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원전 356년 ~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대왕'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기원전 356년 7월 20일에 태어나 기원전 323년 6월 10일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시기는 예수님의 사역보다 약 300년 가량 앞선 때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 북부의 왕국이었던 마케도니아의 아르게아스 왕조 제26대 군주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또는 영어식 발음인 알렉산더 대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와 오리엔트 지방에 대한 공격적 팽창으로 패권을 잡아 마케돈의 '바실레우스(군왕)', 코린토스 동맹의 '헤게몬(패자)', 페르시아의 '샤한샤(왕중왕)',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임하고 스스로를 '퀴리오스 티스 아시아스(아시아의 군주)'라고 칭하였다.
기원전 356년 펠라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20세의 나이로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계승해 '바실레우스'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치세 기간 대부분을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미증유의 군사 정복 활동으로 보냈다. 30세가 되었을 때에는 그리스를 시작으로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까지 영토가 확장되었다. 고대 서양에서 그 이전까지 전례가 없던 대제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그는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어느 중요한 도시를 함락했다거나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조금도 기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러다가는 아버지한테 일을 다 뺏겨서, 우리는 크고 빛나는 사업도 못 하고 말겠어"라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쾌락과 돈보다는 영광과 명성을 더욱 갈망했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영토가 넓어질수록 자기가 정복할 땅이 적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결코 안일한 생활과 호사스러움이 보장되는 평화롭고 번영된 나라를 물려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외적을 가진 나라의 왕위를 계승받아 마음껏 용기를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유년기의 알렉산드로스는 16세가 될 때까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기원전 336년 부왕 필리포스가 암살된 뒤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가 개척한 부강한 왕국과 숙련된 군대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에 이어 코린토스 동맹의 '헤게몬'으로 추대된 알렉산드로스는 그 권위를 이용해 팽창 정책을 시작했다.
기원전 334년 그는 소아시아에서 군림하던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 제1제국)을 침공하여 10년에 걸친 원정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 등 몇 차례의 결정적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분쇄했고, 마침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페르시아 제1제국을 멸망시켰다. 이 시점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돈 제국의 강역은 아드리아해에서 인더스강에 이르렀다.
'세계의 끝'을 보겠다는 열망으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6년 인도를 침공했으나 병사들의 반발로 회군하였다. 바빌론을 제국의 수도로 삼기 위한 개발을 계속하던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는 계획했던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시작하지 못한 채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그가 죽자마자 일련의 내전으로 산산이 조각났고, 조각난 각각의 지역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들과 참모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를 주장하면서 각각 왕을 자칭하고 할거하였다. 이들을 '디아도코이('후계자들, 계승자들'을 뜻하는 그리스어)'라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군사 정복 활동으로 인한 '문화적 동력'은 신약성경 시대의 배경을 이루었다. 다양한 문화를 지닌 지역들이 군사 정복에 의해 복속되면서 문화의 상호작용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헬레니즘 문화가 두루 퍼지게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력은 컸지만, 문화는 양방향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헬레니즘 문화와 지역 문화의 상호작용이 일어났다.
▶ 사람들과의 접촉: 현지인들과 직접적으로, 물리적으로 접촉했고, 이에 따라 상호작용이 있어났다. 또한 다양한 종교들간의 접촉으로 인해 종교 혼합주의가 발생했다.
▶ 지역 동맹: 현지인들과의 동맹을 통해 그들의 능력과 지식을 헬레니즘 문화 안으로 통합시켰다. 알렉산드로스의 군사 정복 활동 경로를 따라 새로운 세계가 열렸고, 무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 도시 개발: 군대의 전초 기지나 식민지 정착을 위해 세워진 새로운 도시는 그리스의 언어, 문화, 정치구조를 전파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특히 무역업자, 장인, 상인, 도시 거주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양방 통행: 그리스어를 중심으로 한 문화와 그리스의 관습은 지역 문화와 상호작용을 일으켰으며, 문화 교류는 양방향적이었다. 이에 따라 일부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관습을 받아들였고, 일부 비유대인들은 회당 같은 유대인의 집회에 호감을 갖고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계승자들이 촉발하고 수세기 동안 유지시킨 일련의 과정으로부터 예수와 초기 예수 운동이 나타났던 신약성경 시대의 세계가 이루어졌다.
▶ 신약성경 시대의 언어: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지 약 400년 후, 초기 예수 운동을 전파한 제자들은 그리스어로 예수의 사역을 소개하는 편지와 이야기를 써서 가르치고 서로 격려했다. 알렉산드로스 덕분에 그리스어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언어가 되었다.
▶ 신약성경 시대의 도시: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계승자들은 도시를 세우고 도로와 항구로 도시를 연결하여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초기 예수 운동이 진행되던 시기의 세계 속에서 도시는 예수를 믿는 자들의 일상의 장소였다.
▶ 신약성경 시대의 철학적 전통: 바울의 저술에는 그리스 철학의 지식들이 반영되어 있고, 그리스의 철학적 연설 형식이 나타나 있다. 바울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다문화 세계 속에 존재했다.
▶ 신약성경 시대의 다양한 민족 출신의 사람들: 유대인과 이방인은 처음부터 예수 운동의 일원이었다. 사도행전에는 '히브리파'와 '헬라파'가 등장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연합을 이루지만 관습은 다양할 수 있음을 말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도 구성원이나 관습 면에서 다문화 요소가 가득하다.
▶ 신약성경 시대의 종교적 경험: 바울이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 아테네(신약성경에서는 '아덴'으로 표기)에 갔을 때, 그곳에는 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선언과 헬레니즘 전통을 양립시키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기원후 1세기에는 그리스 언어와 생활방식이 지배하는 세계가 형성되었지만, 지역 문화는 그리스 문화와 상호작용을 일으켜 다문화적으로 발전했다. 이에 따라 종교 측면에서는 다신교가 형성되어 있었다.
▶ 신약성경 시대의 남성상: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지배력과 용기를 과시하는 것이 위대한 남성상으로 규정되었다. 이후 로마의 많은 남성들과 황제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예수를 만물을 다스리는 권력자로 그려낸 것은 이와 유사하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와 달리 예수는 또한 종의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본받아 예수처럼 되려고 했다. 예수는 당시의 미덕인 남자다움의 최종 기준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히브리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 (기원전 250년대)
유대인 성서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기원전 323년으로부터 80년 후인 기원전 250년대경에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 연대는 전승에 따른 대략적인 것이며, 상당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다. 70인역은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그리스어 번역을 뜻한다. 나머지 책들은 다음 세기 정도에 번역이 가능했다. 고대세계에서 유대인 성서를 소리 내어 읽는 경우에는 히브리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번역된 유대인 성서가 사용되었다.
70인역에 관한 전승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서 기원한다. 편지의 이야기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 왕의 시대가 배경이지만 그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 자체는 70인역이 번역된 시기의 문장을 흉내내어 작성된 후대의 문서로 보며, 따라서 이 문서 자체의 신빙성은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세상의 모든 책을 소장하고 싶어했다. 도서관의 사서 데메트리오스는 유대인의 율법서도 포함시키고자 했기에 왕의 명령에 따라 대제사장 엘르아살이 72명의 서기관과 학자들을 보내 번역 작업을 맡게 했다는 것이다.
▶ 역사적 기록이 아닌 전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이야기는 역사적인 정확성이 떨어진다. 데메트리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왕 밑에서 일했고, 알렉산드리아의 왕실 도서관원이 아니었으며, 몇몇 군데는 70인역에서 가져온 것 같다. 그럼에도 70인역의 기원에 관해서는 다소 신뢰할 만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 번역 작업은 그리스 문화가 지배하는 다문화 세계에서 소수였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고 드러내며 자신들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 유대인과 이방인의 상호작용: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상호작용에 깊은 관심을 드러낸다. 아리스테아스는 유대인에게 호의적인 이방인이었고, 자신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유대인의 방면을 탄원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제물로서 유대인 노예들을 방면했으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엘르아살도 왕의 제안을 환영했고 유대인을 향한 호의에 감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72명의 번역자들을 환대했다. 아리스테아스와 데메트리오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높이고 유대의 거룩한 저술들과 문화와 사람들을 드높인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제사장 엘르아살이 번역을 위해 선택한 72명은 유대 문학과 더불어 그리스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펼쳐진 그리스 세계에 친숙했고, 그 세계에서 두드러진 역량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 다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작업: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는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조화를 강조하는 한편, 유대인과 이방인의 중요한 차이점도 제시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그 차이점을 존중했고, 데메트리오스는 유대인의 정체성의 표현을 막지 않았다. 아리스테아스는 유대인의 관습을 존경하고 축복했다. 엘르아살이 율법을 설명하면서 다신교와 우상 제조를 거부했던 것과 같이 율법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것이었지만, 유대의 문화와 전통은 헬레니즘 세계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 문화적 적응과 정체성의 자기 주장: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그리스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유대 지역의 유대인들은 이 작업을 인정했고,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완성된 번역을 인정하고 축하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번역본을 승낙하셨고, 완성된 번역은 이방인 왕인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승인받았다.
70인역이라고 불리는 오경의 그리스어 번역 외에 히브리 성서 전체가 그리스어 번역되는 과정은 한 세기 이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기나긴 과정은 다문화 세계에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확립할 뿐만 아니라 소속감을 위한 과정이었다. 그 결과인 그리스어 번역본은 초기 예수 운동의 자원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예수의 중요성을 알리고 그의 제자로서 정체성을 표현했다.
70인역은 예수 운동에 있어서 히브리 성서에 대한 권위 있는 번역본으로 인정받았다. 예수 운동은 구약성서의 말씀을 인용할 때 대부분 70인역에서 가져왔다. 그리스어는 예수 운동이 존재하던 시대의 세계 공용어였으며, 이를 통해 문화의 적응 과정이 진행되었다. 예수 운동은 그리스어 번역본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번역본을 빌어 해석함으로써 다문화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위상을 나타냈다.
▶예수를 중심으로 읽기: 초기 예수 운동은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연결시켜서 번역본을 해석했다. 그들은 누구도 알지 못했던 예수와 관련된 구절들을 성서에서 찾았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유대 전승을 그리스어로 번역함으로써 그리스 문화에 적응시켰듯이 예수 운동은 그리스어 번역본을 자신들의 이해와 경험과 상황에 적응시켜 해석했다. 이사야 7:14절이 좋은 예이다.
(이사야 7:14)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예수를 중심으로 비탄의 시편 읽기: 비탄의 시편으로 불리는 시편 21-22편의 그리스어 번역본과 마가복음 15:34은 연상을 통해 로마와 유대 당국의 손에 죽은 예수에 대한 설명으로 해석되었다.
(마가복음 15:34)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예수를 중심으로 다시 읽기: 신약 성서의 저자들은 70인역으로부터 패러다임을 빌려와서 예수와 관련시켜 재해석한다. 바울도 유사한 방식으로 70인역의 단어들을 사용하여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가 가진 의미를 해석한다.
예루살렘 성전 재봉헌 (기원전 164년)
오늘날에도 유대인 공동체는 이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며, 하누카('봉헌'이라는 뜻. 신약성경에는 성전을 수리했다는 뜻에서 수전절(修殿節)로 번역됨) 절기 때마다 이를 기념한다.
(요한복음 10:22)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유대인들이 그리스 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마카베오서를 통해 기원전 164년의 예루살렘 성전 재봉헌 사건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사건에는 악당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와 영웅인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가문'이 등장한다.
마카베오1서는 알렉산드로스의 계승자 중 최고의 악당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왕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안티오코스는 예루살렘과 유다 지역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말살하고자 공포에 의한 문화적,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제국주의를 도입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안티오코스와 손을 잡은 "변절자들"이 나타났다. 안티오코스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예루살렘에 쳐들어가 성전의 그릇들을 가져갔고, 2년 후에 또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성전 옆에 요새를 세웠다. 그는 제국을 하나의 백성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제국 내의 누구든 고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관습이나 의식을 금하는 칙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유대인의 율법과 절기 준수, 희생제사 등이 금지되었다. 대신 이교도 제사와 우상 숭배를 포함하는 새로운 규례를 정하고 이를 지키도록 악행을 저질렀다.
마카베오1서는 이에 대항하는 영웅으로서 유다 마카베오를 소개한다. 유다의 아버지 맛다디아는 최초로 폭력적인 대응을 시작하여 게릴라 작전을 이끌었으며, 맛다디아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중 유다 마카베오가 지도자가 되어 무기를 들고 유대 전통 의식에 대한 안티오코스의 공격에 저항했고, 잇따른 군사적 승리를 통해 반란을 성공으로 이끌며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했다. 그가 죽은 이후 그의 가문은 로마가 통치하기까지의 100년 동안 이스라엘의 경건한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 마카베오1서는 이를 크게 기리며, 무장반란과 이스라엘의 독립을 지켜 낸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카베오1서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허락하신 것으로 서술하며, 안티오코스의 죽음은 형벌로 평가한다. 이처럼 마카베오1서는 안티오코스에 대한 유다의 투쟁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이 재봉헌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마카베오2서는 마카베오1서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1서의 속편이 아니고 매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마카베오2서에는 죽기까지 충성했던 연로한 율법학자 엘르아살,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마카베오1서와 달리 마카베오2서에는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신다는 부활에 대한 발전된 진술이 등장하며, 순교자의 죽음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개입을 불러일으킨다는 신학적 성찰을 말하고, 그 다음에 유다 마카베오의 군사 행동을 말함으로써 군사적 수단으로 이룬 승리를 축소시킨다. 마카베오2서는 성전 약탈→순교 사건→군사 작전→성전 재봉헌의 순서로 구성되어 순교를 재봉헌 사건의 해석을 위한 틀로 부각시키고, 하나님이 적들을 쳐부수신다고 선언하는 유다를 통해 하나님의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하며, 성전 재봉헌은 안티오코스가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 때문에 모든 것을 돌려준 까닭이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마카베오2서는 순교자들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이 재봉헌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성서 속 세계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서로 뒤얽혀 있었다. 안티오코스는 통치권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 제도를 공격했다. 유대는 신정국가이면서 제사장 통치 체제였고, 성전은 정치, 경제, 문화, 권력의 중심부였다. 이는 신약 성서 시대 전반에 걸친 특징이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제국의 권력을 모방한 정치적인 용어로 예수의 통치를 말했고, 안티오코스에 저항했던 마카베오1서가 그리스어로 쓰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역설이다.
로마의 유대 점령 (기원전 63년)
※ 하스모니안 가문은 유다 마카베오의 동생 시몬 마카베오가 창건하여 기원전 142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린 유대인의 마지막 독립 왕조이다. 하스모니안이라는 왕조의 이름은 마카베오의 조상인 하스몬에서 나온 이름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로마는 초강대국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기원전 63년에 유대를 점령했다. 로마 사령관 폼페이우스는 하스모니안 가문의 권력 다툼과 내전에서 형인 히르카노스 2세를 지원하여 동생인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진을 친 예루살렘을 3개월 동안 포위하여 결국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1만 2천 명을 학살했다.
그 결과로부터 많은 것을 잃게 된 패자가 나타났다.
▶ 유대인이 최대의 패자가 되었다. 로마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인해 유다 마카베오의 성전 재봉헌 이후 한 세기 동안 지속된 유대의 독립은 끝이 났다. 로마 제국 권력의 지배 하에서 가난한 유대인들은 생산과 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 하스모니안 가문도 패자가 되었다. 유대 독립의 상실은 곧 대제사장과 왕을 차지했던 하스모니안 가문의 통치가 종식됨을 의미했다.
그 결과 이득을 취한 승자도 나타났다.
▶ 로마는 전략적,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유대를 차지했고, 유대에 공물을 요구했다.
▶ 히르카노스 2세는 형제인 아리스토불로스가 권력 회복을 위해 싸우는 동안 지방 세력들과 동맹을 맺어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로마의 전략을 이용했고, 기원전 47년 즈음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분봉왕이 되었다. 그러나 명목상의 통치자였을 뿐이다.
▶ 세 번째 승자는 헤롯왕이다. 하스모니안 가문 중 한 사람의 관료였던 안티파트로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유대의 행정관으로 임명된 후, 아들 파사엘과 헤롯을 예루살렘과 갈릴리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40년에 로마 원로원은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했다. 잔인한 지배자 헤롯을 유대의 분봉왕으로 임명한 것은 군사력을 기본으로 정복 지역에서 공물과 세금을 거두는 로마의 통치 방식에 있어서의 또 다른 전략이었다.
헤롯은 통치 기간 내내 하스모니안 가문과 대립했지만, 그의 아내 마리암네와 장모 알렉산드라는 하스모니안 가문 사람이었다. 헤롯은 안티고노스를 제거했고, 아리스토불로스 3세의 대제사장직 임명을 거부하고 죽였으며, 요셉을 처형했고, 히르카노스 2세를 처형한 후에는 마리암네와 알렉산드라까지 처형했다. 그리고 마리암네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을 처형했고, 또 다른 아내 도리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안티파트로스도 처형했다. 마태복음 2장에서 헤롯이 베들레헴의 2세 이하의 아기들을 죽이는 동안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가 이집트로 도망가는데, 이는 헤롯의 성격에 걸맞는 사건이다.
그러나 헤롯은 로마의 분봉왕으로서 피지배민들에게 호의를 베풀며 많은 건축물을 지어 고용을 창출하기도 했다. 또한 처음에 자신의 비용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재건축하기 시작하여 많은 일자리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아 유대인의 종교 관습을 존중했던 것 같다. 황제 숭배 사원을 세웠고, 일부 바리새인들과 충돌하여 그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헤롯과 하스모니안이 다투는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이름을 딴 『솔로몬의 시편』이라는 글 모음집을 썼다. 언약의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당대의 사건들을 바라보지만, 그들의 해석은 매우 암울했다. 시편 기자는 폼페이우스의 행적을 빌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형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인식하지만, 폼페이우스의 불법은 도를 넘었고, 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품었던 시편 기자는 정의가 지연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자손인 합법적인 왕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오고 있다고 여겼다. 이는 유대 문헌 중 최초이자 가장 완성된 메시야의 언급이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행동에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기원전 4년 헤롯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 중 아르켈라오스, 안티파스, 필립에게 권력 승계가 이루어졌으나,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고 왕권을 노리는 자들에 의해 유대 땅은 약탈에 시달렸다. 서기 6년 아르켈라오스가 제거된 이후 시행된 인구조사에 대한 반역이 일어났고, 이후 사회적 불안은 극심했다. 안티파스가 갈릴리를 통치하게 되면서 예수가 공적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로마가 십자가에 매단 예수의 죽음 이후, 서기 1세기 무렵에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은 로마 제국 권력 아래에서 예수에 대한 충성심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권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신약 성서의 몇몇 저술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충성된 시민으로 묘사된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로마의 통치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선언하며 복종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고, 베드로전서는 사회적으로 법을 지키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존중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로마 제국에 대해 조심스럽게 비판하면서 로마에 있는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는 특별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신약 성서의 다른 저술들은 로마 권력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기를 권한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제국이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계시를 말한다. 첫째 짐승은 네로 황제가 떠오르도록 묘사되었고, 둘째 짐승은 제국 총독이나 부유한 지역 엘리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짐승의 활동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며, 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한 환상으로 마친다. 복음서 역시 일부 부정적 관점이 있지만, 일상의 전략 및 실천사항들과 섞여있다. 대립과 적응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귀가 로마 제국의 배후라고 말하며, 마태복음은 제국의 폭력성을 폭로하면서 로마의 동맹인 예루살렘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세워질 것을 말하며, 바울도 하나님의 통치가 승리할 것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바울은 교회들에 편지를 보내 그들이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기쁜 소식을 삶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권한다. 복음서들도 제국을 등지거나 폭력으로 맞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의 제자들은 제국주의의 폐해를 고칠 수 있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사회적, 경제적 삶을 구현해야 했다.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표적이며, 로마 세계의 불의함을 역전시키고 하나님의 통치를 조금이나마 엿보고 기대하게 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서기 30년경)
서기 30년경 일어난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의 정확한 날짜를 아는 사람은 없다. 서기 26년에서 37년 사이 필라투스(신약성경에서는 '빌라도'로 표기)가 유대의 총독이었을 때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신약의 저술들과 여러 외경 본문에 다수의 증언이 담겨있다. 또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과 로마인 역사가 타키투스의 글에도 나타난다.
기원전 63년 로마가 유대 전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십자가형이 시행되었다. 십자가 처형 방식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시대에 가장 처참한 죽음이었고, 로마 통치의 위협에 맞선 강력 범죄자들, 하층계급민, 반란을 일으킨 외국인, 테러리스트 등을 처형할 때 사용되었다. 반역죄가 아니라면 로마 시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예수는 로마의 통치에 맞선 반역죄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예수가 죽음을 당한 방식 외에도 몇 가지 관찰을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가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한다.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반역자들, 폭력 테러리스트, 무장 게릴라 집단을 표현할 때 사용했다.
▶ 필라투스는 악명높은 반역자인 바라바와 예수 중에서 하나를 놓아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 모든 복음서들은 필라투스가 예수를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표지판을 십자가 위에 붙였다고 전한다. 로마의 승인 없이는 어떤 왕도 있을 수 없었으며, 예수가 로마 권위에 반하는 지도력과 통치를 실행한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유대인의 왕, 반역자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공생애 동안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주제였다. 그의 표현들은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승을 떠올리게 했으며,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도록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전승을 떠올리게 했다. 이처럼 또 다른 나라를 주장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었다. "나라"는 "제국"으로 번역되는 명사이며, 이는 로마 제국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 예루살렘의 고위층과 갈등을 일으켰다. 로마는 지역의 고위층들과 동맹을 맺고 로마의 권력과 혜택을 나누었다. 이 전략에 따라 유대에서는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한 제사장 계급의 사람들과 손을 잡았고, 이들은 권력의 유지와 사회 구조를 유지하고자 했다. 예수는 예루살렘의 지도층 무리들과 갈등을 일으켰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과 사회적 관습에 대한 해석의 대립 때문이었다. 예수는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을 비난했으며, 성전 파괴를 선포했다. 이를 참을 수 없었던 유대 지도층과의 대립으로 인해 십자가 죽음은 불가피했다. 지도자들은 예수를 필라투스에게 넘겼고, 영리한 필라투스는 무리들을 조종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대한 지지를 끌어냈다.
▶ 폭력에 의지하지 않는 종말론적 선지자였다. 그는 '이미'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러나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통치 사이에서 사역했다. 세상 제국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다음에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변하는 인자가 자신이라고 주장했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가 임박했음을 선언했고, 모든 민족들에 대한 심판의 기준은 '무력하고 약한 자들을 적극적으로 돌보았는가'의 여부라고 말했다. 수탈로 인해 사회적 불균형이 발생한 사회에서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는 대안을 제시했기에 잃을 것이 많았던 권력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십자가 처형의 의미를 설명해 주지 않았고,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현재진행형이다. 예수를 따른 초기 신자들에게도 십자가에 대한 이해는 긴급한 과제였다.
▶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그의 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해석했다.
(로마서 3:25)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보다 수십 년 전에 기록된 마카베오4서에도 "화목제물"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마카베오2서는 순교를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으로 이해했지만, 마카베오4서는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죄를 씻고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로부터 민족을 지켜내도록 "속죄하는 제물"로 이해한다. 바울은 이에서 더 나아가 "우리를 위하여" 순교한 것으로 이해했다. "위하여"라는 단어를 통해 예수의 죽음과 예수를 믿는 자들이 연결된다. 예수의 죽음은 탄원일 뿐만 아니라 희생제물이기도 했다.
▶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가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평가하는 기준'이라는 매우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여주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판단하는 잣대이다. 인간의 관습과 제국의 관례와는 맞지 않는 십자가로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적 질서와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요청한다.
(고린도전서 1:23)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전통적 사고로부터 예수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해 저주를 감당하며 십자가에 달렸다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3:1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고 저주를 받아 죽은 예수의 부활로부터 세상 누구에게나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갈라디아서 3:14)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가 필요없음을 의미한다.
▶ 복음서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폭넓게 고찰한다. 마태복음 27장은 예수를 로마 통치에 맞설 권세자로 제시하고, 28장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로마의 권력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비전은 제국을 이룩한 로마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신약 성서 본문 저술 (서기 50년 ~ 130년)
서기 약 50년에서 약 130년 정도까지의 기간 동안 신약 성서를 구성하는 문서들이 저술된다. 이 수십 년은 예수 운동이 출현하는 데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과 원동력을 제공한 기간이다.
바울서신을 기록한 바울은 항상 논란을 부르는 인물이며, 그의 서신을 통해 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바울 서신은 예수 운동 출현 이후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이다. 신약 성서에는 그의 이름이 저자로 실린 13개의 서신이 있지만, 학자들은 그 중 7개의 편지만 바울이 썼다고 생각한다. 고린도전후서를 볼 때, 신약 성서에 실리지 않은 바울의 편지들이 더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쓴 편지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구체적인 전후 상황이 중요하다. 이 편지들은 바울과 믿음의 공동체 사이에 관계가 깊어지고 상호작용이 확장되어 갔다는 증거를 보여주며, 바울이 편지를 받게 될 특정 교회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는 고린도전후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 편지들에는 바울의 입장만이 나타나 있지만, 공동체에는 많은 인물들과 많은 목소리와 많은 갈등들이 있었고, 바울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의 목소리였다. 바울의 최종 변론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하신 예수의 복음을 살아 내고 있으며, 그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특정 교회의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자신이 가르친 바를 적용해 주었다. 이에 따라 그는 어느 정도 일관된 신학 사상가로 이해된다. 그러나 일관된 핵심 요소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①종교개혁에서는 그의 신학의 핵심을 "칭의"로 본다. 그러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제외하면 이 말은 많이 쓰이지 않았다. ②또 다른 관점은 "그리스도 안에서"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는 바울 사상의 다양한 측면을 담아내지 못한다. ③이와 달리 바울을 하나님 중심적이고 미래 지향적, 종말론적인 사상가로 보며 그의 신학적 사고를 형성하는 큰 틀을 파악한다. 여기서는 변호, 보편구원론, 이원론, 임박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 접근법에 의하면 바울은 상황적 우발성과 복음적 일관성의 상호작용이라는 방식으로 신학과 사역을 이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약 성서에는 바울이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6개의 편지(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바울이 죽은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쓰인 것으로 보이는데, 고대 세계에선 스승의 이름으로 글을 쓰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바울이 쓴 편지인지를 결정하는 네 가지 요소 중 어휘, 스타일, 역사적 상황은 강력한 근거가 못되지만, 신학적 이해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 서신들은 바울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르게 이해한다. 에베소서에서 교회는 예수를 믿는 지역 공동체를 넘어 우주적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장래에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에베소서는 믿는 자들이 이미 하나님의 뜻을 충만히 경험하고 있다고 말한다. 목회 서신(디모데전후서, 디도서)에서는 바울이 중요하게 여긴 믿음, 의, 교회, 사역의 주체 등 몇 가지 단어들의 의미가 달라진다. 6개의 편지들은 미래에 초점을 덜 맞추고, 지배적인 사회 문화 양식에 더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의 추종자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새로운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경우, 도입부에서 부활한 예수는 성령을 통한 능력을 약속하고 세계 선교를 위임하는데, 사도행전은 이에 따라 진행되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충성한 자로 바울을 묘사한다. 바울은 대개 유대인 공동체를 먼저 방문했으며 대부분은 바울과 복음을 거부했다.
다른 서신들 중 베드로전후서는 베드로의 순교 이후 작성되었다. 어쩌면 신약 성서 중 가장 늦게 쓰인 서신일 수 있다. 베드로전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로 충성되이 살 것을 권한다.
베드로후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우려한다. 예수의 재림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것을 기다리며 거룩하고 경건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야고보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염려를 담고 있으며, 실천적인 제자도를 가르치고 있다.
히브리서는 가르침과 권면을 번갈아 제시하며, 히브리 성서를 예수와 연결시켜 해석한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계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예언, 그리고 이를 소아시아 일곱 지역 교회에 전달하는 편지이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는 없더라도 로마에 대한 심판의 때가 도래했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세워질 것을 말한다.
복음서는 예수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가 당면한 특수한 상황과 그들의 요구에 대응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 복음서는 '이야기' 방식을 사용한다. 독자들이 읽는 동안 하나님의 관점과 충성된 삶을 깨닫게 된다.
둘째,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다룬다. 예수의 전 생에 걸친 공적 활동에 집중한다.
복음서는 서기 약 70-100년 사이에 작성되었는데, 예수 시대 이후 50년 동안 예수의 의미를 다듬어서 설명하는 문서이다. 복음서의 주인공은 예수지만, 네 개의 복음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수를 묘사한다. 마가복음은 예수를 하나님 통치의 대행자이자 자신의 행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자로 묘사한다. 예수의 가르침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사명이 구원의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예수의 행적을 이 사명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공생애를 천천히 소개하며, 사회적 해방과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으로 공생애의 큰 틀을 형성한다. 요한복음은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자로 예수를 소개한다.
이들 복음서의 목적은 단순히 예수의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더 잘 알아서 헌신하게 하고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게 하려는 목회적이고 신학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 마가복음은 충성스런 삶과 두려움의 침묵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끝을 맺는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에 관한 가르침을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연결되며, 제자도란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속편으로서 예수를 모방하는 예수의 제자들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사역이 계속 이어지는 데 있어서 제자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나타내며, 이는 예수에 관한 원자료나 전승의 역할, 복음서 저자들의 핵심 역할, 각각의 복음서가 진술하는 상황의 중요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유사성 측면에서 세 복음서는 공통의 문헌자료에 기반하고 있으며, 문학적 상호의존성을 보인다.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원자료로 사용되었으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또 다른 문헌(흔히 Q라고 불리는 2차 문헌 자료) 또는 구술 자료 모음을 사용하여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사성과 차이점은 세 가지로 설명된다.
①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과 또 다른 문헌 자료를 사용하여 제각기 고유한 자료를 추가해서 썼다.
②각 복음서의 저자는 이 자료들을 창의적으로 사용하여 예수의 의미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구성했다.
③각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가 처한 특수한 상황이나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전승들을 수정하거나 편집하여 목회 사역의 도구로 사용했다.
복음서란 서기 70년대 이후 예수에 관한 전승을 이야기 형태로 만들고 해석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들은 다양한 양식과 신학적 이해를 담고 있지만, 예수를 따르는 제자 공동체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에 예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선포하고 예수에게 충성하고 헌신하며 살도록 돕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신약 정경의 확정 (서기 397년)
교회는 신약 정경이 없는 채로 수백 년을 지냈다. 신약 정경은 적어도 350년에 걸친 다양한 역사적 요인과 과정을 통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신약 정경이 형성된 과정을 이야기 할 때는 순서가 뒤집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1세기에는 아무도 정경에 관해 구상하지 않았으며, 정경의 개념은 여러 세기를 거치면 서서히 등장했다. 그러한 과정의 일부는 지금 확인하기가 어렵다. 교회의 성서는 70인역이었으며 예수를 믿는 자들이 쓴 저술들은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70인역에 필적하는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
(1) 신약 성서가 형성된 첫 번째 단계는 '기록'이었다. 신약 성서를 형성하는 저술들은 서기 50-130년경 기록되었다. 이 저술들은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나왔으므로 교회에 뿌리를 두었고, 교회생활을 반영하며, 교회로 보내졌다. 이 저술들은 주로 구두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던 상황에서 나왔으며, 문서 자료는 구술 자료와 공존했다. 문서 자료가 출현한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바울에게 편지는 자신의 존재를 대신하는 것이었으며, 목회 사역의 수단이었다. 편지는 지도자나 교사가 없을 때 이를 대신해 특정 공동체에 보내는 훌륭한 매체였다. 신약 성서의 27개의 문서 중 20개가 편지이고,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도 추가할 수 있다. 누가와 요한은 각각 누가복음 1:4과 요한복음 20:31에 글을 쓰는 목적을 남겼다.
(누가복음 1:4)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20:31)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기록은 자료를 체계화하고 일정한 형태를 갖추게 하며,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다듬는 수단이 되었다. 편지들은 저자가 해석하는 수준에서 무엇이 '바른' 이해와 관행인지를 전했다.
(2) 신약 성서가 형성된 두 번째 단계는 예수를 믿는 공동체에서 이 본문들을 '읽고 듣는 것'이었다. 저술들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으며, 집회 중에 큰 소리로 읽혔다. 편지를 받은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들에서도 회람되었다. 2세기를 지나면서 특정 공동체를 위한 복음서는 더 넓은 지역의 다양한 집회에서 읽히고 있었다. 2세기 중반 예배를 묘사한 유스티누스의 글을 통해 몇가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복음서는 "사도들의 회고록"이라고 언급되었고, 70인역의 선지서와 함께 낭독되었다는 점이다. 다만, 이런 낭독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이런 관행이 얼마나 널리 퍼져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에 이런 저술들을 사용할 때는 '특정 상황에 맞추어 기록한 글을 다른 장소에서 읽는 것이 적절한가', '70인역의 권위와 위상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등이 문제될 수 있었겠지만, 그 저술들이 공유된다는 사실은 로마 제국 내에 흩어진 여러 지역 공동체가 하나의 운동에 속해있다는 인식을 갖게 했을 것이다.
(3) 신약 성서가 형성된 세 번째 단계는 저술들의 모음집이 형성된 것이다. 저술들이 집회에서 사용되고 사본이 만들어지면서 저술들의 모음집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저술들이 적실성 검증을 통과했고, 글이 기록될 당시의 특정 상황을 넘어서는 유용성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바울 서신, 사복음서, 일반 서신의 세 권의 모음집이 나왔는데, 정경은 이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복음서가 묶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복음서는 1세기에 회람되고 있었다. 2세기에 서로 다른 복음서에 불편을 느낀 타티아노스가 이들과 다른 자료들을 합쳐 『디아테사론』을 만들었으나 널리 채택되지 않았으며, 이는 교회가 예수의 행적과 의미에 대한 다각적인 설명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했음을 나타낸다. 비슷한 시기에 이레네우스는 네 개의 복음서를 하나로 묶은 모음집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넓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3세기 초반의 필사본에는 네 개 복음서의 모음집이 존재했다는 최초의 증거가 나온다. 두 번째로 발견된 자료 모음집에는 바울 서신이 포함된다. 2세기 초 이그나티우스 서신과 베드로후서를 볼 때, 그들은 바울 서신 중 몇 권이 성도들 사이에 회람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서기 140년경 마르키온은 바울이 관여된 서신서 모음집이 존재한다는 최초의 증거를 제공하고, 서기 200년경의 필사본도 서신서 모음집임을 증거하는데, 포함된 항목은 약간씩 달랐다. 이 모음집은 편지들이 적실성 검증을 통과했다는 것과 일정 정도 권위를 인정받았음을 보여 준다. 세 번째로 발견된 보다 작은 모음집은 일반 서신 또는 공동 서신으로 알려진 나머지 일곱 편지에 해당한다. 이 모음집은 훨씬 느리게 발전했으며, 이 모음집을 공동 서신이라고 먼저 언급한 사람은 4세기의 저자 유세비우스다. 세 모음집 외에 정경의 일부가 되지 못한 저술들도 높은 평가를 받고 신자들의 모임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4) 신약 성서가 형성된 네 번째 단계는 목록의 작성과 선택이었다. 저술들이 세 개의 모음집으로 모이는 과정은 목록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동시적인 선택 과정이었다. 무라토리 정경을 보면, 중요하게 여긴 저술 목록과 배척했던 저술 목록을 알 수 있으며, 저술들은 명백히 받아들일 수 있는 스물두 개의 저술, 이제까지 건드릴 필요가 없던 저술, 유익하지만 교회에서는 읽히지 않던 저술의 세 가지 범주로 구분된다. 서기 300년경 유세비우스는 받아들일 수 있는 저술과 그렇지 않은 저술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목록을 네 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4세기를 지나면서 정경 확정 과정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320년경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아리우스 등과의 신학 논쟁을 통해 권위있는 본문을 분류하고 해석할 필요가 커졌으며, 두루마리 대신 필사본이나 책의 사용이 늘면서 어떤 저술을 포함시켜야 할지에 대한 필요성도 대두되었다. 이런 압력들에 의해 서기 363년 라오디게아 공의회에서 목록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서기 367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부활절 편지』에서 처음으로 교회들을 위한 권위 있는 신약 스물일곱 권으로 된 정경 목록을 정리한다.
(5) 신약 성서가 형성된 네 번째 단계는 비준이었다. 아타나시우스의 목록은 즉각적이고 보편적인 동의를 얻지 못했으며, 이는 일반적인 흐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소망을 제시한 것이었다. 정경 확정과 관련된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교회가 아타나시우스의 목록에 동의했다. 서기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는 스물일곱 권의 저술을 하나의 규범적 관행으로 비준한다. 서기 367년 아타나시우스의 선언과 서기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의 비준으로 스물일곱 권의 목록은 많은 교회들에게 정경으로 인식되었고, 점점 지지를 얻었다.
신약 성서가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에 작용한 요인들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어렵다. 형성 과정의 각 부분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며, 정경 목록을 작성하는 과정에서는 공식적인 기준도 없었다. 여러 기준이 상호작용하여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중요한 기준은 기원이 예수와 사도들의 시대에 가까워야 한다는 고대성, 예수와 가까웠던 사도적 인물과 연결되는 사도성, 허용되는 신학적 내용의 정통성, 광범위한 교회에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보편성 등이다.
이렇게 형성된 정경은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비준된 정경은 새로운 기독교 전통과 교회들이 출현하는 데 울타리로 작용했다. 이는 예수를 믿는 자들의 정체성이 일정 한계 내에서 확립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한계를 규정하는 데에는 유대 전통 및 예수 시대와 연결되는 역사적 연속성,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초점, 제도적 구조 및 도덕적 관습등이 관련되어 있다.
▶ 그런 한계 내에서 정경은 다양한 관점과 실천을 인정하고 허용했다. 정경과 관련한 두가지 질문과 답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2천 년 전의 문서와 저술들이 당시와는 상이한 오늘날의 과학기술 문명시대에서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겨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정경은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둘째로 '사람들에 의해 채택된 문서가 당면한 과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겨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모든 세대가 정경으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대답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신약 성서를 이해하기 위한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약의 저술들은 당대의 문화적, 역사적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그것들을 반영한다. 문화적, 역사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들과 저술들이 지향하던 삶의 측면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둘째, 신약의 저술들은 다문화적인 세계에서 출발한다. 특정한 문화적 상황 속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일관된 시각을 담고 있지 않으며,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동일한 태도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셋째, 신약의 저술들은 유대의 전승과 관습에서 자료를 가져오고 이를 재활용함으로써 유대의 문화적, 신학적 전승에 빚을 졌다. 신약의 저술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의 연속성상에 있다고 보여 주면서도 예수에 관한 주장으로 단정되는 부분도 있음을 보여 준다.
넷째, 신약의 저술들은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계와 깊숙이 얽혀 있으며 그 세계를 반영한다. 로마 권력과 협상하기도 하고 제국의 요구와 통제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제국의 주장들을 모방한 것이기도 하다. 영적인 해석이나 개인적 의미에만 치중하면 신약 성서의 주요한 관심을 놓치게 된다.
다섯째, 신약의 저술들은 다양한 요소가 뒤얽힌 세계로부터 출현했기에 다양한 목소리를 낸다. 이는 저자들이 살았던 다문화적이고 복합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공동체가 처했던 특정한 상황들을 반영한다. 다양성과 상이성이 풍부한 각각의 저술들은 본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섯째, 신약의 저술들은 다양한 요소가 뒤얽힌 세계로부터 출현했기에 사회적인 본문이기도 하다. 정경의 구성은 저술들이 모든 세대의 모든 공동체에 역할을 계속해도 된다는 인증이다. 사회적 역학의 인식은 저술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곱째, 모든 시기의 독자들은 신약의 저술들을 읽고 들음으로써 자신들만의 의미와 해석을 형성했다. 올바른 읽기를 위해서는 신약의 본문들이 출현하던 당시의 세계를 바로 알고 읽을 필요가 있다. 또한 개인적인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수 있도록 공동체 안에서 읽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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