던 교황선거는 1268년 말에서 시작되어 1271년까지 거의 3년이 걸렸다. 5년째 되던 해 비테르보의 시당국과 시민들은 더 이상 못 참고 추기경들을 선거장에 감금하고 그들에게 빵과 물밖에 제공하지 않았다. 새 교황은 그 방법이 훌륭했음을 인정하고, 1274년 그것을 제도화했는데 규정에 따르면 8일이 지나도 유효한 선거에 이르지 못할 경우 그때부터 선거가 성공하기까지 선거인단의 추기경들에게는 빵과 포도주와 물 밖에는 공급받지 못하게 조처하였다.
오늘날 추기경들이 교황선거를 치르는 콘클라베 장소는 바티칸궁 안의 시스틴 경당이다. 오전 오후 두 번의 투표로 3분의 2에 한 표가 더 나올 때까지 투표가 계속된다. 이때 성베드로 광장에서는 전 세계에서 운집한 신도들이 시스틴 경당의 굴뚝에서 피어오를 흰 연기를 기다린다. 검은 연기는 투표결과가 미결임을 뜻하며, 흰 연기는 새 교황이 탄생했다는 뜻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이틀만에, 네 번째 투표에서(?) 선출되었다.
새로 선출된 교황이 교황직을 수락하면 즉시 교황이 되어 전권을 갖는다. 이어 성베드로대성당 발코니에서 새 교황으로 선출된 추기경의 이름과 그가 택하는 교황 명칭이 발표된다. 새 교황에게 추기경들의 순명선서가 있은 후 새 교황은 성베드로대성당 발코니로 나가서 로마시와 전 세계를 향해 인사와 첫 축복을 내린다.



4.2. 추기경(樞機卿)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들을 계승하는 주교단(교황은 로마의 주교다)과 주교를 보필하는 사제(신부)와 부제라는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2006년 3월에 한국의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임되면서 추기경에 대한 국민의 흥미가 커졌다. 추기경(Cardinal)은 가톨릭교회에서 교황 다음 가는 고위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5세기 때부터 이 명칭이 나타나는데, 교황이 로마 교회를 다스리거나 세계교회문제를 협의하는 자문역을 맡았다. 주교도, 사제도, 부제도 추기경으로 임명된다.
로마 주교인 교황에 의하여 서임되는 추기경들은 교황청의 여러 기관에 배속되어 장관으로 부임하거나, 우리나라 정진석 추기경처럼, 지역교회의 교구장으로서 자기 교구를 통솔한다.
추기경들은 1059년 니콜라오 2세에 의하여 교황 선출권을 독점함으로써 다른 주교들보다 월등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지금 규정으로는 80세가 넘는 추기경은 교황 선거권이 없다. 추기경에게는 “전하”(殿下 Eminence)라는 경칭이 붙여지고 바티칸 시민권과 여권을 갖는다.



4.3. 스위스 근위병
   바티칸을 구경하다 보면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 선이 있는 화려한 제복을 입은 스위스 근위병을 볼 수 있다. 이들이 교황 근위대로서 바티칸을 지키게 된 계기는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성베드로대성당을 개축하면서 공사중의 경호를 위해 스위스 쮜리히와 루체른주와 용병파견 계약을 맺게 되면서다. 최초로 150명이 파견되었다. 1527년 부르군디(네덜란드)의 찰스 5세가 로마를 침략하여 약탈하자 항전하다 용병대장을 포함한 147명이 장렬히 전사하는 충성을 보였다. 이를 계기로 교황청 수비를 스위스 근위병에게 맡기는 전통이 생겼다.
현재 스위스 근위병은 1548년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제복을 입고 근무하며, 입대자격은 스위스 출신에 신장 174센티 이상, 19-30세의 나이에 용모 준수한 남자여야 한다. 바티칸 안에서 유숙하며 사령관을 포함하여 장교 5명 사병 101명이다.



4.4. 성인(聖人)과 시성식(諡聖式)
   신약성서에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명칭으로 '성도'(聖徒)라는 말이 나오지만 '성인(聖人 saint)'이라는 칭호는 초기 교회서부터 성덕(聖德)이 뛰어난 분들에게만 쓰였다. 생존시에 영웅적인 덕행(德行)으로써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어, 사후에 교회가 엄정한 조사 끝에 '성인록'에 올리고, 교황이 성인으로 선포한 분들을 가리킨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 성녀 글라라, 성토마스 아퀴나스 등으로 부른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세례 때에 성인 중의 한 분을 자기 신앙생활의 수호자로 모시고 그의 이름을 따 세례명을 짓는 관습이 있다.
교회역사 초기에 신자들의 공경을 받았던 인물들은 주로 순교자(殉敎者)로서 신앙을 고수하려고 고통과 죽음을 통해 영생을 얻고 그리스도와 지상의 교회 사이에 중계를 한다고 믿어졌다. 밀라노 칙령(313년)이 반포된 이후는 순교자가 아니더라도 신앙의 증거자, 교리의 탁월한 학자, 선교열성과 자선 및 복음정신이 뛰어난 자, 참회와 고행으로 모범적 신앙 생할을 한 사람으로 확대되었다.
성인으로 선포하는 예식행위를 시성식(諡聖式 canonization)이라고 하는데, 교황청은 1588년 이 일을 전담하는 부서를 설립하였다. 덕성이 훌륭한 사람이 사후에도 많은 감화를 끼치면 ‘하느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그의 행적을 조사하며, 그 조사에서 통과하면 ‘가경자’(可敬者), 죽은 이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기적까지 일어나면 ‘복자(福者)’ 그리고 다시 그의 감화와 기적이 빛을 발하면 ‘성인(聖人)’의 칭호를 부여한다. 프랑스의 영웅 쟌 다크는 1431년 마녀의 누명을 쓰고 화형을 당하였고 500년후 1920년 성녀로 시성되었다. 그런가 하면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1910-1997)는 죽은 지 6년 만에  복자(福者)로 시복(諡福)되었다(2003년).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문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103위가 시성되었다. 한국의 시성식은 아비뇽 교황 시대를 제외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 교황청 밖에서 거행된 시성식이었다



4.5.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는가?
   교황이 이탈리아 중부에 교황령이라는 영토를 갖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에게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유럽 정치에 깊이 개입하자 유럽정치사에 중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신정(神政)정치가 옳은가? 교황과 황제 누가 상위에 있는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두고 가톨릭 교회에서는 오랜 진통을 겪었고 특히 14세기의 사변적 토론을 거쳐 다음과 같이 이론을 정립해 왔다.



①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인간이 영혼 육체의 결합체인 만큼 현세적 행복과 더불어 영원한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궁극목적론>을 내세워, “그리스도교 백성의 모든 국왕들은 교황에게 복속하기를, 마치 예수 그리스도에게 친히 복속(服屬)하듯이 하라”는 결론을 냈다.
② 그러나 교황권이 융성할 적에 교황청에서는 <두 검(劍) 이론>이 나와 영권과 속권을 둘 다 교황이 장악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 박스글 (교황 보니파시우스 8세의 칙서 「하나인 교회」(1302) 참조)
“하나요 유일한 교회의 단일한 몸은 단일한 머리를 가질 따름이요 괴물처럼 두 머리를 갖지 않느니,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베드로와 베드로의 후계자가 곧 그 머리다....
“두 개의 검, 즉 영적인 검과 현세적 검이 둘 다 교회의 권한에 속한다. 후자는 교회를 위하여 행사되고 전자는 교회에 의해서 행사되어야 한다. 전자는 사제의 검이요, 후자는 비록 국왕들과 군인들의 손에 있지만 사제의 묵인과 용인 속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검이 검 밑에 놓여져야 하고 현세적 권한은 영적인 권한에 종속되어야 한다....
“영적 권한은 그 품위와 고귀함에 있어서 여하한 지상 권한보다도 월등하며, 영적인 것이 현세적인 것을 우선하는 그만큼... 영적 권한은 지상적 권한을 설정하고 지상적 권한이 선하지 않으면 이를 판단할 권리를 갖는다.”



③ 중세문화의 걸작인 「신곡(神曲)」을 쓴 단테(1265-1321)는 인간이 현세와 영원이라는 이중목적을 갖는다는 <두 개의 궁극목적론>을 내세워, 인류에게는 이중 목적에 의거한 이중 지도가 필요한데 교황과 황제라면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이론적으로 확립하였다. 물론 황제의 권한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내려온다.
→ 박스글 (단테 알레기에리, 「제정론」(1312) 참조)
“인간을 영혼과 육체에 의거하여 고찰한다면, 인간은 부패할 존재이면서 또한 불후의 존재이다. 그래서 만약 인간이 부패할 것들과 불후의 것들의 중간점이라면, 모든 중간점이 양극단의 본성에 참여하는 이상, 인간 역시 양편 본성에 다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온갖 본성이 어떤 최종 목적에로 정향되어 있는 이상, 인간의 이중목적(二重目的)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따른다. 인간은 존재자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불후성과 부패성에 다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존재자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두 개의 최종 목적에로 정향되어 있다는 결론이 따른다....
“그것 때문에 인간에게는 이중 목적에 의거한 이중지도(二重指導)가 필요하게 되었으니, 계시된 가르침에 따라서 인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교황과, 철학적 가르침에 따라서 인류를 현세 행복으로 영도할 황제가 그것이다.”



④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1275-1342)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생활에서 종교생활은 사회생활의 일부에 불과하므로 교황은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소위 <외연론(外延論)>을 펴기도 하였다.
⑤ 20세기에 이르러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정치 공동체와 교회는 그 고유 영역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 그러나 양자는, 자격은 다르지만, 동일한 인간들의 개인적 사회적 소명에 봉사한다. 교회는 국가 권력이 부여하는 특권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때에는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하여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다.”는 <협력적 비판론>을 내놓았다. 



→ [박스글: 어느 그리스도인의 「다빈치 코드」 읽기
   요즘 로마의 전철이나 기차에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읽는 이들이 곧잘 눈에 띤다. 필자는 그의 소설 「천사와 악마」도 마저 읽고 나서 살인의 무대가 되는 피아자 델 포폴로, 바티칸 광장,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나보나 광장의 분수대를 호기심 있게 둘러보았다.
   물론 소설은 상상력이 낳은 허구이다. 가톨릭교회의 뼈아픈 과거사를 들추면서 베스트셀러를 지어 내는 문학가의 추리력도 하느님이 주신 능력인 만큼, 소설을 읽고 우리 신앙의 다른 면을 엿보는 눈을 얻는다면 이로움이 없지 않다. 작품 결말에도 악마의 화신은 ‘오푸스데이’의 아링가로사 주교가 아니라 기호학자 티빙이지 않던가!
   우선 ‘하느님의 사업’(Opus Dei)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딴 ‘오푸스데이’는 1928년에 스페인에서 창립되어 로마교회가 공인한 성직자단이다. 창립자 에스크리바는 2001년에 현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고, 로마에 산타크로체라는 신학대학을 두고 전 세계에서 모여온 신학생을 해마다 30여 명씩 사제로 서품하여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수도회가 어느 정도 커지면 교구의 간섭을 받지 않는 성좌설립 수도회가 되듯이, 당초부터 교구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성직자단이 교회법에 새로 생겼고 오푸스데이가 처음으로 등록되었다. 오푸스데이는 몇 가지 특징(엘리트위주, 비밀고수, 경건주의) 때문에 소설의 표적이 될 만큼 호기심을 끄는 듯하다.
   둘째, 마리아 막달레나니 주님이 성찬에 쓰셨던 성배니 하는 것들이 소설의 주제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참 하느님이면서 또한 참 사람이라는 교리를 우리가 믿는다면 소설가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동정을 표하여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니 카찬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니 하는 글을 쓰더라도 성숙한 신앙으로 웃어넘기면 된다. 책 판매나 영화 상영을 금지하는 언행은 되레 그런 작품을 베스트셀러로 만들 따름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경건함을 중시하지만 보수적 입장으로 교회 내에 근본주의를 조성하여 ‘도덕적 종교인이 비도덕적 정치사회를 건설’하는 결과를 낸다면 우리는 종교가 문학이나 예술을 두려워한다는 저 작가들의 비난에 말려들 염려가 있다.
   댄 브라운이 독자에게 깨우쳐 주려는 다빈치의 진짜 코드는, ‘장미의 이름으로’를 쓴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빌리면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진리, 이성과 과학에 대한 철없는 두려움, 웃음을 잃은 신앙”에서 악마의 얼굴을 찾는 지혜가 아닐까? (2006.1.22 서울주보: 성염)






V. 순례지 바티칸 
⇒ 대사관 사이트...
⇒ www.vatican.va



5.1. 바티칸과 성베드로 대성당
바티칸은 쟈니콜로 언덕 밑에 로마인들이 ‘바티칸 평원’이라고 부르던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로마황제 네로가 그곳에 경기장을 세웠는데 많은 그리스도신자들이 그 경기장에서 학살당하였다.
사도 베드로가 67년경 이 경기장에서 순교한 다음 경기장 밖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는데 그 무덤 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성베드로대성당(길이 118미터, 폭 64미터)을 지어 셀베스텔 1세 교황에 의해 축성되었다(326년).
현재의 성당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으로 그 전의 성당을 헐고 1506년 4월 18일 착공하여 브라만테, 라파엘, 미켈란젤로, 델라 포르타, 베르니니, 마데르노 같은 르네상스 거장 대부분이 참여하여 120년의 긴 세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626년에 완공되었다.
1546년 바오로 3세는 71세의 노장 미켈란젤로를 건축공사 책임자로 임명하였으며, 미켈란젤로의 설계와 구상으로 성당의 거대한 돔이 델라 포르타의 공사로 완성되었고, 카를로 마테르노에 의해 성당의 정면이 완성되었으며, 교황 바오로 5세의 명에 의해 성당의 세로 길이는 원래의 설계보다 더 길어진 라틴 십자가의 형으로 모양이 바뀌었다. 성베드로대성당은 1626년 11월 18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 때 준공되어 축성식을 가졌다. 성당 지하에는 역대 교황들의 묘소가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를 두 번이나 방문한 요한바오로 2세(재위: 1978-2005)의 묘소는 지금도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다.
성당의 대형 광장은 베르니니의 작품(1656-67년)으로 교회가 전 인류를 끌어안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광장 중앙의 오벨리스크는 칼리굴라 황제(재위: 37-41)가 이집트에서 옮겨왔고 네로 경기장에 옮겨져 있던 것이다.
5.2. 성베드로대성당을 비롯한 로마의 4대성당
로마에는 성베드로대성당, 성바오로대성당, 라테란의 성요한대성당, 그리고 성마리아대성당 네 곳이 성지로 간주되어 로마에 오는 순례자들이 반드시 들른다. 성베드로대성당 외에는 바티칸 밖에 있지만 교황의 통치가 직접 미친다. 다른 세 곳도 간단히 소개한다.



5.2.1 성바오로대성당 (San Paolo Fuori le Mura)
   성바오로대성당은 성베드로대성당에 이어 로마에서 둘째로 큰 성당이다. 성베드로와 함께 로마에 그리스도교회를 세운 사도 성바오로의 유해는 이 성당의 높다란 제대 아래 잠들어 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 도착과 전교행적은 신약성서 사도행전에도 분명하게 나와 있으며, 네로 박해시대에 시외에서 참수당한 것으로 전해 온다.
교황만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중앙제대 위로는 고딕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아르놀프 캄피오의 천개(天蓋)가 장치되어 있다. 이 성당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말씀을 새긴 10개의 나무판이 있고, 예언자들과 예수의 일생, 그리스도 말씀을 새긴 545개의 나무판은 비잔티움 예술의 최고로 알려져 있다. 회랑 윗벽에는 255명 교황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현직 교황의 초상에는 조명이 비추고 있다. 부속 베네딕토 수도원에는 고대 콘스탄티누스대성당에서 찾아낸 비석과 비문, 그리고 42명 교황의 원형 프레스코가 보존되어 있다.
→ [박스 기사: 순교자 성바오로 비문 발견]
성바오로대성당 중앙제단 아래 사도 성바오로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것은 구전으로 내려왔으나 한 번도 확인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2006년 12월 12일 성바오로대성당측은 2002년부터 지하를 집중 발굴하던 중 중앙제단 아래에서 “순교자 성바오로”라는 비문이 새겨진 석관을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발굴조사단은 석관을 개봉하여 유해를 확인하는 작업에 곧 들어가겠다고 발표하였다.
→ OR 사진 첨부



5.2.2. 라테란의 성요한대성당(San Giovanni in Laterano)
   로마의 4대성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콘스탄티누스대제는 그리스도교에 종교자유를 부여하자마자 이곳 토지를 로마 주교에게 기증하고 그곳에 성당을 지어주었다. 성당 중앙 홀에는 열두 사도의 대형 석상이 죽 안치되어 있다. 대성당 가까이는 황제가 지었다는 ‘세례당’이 있고, 맞은편에는 예루살렘의 로마 총독관저에서 계단(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며 오르내린 계단으로 전해 온다)을 안치한 ‘성계단 성당’이 있다.
성당에 부속된 라테란 궁은 4세기부터 로마 교황의 궁전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바티칸이 한 독립국가로 인정받게 된 유명한 라테란 조약이 1929년에 이곳에서 서명되었다. 현재 이 궁전은 교황을 대리하여 로마 교구를 통솔하는 교황서리 추기경의 주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사진 첨부]



5.2.3. 성마리아대성당(Santa Maria Maggiore)
   성마리아대성당은 로마의 4대 대성당 가운데 하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358년 한여름 8월 5일에 성모 마리아가 요한이라는 귀족의 꿈에 나타나 당신이 가리키는 언덕 위에 당신의 이름을 딴 성당을 지어 바치기 바란다는 소원을 말했다고 한다. 같은 날 밤에 교황 리베리우스에게도 나타나 똑같은 말을 하였다. 교황은 이른 새벽에 사람을 그 장소에 보내어 한여름인데도 하얗게 눈이 덮여 있음을 보고서 꿈을 믿었고 요한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그곳에 대성당을 건립하였다. 이런 이유로 ‘눈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성모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 이 성당 입구 라디오가이드를 빌려주는 곳에서 신청하면 한국어 안내서를 빌려준다.



5.3. 카타콤바
⇒ 사이트 소개(우리말 안내가 실려 있다)
   카타콤바(Catacomba)는 고대 지하 묘소를 가리키는 말로 특히 로마에서 그리스도인과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던 묘소이다(복수명사를 써서 ‘카타콤배’라고 부른다). 카타콤바는 어디까지나 매장(埋葬)을 위한 장소였고  그리스도인들은 여기 모여 장례식을 거행하고 순교자들과 고인들의 기일(忌日)을 기념하였다. 박해 중에는 예외로, 이곳에서 비밀리에 성찬(聖餐)을 거행하기도 하였다(카타콤바가 그리스도인들의 비밀 은신처로 사용된 적은 결코 없었다). 박해가 끝나고 특히 다마수스 교황(재위: 366-384년) 시대부터 카타콤바가 순교자들을 떠받들어 모시는 본격적인 성지(聖地)가 되었고 로마 제국 어디서나 모여오는 그리스도교 순례의 중심지요 신앙심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하묘지를 선호하게 된 다른 동기도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렬하였으므로 ‘죽음의 안식’에서도 함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더군다나 이런 장소는 따로 떨어져 있었으므로 특히나 박해를 받던 시기에는 그들만 따로 모이는 집회장이 될 수 있었고 무덤 비석에는 그리스도교 상징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로마법으로는 죽은 사람을 로마 성안에 매장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카타콤바들은 로마에서 뻗어나가는 가도(街道)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5.4.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
→ 별지의 자료들을 삽입할 것
⇒ 라디오 가이드/ “* 이 안내방송은 2005년 주교황청 성염 대사의 요청으로 우리나라 문화관광부에서 우리말 번역과 녹음을 제공한 것입니다.
선교민속박물관 방문
⇒ 대사관 사이트
(??? 하다가 말았나???)
(*선교민속박물관을 반드시소개할 것)
(* 라디오 가이드 소개)
  
바티칸은 아주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서기 846년 로마를 침략한 사라센이 성베드로대성당과 성바오로대성당에서 보석과 성물을 약탈해 간 6년 후인 서기 852년 교황 레오 4세의 명으로 축조된 성벽이다. 바티칸의 웅장한 궁전과 건물들은 오랜 세기에 걸쳐 차례로 건축되었고 르네상스 시대부터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의 미술가들이 건축하고 장식한 것이다.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된 귀중한 문서와 예술작품들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박물관을 이룬다. 이 박물관을 돌면서 방문하는 <시스틴 경당>, <교황 니콜라오 5세 경당>,<라파엘의 방>, <보르쟈 저택>은 바티칸 박물관에서도 가장 자랑하는 곳이다.
주요 전시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주요 전시관을 소개한다면:
→ * 라디오 가이드 안내도표 순서로 정리할 것
→ *라디오가이드 교정본에 따라서 이름을 확인할 것
 
5.4.1 이집트 박물관(Museo Egizio)
이 박물관에는 로마와 그 주변에서 발굴된 것과 고대 로마제국 시절에 이집트에서 반출된 것, 그리고 18세기 후반부터 교황들이 구매한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 중에는 서기 1-2세기에 이집트 식으로 로마에서 만들어진 모작들도 더러 있다.
 
 
 
5.4.2 키아라몬티 박물관(Museo Chiaramonti)
모두 59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고 로마 숫자로 표기하여 각 방을 나누고 있으며, 약 천여 개의 다양한 형태와 수준의 조각품, 곧 신상, 흉상, 기념상, 부조 그리고 납골함과 석관도 전시되어 있다. 긴 회랑의 중간에는 아름다운 ‘비석 갤러리’(Galleria Lapidaria)가 있어 정말 풍요하고 중요한 장례(葬禮) 비문들을 모아 놓았다. 이교도와 그리스도인의 비문을 양편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두 세계의 장례 의식이 매우 독특하다. 이교도들은 죽음을 필연적 숙명으로 받아들인데 비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5.4.3. 신축 별관(Braccio Nuovo)
나폴레옹이 약탈해간 작품의 일부가 1816년 바티칸으로 반환되었으며 이 박물관은 이렇게 반환된 미술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바닥은 비아 아르데아티나에 있던 2세기 로마 저택에서 가져온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5.4.4 솔방울 정원(Cortille della Pigna)
1562년 대형 벽감(壁龕)의 중앙에 놓인 엄청난 크기의 솔방울에서 유래한다. 솔방울 정면에 있는 것이 ‘신축 별관’, 왼쪽으로는 ‘키아라몬티 미술관’, 오른 쪽으로는 교황청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다.
 
5.4.5. 비오 클레멘스 박물관(Museo Pio Clementino)
여기에 소장된 조각상 가운데 다수가 그리스 원작을 로마 양식으로 복제한 것들이다. 이 박물관에는 모두 12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방의 이름은 소장된 작품을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 박물관은 바티칸 고전 소장품을 해석하는 기본 원칙을  보여주는데, 교황들은 고전미술을 장차 그리스도교가 완성할 것을 예시해주는 무엇, 곧 장차 올 그리스도교 시대의 전령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5.4.6. 태피스트리 갤러리 (Galleria degli Arazzi)
이 박물관에는 그림 대신 라파엘 유파의 작품을 바탕으로 짜낸 태피스트리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가들이 판지에 도안을 하면 공예가들이 양모와 비단 색실 그리고 금실 은실로 태피스트리를 짰다.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서일화들을 그렸다.
 
5.4.7. 그레고리오 세속 박물관(Museo Gregoriano Profano)
바티칸 박물관 중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고대 로마의 유물과 고대 그리스의 원형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바티칸 박물관의 소장품 전시 목적은 그리스도 이전의 것을 포함하여 예술을 하느님의 선물로 간주하여 모든 형태의 예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있다.
 
5.4.8. 지도 미술관
이탈리아 지역과 교회 통치지역을 묘사한 40개의 지도가 걸려 있는데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1580년과 1583년에 그리게 한 작품들이다. 이탈리아를 세로로  양분하는 아페닌 산맥을 기준으로 이탈리아 서부 지역을 왼쪽 벽에 배치하였고 동부 지역을 오른 쪽에 배치했다. 입구 맞은 편 끝에는 고대와 근대 이탈리아의 모습을 담은 지방 지도가 배치되어 있다. 각 지도는 주로 그 지역의 중심부를 조망할 수 있는 도면을 포함하고 있다.
 
5.4.9. 성비오 5세 교황 저택
비오 5세(1566-1572)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회개혁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지중해에서 이탈리아를 위협하던 터키 제국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베니스 공국, 제노바 공국 그리고 스페인과 함께 신성동맹을 결성하여 1571년 10월 7일 레판토 해전에서 오토만제국의 해군을 제압하였다. 현재 이 미술관에는 여러 지역과 시대에 만들어진 태피스트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부속경당에는 루시퍼가 이끄는 반란군 천사들을 무찌른 대천사 성 미카엘의 전투가 그려져 있다.
 
5.4.10. 소비에스키의 방(Salla Sobieski)
유럽을 위협하던 터키를 물리친 폴란드의 왕 소비에스키의 이름을 딴 곳으로, 여기 그려진 전투는 1683년 비엔나의 성벽 아래에서 치러졌다. 이 방의 바닥은 로마 양식으로 오스티아 발굴 때 나온 것이다. 입구 쪽 벽에는 17세기에 고백 성사의 내용을 밝히기를 거부하여 죽임당한 보헤미아의 사제 사칸더의 순교를 묘사하고 있다. 출구 쪽 벽에 걸린 그림은 캘빈주의자들의 증오로 1572년 교수형에 처해진 사제 19명의 고르코미에시 순교자들이다.
 
5.4.11. 원죄 없는 마리아의 방(Sala dell'Immacolata)
성모 마리아에게 ‘원죄 없는 잉태’의 교의를 선포한 사건을 기념한다. 성모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분이어서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로 교황 피우스 9세가 1854년 12월 8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이 교리를 선포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방바닥은 로마 시대의 것으로 오스티아에서 발굴된 것이다.
 
5.4.12. 라파엘의 방(Stanze di Raffaele)
라파엘이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청으로 이 프레스코 벽화들을 그리려고 1508년 플로렌스를 떠난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5세였다. 라파엘이 이 방들의 벽화를  제작하는데 1509년에서 1517년까지 8년이 걸렸다. 처음 두 방은 라파엘이 직접 그렸고 동료 미술가 로마노와 페니가 그린 방의 제작을 감독했다. 출입문 맞은편에 “가장 거룩한 성사에 관한 논쟁”이라는 제목의  커다란 프레스코화가 있고 맞은편에는 “아테네 학원”이 그려져 당대까지의  모든 철학자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두 거장은 라파엘이 1520년에 사망한 이후 네 번째 방의 프레스코 작품도 제작하였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헌정된 것이다. 라파엘 작품의 주요 주제는 두 가지, 인간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중심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세속적 표상으로 교황권에 의해 가시적으로 구현된다. 이 프레스코 작품은 벽에 붙인 회반죽이 채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 넣어 그 회반죽이 마르고 나면 그림이 벽 자체의 구성 요소가 되도록 한 것이다.
 
5.4.13. 교황 우르바누스 8세 소성당
이 작은 건물은 교황 우르바누스 8세의 개인 성당이었다. 교황은 미술가들을 자기 가족이나 친구처럼 대했고, 베르니니는 교황의 환대에 답하여 성베드로대성전 안에 교황 묘소와 흉상을 멋있게 설계하였다.
 
5.4.14. 니콜라오 5세 경당
실내는 비교적 소규모이고 십자형으로 된 둥근 천정은 네 복음서의 저자들이 그들을 상징하는 짐승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 소성당의 내부는 1447년에서 1451년 사이에 도미니코회 수사 프라 안젤리코가 그렸다. 이 경당은 프라 안젤리코의 걸작이다. 상단부에는 스테파노 성인의 이야기를, 하단부는 라우렌시오 성인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 쪽 제단 옆 기둥에서 시작해서 대그레고리누스, 아타나시우스, 암브로시우스, 토마스 데 아퀴노, 아우구스티누스 , 예로니무스, 레오, 그리고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이 차례로 그려져 있다.
 
5.4.15. 보르쟈 저택과 바티칸 현대 종교 미술관
핀토리키오 프레스코 벽화와 현대 종교예술품이 소장되어 있다. 프레스코는 단지 뛰어난 예술적 가치뿐 아니라 15세기 교황궁의 생활과 풍습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1973년부터 교황 바오로 6세의 명으로 이 저택은 현대 종교 예술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들도 소장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250여 작가들의 500개 이상의 작품이 있는데 그 중에는 고호, 샤갈, 달리, 메시나 등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55개 방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5.4.16. 시스틴 경당(Capella Sistina)
시스틴 경당은 바티칸의 예술적 영적 핵심이다. 1477년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이 건물을 새롭고 웅장한 성당으로 개축할 결심을 했다. 1480년에서 1483년의 짧은 기간에 페루지노, 보티첼리, 기를란다이오, 시뇨렐리와 로쎌리 같은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이 성당 벽에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58년이 흐른 1541년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 천정화와 최후의 심판을 더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시스틴 경당은 강생한 하느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데 활용한 최상의 예술이며, 추상적인 신학적 이념을 모든 사람이 이해할 시각적인 형태로 구상화한 가톨릭 신앙의 표현이다. 시스티나 경당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린 미술가들, 특히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예술적 직관 뿐 아니라 계시에 나타난 구원하시는 말씀을 표현했다.
 
5.4.17. 교황청 도서관(Biblioteca Apostolica)
이 도서관의 역사는 로마 교회의 역사만큼 길다. 1471년에서 1484년까지 재임한 교황 식스투스 5세에 이르러 바티칸 도서관이 정리되었고 확실한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오늘날 교황청 도서관은 세계에서 가장 잘 갖추어지고 넓은 독서실과 목록, 마이크로 필림실, 도서 보존 연구소, 창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7만권 이상의 필사본, 7천권의 고판본, 약 70만권의 인쇄물 그리고 10만종 이상의 판화와 많은 지도와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이 도서관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값진 문서들도 소장되어 있다. 이집트 상형문자로 기록된 파피루스 문서에서부터 가장 오래된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쓰인 법전, 그림으로 장식된 책들 그리고 매우 귀중한 제본된 책들이 소장되어 있다. 전문학자들과 연구원들만이 이 소장본들을 열람할 수 있다.
 
5.4.18. 미술관(Pinacoteca)
바티칸 미술관 소장품 대부분은 18세기 교황 피우스 6세가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폴레옹이 한때 약탈해 갔다가 돌아온 작품도 많다. 그 뒤 1백년에 걸친 작품구입과 기증 덕분에 약 460점에 달하는 많은 작품들이 시대와 학파에 따라 논리적인 순서에 맞추어 8개의 방에 나누어 전시되어 있다. 여기의 작품들은 12세기에서 시작하여 18세기와 20세기 일부까지 이른다. 지오토, 안젤리코, 멜로초, 벨리니 같은 거장들에 헌정되었고 여덟 번째 방은 라파엘로가 그린 제단 작품으로 “거룩한 변모”와 일련의 태피스트리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다빈치, 티티안, 베로네세, 레니 그리고 바로치의 작품도 있다.
 
5.4.19. 선교민속박물관
* 반드시 소개할 것
→ Pinacoteca 가는 길에
→ 한국관
 
 
 
5.4.20 그레고리우스 에트루스키 박물관(Museo Etrusco)
기원전 1000년경 중부 이탈이아에 거주하던 에트루리아인들은 로마 이전의 가장 중요한 문명을 이룩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많은 발굴과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얻어진 자료들과 화려한 색채로 장식된 무덤 소장품들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에트루리아의 사회는 가족 중심이었는데 여자들의 사회적 역할이 뛰어났고, 식탁문화가 대단하였다. 무덤이나 발굴된 물건들을 살펴보면 만찬을 묘사한 경우가 매우 많다.
 
5.4.21. 무세오 피오 크리스티아노(Museo Pio Cristiano)
교황 비오 9세가 1854년 자기 이름을 따서 이 박물관을 설립했다. 이 박물관에 소장된 조각상과 비문들은 모두 그리스도교 시대에 속한 것으로 수세기에 걸쳐 교황들이 수집하거나 기증받은 것들이다. 소장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장례 문화와  연관된 것으로 석관이나 석관의 일부 비석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각한 죽음의 개념이 이 모든 작품들을 연결시키는 고리가 되고 있다.
 
5.4.22. 팔각정원(Cortile Ottagono)
이 팔각형의 정원은 교황 율리우스 2세가 16세기에 지은 것으로 브라만테가 조각상을 설치하기 위해 설계하였다. 이곳에 교황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고대 조각상들을 세워 놓았다. 유명한 벨베데레의 아폴론신상, 라오콘상, 그리고 매우 뛰어난 비너스 펠릭스상 등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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