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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 지망생을 며느리로 삼았다

작성자갈대처럼|작성시간26.06.22|조회수4 목록 댓글 0

수녀 지망생을 며느리로 삼았다

 

 








조르르 아들만 넷이었다. 아들 부자라며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걔네들을 건사하느라 아내와 나는 하늘 한 번 쳐다보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아이들이 별 말썽 없이 공부도 곧잘 하고 성당 가는 데도 꾀부리지 않는 게 참 다행이라 싶었다. 세례명이 베드로인 첫째부터 바오로, 요한, 시몬, 네 형제는 성당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네 아들 중에 신부(神父)님 한 분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아들 하나는 하느님께 바쳐야지!’

주위에서 자주 듣는 얘기였다. 그중에서 처 이모할머니의 목소리가 특별히 컸다. 일제 강점기에 여고를 나와 한때 공직에도 몸담았던 그분은 아내를 비롯한 처가 쪽 사람들을 세례받게 하고 신앙생활의 길라잡이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런 얘기들이 그냥 덕담이라 싶어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 덕담은 어깨를 짓누르는 난제로 떠올랐다. 네 형제 중 누구를 신학교에 보내야 할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신부 되라는 덕담을 일상이다시피 듣고 자란 아이들이니, 그중 누군가가 손 번쩍 들고 ‘내가 신학교에 가겠습니다’라고 하면 문제는 간단했을 것이다.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내나 내가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이모할머니의 채근은 옥죄어 오고 참으로 난감했다. 그럴 즈음에 아이들과 주변 사람들의 눈길이 셋째 요한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넷 중 말수도 적고 신중한 모습이 틀림없는 사제(司祭)감이라고들 했다. 이모할머니는 숫제 셋째의 실명을 들이대며 기정사실로 밀고 나갔다.

셋째는 형제들 중간에 끼어 아래서 치받고 위에서 누르는 형국이라 기를 못 펴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다른 아이들은 번잡하다 싶을 만큼 활발한데 그 아이는 숫기 없이 늘 조용했다. 그가 신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그리된 데는 본인의 의지보다 주변의 부추김과 압박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등 떠밀려 가는 게 아닌가 싶어 속이 짠했다. 하느님을 섬기는 성직(聖職), 일반직장처럼 쉬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 부부에게는 네 아들 중 하나지만 당사자인 셋째에게는 일부가 아닌 인생 전체일 것이다.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주위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았을 것이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내와 의논 끝에 셋째를 불러 앉혔다.

“대학 졸업 후에 신학교에 가면 어떻겠냐?”

우리 부부는 본인의 사리 판단력이 생길 때까지 최대한 늦춰보자는 심산이었다. 요새는 안 되지만 그때는 대학 졸업자는 신학교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예, 그러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다소곳이 받아들였다.


매일같이 도시락 두 개를 갖고 학교로 가던 셋째의 학력고사 성적은 340점 만점에 321점이었다. 과외 공부 근방에도 가지 않았는데…. 그 점수면 어느 인기 학과에도 다 갈 수 있었지만, 철학과로 갔다. 거기서 서양 중세사를 택한 건 그게 신학교 필수과목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새 4학년 졸업반이 되었다. 성년이 되고도 남았으니 이제 선택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우리 부부는 사제가 되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고 그리되지 못하는 것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했다. 마음을 다해 기도만 올렸다. 하느님의 응답이었을까. 어느 날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했다. 선선히 그러라고 했다. 그 선택에는 간절한 기도와 잠 못 이루는 고뇌가 따르지 않았을까 싶었다. 학부 때는 교내 장학금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학교 밖 ‘우산 장학재단’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박사과정 중에 ‘석사장교’에 선발되어 경북 영천에서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첫 면회, 군복이 잘 어울린다 싶은 아들은 밝은 표정이었다. 훈련생 중에 현직 대통령 아들이 있어서인지 여러 가지 배려가 있다고 했다. 갖고 간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 끝에 아내가 여자친구 있냐고 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는 여학생 하나도 없냐고 놀림조로 몰아세우니, 그제야 슬그머니 뒷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전화번호 하나를 적어 주었다.

그 번호의 주인공은 미학과 같은 학번의 백승희였다. 그때는 철학과 안에 미학과가 있었기에 알고 지냄은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 집 전화번호를 주고받을 정도면 보통 사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 여학생과 함께 면회를 다녀온 아내, 활달하고 구김살 없이 서글서글한 게 내성적인 셋째의 짝으로 딱이라 했다. 거기다 ‘클라라’라는 세례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였다지 않는가.

셋째가 예비역 소위로 제대할 즈음 독일 아데나워 장학금 수혜자로 선정되었다. 그 장학금은 동반 가족의 생활비까지 나오는 특별한 것이었다. 거기서 학위를 받고 오려면 최소 칠팔 년이 걸린다는데 혼자 보낼 수 없었다. 내가 승희 학생을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결혼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저네들끼리 그새 무슨 얘기가 있었던지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셋째는 칠 년여 만에 돌아와 모교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승희는 여기서 아들 하나, 독일에서 딸 둘을 낳아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남편과 함께 학위 따겠다는 야무진 꿈은 이루지 못한 채 돌아왔다.

학창 시절 셋째와 승희는 과연 어떤 사이였을까? 그 궁금증은 멀리 부산에서부터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십 년 전쯤 내가 어느 문예지의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연례행사인 가을 세미나를 부산 해운대에서 갖게 되었다. 창사 이래 첫 탈서울 행사, 만당한 세미나장에는 이해인 수녀님도 함께했다. 세미나 후의 뒤풀이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검푸른 바다에는 별들이 내려와 출렁이고 실내는 흥겨운 노래와 춤으로 넘실댔다. 글쓰기도 바빴을 텐데 언제 저리 멋진 춤과 노래를 익혔을까 싶었다. 수녀님은 시만 잘 쓰는 줄 알았는데 노래와 율동도 일품이었다.

“저기 앉아 계시는 강철수 회장님이 우리 수도회로 온 수녀 지망생을 데려가 자기 며느리로 삼았어요.”

수녀님이 무대를 내려오면서 농담처럼 툭 던진 한마디, 내가 엉거주춤 일어나 허리를 꺾어 사과하는 모양새를 취하자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처음 듣는 얘기인 데다 자칫 시빗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싶어 당황했는데, 문우님들은 그걸 축제의 흥을 돋우는 양념쯤으로 치부하는 것 같아 적이 마음이 놓였다.

셋째 내외를 불러 수녀님 얘기에 대한 문초(?)를 시작했다. 어째서 수녀가 되려 했냐고 했더니 지천명의 나이에도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다. 먼먼 젊은 날의 아롱진 꿈,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 딱 부러지게 답은 않지만 셋째의 신학교행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밝혀졌다.

못내 좋아하는 사람이 먼 곳으로 떠난다는데 멀거니 지켜볼 수만 있었겠는가. 당연히 자신도 그곳과 가까운 곳으로 떠나 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곧바로 평소 흠모하던 이해인 수녀님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수녀가 되겠다는 장문의 편지를 올리지 않았을까. 수녀님은 그러기 위해서는 세례부터 받아야 한다며 ‘클라라’라는 세례명과 대모(代母)까지 주선해줘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게 했다고 한다. 가족은 물론 친구 중에도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 없었기에 수녀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후 수녀님이 계시는 부산 베네딕도 수도회를 다녀와서는 그곳에 입소할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절벽 같은 장애가 승희 앞을 가로막았다. 일여 삼남 맏이인 딸이 별안간 수녀가 되겠다고 했으니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어머니가 식음을 전폐하고 결사적으로 말리는 데야 어쩌겠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승희를 구해낸 건 결혼 카드를 꺼내든 미래의 시아버지인 나였다. 그러고 보면 ‘수녀 지망생을 며느리로 삼았다.’라는 이해인 수녀님 말씀은 참이지 않은가. 

 

 

- 강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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