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성이라 부르던 30년전 서울거리◈ 토지조사사업이 끝났을 무렵에는7만8천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여한국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 東拓의 소작료는일반 민간보다 상당히 고율이었을 뿐 아니라, 수탈 방법도 악랄하였으므로,한국인들의 東拓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었다.현 을지로쪽 명동 입구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창경궁의 동문을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1928년 문루가퇴락하였으므로이를 헐어버리고 홍예(虹霓)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北門(북대문)은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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