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잘 싸우는 자, 잘 헌신하는 자
설교본문 : 사도행전 18:1~17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13년 7월 28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분노하고 싸우고 다투고 좌절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믿음이 좋고 훌륭한 사람이라 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주 사도행전 큐티에서 초대교회에서 가장 큰 열매를 맺은 바울이 분노하고 싸우고 좌절하고 탈진에 빠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화를 내고 탈진에 빠진 모습을 기뻐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분노와 절망이 복이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지난 며칠 동안 우리가 한 큐티 말씀을 중심으로 바울이 분노한 것이 일반적인 경우와 어떤 점에서 다르고 어떤 점에서 같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분을 내고 다투는 바울
먼저 바울의 분노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이시형 박사가 최근 분노와 짜증에 대한 칼럼을 썼습니다. 이시형 박사는 분노는 그래도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든지, 모욕을 당했다든지 이유가 있고, 또 목표와 방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짜증은 불만스러운 상황에서 왈칵 일어나는 화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지난 82년 경남 의령에서 우순경이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짜증이 나서 무려 56명을 죽인 일이 있었지요. 짜증이란 때로 이렇게 무서운 사건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가령 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 분노는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애국자가 되게 합니다.
그러면 바울의 분노는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두 차례 크게 싸운 일이 나옵니다. 한 번은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싸운 일이고, 또 한 번은 두 사람이 한 편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싸운 일입니다. 그 중에 먼저 두 사람이 한 편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싸운 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새로운 사역에 참여하기 위해여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을 때입니다. 유대에서 몇몇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 와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과 아주 격렬한 다툼과 논쟁을 벌입니다.
이 싸움은 아주 길고 지루하게 계속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싸움을 멈추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싸움을 멈추면 믿는 자들이 믿음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과 아주 격렬하게 다투며 논쟁하다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으니 안디옥 교회 관계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와 교인들 몇몇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로 보내기로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제 1 차 예루살렘 사도 총회가 열립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과 아주 심하게 다투며 논쟁했습니다. 이 싸움이 끝날 것 같지 않으니 베드로가 일어나서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뒤이어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가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가 다 받아들일 수 있는 4가지 타협안을 제시하여 길고 긴 이 싸움이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 모두 크게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두 번째 싸움은 바울과 바나바 2차 전도 여행을 출발할 때 마가요한을 데리고 갈 것인가를 두고 의견 차이를 보이다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가장 힘든 때에 마가요한이 돌아간 일로 바울이 충격을 받았는데, 그를 또 데리고 가면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라며 바울은 데리고 가지 말자고 했고, 바나바는 젊은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으니 데리고 가자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싸움이 일반 싸움과 어떤 면에서 다른지 살펴봅시다.
1) 싸움의 동기가 다르다 : 복음을 위하여
만일 여러분이 의사인데 병원에 죽어가는 환자들이 가득하다고 합시다. 아주 간단한 처지로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병원에서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싸워서라도 그 환자들을 살려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병원측의 말에 순종하여 간단히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바울의 싸움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싸우는 모습은 일반 사람들의 싸우는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고함을 지르며 서로에게 달려드는 모습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의 싸움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들이 복음을 위해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선교의 사역을 위해 마가요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고, 바울은 선교의 사역을 위해 그를 데리고 가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전혀 달랐지만, 그 마음속에 담긴 뜻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자 더 좋은 길을 주장하며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하게 보는 자리싸움이나 내 욕심 채우기 위해 싸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싸움입니다.
또 바울과 바나바가 한 편이 되어 싸우는 일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계속 전해지게 하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들이 싸우지 않으면 이방인들이 할례 받기를 두려워하여 믿음 갖기를 포기하는 일이 속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싸우는 과정이 다르다 :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잃지 않는다
일반적인 싸움은 싸우는 과정에서 흥분을 키워갑니다. 처음부터 싸우는 목적이 상대를 누르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싸움은 상대가 옳은 말을 한다고 하여도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상대의 기를 꺾으려 싸울 뿐입니다. 그러다 상대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화와 분노를 키워다가 결국 어떤 선을 넘는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욕설을 내뱉는다든지, 아예 판을 깨는 어떤 행동을 우발적으로 저지르고 말지요. 그러다가 파국을 맞고 영영 다시 보지 못할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더 잘 전하도록 해기 위해 싸웠습니다. 상대를 누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한 싸움이므로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 따위는 없습니다. 내가 상대를 이겨야 한다는 헤게모니 쟁탈 싸움과는 차원이 다른 싸움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싸웠고, 싸우는 과정에서도 결단코 복음의 자리를 잃지 않습니다.
3) 싸움의 결과가 다르다 : 더 큰 복음의 열매를 낳았다
그러다 결국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서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좋은 장면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막판에 아름다운 반전을 이루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요한을 데리고 구브로(키프로스)로 가서 새로운 선교의 역사를 이루는 자가 되었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1차 전도 여행 때 다녔던 도시들을 다시 방문하는 길을 떠났습니다. 싸움의 결과 파국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의 역량을 두 배로 키운 것입니다.
※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
살다보면 우리도 다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싸움은 서로가 치유될 수 없는 폭언만 퍼 붓다가 파국으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싸우고 싶은 욕망이 생겼을 때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복음을 위한 것인지를 따져봅시다. 복음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면 그 시작점에서 멈추십시오. 그게 안 된다면 멈추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십시오.
바울과 바나바처럼 싸우더라도 복음의 자리, 말씀의 자리를 결단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 역시 복음을 위한 선택으로 마무리 되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싸움을 몰고 가지 마십시오. 서로 잘 하려고 싸우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지치고 탈진한 바울
1) 탈진한 바울
오늘의 두 번째 이야기는 바울이 지치고 탈진한 이야기입니다. 지쳐도 적당히 지친 것이 아니라 죽을 만큼 힘들고 어려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탈진한 상태로 지쳐있었습니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진 바울이 이렇게 약할 때가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바울은 1~2차 전도여행을 지내오는 동안 그 어떤 어려움도 불도저처럼 뚫고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는 자들이 듣고 믿는 것도 아니고, 대적하며 욕설을 퍼붓는 것도 아니고, 그저 조롱하는 표정으로 냉랭해진 모습을 보이자 천하의 능력자 바울도 힘을 잃고 맙니다. 모든 의욕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우울증과 좌절감에 빠진 바울은 자칫하면 모든 사역을 포기할 뻔한 위기를 맞습니다. 그야말로 요즘말로 번아웃(burn out)된 것입니다.
2) 헌신이란 바로 이런 상태를 두고 하는 말
흔히 ‘헌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돌로 죽을 만큼 얻어맞은 후 일어나자마자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갈 때에 바울처럼 힘차게 일할 때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헌신’은 한 발자국도 더 나갈 수 없을 만큼 모든 힘을 다 소진했을 때를 의미합니다. 밭에서 일을 하는데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호미질 하나도 더 못할 정도로 탈진한 상태가 헌신입니다. 마라톤을 완주한 후 곧바로 쓰러지는 모습처럼 모든 힘을 다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3) 무엇 때문에 모든 힘을 다 소진했느냐가 문제
그러나 그런 탈진 상태가 된 이유가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일을 하다가 탈진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주께 참되게 헌신한 사람입니다.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서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기도했고, 모세도 자기를 죽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을 만큼 주님을 위해 모든 힘을 다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참되게 헌신한 사람입니다.
4) 그러나 탈진된 상태에서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본인 몫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탈진된 상태에 빠졌을 때 그 사역을 포기합니다. 그동안 저에게 어린이교회학교 1년만 쉬겠다고 하고는 영원히 쉰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바울 역시 아테네에서 탈진되었을 때 그만 하나님 섬기는 일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또 이렇게 지쳐있을 때에는 아주 작은 유혹도 이기기가 힘이 듭니다.
이 때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본인 몫입니다. 그들이 힘들고 어려운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 섬기는 일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바울이나 모세나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되지만, 그 사역을 포기하거나 다른 길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최근 자살한 김종학씨도 자신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는 탈진이 되었을 때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일 믿는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선택을 한 이상 하나님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라 참고 이겼다면 내년쯤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로 모르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5) 바울 같은 신실한 사람도 지키고 탈진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바보 같은 사람이라 지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탈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나 엘리야 같은 능력 있는 자들도 지키고 탈진에 빠집니다. 가끔 선교사들과 목사님들의 자살 소식이 들리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내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어느 순간 지치고 탈진에 빠지는 것은 벗을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입니다.
어린이 교회학교이든, 성가대나 남녀신도회나 무엇이든 간에 주께 충성하는 자에게도 지치고 탈진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가장 큰 유혹이 한 1년쯤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절대로 쉬어서는 안 됩니다. 마귀의 유혹입니다. 자칫 영원히 쉬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사명의 길을 계속 걷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특별 보호 프로젝트를 가동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3. 분노와 좌절 속에 담긴 열매
바울은 바나바와 헤어진 후 1차 전도여행 때가 갔던 더베와 루스드라를 방문합니다. 루스드라는 1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죽을 만큼 돌로 얻어맞은 곳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바울이 곧 일어나서 자기가 얻어맞았던 그 루스드라 성으로 들어갔다가 바로 그 이튿날 더베로 갔던 곳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그 엄청난 핍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도 결신자를 얻지 못한 곳이 루스드라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뜻밖에 바울은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동반자인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그곳에서 만납니다. 바울이 그런 핍박을 받고도 다시 그 성으로 들어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드로아 성에서 사도행전의 저자이며, 바울이 순교를 당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의사 누가를 만납니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열매가 있으면 고생한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 지독하게 고생만 하고 아무런 열매도 없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고 느낀다면 좌절과 절망감만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 힘든 시간의 열매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보면 그때 그 어려움이 있었기에 더 믿음이 성숙해질 수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이란 없습니다. 고통만 있고 열매는 없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내 고통의 시간으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 바울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특별 보호 프로젝트
그렇게 지치고 탈진해 있으면서도 바울은 그 다음 사역지인 고린도로 들어갑니다. 바울이 보기에 아테네보다 고린도는 더 힘들게 보이는데도 들어갑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주께서 명하신 사역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특별 보호 프로젝트가 가동이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더니 이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와 있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로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 밖으로 추방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바울보다 며칠 앞서 고린도에 도착했고, 바울은 바로 이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온 것입니다. 이후로 두 사람은 바울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할 만큼 바울을 돕는 자가 됩니다.
바로 뒤 이어서 실라와 디모데는 빌립보로부터 선교 후원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그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누구로부터도 공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십니다. 디도 유스도와 회당장 그리스보다 예수님을 믿고 그와 합류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정도 사역을 한 후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그를 고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변명을 하기도 전에 갈리오 총독은 바울을 공격하려 했던 유대인들을 모두 쫓아냅니다. 그리고 바울을 공격하려 했던 유대인 대표인 소스테네가 도리어 매를 맞습니다. 본문 17절에 갈리오가 이 일을 보았으나 상관하지 않았다는 말은,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확실하게 지키시고 도우셨는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4. 잘 싸우는 자, 참되게 헌신하는 자가 되라
기왕에 싸움을 하려면 싸움을 잘하는 자가 되십시오.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가 되십시오. 복음을 위해 싸우는 자가 되십시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 싸우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내 자존심을 세우는 일을 위해서는 싸우지 마십시오. 단지 상대를 누르기 위한 싸움이라면 처음부터 하지 마십시오. 이런 싸움은 망하게 하는 싸움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있는 상태에 빠졌다면 기뻐하십시오. 주께서 기뻐하십니다. 어린이 교회학교, 성가대나, 남녀신도회를 섬기다가 탈질 되었습니까? 기뻐하십시오. 주께서 참으로 헌신된 자로 여기십니다.
꼭 교회 일이 아니더라도 그렇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섬기다가 지쳤습니까? 누군가를 지칠 만큼 사랑하고 섬겼다면 이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내가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을 만큼 그를 사랑한 것이니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사랑하십니다.
주님
어떤 경우에도 싸우거나 다투지 말게 하시고,
혹시 싸우더라도 바울과 바나바같이
믿음의 열매를 더욱 잘 맺는 방향으로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까지 파멸로 몰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주께 충성하는 바울이 연약해졌을 때
주께서 그를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바울처럼 지치고 탈진했을 때에도
결단코 주께서 맡기신 사역을
포기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